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환자실 앞 면회 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분투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는 그 시간, 6층의 분만실에서는 진통중이던 산모가 더 이상 자심한 고통은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새 생명은 의도하지 않은 채 세상을 향해 밀려 내려 온다.

 

 

오로지 태어나는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테르툴리아누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채 이 어둑시근한 제사를 통하여 김영하의 이 책에 들어갔다. 이 책이 십대 폭주족 아이들에 대한 얘기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랬을까? 때로는 자신이 읽기 시작하게 된 책이 다루는 소재조차 모르는 채 그 책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편견도 단견도 자만심도 허영심도 잠시 내려 놓은 채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도 있는 유일한 시간이 허락될 지도 모르니까.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다. 그것부터가 이상하다. 그러나 시작이니까 아직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다.
-p.7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 시작이 아닌 것처럼 위장한다. 이 마술의 관람자가 되어 마음을 졸이다 보면 1장은 그 다음부터임을 알게 된다. 그 밧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도 실패한 마술로 피범벅이 되어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으로 그를 알아주겠다는 일념으로 밧줄이 흔들거려도 잠시 다리를 꼬아 지지하며 버티어 본다. 참고로 그가 쓴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생채기를 그어대고 이렇게 그 생채기를 따갑게 젖혀 놓는 이야기는 언제나 읽는다는 행위를 거룩하게도 진저리나게도 한다.

 

그리고 귓가에 아직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힘겹게 쇼핑카트를 밀며 고속버스터미널로 들어가 혼자 아이를 낳는 장면을 참아내야 드디어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다. 작가는 아이가 나오는 순간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이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순간 살이 살을 낳는다. 생이 생을 끌고 들어온다. 그렇게 낳은 아이, 제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아니 그 제이와 함께 성장하며 이 이야기의 화자가 되는 동규가 제이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나가게 된다. 십대 미혼모의 몸에서 태어나 룸살롱 주방에서 일하는 돼지엄마에게 키워지고 또 버려지는 제이의 십대는 부모의 불화로 해체되는 가정에서 자라다 결국 집을 나오는 동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둘은 결국 폭주족의 리더와 일원으로 다시 함께 하게 된다.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p.73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p.133

 

제이에게는 타인의, 사물의, 고통을 감지하는 예민한 센서가 있다. 동규가 얘기했듯이 제이는 세상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고통 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처절하게 아파야 하는 고통, 폭력에 유린당하는 고통에 제이는 슬퍼하고 분개한다. 여기에 가난한 십대가 있다. 가스통을 지고 피자를 배달하고 때로는 어른의 성적 유희 대상이 되고 그 돈으로 다시 피자를 사먹고 게임을 하고 같은 십대를 성적으로 희롱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세상을 질주한다. 우리가 보는 그들은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이고 불결하고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는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 격리시켜야 한다, 우리의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들로부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아이가, 우리의 동생이 그럴 수 있고, 우리가 그랬을 수도 있다고, 그 아이들도 아픈 아이들이라고 가슴으로 공감해 주지 못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와 분리된 기이한 외계의 침입자들이 아니다. 우리가 차마 들여다 보고 싶지 않은 가장 아픈 자화상이다. 김영하는 그 아이들과 시선을 맞추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독자가 느끼는 감동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 엇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마처 부차적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십대는 외국인 불법체류자와 비슷한 급의 천민이었다. 최저 시급을 받고 비천한 대접을 감수하면서도 항변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p.164

 

김영하는 이러한 아이들에 대한 공감과 이 아이들을 막다른 곳으로 내모는 기성세대의 '폭력'에 대하여 통찰한다. 최근 일어난 대구 중학생의 자살 사건도 갑자기 사회가 주목하기 시작한 아이들의 폭력성은 소름끼치게 어른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심지어 아이들의 폭력 서클은 어른들의 폭력 조직의 사주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계속 아이들의 이너 서클에서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꼬마 괴물들을 키워 놓은 것은 정작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외면하려 한다. 작가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폭주족을 단속하는 박승태 경위를 보여 준 것은 그런 우리의 의도적인 외면이 사실은 툭 치면 무너질 허방과 다름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게다. 박승태는 합법적 공권력의 전위 부대다. 그 공권력은 일의 전후 사정과 사람의 삶을 묻지 않는다. 박승태는 소년 시절 캠프 지도교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자신을 게이로 규정짓게 된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더 이상 두들겨패거나 죽일 수가 없었다."는 그의 얘기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덮어버린 과거가 어떻게 또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표본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는 동규의 이야기를 받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시키는 소설가의 시선으로 바뀐다. 거리에서 열일곱이 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니까 자꾸 대화를 하자고 한다고 했던 아이들의 눈물. 이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자꾸 아연해지며 가슴 한켠이 뻐근해졌다. 모든 상처, 치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외면하지 말라는 이야기. 그것도 내것이니까. 충분히 아파하라는 이야기. 외면당했던 고통이 웅크린 몸을 펴고 가만히 걸어 나온다. 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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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아직 글을 묵직하게 잘 쓴 작가라기 보다는
판을 잘 짜는 작가라는 생각이 아직도 있어요.
좋은 스토리텔러라고나 할까? 대충 제 생각은 그래요.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ㅋㅋ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영하와 김연수의 조합이면 완벽할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 2012-03-0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다섯!

요즘 쏟아져나오는 한국소설들 중에서 궁금했던 책은 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리]뿐이었는데 말입니다(체험판을 다운받아 아이폰에 저장해 두었어요 :-)

blanca 2012-03-08 22:33   좋아요 0 | URL
저는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소설이라는 것도 잊고 한국 현대 소설에 이렇게 몰입하기는 최근들어 처음이랍니다.

이진 2012-03-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 멋져요.
저는 무턱대고 한 작가를 읽기보다는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그 작가의 스토리 개연성을 찾아보는 편인데 그래서 이 책은 피하고 "검은꽃"이라는 책을 선물받았어요. 김영하를 만나기가 두근두근 댑니다 ..후

blanca 2012-03-08 22:34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읽으면 더 많이 공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십대의 이야기니까요. 저는 나와바리가 무언가 했다니까요^^;;

비로그인 2012-03-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 좋은 것이고 어떤 것이 좋지 않은 것일까요?
폭력이 되면 그것이 나쁜 것일까.
구원이 되면 그것이 좋은 것일까.
들어주면, 그것이 다행일까.
듣지 않으면, 그것은 다행이 아닐까.
무엇을 듣고 무엇을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요, 블랑카 님의 글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

blanca 2012-03-08 22:3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그 어떤 대안이나 해답 없이 그냥 가장 아픈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물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닌 것 같아요. 읽고 나니까 삶이란 참 아픈 것이로구나, 어리든, 젊든, 나이 들었든, 이해란 참 먼 것이로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그래서 가슴이 참 스산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