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둘 있다. 한 소년은 범죄의 피해자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고 다른 한 소년은 범죄의 가해자를 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둘은 살아남았다. 가족이 산산조각으로 바스라지고 살아남은 자는 생존 자체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는다. 설명해 봐! 네가 살아남은 이유를. 네가 보아버린 것들을.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내처 읽어버린 이야기 속 두 주인공 소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응시하다 손을 잡는다. 기막힌 우연이다. 작가들은 서로의 소년들을 알고 있었을까. 언젠가 독자들이 그 두 소년을 함께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을 예감했을까, 싶었다.

 

 

 

 

 

 

 

 

 

 

 

 

 

 

 

 

 

사실과 진실....

 

"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
-<모방범>2권 p.493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7년의 밤> p.25

 

 

<모방범>은 학창 시절 아이들의 선망을 샀던 소년 둘이 자라서 연쇄 살인범이 되는 이야기다. <7년의 밤>은 소녀를 살해하여 시신까지 유기하고 댐의 수문을 열어 마을 전체를 물 속에 잠기게 한 전직 야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와 정유정은 천인공노할 범죄 사실의 이면의 진실을 하나 하나 채집하여 내어 놓는다. 어머니 앞에서 처음 걸음마를 내딛던 날 한없는 찬사와 경탄을 받았을 평범한 그들이 어떻게 생명들을 꺼지게 하고 그 생명들을 둘러 싼 삶들을 패대기치는지 그 과정을 복기한 것은 이해와 공감을 바라는 시선이 아니라 정유정 작가의 말처럼 사실과 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그러나'를 수긍하는 과정이다. 구역질나지만, 두렵지만 삶의 전장은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꾸미던 꽃밭이 아닌 것을. 때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갑자기 폭주해서 밀려오는 경험이었다.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그 미약한 가능성도 삶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외모도 출중했던 소년들은 그 언저리에 있었던 소년들 만큼이나 때로 의외의 진로를 택한다. 늦은 비행에 어떤 논리적 필연적 연유를 갖다 대고 찾아 낼 수 있을 만큼 삶은 도식적이지 않다. 왜곡된 자아상은 엉뚱한 출구로 자존감을 회복하려 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찾으려 했던 '그러나'는 이 소년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 소년들 앞에서 무너질 것 같으면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는 피해자들의 '그러나'에 대한 이야기다. 잔혹한 소년들이 끝내 파멸시키지 못한 '그러나'를 건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자 우리가 오늘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다.

 

<7년의 밤>에서는 평범한 가장의 우연한 실수로 시작된 파멸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사회 앞에서, 힘의 헤게모니 앞에서 무력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범죄로 내몰린다.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시작된 그의 범죄는 마침내 자신의 가정마저 해체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수몰되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소년은 흉악범의 자식이 되어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소년이 아버지의 사실과 진실 사이에 놓인 '그러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다. 이해와 수긍과 용서는 엄연한 간극이 있다. 그 간극에 애써 작가는 참견하지 않는다. 그 편안함 속에는 어떤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다. 정유정 작가의 매력인 것 같다.

 

 

가족이란...

 

두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딸을, 손녀를, 부모를 흉악범죄로 잃고도 살아나가야 하는 가족. 피해자임에도 정작 가해자가 되어 버린 오빠를, 아들을,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는 가족. 제대로 된 사랑과 교감을 받지 못한 채 엇나가 버린 아들들이 흉악범죄자가 되어 버린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 다른 가족을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가정만은 지키려고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은 정작 그 지키려 했던 것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했던가,에 대한 아픈 회의와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가족은 마치 '나'를 길게 늘여 촉수만 붙인 것 같다. 우리는 때로 '나'와 '가족'의 경계를 잊는다. 그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족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이 한 순간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 이후.

 

<모방범>의 가족을 잃은 소년은 손녀을 연쇄 살인범의 손에 잃은 할아버지와 손을 잡는다. <7년의 밤>의 사형수 아버지를 둔 소년은 보이는 '사실'이 아니라  이면의 '진실'을 찾아 헤맸던 아저씨와 끌어안는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결속 안에 있다 그것이 끊어지고 걸어 나온 그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어깨에 기댄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가족은 또다른 '나'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소통과 유대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그 환각에서 깨어난 지점에 타인이 걸어들어올 여지를 남겨둔 것은 인간 사이에는 포기할 수 없는 소통과 지지와 신뢰, 애정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의 몰이해를 묘사하고도 끝내 이것들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들 본인들의 희망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P.S.

왜 인간에 대하여 선보다는 악에 대한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갖는 것일까? 더 할 얘기가 많은 것일까? 더 많은 이끌림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성악설도 원죄설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손치더라도 무력한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게 무참하게 느껴지는 삶의 우연성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조합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 때문일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미리 맷집을 키우는 일일까. 이러한 책들은 항상 말줄임표로 끝나고 만다.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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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3-2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부터 미미여사 작품이 대단한 인기더군요.도서관에서도 늘 대출 중이고...요즘은 남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여자는 미야베 미유키가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일 겁니다.우리나라는 워낙 추리작가의 지위가 낮으니 원...

blanca 2012-03-30 21:2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뒷북을 친 것 같아요^^;;아, 히가시노 게이고는 접해보지 못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책은 <화차>를 보고 반해서 또 다시 시도해 본 건데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 이런 장르물을 읽으면 무서워서--;; 그만 읽으려고 합니다. 추리작가가 선정적이고 원색적인 자극물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심연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경우 같은 경우는 단순히 장르물로 한정될 수준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그런 작가도 나오고 인식도 많이 달라지기를 바라 봅니다.

cyrus 2012-03-2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어느 책에서 봤는데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대요.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기억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대요. 서로 다른 소설을 읽다가 우연히 서로 유사하다거나
이어지게 되는 관점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이 무척 새롭죠 ^^

blanca 2012-03-30 21: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7년의 밤>은 찬사를 많이 들어서 내용 자체를 아예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스릴러물 같은 분위기도 있어서 사실 많이 놀랐어요. 연달아 읽어서 그런지 공통점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2012-03-3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극단적인 비극을 그려내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사실은 희망에 관심있는, 희망을 찾는 사람들 같아요. 화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여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2-04-01 21:42   좋아요 0 | URL
섬님, 맞아요. 힘들다, 슬프다,고 호소하는 와중에는 그래도 살만한거야,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을 찾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예리하십니다.^^

마태우스 2012-03-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 읽은지가 5년이 넘으니,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요. ㅠㅠ 역시 책도 젊을 때 읽어야 한다니깐요. 글구 7년의 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볼게요.

blanca 2012-04-01 21:4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7년의 밤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사실 읽으면서 서사의 힘, 문장력 등이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싶어 내심 놀랐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4-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다 살지 않아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라고 추측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일이 그 중 하나였어요. 이렇게 밀도가 있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놓고 있게 되다니, 생각하다가, 새털같다, 라고 느끼는 부분들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저 책들이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런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 듯 아프게 써내려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쁘면서도 좋고 좋으면서도 나쁜 것들이 있다, 고 소설가 양귀자가 모순에서 말한 것 처럼요.
인간에 대해서는 부정이 긍정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아마도 행복할 때엔 일기를 잘 쓰지 않는 것과(그런 경우가 있다면요)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blanca 2012-04-01 21:45   좋아요 0 | URL
쥬드님의 새로운 네임이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쥬드님이라고 줄창 부르기로 했어요.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도 삶도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더 넘쳤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김훈이 인터뷰한 것 보니까 삶에 대한 너무 어두운 시각을 가지고 있어 돌연 겁나기도 하더라고요. 저보다 더 많이 살고 느끼고 체험한 사람이 하는 얘기란 항상 더한 무게를 가지잖아요. 거짓말 같을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체념보다는 긍정,희망을 더 늘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기가 더 쉬우니까요.

Jeanne_Hebuterne 2012-04-02 12:49   좋아요 0 | URL
히힛 제 닉, 잔 에뷔테른이에요. 저도 저 글씨를 찍질 못해서 구글에서 고스란히 복사해서 붙였습니다만, 무엇으로 불러도 장미이듯이(비유가...죄송해요) 무엇으로 불러도 이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김훈의 그 시각,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라고 비유할 때 부터 떠올렸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큼만 강하고, 살아남기 좋을 만큼 어두운 글이었어요. 블랑카 님에게서는 일말의 밝음이 늘 있어요.

순오기 2012-04-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은 안 읽어서 모르지만, 7년의 밤은 굉장하지요. 정유정 작가를 만나고 싶을 만큼...

blanca 2012-04-04 21:34   좋아요 0 | URL
영화화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이런 작가가 지금 한국에 있다니, 이런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문장력도 얼마나 좋은지 소설의 부흥도 가능하겠다 싶고요.

후애(厚愛) 2012-04-0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모방범을 선물 받아 놓고 아직도 못 읽었어요.
선물 주신 분께 너무 죄송해서... 읽어야하는데...

독감은 좀 어떠세요? 입 맛이 없더라면 챙겨 드셔야 합니다.

blanca 2012-04-04 21:35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자리 털고 일어났는데 또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예, 억지로라도 몸에 좋은 것 먹으며 회복하려고 합니다. 후애님도 어서 건강해지시기를...

icaru 2012-04-0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이 책은 5년을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이라던데, 이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다는 걸 반증한다 싶어요.. 사실 저도 읽은지 오래되어서 줄거리랄게 세세하게 생각은 안 나는데, 얼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서 유사한 설정이다 라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물론 모방범 쪽이 악랄하다면 악랄하고, 미디어를 역이용하여 쇼맨쉽을 발휘는 하는 정신착란 모습에 기함을 토했지만요.

추신에 덧붙인 말씀처럼, 왜 사람은 악에 대한 이야기에 더 쉽게 설득당하는지... 에 대한 말에도 블랑카 님다운 통찰이 느껴져요. 맷집을 키운다 라니 ㅎㅎㅎ.. 또 그건 이런 장르의 작품이 건재하고도 승승장구하는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blanca 2012-04-04 21:37   좋아요 0 | URL
icaru님, 제가 겁이 많아서 밤에 이 책을 읽다 보니 자꾸 무서워서 2권, 3권은 안 읽고 처분하려는 생각까지 했잖아요 ㅋㅋ 그러면서 또 읽고 막 괴로워하고. 너무 악랄한 인간상을 보니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도 어두워지고 부작용이 있더라고요. 당분간 밝은 책들 위주로 읽어 보려고 한답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지음, 이다희 옮김 / 섬앤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관습의 힘은 강고하다. 우리가 자라나고 살아나가고 내일을 상상하는 공간에 차곡차곡 쌓인 것들은 때로 발목을 붙잡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꿈꿀 수 있는 내일은 마치 위험한 반역 같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을 타협하고 굴복하고 견뎌 나간다. 용기는 나타와 안일, 생존까지 담보로 요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막에는 생리통이 너무 심해 똑바로 서지 못하면서도 염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소녀가 있다. 그리고 아기를 낳자마자 천 조각처럼 바늘과 실로 봉해져야 하는 여자가 있다. 남편을 위해 질 입구를 단단히 조이고자 하는 것이다. 굶고 있는 열한 명의 자식들을 위하여 임신 9개월의 몸으로 먹을 것을 찾아 사막을 누비는 여자도 있다. 첫 아이 출산을 앞두었지만 여전히 질 입구가 막혀 있는 여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엄마처럼 홀로 사막으로 나가 아기를 낳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불행히도, 나는 질문의 답변을 안다. 많은 여자들이 홀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운이 좋으면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오기 전에 남편에게 발견될 것이다.

-p.335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할례를 받고 열세 살에 낙타 다섯 마리에 노인에게 시집을 보내려 한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나와 세계적인 모델이 된 입지전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둔중한 울림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은 어느 정도 극복한 고통일지라도 침묵 속에서 방관되고 있는 부당한 폭력과 고통에 대하여 용기있는 폭로를 했기 때문이다. 외모로 먹고 사는 것이 아직도 어색하다고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상치되는 지점에서 때로 양심적인 머뭇거림을 느끼는 이 여인은 어느 날 우연히 패션지 앞에서 봉인되어 왔던 부조리와 불합리의 소굴의 빗장을 열고 행동하는 양심이 된다. 외부 세계에서는 이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신체절제술에 대하여 왜 아직까지 집단적인 거부의 움직임이 없었는지 내부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겠지만 정작 그 속에서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며 면면이 살아 내려온 여자들은 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고 반역적인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여성 할례, 오늘날 이보다 적합한 용어로 말하자면 '여성성기절제술 FGM'은 아프리카내 28개국에서 지금도 크게 행해지고 있다. 유엔은 어림잡아 1억 3천만여 명의 여성들이 FGM을 받았으리고 추정한다. 적어도 2백만명이 매년 피해자가 될 위험을 안고 있는데 하루로 환산해 보면 6,000명이다. FGM은 대개 미개한 환경에서 산파나 마을의 나이 많은 여자에 의해서 마취없이 행해진다. 여자들의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수술에 사용하는데 그 중에는 면도날, 칼, 가위, 깨진 유리 조각, 날카로운 돌 등이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빨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략> 가장 심한 방법은 '봉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소말리아 여성의 80퍼센트에게 행해진다. 내가 당한 것이기도 하다. 봉쇄술을 받은 직후에는 쇼크나, 세균 감염, 요도나 항문의 손상, 흉터의 발생, 파상풍, 방광염, 패혈증, HIV 감염, B형 간염 등의 증세나 합병증이 올 수 있다.
-P.343

 

와리스 디리는 다섯 살에 받은 이 봉쇄술로 인하여 생리혈이 고여 생리 기간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에 허덕이게 된다. 영국에 와서도 그녀는 이 신체의 부끄러운 비밀과 이해받지 못할 고통으로 인하여 남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이 자신을 좀먹게 내버려두지 않고 의사 앞에 나아가 상처를 공개하고 그 상처를 치료하고 사랑에 빠지고 마마가 되고 자신이 얻은 명성에 기대어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아직 이 고통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소녀들을 구하기 위하여 용기있는 걸음을 내딛는다. 그렇다면 이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인 앞에서 모든 아프리카적인 것들은 부정되고 있을까. 이렇게 잔인하고 미개한 관습을 전수하고 전수받고 꽁꽁 봉인한 채 부족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자신들이 먹을 것조차 외부의 원조에 기대야 하는 사람들의 나라.

 

매일. 나는 내가 소말리아 사람임이 자랑스럽고, 조국이 자랑스럽다. <중략> 할례의 경험을 제외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 어느 누구의 어린 시절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나는 삶을 체득했다.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의 삶이었다. TV에 나오는 남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그런 인위적인 삶이 아니었다.
-P.347

 

 

 

르 클레지오는 소설 <아프리카인>에서 "아프리카, 그것은 얼굴이기보다는 몸이었다. 감각의 폭력이자 욕구의 폭력이었으며, 계절의 폭력이었다."고 증언했었다. 그렇다. 나는 와리스의 "그것은 실제의 삶이었다"는 얘기 앞에서 갑자기 망연해져버렸다. 나는 과연 실제의 삶을 체득한 적이 있었던 가. 먹는 것, 마시는 것, 자는 것, 사랑하는 것, 우정을 나누는 것. 나는, 우리는 어느새 남의 인생을 지켜보며 그것이 마치 내가 사는 삶인 것처럼 소비하며 대리 만족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와리스는 아직도 자신의 나이가 정확히 얼마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아프리카적 시간 관념 안에서 산다고 한다. 언제나 물을 찾아 헤매는 생활이었기에 지금도 물을 보면 마냥 기쁘고 소중하다고 했다. 젖먹던 힘까지 내어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했기에 내일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회상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저만치 뒤로 하고 달려야 했던 삶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생에 대한 온전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슬몃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여자의 충절은 야만적인 관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얻어야 하는 것을 안다."는 와리스 디리의 고백은 할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생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아프리카의 가장 잔인하고 미개한 폭력의 응축체 같은 할례 앞에서도 생명이란 선물에 경탄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때로 폭력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곳으로 비하되는 세상이 아름다운 별이 태어난 곳임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사람만이 그 별을 볼 수 있다. 분명 이 지구별은 너무 슬프지만 아름다운 놓고 싶지 않은 작은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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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2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이게 책으로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몇년전에 영화로 봤어요. 이 리뷰를 읽노라니 그때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먹먹함이 다시 찾아오네요.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어떻게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보고 자라온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을텐데, 거기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텐데, 어떻게 깨우칠 수 있었을까.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책에도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여자가 수술을 하러 갔을 때, 아프리카 출신의 남자가 아프리카의 말로 부끄러운 줄 알고 수술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거든요.

책이 묵직한가 봅니다, 블랑카님. 리뷰가 묵직해요.


blanca 2012-03-20 22:21   좋아요 0 | URL
아, 영화 보셨군요. 저는 못 봐서 영화로는 어떻게 묘사되었을지 궁금해요. 와리스 디리가 어렸을 때부터 반항아적 기질이 다분했대요. 일단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했는데 도망쳐나오면서부터 그녀의 다른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아요. 남편도 본인이 쫓아다녀서 결혼하고^^;; 정말 솔직하고 대담한 여전사 같은 느낌의 여인이더라고요. 군데군데 에피소드들이 너무 귀엽고 발랄하답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을 책도 가지고 있고, 영화도 가지고 있고... ^^

요즘 제가 상담을 받는데, 제가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지 알았어요,
힘든 상황인데, 징징대지 않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사람이요. 그리고 그 반대 유형을 보면 화를 내는거죠.
그것은 아마 내게 화내야할 것에 대한 투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고 싶은 책이예요.
그리고 블랑카님과 똑같이 망연해질까봐 두렵기도 한 책이죠....

근데! 왜 봄이 안 오는거죠!

blanca 2012-03-20 22:22   좋아요 0 | URL
아, 저도요! 저는 힘든 상황 앞에서 특히 담담하게 침착하게 잘 헤쳐 나가는 사람이요. 한 마디로 진정한 의미에서 강한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너무 나약해서.... 그죠, 오늘이 춘분이라는데 짚업 가디건 걸치고 밖에 나갔다 얼어 죽을 뻔 했어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더라고요. 저는 정말 봄이 온 줄 알았거든요--;;

비로그인 2012-03-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어떤 책임을 졌죠?
어디까지나 그것은 당신의 삶일 뿐입니다.
라고, 조용히 말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사람의 목소리는 그래요.
(블랑카님에게 하는 말 아니에요!! 놀라실까봐!)
종종 한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
다른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기쁘기도 합니다.

아참, 저는, Jude입니다.
:)

blanca 2012-03-20 22:24   좋아요 0 | URL
쥬드님 ㅋㅋ 깜짝이야. 완전 찔리는 질문이잖아요. 저는 여러가지로 우물 안 개구리인데 앞으로도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이 틀을 깨면서 성장하고 싶어요. 이게 전부라고 자꾸 생각하며 살다 세상을 마감한다는 건 너무 비극적이잖아요.

비로그인 2012-03-21 12:49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블랑카님 놀래켜 드리려구요!

moonnight 2012-03-2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사놓고 아직 못 읽은 책이에요.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요. -_ㅠ)

책을 산 날이었나 케이블 티비에서 영화로 보여주기에 (즐겁게) 놀랐었어요. 정말.. 훌륭하다고 정말 장하다고, 다른 말은 떠올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그 입장이었으면 다들 그렇게 사니까,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체념해버리지 않았을까.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상상도 못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니 그 의연함이 존경스러워요.

블랑카님 멋진 리뷰를 읽으니, 마치 책을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큰일 났어요. ^^;;;;

blanca 2012-03-21 22:06   좋아요 0 | URL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두려움까지 솔직하게 고백하고 이런 용기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정말 비범해 보입니다. 아, 책을 사신 날 영화가 했다니, 이런 기막힌 우연이라니요! 꼭 읽어 보셔요. 술술 잘 읽히더라고요. 군데군데 에피소드도 귀엽고^^ 아주 유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Jeanne_Hebuterne 2012-03-2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요, 블랑카님. 이사했어요.

blanca 2012-03-21 22:07   좋아요 0 | URL
아...그런 거였군요.
 

토요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죽음의 동행-인생을 훔친 여자의 비밀'을 보고 너무나 섬뜩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소위 '시신 없는 살인 사건'으로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다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하게 된 젊은 여인의 신분을 가로채고 정작 본인은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사망 보험금을 타 낸 중년의 여자에 대한 얘기였다.

 

'인생을 훔치다' 타인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타인 그 자체를 훔치는 일이 가능할까.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대체 그 동기는 무엇일까. '자기'를 부정하고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의 삶의 주체가 되려는 그 극악무도한 시도가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 심판받고 단죄될 수 있을까. 

 

이것이 소설 <화차>에 맞닥뜨리게 된 사연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로서도 장르 소설로서도 처음이었다. 영화를 볼까도 생각했지만 변영주 감독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게까지 한 그 원작을 날것으로 접해보고 싶었다.

 

 

금융기관에서 대출 관련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자 납입을 지연하다 원금까지 연체되어 신용불량자가 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 사람들 전부가 낭비를 해서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서도 분수를 몰라서도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서 아이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믿었던 부하직원이 배신을 해서 가족 중의 누군가가 큰 사고를 쳐서 아니면 본인이 큰 사고를 당해서 그런 식으로 치닫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된 결론만을 놓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피하려 들었다. 가진 재물의 양으로 그 사람의 힘을 키워주는 사회에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때문에 몸과 마음이 졸아가는 그들은 어느새 이마에 주홍글씨가 찍혀 소외되고 있었다.

 

다리를 다쳐 휴직 중인 혼마 형사에게 죽은 아내 친정 쪽 조카가 찾아온다. 번듯한 집안의 은행원인 그는 신용카드 발급이 거절당하자 증발해버린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한다. 혼마가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두 여인은 이름을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니라 어느새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남발한 신용으로 기만당한 피해자들로 만난다. 이름을 빼앗긴 쇼코는 홀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 애썼지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실족사와 신용불량자 딱지였다. 그녀가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보다 많은 소비를 한 것이 완벽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개인파산 수속을 의뢰했던 변호사의 말은 우리가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내몰리게 되는 잔인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구한다.

 

"제가 한 얘기를 부디 잊지 말아주십시오. 세키네 쇼코 씨는 유달리 낭비벽이 심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어요. 그녀 신상에 일어난 일은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나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주위 상황을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중략>."

-p.171

 

취업을 하고 가장 먼저 받은 선물은 신용카드 발급이었다. 아니, 내가 신용카드 발급을 신청하기 이전에 당시 미친듯이 신용을 남발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중채무자가 될 기회는 저절로 주어졌다. 심지어 카드도 발급해 주고 돈까지 주는 경우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용돈 정도를 벌던 새내기 직장인들에게 사회가 가장 먼저 선물한 것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제몸까지 갉아내며 곧 꺼져내릴 수밖에 없는 거품이건만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언질을 주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가지고 싶다"와 "가질 수 있다"로 지지되는 곳이다. 그 누가 제동을 거는 순간 실상은 가지지 않은 것과 가질 수 없는 것만 남긴 채 붕괴되고 말 것이다. 행복이 소유로 환치되고 권장되는 곳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 드는 것마저 하나의 영리 사업으로 활용되는 곳에서 정말 인간이 발가벗고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교코는 그런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같은 불쌍한 여자의 이름과 삶을 훔치려 들었을까. 그녀는 빚쟁이들에게 쫓겼지만 정작 자신이 그 돈을 써본 적도 없는 생래적 채무자였다. 부모의 주택 대출. 가족의 야반도주. 해체. 끈질기게 그녀가 신혼을 꾸린 곳까지 찾아와 겁박하고 괴롭히는 사채업자들은 그녀가 생존을 위해 선악의 경계마저 허물고 눈을 감게 만드는 막다른 곳으로 그녀를 끌고간다.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하면 상속포기를 할 수 있다는 얘기에서 관보에서 미친듯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려 드는 그녀의 모습. "죽어줘. 제발 죽어줘. 아빠" 이리저리 떠돌던 아버지가 딸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의 지명이 예전에 근처 사형장에서 죄인이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가족이나 친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는 데에서 유래한 '눈물다리'라는 것에서 한없이 슬퍼했던 딸은 그렇게 차라리 아버지가 죽어버려 자신이 빚독촉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한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을은 서로를 잡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p.368

 

개인인적사항까지 소비재로 둔갑하여 매매되는 신용사회에서 남의 삶을 가로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현실이다. 교코가 통신판매회사에 취직하여 마침내 자신이 변신하여 살고자 하는 삶을 발견하여 그녀로 둔갑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허술한 구조가 노출된 탓도 있다. 그리고 하필 그녀가 훔치기로 한 삶은 똑같은 고통으로 개인파산제도를 밟아 자신의 과거를 허물벗듯 벗어버리려 했던 동족이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형사 혼마의 눈을 통해 두 여인의 비극적 삶을 관조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더없이 뭉클하다. 그 담담한 그리운 시선이 무언가를 무장해제시킨다.

 

벤치에 앉아 혼마가 생각한 것은 신조 교코도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먼지 낀 밤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네온사인을 올려다보고, 정체된 자동차 행렬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너고, 쇼윈도 안을 기웃거리고......
-p.317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네들도 보통 사람들이었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런 소망과 과거의 꿈들을 읽어내는 눈.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상황을 복기하는 섬세함. 이 이야기는 그런 것들 속에서 나와 당신, 우리들을 발견하게 한다. 서글프고 비참하지만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빚어낸 참극을 덮으며 그리고 아직도 누군가의 삶으로 도망쳐 견뎌나갈 수 있다고 믿는 교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갑자기 아연해져 버렸다. 이러한 삶. 이것은 누군가의 삶을 잔인하게 가로챈 악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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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3-1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라는 느낌이 너무 섬뜩해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을 쳤을 뿐인데 상황은 점점 더 지옥이고. ㅠ_ㅠ

blanca 2012-03-16 22:50   좋아요 0 | URL
저는 <화차>가 잔혹한 악녀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읽어갈수록 너무 슬프더라고요. 이 작가의 시선이 참 다층적이고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어디에선가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있는 것이라는 얘기가 떠올랐어요.

stella.K 2012-03-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었군요. 난 그런 일을 당해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도무지 와닿지가 않더라구요.
재미도 없구. 영화도 호불호가 있더군요. 그나마 영화로 보면 나을까 싶은데
의외로 상영관도 몇군데 안하는 것 같더라구요. 가까운 곳에선 하지도 않고.
근데 일드가 있더라구요. 크게 기대는 안하는데 그래도 함 볼까합니다.
제목이 주는 의미가 심장하긴 한데 얼마나 감동을 줄지 모르겠어요.ㅠ

blanca 2012-03-16 22:5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안 그래도 이 책이 잘 안 읽히신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나요. 저는 <그것이 알고 싶다> 내용이 너무 생생해서 이 책이 마치 실화처럼 느껴져서 더 몰입이 되었던 것 같아요. 여러가지로 접한 사례들도 떠오르고요. 영화는 책을 읽고 나니 막상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드네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으면 어땠을까요?

마녀고양이 2012-03-16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 책은, 정말 큰 맘 먹어야 손에 쥘 수 있어요. 그래서
사놓고 일이년째 그냥 놔둔 책이 상당합니다. 항상 어딘가 찌르거든요....
피해자가 가장 안타깝지만, 가해자, 이렇게 타인의 삶을 훔친 가해자는 대체 얼마나 자신의 삶이 싫었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웠으면 타인의 삶을 살고 싶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과연 타인의 삶을 훔쳐서, 행복했는가 하는 측면이 가장 궁금하지요... 자신이 아닌 허공에 떠서, 자신과 분리되어 둥둥 떠다니며 그 공허감을 어찌했을까 싶어서요.

블랑카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아, 넘 피곤해요... ㅠ

blanca 2012-03-16 22:5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이미 <모방범>을 또 질러서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되도록 너무 깊게 안 빠지려고 하는데 늦바람이 무섭다고 지금에서야 미미 여사의 책들을 찾아보게 되네요. 아, 진짜 한창 바쁘시겠어요. 대학원 생활은 어떠세요? 저도 요새 너무 피곤하고 이것저것 해야 될 일도 있고. 속은 또 쓰리고 커피는 끊었다 또 마시고 다시 쓰린 속을 부여잡고 후회하고 그런 생활이랍니다.^^;;

stella.K 2012-03-17 13:33   좋아요 0 | URL
앗, 이런...모방범 나 있는데.
그거 나 안 읽는데. 보내드릴 수도 있었는데...
미미 여사의 시대물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근데 욕심 안 낼려구요.ㅋ

아이리시스 2012-03-1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리뷰 제가 읽고 싶은 책만 올라오는데 덕분에 저, 책 안사도 되고 너무 좋아요^^ (응?)
<화차>가 이런 내용이군요. 오래 전에 미미여사 한 권 읽었는데 그때도 사회문제를 다뤘던 걸로 기억해요.
같은 고통을 짊어지고, 같은 것에 쫓기고 있어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상황과 환경, 선택과 결단에 대해 고민해보게 합니다. 좋네요. 뭔가 요즘 하는 고민과 참 비슷해요!!

벌써 주말이군요. 이번주 내내 잠이 모자랐는데 서재도 꾸준히 출석해서 왠지 뿌듯해졌어요.
블랑카님 즐거운 주말되세요22222222222. 아, 저는 아직 팔팔해요...ㅋ

blanca 2012-03-16 22:55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요새 그 열정과 부지런한 막 여기까지 전해져 옵니다. 저도 되도록 안 처지고 안 게을러지려고 노력중이랍니다.^^ 주말에는 봄비가 한창일 것같아요. 푸른 하늘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봄을 맞이하기 위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겠지요? 아이리시스님 한창 팔팔하실 때잖아요. 부러워요^^

cyrus 2012-03-16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나의 신분을 도용해서 산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그리고 살아 있는데도 누군가가의
나의 신분을 도용해버려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도 억울한 일이고요.

blanca 2012-03-16 22:5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자꾸 신용정보 유출되었다고 하고 보이스피싱 전화도 받도 하니 이렇게 타인의 신상정보를 무단으로 반출하고 심지어 인생까지 훔칠 수 있는 상황이 멀게 안 느껴지고 더 섬뜩하더라고요. 무언가 자꾸 부풀어 오르니 그게 꺼지는 과정이 참혹한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3-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는 영화를 먼저 봤어요.
주연배우들이 좀 모자란다는 생각에 아쉬웠지만 내용은 한없이 무겁고 가슴아팠어요.
원작은 읽으려고 사뒀답니다. 낭독녹음도서로 읽으려구요.
블랑카님의 리뷰는 언제나 깊고 명철해요. 고마워요.^^

blanca 2012-03-18 23:2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영화 보셨군요. 저도 연기가 어떨까 궁금했는데 아쉬우셨군요. 내용도 조금 다른 것 같더라고요. 우아, 이 소설을 낭독하신다고요? 들어보고 싶어요. 저 사실 언젠가부터 무서운 것은 영화든, 책이든 다 겁이나서 피하게 됐었는데 이 소설은 무섭다기보다는 참 슬프더라고요. 왜 사람들이 미미여사라고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어요.

2012-03-30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0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환자실 앞 면회 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분투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는 그 시간, 6층의 분만실에서는 진통중이던 산모가 더 이상 자심한 고통은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새 생명은 의도하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밀려 내려 온다.

 

 

오로지 태어나는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테르툴리아누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채 이 어둑시근한 제사를 통하여 김영하의 이 책에 들어갔다. 이 책이 십대 폭주족 아이들에 대한 얘기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랬을까? 때로는 자신이 읽기 시작하게 된 책이 다루는 소재조차 모르는 채 그 책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편견도 단견도 자만심도 허영심도 잠시 내려 놓은 채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도 있는 유일한 시간이 허락될 지도 모르니까.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그것부터가 이상하다. 그러나 시작이니까 아직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다.
-p.7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 시작이 아닌 것처럼 위장한다. 이 마술의 관람자가 되어 마음을 졸이다 보면 1장은 그 다음부터임을 알게 된다. 그 밧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도 실패한 마술로 피범벅이 되어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으로 그를 알아주겠다는 일념으로 밧줄이 흔들거려도 잠시 다리를 꼬아 지지하며 버티어 본다. 참고로 그가 쓴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생채기를 그어대고 이렇게 그 생채기를 따갑게 젖혀 놓는 이야기는 언제나 읽는다는 행위를 거룩하게도 진저리나게도 한다.

 

그리고 귓가에 아직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힘겹게 쇼핑카트를 밀며 고속버스터미널로 들어가 혼자 아이를 낳는 장면을 참아내야 드디어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다. 작가는 아이가 나오는 순간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이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순간 살이 살을 낳는다. 생이 생을 끌고 들어온다. 그렇게 낳은 아이, 제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아니 그 제이와 함께 성장하며 이 이야기의 화자가 되는 동규가 제이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나가게 된다. 십대 미혼모의 몸에서 태어나 룸살롱 주방에서 일하는 돼지엄마에게 키워지고 또 버려지는 제이의 십대는 부모의 불화로 해체되는 가정에서 자라다 결국 집을 나오는 동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둘은 결국 폭주족의 리더와 일원으로 다시 함께 하게 된다.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p.73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p.133

 

제이에게는 타인의, 사물의, 고통을 감지하는 예민한 센서가 있다. 동규가 얘기했듯이 제이는 세상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고통 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처절하게 아파야 하는 고통, 폭력에 유린당하는 고통에 제이는 슬퍼하고 분개한다. 여기에 가난한 십대가 있다. 가스통을 지고 피자를 배달하고 때로는 어른의 성적 유희 대상이 되고 그 돈으로 다시 피자를 사먹고 게임을 하고 같은 십대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세상을 질주한다. 우리가 보는 그들은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이고 불결하고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는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 격리시켜야 한다, 우리의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들로부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아이가, 우리의 동생이 그럴 수 있고, 우리가 그랬을 수도 있다고, 그 아이들도 아픈 아이들이라고 가슴으로 공감해 주지 못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와 분리된 기이한 외계의 침입자들이 아니다. 우리가 차마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가장 아픈 자화상이다. 김영하는 그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독자가 느끼는 감동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 엇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마처 부차적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십대는 외국인 불법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이었다. 최저 시급을 받고 비천한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p.164

 

김영하는 이러한 아이들에 대한 공감과 이 아이들을 막다른 곳으로 내모는 기성세대의 '폭력'에 대하여 통찰한다. 최근 일어난 대구 중학생의 자살 사건도 갑자기 사회가 주목하기 시작한 아이들의 폭력성은 소름끼치게 어른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심지어 아이들의 폭력 서클은 어른들의 폭력 조직의 사주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계속 아이들의 이너 서클에서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꼬마 괴물들을 키워 놓은 것은 정작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외면하려 한다. 작가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폭주족을 단속하는 박승태 경위를 보여 준 것은 그런 우리의 의도적인 외면이 사실은 툭 치면 무너질 허방과 다름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게다. 박승태는 합법적 공권력의 전위 부대다. 그 공권력은 일의 전후 사정과 사람의 삶을 묻지 않는다. 박승태는 소년 시절 캠프 지도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자신을 게이로 규정짓게 된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더 이상 두들겨패거나 죽일 수가 없었다."는 그의 얘기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덮어버린 과거가 어떻게 또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표본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는 동규의 이야기를 받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시키는 소설가의 시선으로 바뀐다. 거리에서 열일곱이 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니까 자꾸 대화를 하자고 한다고 했던 아이들의 눈물. 이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자꾸 아연해지며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다. 모든 상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외면하지 말라는 이야기. 그것도 내것이니까. 충분히 아파하라는 이야기. 외면당했던 고통이 웅크린 몸을 펴고 가만히 걸어 나온다. 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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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아직 글을 묵직하게 잘 쓴 작가라기 보다는
판을 잘 짜는 작가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어요.
좋은 스토리텔러라고나 할까? 대충 제 생각은 그래요.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ㅋㅋ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영하와 김연수의 조합이면 완벽할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 2012-03-0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다섯!

요즘 쏟아져나오는 한국소설들 중에서 궁금했던 책은 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리]뿐이었는데 말입니다(체험판을 다운받아 아이폰에 저장해 두었어요 :-)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소설이라는 것도 잊고 한국 현대 소설에 이렇게 몰입하기는 최근들어 처음이랍니다.

이진 2012-03-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멋져요.
저는 무턱대고 한 작가를 읽기보다는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그 작가의 스토리 개연성을 찾아보는 편인데 그래서 이 책은 피하고 "검은꽃"이라는 책을 선물받았어요. 김영하를 만나기가 두근두근 댑니다 ..후

blanca 2012-03-08 22:34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읽으면 더 많이 공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십대의 이야기니까요. 저는 나와바리가 무언가 했다니까요^^;;

비로그인 2012-03-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좋지 않은 것일까요?
폭력이 되면 그것이 나쁜 것일까.
구원이 되면 그것이 좋은 것일까.
들어주면, 그것이 다행일까.
듣지 않으면, 그것은 다행이 아닐까.
무엇을 듣고 무엇을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블랑카 님의 글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03-08 22:3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그 어떤 대안이나 해답 없이 그냥 가장 아픈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물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닌 것 같아요. 읽고 나니까 삶이란 참 아픈 것이로구나, 어리든, 젊든, 나이 들었든, 이해란 참 먼 것이로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그래서 가슴이 참 스산했어요.
 

라디오 예약녹음을 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아이가 서랍에서 굴러다니던 MP3를 꺼내었다. 아이리버, 나의 것이었던 것 같은데 연애 시절 남편에게 빌려줬다 결혼해서 돌아온 그 MP3. 아니 남편이 선물로 주었던 것을 자기가 다시 빌려달라라고 했던 것도 같고. 여하튼 죽어 있는 고물 같은 투박한 그것에 재미삼아 건전지를 넣으니 예상외로 전원이 들어왔다.

 

아이폰에게 이어폰을 빌려 음악을 들으니 세상에나, 예전 음악들이 고스란히 들려온다. 낯선 노래도 있다. 김동욱의 "떠나가 버렸네" 지금의 JK김동욱의 허스키한 음성이 아니라 그냥 깔끔하고 잔잔한 다른 남성 가수의 목소리이니 동명이인인가 싶기도 하고. 내처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작동법을 더듬어 가며 예전 흔적들을 더듬는다. 머라이어 캐리의 "Hero"도 있다. 재수 시절 책상이 앞 뒤로 빽빽이 줄 지어 있어 그저 내 자리에서 몸통 한번 돌려 뒤에 앉았던 친구들과 얘기하는 게 인간관계의 전부였던 그 시간 아침에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뮤직 비디오의 가사는 정말 "다시 한번!"을 외치게 만들어 주었다.

 

잠깐 추억에 젖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리 이리 누르고 저리 눌러봐도 라디오 예약녹음 기능을 찾을 수가 없다. 분명 무언가를 열심히 예약 녹음해서 공부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인터넷에 찾아 보니 지식인은 2004년으로 돌아가 있다. 아, 이 제품이 그 때 나왔었구나. 컴퓨터에서도 과거의 질문과 답들은 마치 현재의 것처럼 살아 움직인 채 고스란히 안겨 있었다. 일단 타이머로 들어가 현재 시간 설정을 해야 한단다. 들어가 보자. 역시나 2004년으로 되어 있다.

 

2004년.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지냈을까. 아무리 더듬어 봐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다. 열여섯 살 윤진이와 시장통을 헤매며 가사 시간에 만들 치맛감을 끊었던 일은 엊그제 같이 생생하고 그 때 진이와 나누었던 그 따뜻한 공기들은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도 훨씬 지금과 가까운 2004년은 일부러 나이를 계산해 보고 되짚어 보지 않으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를 재우며 복기해 보니 알 것도 같은 시간. 인사 이동을 해서 한창 또 손에 익지 않은 일로 괴로워하고 책을 읽을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었던 나날들. 그 시간들은 기억의 바닥에 가라앉으려 아우성이었나 보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추억으로 갈무리 해두고 싶지도 않아서 그렇게 망각 속에 묻혀 버렸나. 뜬금없이 회사 앞 골뱅이 집에서 두툼한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어서 열심히 비벼 먹었던 기억 정도가 났다. 한심하고도 서글픈 노릇이다.

 

그는 남자 노인 30명에게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반드시 그 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 다섯 가지를 해보라고 말했다. <중략> 노인들이 들려준 기억들 중에는 열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기억이 쉰 살에서 여든 살 사이의 기억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다우베 드라이스마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서

 

 

 

 

스무 살 때보다 서른 살이 되고나서 또 그 중반이 되고 나서 기억은 자꾸 후진한다. 이게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게 더 놀랍다. 그리고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도.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회상 현상에 관련된 세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하나는 이십대 때의 기억력. 두 번째는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사이에 사람들이 대개 기억할 만한 일을 많이 경험한다는 사실,  세 번째 이론은 어린 시절과 성인기 초기에 사람들이 성격 형성과 정체감 확립에 영향을 미치고 인생행로의 지침이 되어주는 일을 겪는다는 것.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추억할 일들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얘기. 그러고 보면 나이드신 분들은 주로 최근의 일보다 아주 예전의 일들을 얘기하시기를 즐긴다. 자기 전에 내가 떠올리는 일들도 현실의 자질구레한 고민들을 제외하면 이십 년 정도 후진하여 좋았던 시간들이다. 앞으로 가면서 자꾸 더 먼 곳을 뒤돌아 보게 된다는 건 인생이 가지는 기본적인 아이러니일까.

 

가까스로 MP3 시간을 2012년 3월 3일로 리셋했다. 이게 제대로 작동해 줄 지는 의문이다. 2004년에 죽어 버린 녀석을 흔들어 깨워서 다시 8년만에 일어나 제 노릇을 다시 하라고 닥달하니 이 녀석이 앙탈을 부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일단 시험 삼아 내일 것을 예약녹음해 보고. 안 되면 또 그 때 가서 다시 대책을 강구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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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0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블랑카님께 페이퍼를 자주 좀 쓰시라고 닥달합니다.

blanca 2012-03-04 22:31   좋아요 0 | URL
^^ 맨날 쓰다가 임시저장 해놓고 안 올려서 그런가 봐요. 자꾸 써 버릇하면 또 쓰게 되고 안 써 버릇하면 또 그렇고. 습관의 힘이 무서운 것 같아요. 고마워요, 이 닥달^^

이진 2012-03-0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저도 다박방님과 함께 닥달을 해야겠군요...

blanca 2012-03-04 22:3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ㅋㅋ 저는 이 사진이 소이진님이 교복 입고 찍은 사진인 줄 알고 깜놀했었어요. 이렇게나 근사하다니, 하면서요 ㅋㅋ

이진 2012-03-05 19:26   좋아요 0 | URL
에이 ㅠㅠ 블랑카님 이러지 말아요... 제가 너무 초라해지잖아욧! 흑흑
내심 제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stella.K 2012-03-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점점 나이를 먹는지 자꾸 옛날 일만 기억나고 죽겠습니다.
근데 웃기는 건, 그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왜 그리
그리운 건지. 그나마 다행이죠. 추억이라도 좋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안 좋게 기억하고 있으면 지금의 저는 되게 안 좋은 모양새를 하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또 그래서일까요, 나이 먹는 게 점점 두려워집니다. 나이 먹어 잘 살 자신이 없어요. 흐흑~
아무튼 추억은 아름다워! 입니다.하하

blanca 2012-03-04 22: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그래요. 그 땐 죽을 것 같았는데 그 젊음은 참 그리워요. 저도 옛날 생각 자꾸 나서 죽겠어요. 할머니 되면 종일 호시절 타령만 하다 젊은이들 다 도망가면 어떡하죠? ㅋㅋ

마녀고양이 2012-03-0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방금 어떤 물건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나서 다시 가지러 가보니 없고, 제자리 와보니 있고
머 이런 반복이랍니다. ㅠㅠ. 기억력이 없어진단게 이런거구나 싶어져요.

나이들면 세월이 정말 빨라진다죠...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지,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져요. 그거...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나랑 블랑카님이랑 느끼는 시간이 다른걸~ ^^

blanca 2012-03-05 16: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미 이 증상이 시작되었답니다. 고유명사에는 완전 약해졌고요^^;; 아웅, 너무 빨라요. 옛날엔 계속 세월아, 가라!고 했는데 이제는 제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요.

cyrus 2012-03-0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년 전 MP3를 봤을 때 기분이 무척 새로웠을거 같아요. 타임캡슐 안에 귀중한 물건을 보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고 있다가 드디어 발견하게 된 기분이랑 비슷하다고 봐야 하나요? ^^;;


blanca 2012-03-05 16:13   좋아요 0 | URL
너무 신기했어요! 게다가 완벽하게 다 작동이 되더라고요. 라디오 예약녹음도 되고. 현재 시간이 2004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참 신기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