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을 글쓰기에 활용할 때는 자칫 독자와 유의미한 접점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하며 공감을 얻으려면 그 이야기는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본질로의 천착과 외연으로의 확장의 균형점을 적절히 찾아야 할 것이다. 우울증에 25년간 시달린 박물학자 에마 미첼이 일 년 동안 집 주변의 숲속을 산책하며 만난 야생식물과 동물, 곤충을 수집하고 배열하여 사진찍고 그리고 기록한 이 관찰기는 그녀가 완벽하게 치유되었다는 과장된 결말을 제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있는 힐링의 여정을 제공해준다. 11월 6일 그녀는 숲속에서 산사나무와 가시자두와 화살나무와 들장미와 너도밤나무 가지를 주워 펼쳐놓고 사진을 찍어 이 책의 삽화를 만든다. 그 삽화를 들여다보는 나는 단 한번도 그러한 것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명명하며 관찰한 경험이 없어 어느 것이 어떠 이름에 대응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한참을 멈추어 그녀가 펼쳐놓은 색과 빛에 젖는다. 자연의 그 무수한 다양성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생존의 주기에 경탄하다 보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겪는 모든 고단한 것들도 결국 어떤 섭리에 귀의할 것임을 믿게 된다. 위로가 되는 아름다운 책이다.
















일본계 작가의 십 대 아들이 영국의 공립 학교에 진학하여 겪게 되는 계층과 인종의 긴장과 갈등의 성장기는 쉽게 읽히고 공감의 영역이 넓다. 특히 사춘기 아이를 기르는 부모라면 아이가 학교에서 겪게 되는 각종 갈등 상황에 저자인 엄마가 반응하는 공감어린 대화의 방식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을 것같다.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거하여 작동하여 결론적으로 위계를 만들어버린 영국의 교육 체계는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 학교와 저소득층이 다니는 공립학교가 연습하는 수영장 레인을 노골적으로 구분하여 운영하는 모습에 특히 놀랐다. 아이들 마음에서는 자연스럽게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장벽이 자리잡고 때로 그러한 낙인을 서로에게 붙여 도발하는 현장에 어른이 어떻게 현명하게 개입하는지에 대한 예시는 씁쓸한 한계를 노출한다. 평등과 자유가 어떻게 절충 지점을 찾아야 하는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현장에서부터 가장 사려 깊게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른들의 방관과 편견과 이기심이 어떻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 파고들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 같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혼란에 왠지 낯익은 묘사들은 기시감이 든다. 헤밍웨이는 쉽고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탁월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많은 단어나 복잡한 문장 구조를 쓰지 않고 툭툭 던지는 짧고 활력 있는 문체로 그 어떤 공간과 사건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그의 재주에 경탄스러웠다. 위대함이란 이렇게 태어나는 것같다. 배의 구조와 관련한 전문 단어들은 사실 잘 와닿지 않아 아쉬웠다. 한글 단어를 찾아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바다와 거대한 물고기를 상대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다 결국 다 잃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진 노인의 모습은 인간의 삶 자체의 은유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그러한 노인 곁에서 훌쩍이는 소년의 모습은 노인의 그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시도가 가지는 궁극적인 의미를 암시하는 듯하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사랑, 공감, 소통. 그리고 우정. 짧디짧은 책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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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09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지요?
아이들 학교 안 가니까 많이 힘드시겠지만요~.^^;;
˝개인적인 체험을 글쓰기에 활용할 때는 자칫 독자와 유의미한 접점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하며 공감을 얻으려면 그 이야기는 내면으로의 침잠이 아니라 본질로의 천착과 외연으로의 확장의 균형점을 적절히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 읽고 반성합니다. 딱 저에게 해당되는;;;;
하지만 저처럼 글을 잘 못쓰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오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구요.^^;;;
글을 쓰다보면 블랑카 님처럼 잘 쓰게 될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요???응??^^;;;;
좋은 글 잘 읽었어요!^^

blanca 2020-04-09 09:21   좋아요 0 | URL
아이들도 이제 두 달째에 접어드니 점점 지겨워지는 것 같아요. 오월이라도 개학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게다가 온라인 개학이 여기는 처음이라 그런지 버벅대고 시행착오가 많아서 여러가지로 어려워요. 미국도 빨리 진정되고 빨리 전세계적으로 확 사그라들어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에잇, 라로님 이건 저한테 하는 이야기였는데요? 한국은 지금 봄이 한창이라 이 상황이 더욱 실감이 안 납니다. 다만 갑자기 미세먼지가 확 사라져서 실감해요. 작년 이맘때 미세먼지 대단했었거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이 시간 잘 이겨내기를 바라요.
 
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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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문학 책이나 사회과학 서적과는 친하지 않은 편인데 이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핑크빛 책자에 반해 버렸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연구하는 프랑스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의 형사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일종의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적절하게 진지하고 적당하게 가벼운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한 책이라 쉽게 읽히면서 역사가가 아카이브와 역사, 사회적 현상, 심지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에 대하여 많은 알찬 앎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아스날 도서관의 사료를 찾으러 가는 저자의 풍경이 마치 단편처럼 묘사되어 있는 부분도 흥미롭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현명할 수 있는 역사가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모처럼 풍요로운 읽기를 경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p.25


참으로 솔직한 발언이다. 그가 역사가라는 직업만 아니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18세기의 어마어마한 아카이브의 바다에 질식할 듯이 익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방대한 자료의 양에 질리고 그 자료를 해독하며 의미를 끌어올리는 과정은 21세기의 첨단 기술과 멀어 보인다. 아무 의미없고 성과 없는 무용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도 비켜 가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의 좌절은 눈부신 통찰로 이어진다.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착각,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실을 보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착각을 깨뜨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진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경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왜곡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명령과 그럼에도 진실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 사이에 난 길은 좁은 길일 때가 많다.

p.118


사람에게는 그가 구태여 학자나 저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각, 느낌, 이론을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 진실이 핵심이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때로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보편적 진실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진실을 버리지 않는 길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사수해야 하는 절대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진다. 저자는 그 지점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언어로 낚는다. 모호하고 애매했던 지점들이 이 이야기 안에서는 맑고 투명하게 떠오른다. 역사가의 개인적인 아카이브가 보편적인 대중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수하거나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누구나 이 역사가의 아카이브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저마다의 깨달음의 순간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함부로 단언하고 합리화했던 순간들에 대한 성찰의 도정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인식, 나의 해석, 나의 판단의 오류를 점검할 수 있다. 


바스티유 감옥 안의 남자는 아내에게 헝겊에 편지를 써서 빨랫감 사이에 숨긴다.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그 편지의 수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동원한 절차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뭉클하다. 남자는 감옥의 빨래하는 여자에게 만약 편지가 아내에게 잘 전달되면 부디 양말을 빤 뒤 파란 실로 아주 작은 십자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십자가는 끝내 남지 않았으므로 그 편지는 아내에게 가 닿지 않았다는 추정을 하는 아를레트 파르주의 해석은 지극히 개별적이지만 이 무명의 남자가 아내에게 전하려고 했던 간곡한 메시지의 무게를 헤아리는 연민이다. 그의 아카이브 안의 사연들은 시대와 장소의 경계를 훌쩍 넘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와 닿는다. 우리 모두 어려운 순간에도 반드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간절하게 상대에게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이 좌절되더라고 그 마음만은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후세대에 이러한 것을 헤아려 줄 누군가가 우리의 그 잃어버린 소망을 짐작해 줄 것이다. 역사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라는 방증 같은 책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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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20-04-02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한테 올 책들 중 한 권인데, 리뷰를 읽고 이 책부터 읽어야지 생각했어요. 추천 꾹. :)

blanca 2020-04-02 18:31   좋아요 0 | URL
와, 찌찌뿡이네요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랜만이에요, 302moon님.

2020-04-1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답답하고 불안한 나날들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2020년의 1사분기가 지나가고 있다. 외출도 약속도 교류도 수업도 없다. 전염병이란 걸린 자가 어떤 낙인을 부여 받기 쉽다. 동선은 때로 타인을 통해 내가 위협 받을 수도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경로가 되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이웃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 함께 타고 인사를 나누는 게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일처럼 보인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것이 배려가 된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참 이 시기와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칠백 페이지의 분량에 질려 그냥 읽지 말까 싶었다. 그런데 시작하자 마자 나도 모르게 그 칠백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모스크바의 호텔에 가택연금된 옛 제정 러시아의 백작의 이야기는 9평 남짓의 방에서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예시를 보여준다. 호텔 바깥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종신형을 받은 로스토프 백작이 그 호텔 안의 종업원들과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고 낳지도 않은 딸을 키워서 어엿한 피아니스트로 세상에 내어 보내는 과정은 묘하게 담담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우아하지만 가라앉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유쾌하다. 백작이라고 내도록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는 한때 호텔 옥상에서 투신하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잡역부는 달콤한 벌꿀을 나누어 줌으로써 백작을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건져낸다. 거창하거나 현학적인 철학 대신 근면하고 소박한 노동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그가 직접 수확한 당밀을 나누어 먹으며 생의 의지를 다시 재확인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계기는 이러한 평범한 일상의 번득이는 아름다운 순간을 재확인함으로써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이 시기의 금언으로 간직하고 싶다.
















번역되기를 고대했는데 실제 신간에 떠서 깜짝 놀랐다. 딘 쿤츠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실제 코로나19에 대한 예언적인 부분이 나온다고 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우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갑론을박이라 확인해봐야겠다. 꼭 그 대목 아니더라도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해보고 싶었는데 기대가 크다. 소설이 경제, 정치 분야의 전망보다 미래를 더 정확히 전망할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주 안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현실화할 무한한 힘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때로 입밖으로 내어 이야기되는 순간 실현 가능성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좀 불안해 질 때가 있다. 카뮈의 <페스트>는 그런 면에서 섬찟하다. 카뮈는 인간들에게 그 끔찍한 질병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얘기하며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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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3-28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는 사놓고 못 읽었는데 책무더기 중 아래에 깔려있(다고 추정되)어서 찾기도 만만찮-_-;;;;;;;;;;;;;
하여간;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저도 언젠가 읽으리라 희망합니다^^ 딘 쿤츠 궁금해요. 블랑카님 서평 기대합니당^^

blanca 2020-03-28 19:50   좋아요 0 | URL
두꺼워서 저도 처음에는 좀 읽기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런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냥 술술 넘어간답니다. 이 작가의 다음 책도 기대됩니다. 아, 저 딘 쿤츠 책도 정말 기다렸는데 출간일이 무려 4월 12일이라 좀더 기다려야 될 듯해요. 이건 원서조차도 잘 없더라고요. 여튼 읽고 사고 싶은 책은 쌓여만 갑니다.
 

즐겨찾는 유튜버 중 '편집자K'가 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이의 충만한 느낌이 좋다. 특히나 그녀가 직접 출간에 참여한 책을 소개할 때는 여지없이 영업당한다. 이 책이 그러했다.















시인 박연준(남자인줄)의 산문집. 향긋한 티백과 함께 받아 그 티와 함께 읽었다. 시인이니 만큼 단정하고 정제된 문장들이 촘촘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좋아 다시 돌아가 읽었다. 


생애의 모든 날을 그러모아 '평생'이라 부른다면 빛나는 날은 기껏해야 며칠, 길어야 몇 주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이전에 나는 가능한 한 찬란한 날만 골라 서 있고 싶었다. 특별한 날은 특별해서 , 평범한 날은 평범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해와 달이 하나씩 있고, 내가 나로 오롯이 서 있는 하루. 

-박연준 <모월모일>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러한 문장에 담아 표현하는 건 시인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 같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 느낌이 시인의 문장으로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한 그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조그맣고 딱딱한, 붉은 간처럼 생긴 슬픔>은 시인의 일곱 살의 슬픔을 애도한 글이지만 동시에 내가 잊어버렸던 그 유년의 상처를 떠올리게 했던 지점이기도 해서 먹먹했다. 같은 시인이기도 한 남편과의 소소한 일상, 서로에 대한 애정, 자잘한 다툼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잔잔하게 공명한다. 공통의 관심사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반려자와 함께 하는 생활에 대한 문장들이 사계를 통과하며 절로 저자와 그들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가 읽어도 공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날들에 대한 사려깊은 이야기다. 표지의 핑크빛 투명한 비누의 사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슬며시 핸드폰 배경화면을 비슷한 것으로 바꿨다. 


잔잔해도 생에 대한 에너지와 여전한 열정, 애정의 흔적이 분분하는 이 책과 달리 노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쓸쓸하다. 이질적이기도 하고 중년이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그러한 날들을 예비해야 한다는 자각은 스산하다. 
















역시 시인의 에세이다. 도널드 홀이라는는 미국의 계관시인 칭호를 받은 팔십 대의 시인이 이야기하는 노년에 대한 삽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떠났고 기동력을 줬던 운전대는 잦은 사고로 인해 놓은 상태이다. 한 마디로 원하는 곳에 가려면 반드시 동행해서 도와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게 된 상황이다. 


나는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더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

-도널드 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내 몫의 원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마 중년 이후부터 이미 시작되는 흐름일 것이다. 청춘이 확장의 절정이라면 중년은 이미 그곳에서 서서히 하강 곡선을 타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연령대다. 잘 늙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너그럽기는 쉽지만 이제 가진 것조차 서서히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수시로 느껴야 하는 시점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려면 인위적인 노력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살 곳이 자기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수긍하고 배려한다는 행위도 그러하다.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 생태계를 고려하는 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 지구를 결국 떠날 것임을 머리로라도 받아들여야 가능한 얘기다. 노시인은 심지어 시를 쓰는 동력과 활력도 하강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시는 그를 떠나버렸다. "시가 나를 버렸다"는 겸허한 고백이 저릿하다. 이제 그는 서서히 소멸을 향해 망각을 향해 저항하지 않고 걸어간다. 그 도정에 관한 이야기가 쓸쓸하다.


두 시인의 에세이가 채운 이틀, 약국 앞에 선 긴 줄에서 이름 모를 아저씨가 마스크를 가득 담은 상자를 실어오는 소리에 반가운 손님 맞듯 다 같이 웅성거렸던 날들과도 겹친다. 여전히 모르고 알아야 할 것 투성이인 '모월모일'들이 봄과 함께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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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1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책 나온 거 보고 브랑카님 생각했는데. 딱 맞혔네요! ㅋㅋ
박연준 시인 장석주 작가의 아내인 줄 알고 있습니다.
무가지 <예스채널>에 글 연재하던데 잘 쓰더군요.
아직 책은 못 읽어 봤습니다.^^

blanca 2020-03-18 20:44   좋아요 0 | URL
오, 스텔라님 예리하셔라. ^^ 아, 저는 시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잘 몰랐어요. 시인들이 대체로 산문도 참 잘 쓰더라고요.

다락방 2020-03-18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2391039

위에 스텔라님이 적어주셨는데, 박연준 시인의 남편이 장석주 시인이고요. 둘은 결혼하면서 결혼식대신 같이 책을 냈어요. ‘우리가 결혼한다‘는 걸 책으로 알린 셈이죠. 그 책이 제가 링크 드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입니다. 두 시인의 글이 같이 실려있어요. 저는 어쩌다보니 박연준 시인의 책 대부분을 읽었는데,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제 경우엔 딱히 좋진 않았어요.

blanca 2020-03-18 20:4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다락방님은 시에도 전문가이니 딱 아시는군요. 저는 이름만 듣고는 남자 시인이라 생각했어요. ^^;; 아, 링크 따라가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moonnight 2020-03-19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떤 책을 읽고 장석주 작가에게 정이 좀 떨어져서=_= 그와 결혼한 박연준 시인에겐 뭐랄까 안쓰러움이 들어요. 주제넘게도 말이죠. 쿨럭.
이 책은 출간소식 듣고 관심 갔는데 아직 사진 않았네요. 블랑카님 좋다 하시니 구매해야겠어요. 도널드 홀 책이랑 함께용^^

blanca 2020-03-19 08:44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럴 수 있죠, 저도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여자 아나운서랑 갑론을박 벌이는 쇼 보고 어제 정나미가 뚝 떨어졌어요. 아, 요새는 또 다들 왜 이렇게 책을 예쁘게 만들죠? 완전 소장각이랍니다.

유부만두 2020-03-20 08:17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비슷한 이유로 박연준 시인의 글을 찾아 읽진 않았네요. 쿨럭.

표지에 혹한 사람에 저도 있습니다. 향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표지에요.


단발머리 2020-03-19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널드 홀의 인용해주신 문장 너무 좋네요. 늙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는 받아들여지는데 전 아직도 늙어가는 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거부감이 들어요. 블랑카님의 차분한 글을 읽을 때 그래도 그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잘 읽고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블랑카님^^

blanca 2020-03-20 07:44   좋아요 0 | URL
어제 문득 거울을 보고 또 놀랐답니다. 정말 나이들어가는 자신의 외형에 특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냥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순리와 타협해가는 것이겠지요. 커가는 아이들 모습도 너무 아쉬워요. 다섯 살 적 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얘기를 이해 못했는데 꼭 한번만 다섯 살적 아이들을 불러와 꼭 안아주고 싶어요. 흑, 눈물나요.
 

트루먼 커포티는 대단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유명인들과 밤새 파티를 즐겼던 사생활면뿐 아니라 작품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자신의 유년이 강력하게 투영된 <풀잎하프> 같은 작품은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반면 일가족 살인마를 직접 밀접한 거리에서 취재하고 쓴 <인 콜드 블러드> 같은 르포르타쥬 성격의 작품은 사실적인 문장들이 섬뜩할 정도이다. 인간은 누구나 쉽게 드러내기 힘든 욕망과 타인에 대한 적의, 대의와 이상에 헌신하고자 하는 선의가 뒤섞여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작가에게서는 그러한 측면이 유달리 더 대조적으로 드러난 것 같다. 그는 친구들과 이웃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동했던 순수한 소년의 마음과 사회의 통념, 경직된 판단의 도덕률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자신의 작품 안에서 그만의 탁월한 기교로 화해시켰다.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 먼로와 친했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공유한 둘은 유년기의 단짝 친구들처럼 교감했다. 실제 그는 한 노배우의 장례식장에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참석하고 보낸 시간을 <Beautiful Child>에 생생하게 그려냈다. 선글라스와 스카프로 무장한 마릴린 먼로가 립스틱을 바르며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넔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와 마릴린 먼로가 독설가인 트루먼 커포티가 마릴린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지를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묻는 모습은 대중에게 비춰진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사랑스러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트루먼 커포티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아름다운 해변의 일몰과 먼로가 그 풍경 속에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마치 그녀의 슬픈 최후를 암시하듯  처연하게 그려낸다. 끝까지 먼로는 커포티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해 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사람들이 "마릴린 먼로 어때? 걔 어떤 애야?"라고 묻는다면


"정말 아름다운 아이야. "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맺는다. 이미 다 커버린 그녀를 아이라고 호칭한 커포티의 마음이 제대로 된 집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 그녀의 모습과 겹치며 아릿하다. 둘은 많은 상처를 품은 유년을 공유한 채 대중과 세상의 주목과 가차없는 비판의 목소리에 노출되는 고통의 지점에서 만났다. 상처를 보듬어 줄 부모가 부재했던 유년을 커포티는 자신만의 방식인 글쓰기로 마릴린에게도 자신에게도 치유해주는 체험을 보여준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또한 그러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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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11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란 게 다 커도 쓰이긴 하더군요.
같은 동년배나 후배를 3인칭으로 지칭할 때도 쓰게 되더라구요.ㅎㅎ
커포티와 먼로가 가까운 사이였군요.
이 사람의 책도 읽어주긴 해야할 텐데 손때나 묻혀 볼지 모르겠습니다.ㅠ

blanca 2020-03-12 08:58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얘기 들으니 우리말도 그런 표현을 종종 쓰네요. 맞아요. ^^ 언젠가 인연이 있겠죠. 책도 작가도 인연과 때가 있어야 만나게 되더라고요.

유부만두 2020-03-20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루먼 카포티는 여기 저기에서 일화로 자주 접했는데요, 아직 읽진 못했어요.

blanca 2020-03-23 12:18   좋아요 1 | URL
언제 기회 되면 <풀잎 하프>부터 시작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