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지음, 이다희 옮김 / 섬앤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관습의 힘은 강고하다. 우리가 자라나고 살아나가고 내일을 상상하는 공간에 차곡차곡 쌓인 것들은 때로 발목을 붙잡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꿈꿀 수 있는 내일은 마치 위험한 반역 같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을 타협하고 굴복하고 견뎌 나간다. 용기는 나타와 안일, 생존까지 담보로 요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막에는 생리통이 너무 심해 똑바로 서지 못하면서도 염소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소녀가 있다. 그리고 아기를 낳자마자 천 조각처럼 바늘과 실로 봉해져야 하는 여자가 있다. 남편을 위해 질 입구를 단단히 조이고자 하는 것이다. 굶고 있는 열한 명의 자식들을 위하여 임신 9개월의 몸으로 먹을 것을 찾아 사막을 누비는 여자도 있다. 첫 아이 출산을 앞두었지만 여전히 질 입구가 막혀 있는 여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엄마처럼 홀로 사막으로 나가 아기를 낳으려고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불행히도, 나는 질문의 답변을 안다.
많은 여자들이 홀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운이 좋으면 독수리와 하이에나가 오기 전에 남편에게 발견될 것이다.
-p.335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할례를 받고 열세 살에 낙타 다섯 마리에 노인에게 시집을 보내려 한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나와 세계적인 모델이 된 입지전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둔중한 울림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은 어느 정도 극복한 고통일지라도 침묵 속에서 방관되고 있는 부당한 폭력과 고통에 대하여 용기있는 폭로를 했기 때문이다. 외모로 먹고 사는 것이 아직도 어색하다고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상치되는 지점에서 때로 양심적인 머뭇거림을 느끼는 이 여인은 어느 날 우연히 패션지 앞에서 봉인되어 왔던 부조리와 불합리의 소굴의 빗장을 열고 행동하는 양심이 된다. 외부 세계에서는 이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신체절제술에 대하여 왜 아직까지 집단적인 거부의 움직임이 없었는지 내부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겠지만 정작 그 속에서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며 면면이 살아 내려온 여자들은 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고 반역적인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여성 할례, 오늘날 이보다 적합한 용어로 말하자면 '여성성기절제술 FGM'은 아프리카내 28개국에서 지금도 크게 행해지고 있다. 유엔은 어림잡아 1억 3천만여 명의 여성들이 FGM을 받았으리고 추정한다. 적어도 2백만명이 매년 피해자가 될 위험을 안고 있는데 하루로 환산해 보면 6,000명이다. FGM은 대개 미개한 환경에서 산파나 마을의 나이 많은 여자에 의해서 마취없이 행해진다. 여자들의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수술에 사용하는데 그 중에는 면도날, 칼, 가위, 깨진 유리 조각, 날카로운 돌 등이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빨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략> 가장 심한 방법은 '봉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소말리아 여성의 80퍼센트에게 행해진다. 내가 당한 것이기도 하다. 봉쇄술을 받은 직후에는 쇼크나, 세균 감염, 요도나 항문의 손상, 흉터의 발생, 파상풍, 방광염, 패혈증, HIV 감염, B형 간염 등의 증세나 합병증이 올 수 있다.
-P.343
와리스 디리는 다섯 살에 받은 이 봉쇄술로 인하여 생리혈이 고여 생리 기간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통에 허덕이게 된다. 영국에 와서도 그녀는 이 신체의 부끄러운 비밀과 이해받지 못할 고통으로 인하여 남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이 자신을 좀먹게 내버려두지 않고 의사 앞에 나아가 상처를 공개하고 그 상처를 치료하고 사랑에 빠지고 마마가 되고 자신이 얻은 명성에 기대어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아직 이 고통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소녀들을 구하기 위하여 용기있는 걸음을 내딛는다. 그렇다면 이 '사막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인 앞에서 모든 아프리카적인 것들은 부정되고 있을까. 이렇게 잔인하고 미개한 관습을 전수하고 전수받고 꽁꽁 봉인한 채 부족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며 자신들이 먹을 것조차 외부의 원조에 기대야 하는 사람들의 나라.
매일. 나는 내가 소말리아 사람임이 자랑스럽고, 조국이 자랑스럽다. <중략> 할례의 경험을 제외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 어느 누구의 어린 시절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나는 삶을 체득했다.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의 삶이었다. TV에 나오는 남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그런 인위적인 삶이 아니었다.
-P.347
르 클레지오는 소설 <아프리카인>에서 "아프리카, 그것은 얼굴이기보다는 몸이었다. 감각의 폭력이자 욕구의 폭력이었으며, 계절의 폭력이었다."고 증언했었다. 그렇다. 나는 와리스의 "그것은 실제의 삶이었다"는 얘기 앞에서 갑자기 망연해져버렸다. 나는 과연 실제의 삶을 체득한 적이 있었던 가. 먹는 것, 마시는 것, 자는 것, 사랑하는 것, 우정을 나누는 것. 나는, 우리는 어느새 남의 인생을 지켜보며 그것이 마치 내가 사는 삶인 것처럼 소비하며 대리 만족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와리스는 아직도 자신의 나이가 정확히 얼마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아프리카적 시간 관념 안에서 산다고 한다. 언제나 물을 찾아 헤매는 생활이었기에 지금도 물을 보면 마냥 기쁘고 소중하다고 했다. 젖먹던 힘까지 내어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했기에 내일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회상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저만치 뒤로 하고 달려야 했던 삶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가 잊고 살았던 생에 대한 온전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슬몃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여자의 충절은 야만적인 관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얻어야 하는 것을 안다."는 와리스 디리의 고백은 할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생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아프리카의 가장 잔인하고 미개한 폭력의 응축체 같은 할례 앞에서도 생명이란 선물에 경탄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때로 폭력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곳으로 비하되는 세상이 아름다운 별이 태어난 곳임을 기억하게 한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사람만이 그 별을 볼 수 있다. 분명 이 지구별은 너무 슬프지만 아름다운 놓고 싶지 않은 작은 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