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오지도 가지도 않을 것 같았던 2019년도 이제 한 달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제 2020년이 온다. 여전히 읽고 썼다. 기억은 희미하고 기록은 남는다,는 이야기가 맞다. 그래서 또 남긴다.



리처드 플래너건이 하는 전쟁 포로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의 증언과 죽음과 맞물려 있다고 한다.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고 과거형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인간의 의지를 압도할 때 그럼에도 남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여운이 길다. 감히 앉아서 읽기에 황송했던 책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그가 얘기하는 한국인 경비병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분명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깨달음이 전해져 왔다.









연령과 인습과 상식을 뛰어 넘는 사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어떤 개인적 편견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작가의 성취일 것이다. 구태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수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저력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책은 죽지 않았고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 억지로 쥐어짜지 않고 나오는 삶들의 형상화에 절로 경탄하게 되는 이야기들.










자신이 속물이라고 어렵게 고백하는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그것을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감히 그 화자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작가의 자전적인 성장기는 소년이 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짙은 호소력을 지닌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소년의 삶은 그 틈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조언은 깊은 울림을 가진다. 전체를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과연 어떻게 그 전장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충고는 공허하지 않고 가식적이지 않다. 그 자신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 연마한 것들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제목이 가지는 것 이상의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 힘들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뻔한 책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벼운 책도 아니다. 요리의 노하우도 걷기의 노하우도 심지어 삶의 노하우도 있다. 하정우는 분명 뭔가를 겪었고 알고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이자 작가라고 생각한다. 빌려 읽지 말고 사서 읽으시기를...












너무 우울하거나 힘들 때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다. 모든 허식과 망상과 환상이 일순간에 타격되고 적나라한 인간의 두려움과 삶의 허약함이 일순간 드러나면 한없이 공허해지고 두려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이 가져오는 그 폭력성과 무자비한 무의미를 직시한다는 것은 의식이 있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비극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대면하며 토로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가 끄달리던 숱한 그 사소한 번뇌, 집착이 얼마나 가볍고 추악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심연의 끝에 가닿게 만드는 책.









그리고 2020년의 읽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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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4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처드 플래니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포로가 아니라 포로 감시원
이지 싶습니다.

blanca 2019-12-04 14:02   좋아요 0 | URL
헉, 경비병입니다. 감사해요. 수정하겠습니다.
 

사십 대에는 사십 대의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이십 대에는 이십 대만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 어떤 연령대를 통과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안에 있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육십 대의, 이만 여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병리학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와 깊이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리처드 셰퍼드는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일을 하는 영국의 법의학자다. 아홉 살에 생모를 잃고 어머니의 역할까지 함께 그러안은 아버지의 양육 아래 그가 법의병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친구가 학교에 갖고 온 [심슨 법의학]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된 알렉산더 포프의 <비평론>의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그의 안치소에서, 법정에서 하나의 금언이 된다. 여러 죽음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비인간성을 대면하게 되는 에피소드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결국 진실의 힘과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할 용기다. 죽음이 만연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페르소나를 다시 재창조해내어야 하는 그 간극의 어려움에 대한 표현도 진솔하다. 셰퍼드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한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런 생활에 어떻게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삶 자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가 이야기하는 그 숱한 죽음들에서 진실의 체를 거르는 일과 더불어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학습된다. 비단 죽음 뿐 아니라 그것과 교차되는 그의 생애의 내레이션의 교훈 또한 여운이 길다. 종반부에 그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통과하는 여정의 그 생생한 고통은 읽는 이에게도 전해져 올 정도로 절절하다. 그가 속한 학계와 사회의 변화와 그 자신의 노화, 삶의 경로의 전환,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간 죽음들의 진실들의 귀환은 긴밀하게 서로 얽혀 이야기의 현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그는 이 책이 하나의 치유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투병을 고백하면서 그가 객관화했던 죽음들은 공포나 환멸이 아니라 공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결국에는 종국의 안식으로 수렴한다. 때로 섬뜩하고 끔찍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화자의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그 비극성으로 마음을 산란하게 했지만 차갑지만 고요한 여운을 남긴다. 이 책 안에서 진실의 정의가 필요했던 미제의 살인 사건들은 결국 정의의 축으로 이동하여 안도를 준다. 그를 괴롭혔던 억울한 혐의들도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결국 그렇게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남겼던 그 숱한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삶과 죽음은 결국 만난다는 하나의 비장한 은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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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7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와 비슷한가, 싶어지네요. 저도 읽어볼게요.

blanca 2019-11-28 11:4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는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순간순간 섬뜩섬뜩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추리 단편 같아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3년에 시작해서

1914년에 마침.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E.M 포스터 <모리스>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지금까지 숱한 제사를 봤지만 포스터의 이 헌정이 최고인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바치는 <모리스>를 거의 단숨에 읽었다.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등장 인물들이 거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 그 선택의 반향, 열린 결말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어떤 판단 자체를 유보시킨다.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초래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은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은 실패했다. 사랑은 이따금 기쁨을 가져다주는 감정일 뿐이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p.330


모리스 쪽의 이야기다. 모리스는 그렇게 느낀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첫사랑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떠난다. 클라이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페르소나와 타협한다. 심지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모리스도 그런 식으로 살아주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어떤 꺼림칙한 잔여를 깨끗이 치워주기를 바란다. 모리스를 일깨운 쪽은 그인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모리스다. 모리스의 좌절과 모리스의 두려움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쩨쩨하다. 타협과 안주가 없으니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우리의 삶이 클라이브와 더 가깝다고 해서 그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포스터는 영리하게 포착한다. 모리스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렸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모리스는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p.348

포스터의 묘사는 눈부시다. 향기와 시각은 시간의 결을 넘나든다. 꺼져가는 꽃잎과 지는 청춘의 모습은 겹친다. 여전히 남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는지에 대한 몫은 읽는 이들의 것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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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14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블랑카님 벌써 읽으셨군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까요?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이 생각나네요. 그 책에서도 서로 사랑했던 남자 둘이 헤어져서 한 쪽은 나중에 커밍아웃하는 작가가 되지만 한쪽은 여자랑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거든요. 그리고 내내, 그 작가의 행보를 좇습니다.

blanca 2019-11-15 11:30   좋아요 0 | URL
포스터 자신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약력을 보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배신 당하고 이것에 반복이었더라고요. 다락방님 예랑 비슷하게 사랑했던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요.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애의 대부까지 서주고...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포스터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삶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하더라고요. 그냥 몇 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읽어도 가슴이 시려오는 그런 삶을 살았더라고요.
 

체육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던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삼십 대 중반이었다. 집앞 복지관 헬스센터의 트레이너 덕택이었다. 재미삼아 인바디를 측정했던 나의 체중 대비 지나치게 낮은 근육량에 승부욕이 발동한 (나의 추정이지만) 그녀는 거의 삼 일 동안 1:1 강습을 시작했다. 스쿼트, 런지, 부위별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각종 운동 기구의 사용법을 열정적으로 가르쳐줬다. 그 이후로 운동하는 여자가 되었다. 물론 각종 변명으로 중간중간 게으름을 피운 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운동 하고 난 후의 그 성취감과 몸의 상쾌함을 기억하기에 완전히 몸을 쉬는 일은 없게 되었다. 문제는 딱 너무 힘들 정도까지만 하고 그 이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이를테면 걷기도 육천 보를 걷게 되면 하루 운동량을 다 채웠다 가정하고 널브러져 있다. 근육 운동도 삼십오 분이 마지노선이다. 그러니 근육이 붙을 일은 없다. 근육이 붙기 직전에 나가떨어지니까. 그럴 때면 평생 몸을 주어진 연장이라 생각하고 갈고 닦은 하루키의 말도 생각나고 운동 하기 전의 그 저질 체력의 과거도 떠오른다.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들의 극기와 절제는 상상이상이다. 나에게 만 보는 언감생심이다. 나는 운동에 관한 타협과 자기 정당화에 능하다.



















그러나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충동은 절대 예술가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은 단 한순간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루에 단 하나의 점만 캔버스에 찍어나가도 10년이 지나면 나의 시간이 집적된 작품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단순한 비유지만, 나는 예술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p.120


하루에 만 보도 이만 보도 아닌, 삼만 보를 걷는다는 하정우의 이 책은 비단 걷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물론 고작 육천 보 걷고 나가떨어지는 나에게 지금 당장 나가 걷고 싶게 만드는 뿜뿌질은 확실히 해주지만 그가 배우로서 가지는 불안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일환으로서의 삶의 전반적인 자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미 충분히 내실과 인기를 동시에 확보한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 배우는 아직도 훨씬 더 훌륭해질 일이 남았구나, 싶을 정도로 신뢰가 간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환상이나 현실 부정이 없는 기반 아래 일상의 귀중함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어쩌다 한번씩 체감하긴 쉬워도 자기 삶의 주축이 되도록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정우는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 고통스러운 삶의 파도가 몰아치면 가장 힘든 것이 일상의 유지다. 밥술을 뜨는 것이 힘들어지고 자기 몸과 정서에 좋은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루틴에 기반한 삶 속에서 나아가야 하는 것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선을 넘어가는 것은 완전한 극복은 아닐지라도 그 고통을 적어도 회피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일이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 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중략>

루틴이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든 간에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다.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다. 

-p.165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는 말이 참 좋다. 너무 힘들다 여기면 운동도 읽기도 먹는 일도 때로 힘겨워진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고 걷고 읽어야 한다. 쓴다면 더 좋다. 일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몸을 일과처럼 만들며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며 기다린 배우의 마음이 응원이 된다. 이제 칠천 보는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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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09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루틴의 중요성을 요즘 새삼 실감하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9-11-09 10:03   좋아요 0 | URL
강추합니다.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가 많았어요. 빌려 읽었는데 살 걸 그랬어요...

moonnight 2019-11-09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살까 하다 잊고 있었는데 사야겠네요@_@

blanca 2019-11-10 08:23   좋아요 0 | URL
달밤님, 사세요. 사서 읽으면 좋은 책을 빌려 읽으면 흑 난감해진답니다. 사자니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고 그냥 보내자니 다 옮겨 적을 수도 없고...

방랑 2019-11-0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열심히 걷고 있어요. 단풍도 보고 운동할 겸 집 주변에 사찰도 가고요. 책 읽을까 고민했는데 사야겠네요

blanca 2019-11-10 08:25   좋아요 1 | URL
방랑님, 저는 작년까지 걷기를 정말 열심히 하다 요새는 이래저래 변명거리가 많아져 게으름 피우고 있었거든요. 하정우가 공항까지 걸어갔다,는 소문 ㅋㅋ을 듣고 사실일까 했는데 그 대목 읽고는 그냥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걷기는 몸뿐만 아니라 내면의 근육도 함께 키우는 일인 것 같아요. 다시 가열차게 해봐야겠다, 뭐 이런 새로운 결심이 서게 되는 책이랍니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그 혼돈의 연대기
론 파워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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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절대로 쓰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던 바로 그 책이다. 아내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했었다. 2005년 7월, 3년 동안 조현병에 시달리던 작은아들 케빈이 스물한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우리 집 지하실에서 스스로 목을 맨 뒤 10년 동안 나는 그 약속을 지켜왔다.

- 론 파워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머리말 중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왕왕 일어난다. 그것은 삶을 통과하는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이 그런 약속을 했던 나 자신조차도 때로 변화시키기 때문일 테고 그렇게 했던 결심 그 자체가 가치는 의미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 지극히 사적인 애통한 상실과 그 상실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천착한 보기 드문 책이 있다. 저널리스트 론 파워스에게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 딘과 케빈은 음악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보통 형제 이상의 교감과 연대감을 나누었다. 과학자인 어머니와 작가인 아버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연으로 부부가 된 낭만적인 사연을 가지고 영민하고 아름다운 형제를 버몬트의 동화 같은 풍광 속에서 키운다. 너무나 현실 같지 않은 빛나던 시간들은 비극적인 결말의 지점으로부터 돌아서 바라 본 지점에서 회고된다. 그 시간들의 마침표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왜 이러한 일을 이렇게밖에 겪을 수밖에 없었는 가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가지고 온다.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조현병도 함께 앓게 된다. 동생은 형과 함께 연주하던 시간을 눈물어린 추억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적인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과한다. 론 파워스의 경우 비단 조현병 뿐 아니라 광범위한 의미의 정신질환을 둘러싼 미국의 200년간의 역사의 개관을 활용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무력한 자들을 어떻게 가장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를 지향한 철저한 몰이해와 오판의 사례다. 정신질환의 범죄화가 바로 그것이다. 


'문명'사회가 그 사회에서 가장 무력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사례로 끝없이 채워져 있는 나의 파일은 그 자체로 대대적인 잔혹함에 관한 하나의 서사다.

-p.261


결국 정신질환자들은 병원보다 감옥을 더 많이 채우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낳았다. 이 안에서 애초에 받았어야 할 적절한 치료와 보호 대신 이들은 철저한 고립과 학대, 방임으로 더욱 망가진 상태로 세상 밖으로 내쳐진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것이 론 파워스의 결론이다. 적시의 진단, 적절한 개입, 인내심이 필요한 약물치료와 사회적 지지 대신 즉각적으로 손쉬운 교화, 분리 등을 택하는 사례는 그러나 용기 있는 이들에 의하여 재고되고 그 방향을 트는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의학적 진보는 질환에 대한 이해를 수반했고 이는 결국 이 책의 원제처럼(No one cares about crazy people)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개혁적인 움직임도 가지고 왔다. 명료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그 가름끈을 선악의 구도로 속단하지 말고 그러한 비극을 철저히 타인의 것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닌 공감어린 정책에 힘을 실어주자는 목소리는 저자 자신의 처절한 상실로 깊이 공명한다. 사적인 상실의 애도는 심오하게 깊어지고 확장되어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적인 시선으로까지 나아간다.


너무나 정상적이었던 그래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당연시하고 꿈꾸었던 한 가정이 어떻게 갑자기 몰아닥친 비극으로 흔들리고 그럼에도 그 상실을 딛고 또 다시 삶이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지금 여기에서 숨을 쉬고 생을 산다는 일의 그 엄중한 무게를 실감케 한다. 꽃길만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맨발로 때로 유리에 발을 베는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쌓는다. 그것을 개인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확장하려는 저자의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강고한 의지와 노력이 전해져 뭉클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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