"너 같은 딸을 낳아라."
"싫어. 그럼 엄마도 나 같았겠네. 엄마가 나를 낳았잖아."
아... 내가 이런 진부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고작 여섯 살짜리를 붙잡고 하게 될 줄 몰랐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그 당연한 명제를 가슴에 품으려고 애쓰건만
그건 머리로나 가능한 일인지
점점 아이와 입씨름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당연히 유치해지고 비논리적이고 되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때로 든다.
육아는 이론으로 타인의 사례로 조언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아이가 기고 아장 아장 걷고 혀짧은 소리로 세상의 사물들을 명명하고 자신의 느낌을 서툴게 표현했을 때
몸은 힘들었지만 아이와 의사 소통이 되면서부터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만으로도
당시 나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모성이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하고
아이 때문에 나의 감정을 절제할 수 없어 미칠 것도 같았고 이러한 양육 방식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고. 가끔은 썩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하며 자족하기도 하고. 꽂혀 있는 책들만 보면 육아박사가 되어 있을 터인데.
나에게는 저 만큼의 허전함과 결핍이 있었던 것같다.
육아에서 아이에게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이로 내려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의 기억도 여섯 살 근처에서 시작되는 것같다. 세상은 엄청나게 크고 나는 엄청나게 작았다. 엄마의 팔은 나의 세상 전부를 덮는 커다란 우산이었다. 무서운 것도 많았고 못 견딜 것도 많았다. 예쁜 연년생 동생 옆에서 몸이 움츠러들었고 심술도 많이 부렸다. 나는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심술맞고 당돌한 것으로 어른들의 관심을 받아보려 했던 것 같다.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 엄마는 무뚝뚝했지만 나의 화와 짜증을 엄하게 다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세상에서 받은 그 숱한 좌절과 실망, 불만도 안전하게 풀어낼 수 있는 커다란 우산이 되어야 한다.
기네스 펠트로가 한창 예뻤을 때, 그리고 에단 호크가 아직은 대머리 징조가 안 보였을 때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녀가 분수대 근처에서 키스하던 장면이 이들이 아이였을 때 했던 서툴게 했던 키스와 오버랩되던 장면. 원작은 찰스 디킨스의 동명의 성장소설이었다. 사실 큰 재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이의 심리 상태에 대한 섬세하고 적나라한 묘사가 절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작은 눈 앞에서 굴절된 세계는 어떻게든 희극적이다. 아주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였을 때 잊었던 그 숱한 두려움과 착각, 기대들에 대한 충실한 복기로 시작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 상황을 온전히 이성적으로 제대로 세계화하지 못하고(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두려움과 절실함이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양육자(주인공 핍한테는 누나)가 가지는 그 어마어마한 무게에 대한 고찰. 여기에는 각종 희극적인 어른들이 등장한다. 무기력한 매형도 누나가 초대하는 그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지역의 유지들도. 핍한테는 그저 한심하고 때로 무시무시한 비정상적인 캐릭터로 재창조된다. 그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어른들은 가르치려 들며 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저만치 밀어내고 만다. 그러니 아이들과 어른은 영원히 소통할 수 없다. 그 격차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묘사. 그 안 어디쯤엔가 찰스 디킨스는 있다.
아이한테 나라는 엄마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내가 주문한 자그마한 트리가 아이한테는 불만이다. 이것저것 각종 장식 용품까지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주문했건만. 아이의 반응은 나를 유치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는 트리와 아이가 기대한 트리의 간극. 그것은 내가 강요로 메울 수 없는 공간이다. 다시금 제대로 다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