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나는 고3이었다. 그 날, 기억이 맞다면 나는 친구들과 보충수업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제 정말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어두컴컴한 교실로  고3 교실에 참을 인자를 적어 놓던 자그마한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얘들아,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거짓말처럼 해체됐다.

그 백화점 안에 있었던 숱한 생명들이 나에게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뭉뚱그려 하나의 예기치 않은 희생으로 다가왔다.

연일 티비에서는 재난 속보 방송을 했고 그 방송을 들으며 영웅처럼 귀환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에 뭉클했다.

그들도 나도 견디고 있었다. 그 무게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김영하의 팟캐스트로 정이현의 <삼풍백화점> 낭독을 들었다.

여고 동창생과의 조우. 그 친구는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읽을 차례다, 싶었다. 결말까지 육성으로 들을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95년 나는 새파랗게 젊었고 어렸고 무모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은 스쳐 지나가지 못했고

하나하나 가슴으로 포박해 들어왔다. 트라우마는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만 남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 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 정이현 <삼풍백화점>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에어콘은 고장이었다. 교실 안도 후끈했다. 선풍기를 돌리고 부채질을 하며 과연 수능날까지 전과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싶어 아연했다. 많은 것들이 예비되어 있을 거라고 착각한 열아홉. 주인공은 서태지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당면할 현실이기도 했지만. 스무 살 문턱은 너무나 눈부셔서 그 이후를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존재감 없던 여고 동창 R을 삼풍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만나게 된다. R과 나는 여고 동창생인데 여고를 졸업하고 이제 대학까지 졸업하려는 찰나에서야 소통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사회인이 된 R은 나에게 고속터미널 근처 칼국수를 사준다. 그리고 남산 근처의 그녀의 작은 방으로 '나'를 초대한다. 스물네 살. 삼풍백화점에서 '나'는 하드커버의 일기장과 소중한 친구를 함께 얻는다. 그 친구가 일하는 매장에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도리어 그 친구에게 피해만 끼치고 어색하게 헤어지고 그것으로 그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한때 절절하게 가까웠던 누구와 어이없이 헤어지는 일은 우리 청춘의 부산물이다. 그 인연히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백화점이 무너진다."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문장에 가슴이 아려왔다. 물론 나의 삐삐번호도 그 번호를 둘러싸고 만들어졌던 우리들의 관계도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싸이홈페이지에서 R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R을 닮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이 R의 딸이기를, R은 삼풍백화점에서 무너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은 이런 내용이다. 나의 삶을 스쳐 지나간 인연이 거대한 재해 속에 고난 속에 함몰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슬픈 복기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사랑하는 청춘의 친구들. 가만 가만 나도 그녀들의 안위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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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04-12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은 언제봐도 참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13-04-16 11: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후애님. 어제까지 춥더니 오늘 드뎌 봄기운도 느껴지고 벚꽃도 자주 보이네요^^

후애(厚愛) 2013-04-2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좀 쌀쌀합니다.
날씨가 이래서 감기도 안 낳고...ㅠㅠ
건강 꼭 챙기시고 즐겁고 알찬 주말 되셔요.*^^*

blanca 2013-04-22 16:50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군요--;; 아무쪼록 빨리 나으세요! 수분 섭취 많이 하시고 목에 스카프나 손수건을 두르면 목감기 예방도 되고 치료도 조금 빨라지는 느낌이더라고요.
 

책을 읽긴 읽었는데 미처 그 책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을 추스르지도 않고 바로 다음 책으로 고고,한 것같다. 먼저 뒤늦게 읽은  로맹 가리의 단편집.

 

 

음, 사실 쉽게 완독하지는 못했다. 로맹 가리 특유의 그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빛을 발할 때도  있고 지루했던 적도 있어 읽다, 말다 했다. 처절한 경험으로 자의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소녀와 떠돌이 도붓장소의 기묘한 동행. 크리스마스 특수와 인간의 친절을 믿는 그들이 끝내 또 처절한 배신을 당하고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그린 <지상의 주민들>에서는 로맹가리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절묘하게 배합된 시선이 드러났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같은 작품은 다소 그로테스크하고 SF적인 분위기가 도발적이었다.

 

로맹가리는 짧은 이야기도 함부로 쓰지 않는 작가인 것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그는 어디에 발자국을 찍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고 뚜렷하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캐릭터의 작가다.

 

 

 

 

 

사실 이탈리아를 가 본 적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이탈리아의 풍경이 상상만으로 부족해 참으로 아쉬웠다. 군데 군데 그의 어쩔 수 없는 위트, 풍자가 드러나 재미있었다. 1844년 일요일 아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풍경을 소설처럼 묘사하며 시작하는 이 여행기는 카톨릭에 대한 가감없는 냉소, 관광지의 뒤안길의 그 적나라한 결핍과 생계를 위한 사투에 대한 묘사로 때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만큼 찰스 디킨스는 솔직하고 그다운 산문을 써내어 그의 언어에 대한 펜심을 충족시켜 준다고나 할까. 화려한 사육제 풍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도 아름답다. 170년 전 이탈리아 풍경에 대한 대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를 다시 발견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구입해서 영어 공부 한답시고 영어 자막 띄우고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한바탕 수업을 들은 기분으로 좋아하는 작가 제인의 북클럽을 오염시킨 것 같아 다소 아쉽다. 다시 한글 자막으로 보니 그 한글자막마저 너무 빨라서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러니 하물며 영어라니. 매달 오스틴의 작품을 한 권씩 선정해서 다 같이 읽고 저마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그 토론 장면이 너무 아름답고 부러웠다. <맨스필드 파크>, <노생거 사원>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못해서 토론 내용에 흠뻑 젖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오스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본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같다. 이런 북클럽 하나가 있어 테마별로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혼자 읽는 것과 함께 읽는 것의 그 찬란함의 밝기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어떤 책이 공통된 정서와 감동을 끌어내지 못할지라도 함께 그 책을 읽었다는 시간 공유의 경험만으로도 소통의 지점은 빛난다.

 

 

 

 

알라딘 서재분들이 종종 언급했던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드디어 다운받아 듣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시간 분량이나 어조가 때로 눈을 감기게 했다. 그의 작품이나 산문집을 보면 대단히 기발하고 재미있는 감각적인 사람일 것 같은데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느낌이 나서 좋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듣다 당장 구입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팟캐스트 듣기를 중단하고 바로 주문했다.

 

 

정이현이 서울 출신 72년생 작가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김영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숙생과 월남인들로 꾸려졌던 우리의 문학에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작가의 등장은 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이현의 소설에는 종종 강남의 중산층의 모습이 가감없이 그려진다. 어쩌면 제인 오스틴도 프루스트도 자주 묘사했던 솔직한 속물적 욕망에 대한 묘사.  바라지만 드러내기는 어쩐지 두려운 것들에 대하여 이 작가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롭게 천착한다.

 

삼풍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여고 동창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나'. '나'는 고등학교 때 그녀와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한 조우는 그녀와의 인연의 틀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식당에서 거의 고봉밥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신 아주머니에게 먹다 먹다 좀 남긴 접시를 갖다드렸더니 너무 어두운 얼굴로 "맛이 없었어요?"라고 해서 괜시리 미안했다. 아주머니가 내가 남긴 김치볶음밥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감기는 끝물이고 이제 정말 봄이 오는 것같다. 4월에는 잠시 살았던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꼭 가보고 싶다. 그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람에 날리는 산수유를 보며 눈물을 삼켰었는데 이제 웃으면서 산수유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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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책 읽는 모습들이 종종 나오잖아요. 밤을 새며 책을 읽는 모습도,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도요. 그런 모습들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책을 읽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적절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로맹 가리라면, 코맥 매카시라면 그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등장 인물중 '그렉'이 르귄의 책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선물하고 끊임없이 읽었냐고 묻잖아요. 나는 네가 좋다는 책을 읽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너는 내가 주는 책을 읽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너무 공감이 됐고요. 결국은 그녀가 그 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어서 제가 다 행복했어요. 책 읽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공감하고 좋아할 예쁜 영화에요. 저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진 않지만요.

blanca 2013-04-05 09:56   좋아요 0 | URL
우아, 다락방님 정말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원서 페이퍼백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가장 연장자(이름이 가물가물)의 그 책갈피도 넘 탐나고. 맞아요, 그렉이 자꾸 자기가 권한 책을 읽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모습 정말 현실적이었죠! 마지막에 북파티도 너무 부럽고요. 부러운 것 투성이였어요!

2013-04-0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4-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인오스틴 북클럽>이라니. 정말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영화를 언젠가 꼭 보리라 다짐했어요. 물론 그 전에 제인오스틴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고 말이죠. 제 주변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작품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떤 로망처럼 인식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고 괜찮을 거 같은데.
정이현의 저 책은 한국 현대 단편 소설집을 한 열 권 정도 한꺼번에 주문할 때 끼어 있었어요. '삼풍백화점' 기억하고 갈게요.

blanca 2013-04-05 10:00   좋아요 0 | URL
아, 특히 남자와 제인 오스틴은 쉬운 접근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도 나오거든요. 아무래도 다분히 소녀적 취향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요. 하지만 절대 아니예요. 소이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설득> 같은 책도 참 좋거든요. 아, <삼풍백화점>이요! 제 고등학교 때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무너졌었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요. 소이진님한테는 이 작품이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싶어요.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규칙적으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엄마가 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수다다. 물론 친구들이 있고 아이 친구 엄마들도 있지만 이제 양복입은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것이 군대 갔다온 이야기일지라도(이상스레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거의 나눌 기회가 없다. 나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조금 투박하고 거칠고 공감이 조금 배제되었을지라도 그런 어조와 시선이 아쉽다.

 

이 책의 저자 정혜윤은 라디오 피디다.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등 주로 독서 에세이 관련 책을 꾸준히 내왔다. 반면 이 책은 정말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인이라고 한다면 영화 감독 변영주, 만화가 윤태호 정도일 뿐 사회학자, 자연다큐 감독, 야생 영장류학자 등 이름과 직업이 생소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그들의 이야기와 정혜윤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지향하는 점이 저자의 그것과 합치되는 점이 있다는 데에서 이 책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기도 한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가 아쉬웠던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새로운 시선 들이 이 책을 읽으며 절로 충족되었다. 정말 신선했다.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 소망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복기가 일본부채처럼 좌르륵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좀 더 진지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듯한 착각에서 행복할 수 있었다.

 

저자는 카프카가 한 이야기 "우리의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에서의 일상을 사생활로 지칭한다. 그러니 "역사 바깥의 시간 속에서 천재"들인 그들의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셈이다.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자연다큐 피디 박수용 감독은 농사꾼의 아들로서 소년 시절부터 소몰이를 했던 경험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악다구니를 하고 싸움박질을 하는 시장의 시간과 끊임없이 소와 함께 걷는 오솔길의 시간은 이윽고 그의 전체 삶을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두 세계에 걸쳐져 있는 삶. 아름답고 잔잔하고 이상적이지만 지루한 그곳과 다이나믹하고 처절하고 거친 이곳. 그는 야생 호랑이를 촬영하기로 하고 한 평짜리 비트에서 칩거하며 호랑이들을 기다린다. 비트 지붕을 사이로 두고 호랑이 가족과 함께 파도 소리를 들었던 기억에 대한 묘사는 더없이 아름답다. 더 자극적이고 조금은 폭력이 섞인 호랑이와의 사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가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끼>,<미생>으로 유명한 만화가 윤태호에게는 만성적인 피부질환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까지 걸었던 그 지난하고 고독한 길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눈물겹다. 노숙까지 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 그의 시간들은 결국 그 무게감으로 승리했다. 또한 소외당하고 때로 멸시당했던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아내에게 "나는 아내에게 존중받았다."는 고백은 '사랑받았다'는 표현보다 더 절절하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나는 것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의 고뇌와 시련들이 마침내 하나의 성과로 만개하기까지 그의 솔직하고 가감없는 고백은 저자의 미려한 문체로 부드럽게 다듬어져 감동을 준다.

 

청년유니온 조성주 전 정책기획실장의 우리 사회의 청춘 담론이 엘리트 중심이라는 이야기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노스페이스 사태'의 바깥에 그 옷을 못 입는 아이들은 미처 논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 논란과 논의의 변경에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피자 배달을 30분 안에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던 아이들의 이야기. 그 아이들을 위해 싸우고 하나 하나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 정말 청춘다웠다.

 

정치경제학자 홍기빈이 이야기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론도 흥미로웠다. 궁극적 유토피아가 가져올 수 있는 무기력감에서 일어나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잠정적 유토피아' 어차피 우리가 만들 수도 갈 수도 없다는 지향이 아닌 현실적이고 '이것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에서 출발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회 개혁론은 따뜻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누가 한 이야기인 지에 대한 사회적인 약력, 타이틀은 말미에나 간략하게 첨부된다. 우리는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그 말 자체에 대한 몰입보다는 어떤 직책, 직업의 누가 이야기하는 지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미 마음을 채색하고 그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평가할 준비를 한다. 이 책은 그런 여지를 주지 않는다. 소년 시절 소를 몰고 하늘의 별을 보며 떠나는 소몰이꾼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우리는 마침내 그가 자연다큐 감독이 되어 야생 호랑이를 촬영했음을 알게 된다. 미리 다큐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오솔길에서의 체험은 작아지고 만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며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던 그렸던 아이가 오늘날 유명한 만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성장 소설 같다. 이미 성공한 만화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그의 이야기가 축소되고 경직화됐을 때 얻는 아쉬움과는 다르다.

 

정말 이야기를 제대로 듣게 된 느낌이다. 정말 이야기. 정말 고팠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 바랐으나 그냥 지나가버린 풍경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낸 그런 책. 가볍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아 요즘 같은 봄 풍경에 펼쳐들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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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4-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혜윤 피디의 책은 새로운 책이 나올수록 곰삭는 느낌이랄까? (좋은 표현~~)
아직도 읽지 못한 그녀의 책 다 읽고나면 이 책도....
아름다운 4월 되세요^^

blanca 2013-04-05 10:01   좋아요 0 | URL
세실님, 지금까지와의 책들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 날씨가 넘 따뜻해져 드뎌 저는 만년패딩을 넣을 수 있게 되었어요 ㅋㅋ 추위를 많이 타서요.

프레이야 2013-04-0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정혜윤의 이런 책도있군요. 그동안 봄감기 앓으셨다니 이제 언능 나으시고 사월을 누리시길요, 블랑카님^^

blanca 2013-04-05 10: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마워요. 정말 대단하게 앓았답니다.--;; 살은 안 빠졌지만요. ㅋㅋ 감기 나은 후 보는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요. 그래서 감기가 오나 봐요. 그냥 이런 것도 행복이란 걸 알게 하려고요^^
 
행복한 자수 여행 - 들꽃을 찾아가는 행복한 자수 여행 1
아오키 카즈코 지음, 배혜영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늘 가까이에서 두고 보는 싶은 들판을 영국에서는 '메도(meadow)'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수 작가이자 원예가인 저자는 이런 영국의 메도를 식물도감을 끼고 찾아다니며 자수로 책의 지면에 옮겨 놓는다. 들꽃과는 먼 주거환경. 이렇게나마 자수 식물 도감을 보니 당장이라도 비루한 손재주로나마 나도 한번 해보고 싶게 만드는 정갈하고 아기자기한 들꽃들.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숙박 시설인 '킹 존스 로지'란다. 전임 정원사가 따로 아름다운 정권을 가꾼다고 한다. 장미아래 저 의자 아래에 앉아 보고 싶다. 어떤 책이든 술술 읽힐 것같다. 저자는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해 숙박은 하지 못하고 차와 점심을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핑크 장미가 도톰하니 만져 보고 싶다.




양귀비, 엉겅퀴, 길뚝개꽃, 수레국화 등이 배합되어 만들어진 정원. 이 꽃들은 보리밭의 잡초로 취급된단다. 사용한 모티프에 대한 해설도 있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꽃밭에 드러 눕고 싶은 정경이다.

<더 페인티드 가든>의 저자 메리 우딘을 직접 만난 저자가 메리 우딘의 정원에서 받은 영감으로 만든 쿠션의 자수들. 코스모스란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저자를 직접 만나 그의 집까지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으리라. 또 그 감상을 이렇게 자수로 뒷갈무리할 수 있는 저자의 재능도 부럽다.





후반부에는 이 책 전반의 작품 도안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마로 된 천과 자수실 두어가지도 함께 왔다. 하지만 자수라고는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초보자가 이 도안을 제대로 활용하고 저자 같은 작품을 만들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실제 자수 강습이 있나 찾아 봤더니 의외로 자수 강습은 드문 편인 것 같다. 사극에 등장하는 아씨들이 수틀 앞에 앉아 있던 풍경이 사뭇 떠올랐다. 예쁘고 정갈한 책이지만 그저 보고 또 보는 수준으로 만족해야기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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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3-28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피터 래빗 시리즈를 그리고 쓴 미스 포터가 떠올라요. '영국', '들꽃', '메도' 라는 코드 뿐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이 고운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이 떠올라서일거에요. 블랑카님 사진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blanca 2013-03-29 10:05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도 이런 것 직접 해보고 싶은데 손재주가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피터래빗 시리즈 저도 좋아해요. ^^

순오기 2013-03-28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자수 책도 있군요. 멋져요~
우린 고등학교 때까지 자수를 했어요, 그때 수놓은 조각이불감은 아직도 그대로 갖고 있지요.
우리 애들 어릴 때 이불로 만들어야지 하면서 세월만 보냈네요.

blanca 2013-03-29 10:06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우아, 고등학교때 만드신 조각이불감이 아직도 있다고요? 볼 때마다 너무 좋으시겠어요. 저희는 자수 시간이 없어서 결론적으로 참 아쉬워요. 자수는 문화센터 강좌에도 잘 없더라고요.

꿈꾸는섬 2013-03-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정말 멋지네요.

blanca 2013-03-30 09:51   좋아요 0 | URL
꿈섬님, 너무 예뻐서 한번 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에요^^;

후애(厚愛) 2013-03-2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안부가 늦어서 죄송해요..
즐거운 주말 되시고 감기조심하세요.

blanca 2013-03-30 09:52   좋아요 0 | URL
후애님, 저는 이미 심한 감기에 걸려 엄청 고생했답니다. 지금 회복 중이긴 한데 모든 일 스톱입니다. 후애님, 요즘 감기 독하다는데 정말 감기 조심하세요.

후애(厚愛) 2013-04-06 15:50   좋아요 0 | URL
감기는 좀 어떠세요?
저도 오늘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ㅠㅠ
오늘 대구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봄비라는데... 왜이리 추운지 모르겠어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감기 얼른 나으시고 건강조심하세요.^^

blanca 2013-04-08 10:29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다 나았답니다. 감기 기운 초기에 꼭 약 먹고 낫게 하세요. 저는 목만 따끔거려 그냥 괜찮겠거니 했다가--;; 며칠을 그냥 누워만 있었네요. 또 서울은 꽃샘 추위가 왔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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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김희영님의 번역으로는 일단 여기까지 출간되어 있다. 끝이 아닌 끝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2권은 '나'의 또다른 자아 스완이 아내가 될 화류계 여자 오데트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이야기와 '내'가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다. 이 두 부분은 묘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상류층 출신으로 지적이고 신사적인 인물인 한면과 전혀 지적이지 않고  과거가 모호한 여자인 오데트에게 집착하고 그녀가 속한 천박한 집단에 소속되기 위하여 분투하는 의외의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나'의 고모할머니가 부여한 외할아버지 친구인 증권중개인의 아들인 겸손하고 평범한 스완과 사교계를 드나드는 화려한 샤를 스완의 분열된 측면과도 오버랩된다. 1권에서 언급되었던 우리의 사회적 인격에 대한 이야기는 2권의 이러한 캐릭터 유형과 또한 책을 읽는 우리들에 진실로 부합된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채워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든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타인의 본모습과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곡해하고 오해할 것이다.

 

오데트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며 마음의 지옥을 만드는 스완의 내면에 대한 묘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타인이나 일의 결과에 집착할 때 보이는 각종 어리석음과 절절하게 닮아 있다. 스완은 모두를 의심하고 모두를 유리한 대로 믿으려 하고 자신의 정당화에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위해 괴로워하거나 기뻐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른 우주에 속한다는 듯 시로 둘러싸이고 우리 삶은 감동적인 영역으로 변해, 우리는 그 영역에서 조금쯤 그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p.90

 

오데트와 스완이 사랑에 빠지며 공유하게 되는 그들만의 은어, 약속, 음악의 상징성은 그것이 덧없어질 유한한 것이기에 더 빛난다. 스완이 오데트의 코르사주 카틀레야 꽃을 바로잡아 주며 '카틀레야를 한다'는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신호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1권에 등장했던 '나'의 이모할머니들의 피아노 선생인 뱅퇴유가 작곡한 소악절이 오데트에게서 연주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음악이 나올 때 스완이 떠올리는 오데트에 대한 사랑, 정열들은 삶의 변전과 인간의 감정들의 그 다양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것들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어리석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퇴색, 그 감정마저 저물고 남는 것들의 궤적은 그 어떤 것에 대입하여도 무리가 없을 만큼 진정성을 갖는다. 나는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문제로 고뇌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스완의 그 지옥같은 마음 속의 전쟁을 듣는 것만으로 그냥,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누구에게든, 이라는 위로를 얻었다.

 

'나'는 스완이 오데트와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된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사랑의 결실인 소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은 '스완'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리고 갑자기 '나'의 시선은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와 모든 변한 것들의 잔상을 부여잡고 씁쓸해하는 노인의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의 덧없음을 탄식하며 2권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글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할 수 있을지. 여기까지 온 것에 그리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프루스트의 그 유려한 만연체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도 같아 뿌듯한 느낌도 든다. 서술 시점의 변주, 규칙적이지 않은 서술 시점의 횡단 등 각종 불친절함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아름다운 구석이 많은 책이다. 그것은 여기에는 수많은 '내'가 흩어져 있어 끊임없이 잊혀졌던 '나'를 채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일은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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