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에게 인간이란 그저 탈것, 통로에 불과할 뿐이에요. 말이 지쳐 쓰러지면 바꿔 타듯이, 세대에서 세대로 우리를 타고 계속 가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유전자는 그저 무엇이 자기에게 효율적이냐만 생각할 뿐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의사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저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의 도입부에 인용된 하루키는 그가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문제를 유전자와 유전체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이 경이로운 책의 서막을 울린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을 가로질러 세대로 전해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그것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얼음을 가르는 충격을 주는 경험이다. 무케르지는 후기에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의 미래에 유치권을 행사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시는 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다시피 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방대한 역사는 다시 그것의 제대로 된 모습을 고찰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실이 이 책이다. 그가 얘기했듯이 이 책은 오히려 암 이야기의 전편에 놓였어야 마땅하다. 


















방대한 생물학, 유전학의 역사는 1865년 브르노의 온화하고 성실했던 수도사 멘델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생전에 거의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완두 잡종 실험을 기반으로 한 논문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유전체 계획까지의 여정 자체를 가능케 한 업적이다. 그가 사랑한 완두 교배 실험은 원래 독립적인 유전 단위를 발견하려는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지독한 성실성이 빚어낸 우연이 장대한 유전학의 역사의 견인 역할을 한 것이다. 무케르지는 다윈과 멘델에게서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구현되었다고 봤다. 둘다 성직자이자 정원사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각 거시적이자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 질문을 탐구했다. 멘델의 논문은 사후에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유전학의 역사의 토대로 깨어나게 되고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명성을 은근히 질시했던 사촌 골턴에 의해 비틀어진 형태의 우생학으로 스며든다. 


무케르지는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이자 서술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힘의 헤게모니에서 물러난 유전학의 역사의 기여자들을 사려깊게 불러와 그들의 잊혀진 이름을 명명한다. 왓슨과 크릭의 DNA의 이중나선 발견으로 인한 노벨상 수상의 뒤안길에는 그들에게 영감과 발견의 도화선을 제공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그녀의 성과에 맞는 적절한 대우도 기여도에 맞는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남성들이 쓰는 유전자의 역사에 프랭클린의 자리는 없었다. 이것은 왓슨과 크릭이 후에 보여준 행보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머가 넘쳤던 천재 과학자 둘은 신우생학을 지지하고 심지어 노년에는 인종편견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아 인생의 전반기에 달성한 업적과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유전자에서 유전체 계획으로까지의 발견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의 방편이자 결과인 돌연변이에 대한 시선과 유전자를 복제하고 변형하는 그 가능의 영역에서의 '자기강화'의 허약하고 위험한 지점의 개입의 문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결국 우리는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나치가 행사했던 그 끔찍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폭력의 역사와 오버랩되는 기시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더 우수하고 더 건강하고 완벽한 세대를 꿈꾸며 그렇지 않거나 부족한 유전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처단하는 기로에 유전학의 역사는 당도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등판한다. 그 자신의 내밀한 역사의 솔직한 고백을 덧붙이며 무케르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그의 가계를 가로지르는 정신질환의 역사다. 삼촌들과 사촌은 조현병을 비롯한 각종의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유전자의 힘을 감안한다면 그 자신도 그러한 유전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딜레마가 어쩌면 이 장대한 유전자의 서사시를 추동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돌연변이의 가운데에 자아를 놓는다. 모든 것을 매끈하게 획일화하려는 욕망은 우리 자신을 죽인다. 


역사를 추진하는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 유전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런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을 지닌 유전체를 선택해왔다. 이 자족적인 논리 회로는 우리 종의 가장 장엄하고 상징적인 자질 중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가장 괘씸한 특징 중의 일부도 빚어낸다. 이 논리의 궤도를 탈출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요구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순환적임을 인식하고, 지나칠 때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강자의 의지로부터 약자를, "정상인"의 박멸 행위로부터 "돌연변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와 나와 나의 삶을 흔들어 대는 외부의 힘에 지쳤다면 유전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권한다. 그 불가사의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완고하게 감추고 있는 왕국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우리와 우리가 죽고도 이어질 그 유전자들의 역사는 인간이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근원적인 힘에 대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태어나 살고 죽는 과정이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무의미함이 아니라 어떤 아름답고 복합적인 메시지의 일환으로서 자리매김한다는 앎은 함부로 폄하될 것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졸업식 행사가 다 취소되었다. 대학생들 입학식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까지 취소된 마당에 이 정도는 불만거리도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Contagion, 2011)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십 대 딸은 신종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거의 집에서만 갇혀 지낸다.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기회도 남자 친구와 만날 시간도 신종 전염병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만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집에서 졸업식 파티를 열어 준다. 아이들도 이 시간 동안 많은 기회를 추억을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으로 충족되어도 내가 어린 시절 열린 공간에서 겪은 많은 체험과 그로 인해 남은 추억의 공간을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들은 이따금씩 미소짓게 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니. 그런데 한편 이 제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 마르셀의 동생은 말기암도 아니었고 희귀병에 걸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이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까지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루였다.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 마치 이 순간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듯,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써버렸다. 시간은 나쁜 놈이다. 또 다른 하루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동생 마르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여러번의 금주 및 재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했다. 가족들도 지쳤다. 이미 합법적으로 안락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의 죽음의 욕망을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삶을 스스로 도움을 받아 끝내고 싶어하는 동생의 소망을 가족들은 끝내 이해하고 그 날들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책은 마르크의 형인 마르셀이 그러한 동생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풀어낸 이야기다. 


마르크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애썼어도 질병을 극복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르크를 꼭 끌어안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크에게는 우울증 등 중복된 정신장애가 있었다.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일상 생활을 파괴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러 번 시도했던 치료는 모두 불발로 끝났다. 노부모와 형의 일상생활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제 그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합법적인 장치가 그의 이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기는데 일조를 담당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어렵고 민감한 이야기라 한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와 고통의 시간을 차마 짐작하고 단언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러한 그의 선택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지 섣불리 단정하고 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삶의 매 순간은 축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분일초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죽음에 앞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인생은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하기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이야기다.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은 쉬운 얘기지만 어렵다. 2002년부터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안락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법적인 종결을 인간이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 그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다. 심리 상담가, 의사, 화장터 직원 등이 개입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그 일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살면 살수록 어렵다. 삶을 넘어서는 고통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당면하기 싫은 문제들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부모님이 했던 고민을 이윽고 내가 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서사 또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이야기 또한 그럴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2-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중독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은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떤 이는 숨쉬기조차 되지 않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저는 가장 큰 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만 끝내고 싶은데 죽을 자유조차 없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요.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2-13 11:11   좋아요 0 | URL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 육체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짐작이 가요. 행복하게 무병 장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나이듦, 죽음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 두려워져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축복과 즐거움 뒤에 있는 어두움, 고통의 측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참 어렵습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학도가 칠십 대의 노장 건축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보낸 한 때가 어떤 식으로 그의 삶에 각인되는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절창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풍광, 귓가에 들리는 듯한 소리의 감각에 대한 표현들, 시간의 경과 속에 변전하는 것들에 대한 천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땅에 건물을 짓는 행위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단숨에 흡입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오마주가 투영되어 있다. 특히나 라이트가 노년에 만든 일종의 젊은 건축도들의 도제 시스템의 장소인 '탤리에신'은  이야기의 배경인 건축 사무소의 영감을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시스템, 노건축가의 카리스마로 운영되는 시스템, 실현되지 못한 설계들, 그럼에도 그곳에 있었던 청춘들이 계승한 스승의 미완성의 꿈들. 간토 대지진을 견뎌낸 라이트의 제국호텔에 대한 이야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자연스럽게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진혼곡이 된다.

















라이트는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할 정도로 세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유명한 건축가다. 그가 생의 후반에 건축한 별장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차를 넘어선 영감과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의 사적인 삶에는 많은 논란의 지점이 있다. 아버지로서 무책임했고 남편으로서 불성실했으며 사적 개인으로서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약속을 어겼고 거짓말을 남발했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고객의 아내를 가로채고 산적한 문제들에 무책임하게 도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한 일들을 수습하고 여전히 속아주는 무리들이 그의 성취들을 가능케 한 역설은 어느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처절한 비극과 배신극과 불굴의 의지와 무모한 낭만적 열정이 결합된 막장 드라마와 위대한 성취가 혼재된 복합적인 융합체다. 그래서 그의 삶을 그의 성취와 함께 이야기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침묵할 일도 폭로해야 할 일도 많은 인생이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건축 비평가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다룬 것은 이 균형의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해 낸 저자에 대한 맞춤한 경의라고 생각한다. 평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쓰는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제대로 완성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만 그의 공과를 치우침 없이 평가하고 존경하지만 비판 받아야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저력이 놀랍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하나는 그가 지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실제로 산 것이다.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20세기 건축의 연금술사>


헉스터블의 언명은 머리말에 있다. 그녀는 '두 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이 역사적 건축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자신이 남기고 싶었던 그래서 창조해 냈던 또 다른 삶으로 표현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이 자서전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는 라이트가 가공한 진실로 윤색해 낸 삶이다. 그러나 그 거짓은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라이트는 이단아였고 독불장군이었고 아웃사이더였고 반역자였다. 스스로를 '위대한 건축가'라 칭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그의 일종의 제자 양성 도제 시스템이었던 펠로십조차 거대한 사기극이자 싼값에 젊은 건축학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러한 일로 그를 고소한 이들도 있었다. 출생 연도부터 출신 학교 등 그가 스스로 설명한 많은 것들의 진실성이 의심 받았다. 금전에 무책임해서 수시로 돈을 빌리고 안 갚았고 공사 대금은 언제나 예상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으며 현장을 자주 비웠다. 그의 건축물 또한 무너지기도 했고 빗물이 새고 여러 하자를 드러냈다. 이러한 많은 결점들이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의아할 정도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물들은 여느 다른 동시대의 동료들의 그것들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결정적인, 선도적인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가 만들어 낸 것들을 도저히 모방해 낼 수 없었다. 그의 설계는 반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 딜레마를 헉스터블은 정확히 지적한다. "예술에 있어서는 위대하지만 태도에 있어서는 왜소했다."는 그녀의 평은 함축적이다. 


그가 조강치처를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과 함께 할 보금자리로 설계한 '탤리에신'에서의 비극은 오래도록 뇌리에 박힐 정도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삶의 비극 앞에서도 라이트는 일어난다. 그곳이 몇 번이고 화재에 전소되어도 라이트는 없는 돈을 끌어들여 재건한다. 심지어 육십이 훌쩍 넘어 남들은 은퇴할 연령에 이르러서도 그는 가장 정력적으로 일에 뛰어들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자 양성 시스템을 자급자족 공동체로 만들어 낸다. 그의 위대한 성취는 이러한 생의 후반기에 이루어진다. 이 대책없는 몽상가의 투지와 무모함은 그가 이루어 낸 예술적 성취가 빚진 대목이다. "완벽함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헉스타블의 말은 라이트를 가장 잘 집약해서 표현한 문구다. 그는 완벽해지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는 역설의 지점에 우뚝 선 거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0-01-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평전 읽어보고 싶네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인물인 듯@_@;;;;;

blanca 2020-01-23 17:40   좋아요 0 | URL
이건 소설가도 생각해 내지 못할 극적인 일들이 빵빵 터지는 인생이더라고요. 놀라운 건 남들 다 은퇴할 나이에 역사에 남을 업적 또한 빵빵 터뜨리고요. 요새 예술가들, 소위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 중이랍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프로지만 나머지는... 반드시 수습해 주고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처리해 주는 반려자가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 흥미롭더라고요.
 

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어왔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마존만 봐도 거의 실물의 책에 가깝게 구현했다는 평을 듣고 심지어 절판된 종이책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킨들조차 종이책 시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실시간으로 클릭 한번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고 심지어 물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북이 있음에도 무겁고 번거로운 종이책이 여전히 매대에 놓여있는 이유가 뭘까.


킨들과 카르타가 있다. 원서야 배송료나 배송 기간을 생각하면 킨들이 비교우위다. 킨들은 새로운 세대를 계속 시도하며 종이책의 장점과 단점을 골고루 분석해 종이책과 전자책의 접점의 지대에서 완벽체에 가깝게 구현해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다. 터치감도 시각의 피로도 개선도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설명하기 힘든 이물감, 실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느낌은 여전하다. 마음대로 줄치고 긋고 메모할 수 없다. 물론 하이라이트, 메모 기능이 있지만 한 박자씩 미끄러진다. 내가 읽은 책은 전자책장에 있지만 정말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 없다. 책의 실물이 없이 활자는 내려앉지 않는다. 


거의 몇 개월만이었을까. 한참만에 꺼낸 카르타는 'NO POWER'라며 울어댄다. 아무리 충전해도 요지부동이다. 인터넷에서 온갖 노하우를 섭렵하여 실험해본다. 재부팅을 해보려 끝이 뾰족한 드라이버로 미친듯이 리셋 버튼을 뚫어버릴 태세로 찔러도 보고 아예 그 상태에서 충전을 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례에 드라이버를 고정시키고 충전도 해보다 무응답에 던져버렸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책장에 앉은 먼지를 보니 나는 여전히 책의 실물을 줄여야겠기에 다시 도전한다. 드라이버로 이미 만신창이가 됐을 리셋 버튼을 강박적으로 찔러댄다. 여전히 부팅조차 안 된다. 마음을 비우고 서비스 센터에 보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아예 셀프로 보드를 갈아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려는 찰나 다시 검색을 해보니 충전 케이블을 교체해 보라는 조언에 솔깃한다. 다시 찔러대기 시작하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읽었던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의 표지가 반갑게 나타난다. 오기로 고,쳤,다.


와, 어쩔 수 없이 오늘 주문하려 했던 책들은 조금 참고 전자책을 주문해야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실물의 책들을 영접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고장나면 꺼지면 읽을 수 없는 전자책들에 대한 비호감은 여전하지만 책을 이고 지고 살지 않으려면 전자책과 친해져야 한다. 이게 사실은 다 상호대차까지 신청해서 한참 걸어 빌려온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의 너무나 낡은 책 상태, 불친절한 소설 도입부 때문이다. 에밀 졸라로 실패해 본 경험은 없는데 도저히 다 못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에밀 졸라가 여성을 묘사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방식이 거슬린다. 그 시대상을 핍진성 있게 드러낸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작가가 여성에게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시선이 때로 필요 이상으로 거칠고 폭력적이다. 물론 편견이나 의도적 무시, 성적 상품화가 에밀 졸라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에밀 졸라는 비겁하지 않은 작가이지만 섬뜩한 면이 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가 노출될 때가 있다. 너무 잘 알아서일까, 그는 절망을 서슴지 않고 나는 그 어두움이 때로 참 싫다.


















그래서 빌려온 책을 읽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책을 준비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은 대기 상태이고. 다 살 수는 없고. 그런 상태다. 이북 리더기를 자가 수리했으니 전자책을 찾아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0-01-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타ㅠㅠ 읽지도 않으면서 생각날 때마다 충전만 해놓는 상태-_- 왜 샀나 모르겠어요 이 욕심ㅠㅠ 아무리 애써봐도 전자책과 친해질수는 없겠는데 이미 한참 과포화상태인 책장을 보면 한숨만=_=;;;

blanca 2020-01-19 16:29   좋아요 0 | URL
달밤님, 그래도 잘 관리하시네요. 저는 아예 방치하다 아예 못 쓰는 줄 알았답니다. 전자책보다 실물책이 훠얼씬 좋은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목록이 있다손 치더라도 딱 어떤 페이지을 찾아 읽는 그 느낌도 없고, 되팔 수도 없고. 저는 두 번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은 전자책으로 읽으려 하는데 전자책으로 읽어버린 책이 너무 좋은 경우 초난감입니다. 여하튼 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좀 덜해지면 좋은데 그게 어려우니 말이에요.
 

여섯 살 때부터 열한 살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정확히 체르니 50번의 1번까지 마쳤다. 집안이 넉넉해서도 재능이 넘쳐서도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본인이 피아노를 배우고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과 열정이 빚어낸 우연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때로 믿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공부하라고 닦달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닌 피아노 연습하라고 잔소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학년 때 그만둔 피아노로 참 길게도 덕을 봤다. 중학교 때 아이들 앞에서 한창 인기였던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의 영화 주제가를 연주했던 기억, 고등학교 때 기악 시험 합주에서 굳은 손가락으로 엉망으로 친 피아노 때문에 음악 선생님께 신 나게 야단맞고 다시 연습해 제대로 완주했을 때 받은 칭찬, 둘째를 가지기 전 동네 아이들과 함께 다닌 피아노 학원. 


잠시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한 연주로 마치 재능있는 아이인 것처럼 착시 효과를 주던 시절에도 나는 내가 열정도 소질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게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흐를 치면서부터다. 바흐는 정말 그렇게 행복한 대가족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서 빚에 시달리고 요절한 모차르트보다 가혹했다. 왼족 새끼 손가락까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강도와 활용을 요구하다니. '바흐인벤션'은 나를 결국 피아노앞에서 몰아냈다. 한 마디로 양손을 충분히 흠뻑 사용하기를 바라는 그 기대치를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왼손은 왼손다웠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그러한 평범성은 당연히 제약 요인이었다. 진지하게 피아노를 그만 치고 싶다는 나의 요청에 응한 엄마의 마음을 지금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음을 알고 체념했던 걸까. 엄마가 그렇게나 염원했던 음악가에 대한 열망은 아무도 실현시켜주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 로이드는 그러한 평범했던 나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다. 피아노를 시작한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무려 13년간 피아노를 배웠고 고등학교 조회 때는 학교 조회에서 대표로 반주를 했고 절대 음감을 가졌다. 고등학교 졸업 20주년 동창회에서 많은 이들이 그녀가 피아노를 여전히 칠지 궁금해할 정도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유망한 전망을 지녔던 소녀였다. 이 책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가 되지 않은 여자의 피아노에 얽힌 일종의 애증의 연대기를 손녀와 비슷하게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할머니 앨리스의 삶과 교차시키며 짚어가고 있다. 여성이 음악, 특히 피아노 연주에 소질과 재능을 보여도 남자들과는 달리 전문 음악가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구조적 한계, 또한 클래식 연주 위주로 형성된 음악계에서 즉흥연주나 재주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일종의 일탈로 간주되는 경직된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 많았던 '피아노 앞의 여자들'이 피아노 앞을 떠나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방증이다.


피아노를 매개로 버지니아 로이드도 할머니 앨리스도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시차를 공유한다. 앨리스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결국 장차 버지니아를 낳게 될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입양함으로써 치유하고 버지니아는 양지에 내어놓을 수 없었던 즉흥연주에 대한 열망을 재즈 피아니스가 됨으로써 실현한다. 결국 할머니 앨리스는 손녀인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를 얻게 됨으로써 자신의 고향에 두고 온 음악에 대한 애정을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피아노는 그녀의 정체성이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숱하게 울며불며 매달렸던 그 고투의 시간들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굳는다. 한 달만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손가락은 내가 연주하고 싶은 선율을 어색하게 튕겨낸다. 그래도 여전히 쇼팽의 에튀드 중 '나비'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등뒤에서 속도가 빨라지지 않나 나를 감시하는 선생님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엄마도 아닌 나 홀로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연습으로 기계적인 타건이 아닌 쇼팽이 원했던 바로 그 느낌, 그 연결에 가까이 가 닿는 느낌으로. 그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 속에서 피아노는 여전히 패배감으로 기억되는 말줄임표이므로 무언가 제대로 된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져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