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차마 드러내기 힘든 심연이 있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다. 대외적으로 인권을 존중하자며 정의를 부르짖으며 자기 부하 직원에게는 갑질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세상 없는 독실한 종교인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경우도 있다. 어릴 때는 사람을 단면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이었다. 내가 지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결한 사람이어야 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미덕이 결여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인체의 신비 만큼 인간의 미스터리함을 느낀다. 어제 미덕을 행했던 사람이 그 날 밤에 약자를 폭행하는 스토리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거나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나는 욕망 앞에 선 인간을 믿지 않는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렇게 믿지 않는 것이 많아진다. 두려운 것도 많아진다. 사회적 연계가 강화되며 자기가 아닌 주변인의 이권과 안전에 좋든 싫든 개입하게 되며 때로 비겁해진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이 나왔을 때, 그것을 수면으로 노출시긴 최초 제보자이자 취재 기자가 20대 중반의 대학생 둘이라는 데에 놀라운 한편 수긍이 갔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성별을 몰랐을 때 바로 남학생으로 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용감한, 이런 대단한 일을 한 주체로 자동반사적으로 나는 왜곡된 성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학습은 놀라운 것이다. 무언가를 용감하게 고발하는 주체로 자동적으로 우리는 남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대생 두 명인 익명의 '추적단 불꽃'이었다. 2019년 7월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이었던 불과 단은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을 준비하며 구글링을 하다 우연히 '와치맨'이 운영하는 구글 블로그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텔레그램 '번호방' 링크를 타고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공유 단체 채팅방인 'N번방' 잠입취재로 이어지게 된다. 텔레그램은 독일에 서버가 있는 모바일 메신저이다. 자기 신원을 노출하지 않으며 각종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범죄를 공모하는 터전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한 곳이다. 


N번방은 언론으로 크게 보도되었지만 이것이 막연히 사이버 성범죄라고만 추측할 뿐 정작 여기에서 이루어진 범죄가 실생활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 이 범죄의 핵심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는 높지 않다. 이곳의 핵심은 성범죄 대상이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그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파괴한 각종 불법촬영물을 미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협박하고 조롱하였으며 심지어 주변의 지인들을 능욕하는 각종 불법촬영 영상물을 올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모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 촬영물을 각종 가상화폐로 거래하며 그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유료회원들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것을 제작하고 유통시킨 범죄자들 뿐 아니라 문제는 이 대화방에 들어와 있던 팔천 명이 넘던 회원들이다. 그들은 이 촬영물을 감상하고 지인을 능욕하고 각종 사회 일탈적인 발언을 주고받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색출과 처벌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불과 단의 평범하게 생각했던 선량해 보이는 지인도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이십 대 중반에 믿었던 주변인들의 괴물 같은 심연을 들여다본 불과 단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N번방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세상에 터뜨린 이 두 여학생이 겪었을 트라우마와 신변에 대한 걱정은 정작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그 둘이 그것을 취재하는 과정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맞닥뜨린 각종 성추행과 성편견에 따른 차별적 발언 등으로 갖게 된 상처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여대생들의 성장 과정 및 대학교, 취업시장에서 겪게 된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진보도 없이 똑 닮았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세상에서 어린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부당한 일들을 끊임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것에 반기를 들면 나는 예민하고 성마른 여자가 되고 넘어가면 무던하고 적응력 좋은 사회인이 되는 것이라는 구도가 염증스럽다. 


N번방을 발본색원한다고 해서 음지에서 자라나는 거대 욕망의 뒤틀린 재현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은 선악 구도를 뛰어넘어 한계를 모르고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태가 사소한 것이라 여기는 순간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누구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축소 환원되어 유린될 수 있고 그것은 자본주의 화폐로 거래되며 이권 사업으로 커갈 것이다. 자기 몸을 지키는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운 취약 입지에 있는 아이들, 약자들이 가장 먼저 범죄의 타겟이 될 것이고 이것은 끊임없이 은폐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려 할 때 우리는 그 카르텔의 침묵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상시 감시체계가 작동하고 언론과 우리 모두가 주시해야 하는 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비단 성범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어긋남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폭력의 지대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 않는가? 인간이 인간을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은 마땅히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범죄다. 


불과 단은 아직 세상을 믿는다. 그들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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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1-29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감사한 리뷰에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 좋고, 감사한 리뷰입니다.

blanca 2021-01-30 08:5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기 전까지는 너무 막연하게 모호하게만 알고 있었더라고요. 놀라웠어요.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텐데... 그리고 그때와 사회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더 절망을 느낍니다.

수이 2021-01-2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리뷰를 읽어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는데 블랑카님 리뷰는 읽으면 정말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지는 힘이 있어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1-01-30 08:55   좋아요 0 | URL
수연님, 이 책을 많이 읽어주고 기억해 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안 그래도 벌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희석되고 이것은 성범죄자들의 형량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네요.

얄라알라 2021-02-0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아주 오래된 유죄] 초반부 읽고 있는데, 이 책과 같이 읽으면 더욱 좋겠군요!! 표지만 보고 책 소개 제대로 안 봤던 책인데, 리뷰 고맙습니다!

2021-02-04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년 새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경이로운 작품이었다. 자신의 죽음과 실존을 직시하는 게 인간으로서 얼마나 두렵고 거대한 과업인지 적나라하다. 사형 집행을 앞둔 뫼르소가 참회와 사후세계를 설득하려는 사제 앞에서 거기에 반기를 드는 모습이 절정이다. 


나는 유신론자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약하고 죽음을 직시할 수 없기에 유신론자다.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악행과 이기심이 합리화되는지를 경험하고 보고 들었다. 최근 정인이 사건만 해도 그렇다. 소위 종교의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이 행한 악행과 그것을 알고도 모르고도 방조했던 또 다른 그들의 행태에 분노한다. 신앙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최선의 것이 되자고 기도하는 것을 합리화는게 아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자신들과 피를 나눈 가족 안에서만 유효하고 그들의 부귀영화를 이 생에서 이루기를 기도하며 타인의 삶, 타인의 고통에 눈 감고 때로 온갖 편법, 폭력을 저지르는 행동도 그저 그 종교 안에서 다 사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자인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써 신을 동원하는 일은 악행 중의 악행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지금까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보던 캐릭터의 전형성과 어긋난다. 정의롭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고 감정 과잉도 아니다. 오히려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나이도 모르고 장례식에서 돌아와서는 푹 잘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고 다음날 바로 데이트를 나가는 등 어떻게 보면 소시오패스처럼 보일 지경이다. 심지어 이웃의 치정 사건에 기꺼이 연루되어 대신 복수를 해준다. 그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시로 삶의 자잘한 일상들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표현한다. 독자들은 그를 때로 불가해하다고 황당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우리 내면의 가장 꺼내어 놓기 힘든 부분을 직설적으로 대변한다. 사회에서 기대되는 그 모든 어떤 전형들에 철저하게 위배되는 모습.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생의 쾌락

에는 기꺼이 열려 있는 모습. 


거기에는 카뮈가 투영되어 있다. 
















스물두 살에 쓰인 카뮈의 에세이들은 그가 한참 지난 뒤에 다시 출판하며 붙인 서문에서 그는 이 글들이 서툴지만 여기에 다른 어떤 책들보다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원천인 "가난과 빛의 세계"가 이 <안과 겉> 속에 있다고 고백한다. 


인생이라는 꿈 속에, 여기 한 사나이가 있어, 죽음의 땅 위에서 자신의 진리를 발견했다가 다시 잃고 나서 전쟁과 아우성, 정의와 사랑의 광란, 그리고 또 고통을 거쳐, 죽음마저 행복한 침묵이 되는 이 평온한 고향으로 마친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안과 겉> 서문


여기에 있는 <아이러니>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바라본 늙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담겨 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이 떨어진 그 거리를 뚫고 노년의 고독과 소외, 권태에 대하여 마치 단편소설처럼 노인들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되어 이미 그 초라하고 외로운 노년과 죽음을 경험한 듯하다. 자신의 역할, 자리,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고독하게 구석에서 소외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스물두 살의 청년이 들려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아랍의 까페에서 카뮈가 회상하는 어머니와의 가난한 유년,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긍정과 부정의 사이>는 노벨 문학상을 받는 위대한 소설가로 아들을 키워냈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빈민가의 한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대한 아름답고 슬픈 추도사다. 아픈 어머니와 함께 누워 세상에서 격리된 두 사람만의 그 엄청난 고독, 고통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서글프다.


어떤 사나이가 고통을 당하며 거듭되는 불행을 겪는다. 그는 그 불행들을 참고 자기의 운명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에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알베르 카뮈 <긍정과 부정의 사이>

그 사나이는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 모든 것을 이룬 나이에도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순함과 투명함만을 받아들이려는 의기도 때로 꺾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지점을 안다.


표제작인 <안과 겉>에서 카뮈는 우리가 가지고 갈 카뮈의 이야기를 응축하여 표현한다. "인생은 짧은 것이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라고. 


그것은 여전히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빛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결국 인간이 평생에 걸쳐 달성해야 하는 과업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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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7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8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이 오는 날 병원에 갔다  시간이 남아서 이전에도 간 적이 있는 근처의 동네 서점에 갔다. 신혼 때 살던 아파트 입구의 대학가로 빠지는 모퉁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서점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도 편리하지만 이때의 문제는 얻어 걸리는 책이 없이 온전히 자신의 취향,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것으로 읽기가 한정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여러 책을 주인장의 선별 하에 배열해 놓은 서점의 방문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그곳에서 만난 예쁜 책. 책을 사기 위해 무심코 산 책이었는데 젤다에게 한동안 푹 빠졌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 뮤즈. 가십걸.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있게 한 여자. 이런 선입견을 일거에 박살내는 책이다. 스콧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 중 몇몇은 엄연히 아내 젤다의 것이었다. 심지어 젤다가 정신병원에서 쓴 자전적인 소설 <왈츠와 함께>는 스콧이 자신이 쓸 내용과 겹친다고 강제로 많은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의 정신병은 스콧이 젤다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하나의 구실이 된다. 


<젤다>에는 젤다가 스콧의 이름으로 혹은 공저로 발표한 단편소설 다섯 편과 아홉 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정교한 플롯이나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공감각적 심상을 표현한 문장들의 절창은 경이로울 정도다. 또 언뜻언뜻 스콧 피츠제럴드의 문장들과 젤다의 그것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흡사한 대목들이 있다. 재즈시대의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던 그 낭비의 찰나적 아름다움의 묘사와 그것에서 정작 소외되는 내면의 심연의 대비들이 그러하다. 


스콧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시간들을 그린 것만 같은 <남부 아가씨>는 마치 그 둘과 함께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듯한 착각이 드는 읽기를 만드는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모든 곳에는 그곳만의 시간이 있다. 겨울철 한낮 유리 같은 햇살 아래의 로마, 푸른 거즈 같은 봄날 석양에 덮인 파리, 그리고 뉴욕의 새벽 틈새로 흘러드는 붉은 태양, 따라서 당시의 제퍼슨빌에도, 내 생각에는 지금도, 다른 곳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길모퉁이 가로등들이 깜빡대고 칙칙대며 켜지는 초여름 밤 여섯 시 반쯤에 시작해서, 공 같은 백열전구들이 나방과 딱정벌레로 까매지고 먼지 자욱한 거리에서 놀던 아이들이 잠자리로 불려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남부 아가씨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에서는 스콧이 젤라의 일기나 편지글을 표절하여 자신의 책을 낸 것을 익살스럽게 지적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참으로 서글프게 느껴진다. 아내의 편지글, 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껴 써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세상에 내어놓고 유명세를 누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 발레,그림, 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그 어느 분야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정신 분열증으로 전기자극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서 대기하다 잠긴 문 안에서 화재로 죽어버려야 했던 젤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게이도 여전히 살아 있다. 모든 정처 없는 영혼들 속에. 상류층의 풍속대로 계절을 따라 순례에 나서고, 퀴퀴한 대성당들에서 구릿빛 몸과 여름 해변의 사라진 마법을 찾고, 안정과 성공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리츠를 지금의 리츠답게 만들고, 대양 횡단 여행을 이브닝드레스와 다이아몬드 팔찌의 비공식적 업무로 만드는 모두의 마음속에.

-젤라 피츠제럴드 <젤다> 오리지널 폴리스 걸



<오리지널 폴리스 걸>의 어느 날 죽음으로 표표히 화려한 사교계에서 퇴장해 버린 게이라는 여자를 얘기하는 화자에는 엄연히 젤다가 있다. 젤다는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표면적 이해와 오해들, 게이의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욕망과 결핍을 마치 스스로를 변호하듯 이야기한다. 게이가 "언제나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서 낭만이 달아날까 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젤다 자신의 것이다. 대중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소위 그 시대의 셀럽으로 온갖 억측과 가십의 대상이 되었던 젤다의 내면에는 남편의 유명세에 가려 스스로의 재능과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좌절감과 함께 언젠가 반드시 스러지고 말 그 시대의 번영과 낭만의 최첨단을 향유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했다.


젤다는 우리에게 찰나처럼 지나가 버리는 그 모든 젊은 한 순간의 아름다움과 낭비와 순수와 열정의 가운데에 거기에 여전히 숨쉬고 있다. 그 모든 오해와 실패와 망각과 죽음도 함께 있는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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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06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젤다의 인생을 소설로 쓴 거 읽었어요. 드라마로도 나왔고요. (드라마는 못 봤어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 피츠 제럴드 욕도 했습니다. 특히 ‘밤은 아름다워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blanca 2021-01-07 09:06   좋아요 1 | URL
아, 어떤 소설일까요? 피츠제럴드는 당시의 시대관을 반영한 나쁜 남자의 전형인 것 같아요. 아내의 재능을 가로채고 질투하고 글쎄, 이게 아직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어렵겠지만요. 저는 젤다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 거의 겹치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어요. 부잣집 딸에 철 없고 향락과 사치만 일삼는. 그런데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거더라고요. 문장력이 아주 탁월해요. 발레도 이십 대에 다시 시작해서 입단 제의까지 받을 정도였다니. 그래도 그녀의 사후 그녀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다행입니다.

유부만두 2021-01-07 09:20   좋아요 1 | URL
<Z: A Novel of Zelda Fitzgerald> by Therese Anne Fowler 예요.
 

개인적으로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습작 등을 통해 기량을 닦아도 시 만큼은 쉽사리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시적 기량은 평생을 통해 한정된 값 안에 있는 것이라 어떤 위대한 시인은 나이가 들어 젊을 때와는 다른 완성도를 가진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로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한다. 


김희준 시인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올해 요절한 시인이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시인이다. 천상계와 신화와 현실의 핍진한 삶을 종횡무진하는 시어들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집을 펼치면 그녀의 천문에 흠뻑 빠지게 된다. 시란 이렇게나 신비롭고 곡진하고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그 기본적인 인식으로 다시 돌아가 이 시대에 배고픈 시인이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구나, 함부로 절대 폄하될 일이 아니구가 싶어진다.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친애하는 언니> 중


그녀의 시어들은 작위적이지 않고 진부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고 매끄럽지 않다. 생경하고 신비롭고 형형하고 절절하다. 어떤 문장도 남용되지 않고 빈 틈이 없이 촘촘해서 몇 번이고 되뇌어도 역시 청신하다. 빛나는 나이에 생의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하는 독법은 시어들을 예언적으로 만든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란 시어에서 그만 먹먹해져버린다. 자신과 함께 사물을 읽고 시를 읽고 썼던 이 빛나는 아이를 잃은 시인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아릿해진다.


숨소리가 행간을 바꾸어도 정갈한 여백은 맑아서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의 쉼표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김희준 <오후를 펼치는 태양의 책갈피> 중

마치 시인의 시를 묘사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정갈한 여백, 쉼표마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완성도 있는 시들을 써주었으면 하는 독자의 마음과 이 시인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시의 절창을 완결하여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수긍이 함께 한다. 그녀를 읽으면서도 그녀가 그립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어떤가. 그녀 또한 한때 수도사를 꿈꿨던 시인이다. 자신이 읽은 시들과 자신이 보내는 나날들과 또 그 자체로 시 같은 문장들이 어우러진 이 책 또한 절창이다.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꺾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한정원 <시와 산책>


호숫가에서 노인의 굽은 등을 보며 나이듦을 성찰하는 시인의 언어들이 하나하나 다 온전히 와닿아서 움찔했다. 구태여 서로의 사생활을 캐묻지 않고도 우정을 나누게 된 과일행상 아저씨와의 사연이 너무 반가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든 갑작스런 불행과 삶의 난관들을 타인의 것으로 박제된 것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그 스무 살의 무지에 대한 회상이 너무 낯익어서 놀랐다. 


수도자가 되려 했지만 결국 시인으로 돌아온 저자의 삶의 행로의 모서리가 저절로 그려져 고개가 수그러졌다. 


시인으로 태어나 기꺼이 시를 쓴 젊은 그녀들에게 늦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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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23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와 산책은 평점이 꽤 높네요. 근데 책값이 좀 센데요?ㅋ

blanca 2020-12-23 17:02   좋아요 1 | URL
^^ 제가 이제서야 읽은 이유입니다. 책값이 비싸서 도서관에 몇 번이나 예약하고 상호대차 신청도 했었는데 코로나로 다 취소되어버리더라고요. 중고로도 기다려도 한 권도 안 나오고요. 그런데 읽어보니까 이건 소장하고 싶어지는 책이더라고요. --;; 책값이 요새 자꾸 올라요. 아주 얇은 책도 만사천 원을 훌쩍 넘어버려서 넘겨보다가 못 사게 되더라고요. 도서관도 닫고요.

scott 2020-12-24 0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집 가격 보고 깜놀 !!ㅋ

이출판사가 출간하는 책들 끝말 잇기로 제목을 정한데요.
주르륵 책장에 꽂아두면 한문장이 되도록 ㅎㅎ

블랑카님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카드 한장 놓고 가여 ㅋㅋ

*MerryChristMas*
┏━━━┓행복한
┃※☆※ ┃메리크리스마스★
┗━━━┛

blanca 2020-12-24 13:19   좋아요 0 | URL
어머, 메리크리스마스 너무 예쁘네요. Scott님도 메리크리스마스^^

scott 2020-12-31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2021년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blanca 2020-12-31 19:33   좋아요 1 | URL
대체 이런 이쁜 이모티콘은 어떻게 만드는 거랍니까? scott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감사해요. 더 가열차게 읽고 쓰는 한 해가 되기를...

2021-01-02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3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세련된 것도 아니고 말수완이 좋은 것도 아닌데 은근한 매력이 있어서 끌리는 사람. 표현하는 것보다 내면에 충실하게 쌓인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이. 


우연히 만난 제임스  A. 미치너가 그랬다. 



















<소설>의 원제는 실제 'The Novel'이다. 각각 독일계 미국인 소설가 루카스 요더, 편집자 이본 마멜,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독자 제인 갈런드의 시점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노년에 접어든 작가 요더가 펜실베니아 독일인 거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 <그렌즐러 8부작>을 완성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가 독자의 호응을 얻기까지의 연대기와 출판사 안에서의 편집자의 전략적인 지원, 비평가의 혹평, 신진 소설가의 육성을 둘러싼 태피스트리다. 이는 각자의 시점을 중심으로 똑같은 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하며 하나의 읽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여정이다. 


특히나 남자아이들과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며 그들의 세계에 전투적으로 들어가려했으나 거부당했던 경험이 있는 유대인 소녀 이본 마멜이 소위 나쁜 남자를 만나 허덕이다 결국 편집자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 편집자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투쟁사는 약간 도식적인 면이 있고 그녀의 열기, 적극성과 상치되는 가정 폭력에 대한 대처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소설이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이라며 그녀에게 그 꿈의 현장에서 날아오르기를 응원한 삼촌의 존재는 여자아이들이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입성할 때 어떤 보편의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제시해주고 독려해 줄 수 있는 멘토의 가치를 의미 있게 보여준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칠 때 제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의 아트레우스가의 계보도를 중심으로 인간의 희비극의 원형을 제시하고 인물들에 철저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모습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이미 다 제공된 셈이다. 이것이 비틀어지고 겹치고 쌓이며 태어난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어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쓰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연구하고 내면화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비평가 스트라이버트와 소설가 요더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을 선점한 자에 대한 시기의 마음,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 거액의 기부금을 약속한 것에 대한 불평등한 역학, 그럼에도 남는 인간적인 끌림. 여기에는 실제 작가 미치너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소설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어느 한 단면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여러 중층의 감정을 통과해야 이 언뜻 적대적으로 보이는 관계의 색깔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투박하고 거친 부분들이 있다. 서사보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의욕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런데 그것이 몰입을 방해한다기보다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나이가 무려 여든넷이었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야기는 다르게 읽힌다. 


이야기를 읽는 일마저 어떤 꿈을 꾸는 것마저 포기하고 싶어질 나이에 어떤 이야기를 다시 만들고 인물을 표현하고 이야기의 힘을,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 의지를 확인하는 건 도저히 말로 표현 못 다할 만큼 근사하고 빛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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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2 1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작품은 소설을 쓰고 싶은 지망생들이 필독 리스트에 꼭들어가는 작품이에요
우와 작가가 여든넷에 이런 작품을 썼다니 .....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나온다는 말 동감합니다
셰익스피어 희비극도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출발했죠.

허구를 창작한 픽션일지라도 그 허구속 이야기에 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줄수 있는 이야기를 고대하게 만드는 작품들,,,
끊임없이 펼쳐져있는 광활한 우주속을 헤메도 인생에 나침판이 되어주는 책한권만 있다면
삶에 큰 위로가 될것 같네요 ^@^

blanca 2020-12-22 16:18   좋아요 1 | URL
제임스 미치너의 연표를 읽고 나면 말 그대로 리스펙트가 나와요. 정말 죽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을 했더라고요. 누구나 정점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그게 사람들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삼십대 중반 정도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요즘 작가들 연표를 보면 다 제각각이에요. 이십대에는 천재였다가 완전 추락하는 사람도 있고요. 제임스 미치너 자서전을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stella.K 2020-12-22 16: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고 참 좋아했는데 아직도 다시 못 읽고 있네요.
처음 읽었을 때는 되게 신선하고 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투박했나요?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겠네요.
이책말고 <작가는 왜 쓰는가>도 좋았는데.
중고샵에 나가면 항상 꽂혀 있던데 다음에 나가면 엎어와야겠습니다.^^

blanca 2020-12-23 10:21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이게 아주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게 문장 연결이나 서사의 진행이 매끄럽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대목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또 잘 읽혀요.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재미와는 또다른 흡인력이에요. 참, 출판사에서 특별판으로 상하 합본으로 낸 게 9천원이면 살 수 있어 가성비가 좋더라고요. 저는 그걸로 구입했어요. 책도 참 예쁘고 활자도 잘 읽히고 강력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