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와 이디스 워튼은 둘다 뉴욕의 최상류층 출신 작가로 실제 생애 전반에 걸쳐 친하게 지낸다. 이디스 워튼이 <순수의 시대>로 여성 작가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헨리 제임스에게 비견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결핍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둘은 아무래도 상류층이라는 한정된 배경 속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내적 욕망을 탐구하는 데에 천착한 작품이 많다. 이는 한계이기도 하고 그들의 강점이기도 했다. 경험은 작가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그 깊이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거실에서 창조한 세계를 결코 폄하할 수 없다. 

















19세기 전반의 명망 있는 의사 슬로퍼의 고명딸 캐서린이 집안의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청년 모리스에게 한눈에 반하며 아버지와 갈등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나쁜 남자한테 빠진 딸의 어리숙함을 못 보아 넘기는 꼰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여주인공 캐서린은 정말 답답한 캐릭터다. 아버지도 연인도 그녀의 확답을 듣지 못한다. 자신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아버지에게도 섣불리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모리스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캐서린의 모습은 언뜻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어 보인다. 헨리 제임스는 여기에서 기지를 발휘한다. 바로 그 인물의 현실성이다. 사실 어떤 딜레마 속에서 시원한 결단을 내리고 그 길로 질주하는 모습은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만 보내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누구나 상황은 다르지만 자신의 과거 한 조각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우리의 못난 구석, 근사하지 않은 부분을 불러온다.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의 남자 주인공 아처에서 캐서린을 변주한다. 그 또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대신 사회의 압력에 굴복한다. 그도 캐서린처럼 사랑을 포기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회고하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선택은 캐서린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과거를 의아하게 돌아보는 캐서린과는 달리 뉴랜드 아처가 회고하는 자신의 사랑은 끝내 포기했던 "인생의 꽃"이었다. 그럼에도 여기 현실에 남아있기를 선택하는 자신의 모습 또한 그는 인정한다. 끝내 죽는 순간까지 딸에 대한 권위와 구속을 포기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시원하게 반기를 들지 못한 캐서린과도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헨리 제임스와 이디스 워튼 또한 평생을 자신들이 가지고 태어난 것, 속한 계층의 한계 안에서 마음으로 원하는 것,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의 긴장 관계에서 살았다. 그들의 삶이 작품의 기본 구조와도 만나는 부분이다. 


이곳 아니면 저곳, 여기 아니면 저기, 이것 아니면 저것의 사이 그 어느쯤에 그렇게 우리들도 모두 갈등하며 나날들을 보낸다. 무엇이 옳았는지를 회고할 수 있을 시점이 오면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 한없이 허무해지지만 깊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을 나란히 놓고 본다. 어떤 선택도 회한이 남는다. 그 선택을 한 자신, 그러한 것을 견인한 환경,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게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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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3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블랑카님, 저 안그래도 주문해서 워싱턴 스퀘어가 어제 도착했습니다만, 블랑카님이 이렇게 똭- 페이퍼 적어주시네요. 아아...독서인생이란 무엇인가요?

순수의 시대는 저 너무 좋아해요. 마음속 성소란 말을 되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blanca 2020-06-30 19:04   좋아요 0 | URL
헉, 아, 이 책 나온지 좀 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동시에? 다락방님도 <순수의 시대>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너무너무 좋아서 두 번 읽었어요. 이디스 워튼 정말 좋아요. 삶까지. <이선프롬> 도 너무 좋았어요. 헨리 제임스는 음, 저는 솔직히 아주 좋다, 이렇진 않은데 그렇다고 그 작품이 안 좋은 건 아니고.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좀 답답한 캐릭터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도 같고요. 그래도 <워싱턴스퀘어>는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랍니다. 다락방님이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한동안 시를 읽지 않았다. 와닿지 않았고 때로는 언어들의 과잉과 생략이 껄끄러웠다. 한 마디로 잘 읽히지 않아 잘 안 읽었다. 



















무엇보다 자기 감정을 그저 쏟아내는 것이 아닌 청자에게 속살거리는 듯한 말투가 정겹다. 잘 읽히고 감각적이고 쳥량하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뭍에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수국의 즙 같은 말투"에 한동안 중독되어 읽고 또 읽었다. '시'란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아도 그 응축된 언어의 집 한 채로 독자에게 때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문간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이전과는 같아질 수 없다. 그 전환은 반가운 일이다. 그 집을 통과해서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거나 비합리적이지만 무의미하거나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법이다. 덥고 끈끈하고 답답한 나날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맞은 느낌. 시를 연이어 읽고싶게 만드는 마력을 몰고 오는 시집이다. 시가 안 읽히는 시대, 이런 시인은 여전히 태어나는구나 싶어 반가웠다.


















복간된 책이다. 시집이 아니라 저자의 삶의 이야기와 그녀가 읽은 마흔여덟 편의 시가 함께 실린 책이다. 한 마디로 삶과 시의 독법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이런 류의 책들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가벼울 줄 알았던 한 중년 여성의 시읽기는 깊고 예민하고 예리하고 진중하다. 내가 요즘 느꼈던 것들, 생각했던 것들을 들킨 듯 삶의 속살에 대한 천착이 빛난다. 늙음과 소멸, 이 사회의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주의에서 소외되고 왜곡되는 사람들의 본질에 대한 애정은 이 시읽기가 자칫 개인주의적 감상으로 한정되지 않도록 한다. "삶의 기본값으로 주어진 설움과 청승을 어떻게 품고 갈까"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물음은 우리가 사랑하고 암송했던 시들이 줄 수 있는 답이 아니지만 그것을 묻고 답을 궁금해하는 시간은 값지다. 또한 학생들이 버린 노트에 소녀 감성으로 일기를 적는 환갑의 청소 노동자와 "지팡이가 아닌 낙엽에 기댄" 구순의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올드걸'을 발견한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비단 특별한 계층, 종족에게만 허용된 특권이 아니라 이 처연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 우연적인 삶이 던지는 화두를 응시하는 것과 통하니 말이다. 


다시 시를 읽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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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20-06-29 0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저도 시를 읽으려고 하는데..이 시집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접하니, 얼른 사서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싶어져요. 응축된 간결하면서도 좋은 리뷰 고마워요 블랑카님♡

마지막 줄, 제 마음이 그러했는데 블랑카 님 리뷰를 읽으면 ‘느낌의 공동체‘라는 말이 절실해져요.

blanca 2020-06-29 15:20   좋아요 1 | URL
쟌느님, 저는 사실 시집은 잘 안 사요. 특히 최근 시인들의 시집은요. 그냥, 집중이 잘 안 되고 자꾸 잡념이 몰려와서... 시적인 인간이 아닌게지요. 그런데 요즘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는데 왜 이리 좋습니까. 이건 두 번, 세 번 읽게 되네요. 그냥 내가 잊어버렸던 표현못했던 감정들이 명확해지는 느낌이 시원해서 좋아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중략>


김사인 <화양연화>


살아보니 결국 승자는 돈도 권력도 열정도 사랑도 노력도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들을 무화시킨다. 변화시킨다. 심지어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본질 그 자체까지 때로 흔든다. 스무 살의 나보다 마흔 살의 타인과 더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사인의 <화양연화>를 읽으며 문득 서글퍼졌다. 덧없고 속절없는 느낌. 그가 예언했듯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그러한 시간을 맞는 것도 기대되지 않는다. 애닯고 애타는 것도 특권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던 탓이겠지. 기다리며 울던 시간도 그 시간만의 추억이 될 것임을 모르고 무너지려 했던 시간들. 


















아이가 어렸을 때 집앞에 걸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있었다. 학교 안에는 서점이 있었고 분야별 신간과 아기자기한 문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도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였다. 내가 다니지 않았던 이공대 안을 그렇게 세 살 아이와 함께 아무리 보내도 끝날것 같지 않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종종 가곤 했다. 그 구내서점에서 처음 본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당시의 김연수 만큼 젊은 생기가 있는 소설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날들도 나름대로 힘들었지만 '화양연화'였던 셈이었다. 스마트폰은 아직 초창기였고 사람들은 책 얘기를 하는 것을 특이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그러한 얘기를 하면 심드렁하다. 그 서점에서 강아지 스티커를 매일 사서 아예 재고를 영으로 떨어뜨렸던 기억은 없단다. 그 스티커는 침대 헤드를 점령해서 집에 오는 사람마다 경악하게 만들었었는데. 기억에 없다니. 


김연수가 오랜만에 신간을 냈다. 그의 전작을 읽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모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이 나이들어간다는 실감이 가장 큰 작가다. 나보다 앞질러 살아보고 했던 얘기들을 뒤늦게 경험하며 정말 맞구나, 하던 시간들도 많았다. 문학을 문학으로 남겨 놓으려는 순정의 대목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대학교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내식당에서 혼자 들썩였던 그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내 기억에 포개진다. 그런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을 복기하는 날도 온다. 애달픈 시간들이 쌓여 애닯지 않은 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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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9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결국 시간이었다는 것도 저 역시 깨닫고 있고요. 시간이 변화시키는 것도 저 역시 요즘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보는 눈도 그래요. 이게 이렇게 좋았던가, 이게 이렇게나 끔직했던가, 하고 늘 보던 것을 그리고 익숙한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돼요. 나이가 같다고 다 그렇진 않겠지만, 블랑카님과는 세월의 흐름과 변화를 보는 눈,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같이 가고 있다고 느껴요. 오늘 페이퍼 정말 좋습니다, 블랑카님. (아, 김연수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요.)

blanca 2020-06-20 08: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게 정말 세월, 나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게 ˝이게 나야, 내 생각은 이래˝라고 주장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낯설어요. 자꾸 변하고 닳아요.

다락방님 글 읽다 때로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 이거 내가 느낀 건데, 이러면서. ㅋㅋ 그리고 시기도 비슷해요. 잘 나이들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나이들어가기를... 함께요.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로 시작하는 <레베카>는 놀라운 작품이다. 동명의 뮤지컬로 유명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서스펜스 소설은 섣불리 장르작품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 특히나 이야기의 배경인 영국의 대저택 '맨덜리'의 묘사는 당장 눈앞에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경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고 생생하다. 인간의 내밀한 욕망, 복잡다단한 중층적 심리, 각자의 필요가 상충할 때 빚어지는 우연한 사건들의 파고에 대한 정묘한 표현들은 서사의 상상력의 진폭과 언어의 표현력이 맞춤하게 결합할 때의 최상의 지점을 나타내어준다. 한 마디로 경이로운 작품이다. 















속물에 교양 없는 귀부인의 수행원으로 심부름꾼 역할을 하던 소녀가 영지의 화려한 대저택의 소유주인 맥시밀리언 드윈터를 우연히 휴양지의 호텔에서 만나 드윈터 부인이 되는 이야기는 언뜻 진부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레베카>는 오히려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다. 그녀를 맞이한 '맨덜리'에는 이미 죽었지만 그 존재감을 하인들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전처 '레베카'의 환영이 떠돌고 있다. 모두가 그녀를 추억하고 추앙하고 그녀의 취향들을 고수하며 '나'를 은근히 소외시킨다. 심지어 남편 맥시밀리언조차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 무언가 나는 공유할 수 없는 레베카와의 순간들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둘러싸며 점차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된다. 


레베카에 대한 환상이 벗겨지는 과정은 '나'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미덕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단지 이야기의 서스펜스와 흡인력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어떤 내면적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삶에서 성장을 이루어내는지에 대한 사려깊은 통찰은 <레베카>가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되고 읽힐 수 있는 여지를 확장한다. 소극적이고 소심하던 나는 당차고 야무진 어른으로 나아간다. 핑크빛 환상에만 매달리지 않고 냉엄한 현실에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 나아갈 수 있는 삶의 기본 자세를 배워나간다. 


나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더 강하고 좋아진다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불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그 불의 시련을 최대한 겪어낸 셈이었다. 우리는 공포와 고독, 그리고 대단히 큰 좌절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중


'불의 시련'을 통과하는 소녀의 시선은 독자와 함께한다. 그 누구나 그녀의 우유부단함과 공포와 두려움에 동참하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레베카를 상대로 한판 승을 벌이는 느낌이다. 그 '불의 시련'은 우리가 살며 겪는 위기와 고난의 시간들을 소환한다.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고, 내일을 두려워하게 되는 시간들. 그것을 통과하고 남는 평온한 내일들. 그 틈에서 결국 잃어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일. <레베카>를 읽는 일은 그러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그래서 막무가내로 믿고 두려워하고 부서졌던 시간들을 여전히 그리워한다. 이 역설이 성장기를 관통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면 '레베카'의 환영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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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베카 진짜 너무 재미있죠! 사랑 얘기인가보다 하고 읽었다가 중간부터 깜짝 놀라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지금 제가 쓴 리뷰 찾아보니 2018년에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이라며 별다섯을 주었네요. [나의 사촌 레이첼]도 그래서 잽싸게 샀는데 아직 안읽었어요. 아, 블랑카님. 소설 진짜 너무 좋지 않습니까? 잘 쓰여진 소설 말이에요.

blanca 2020-06-10 14:54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은 역시 알고 계셨군요! 저 이 소설 읽고 너무 놀라서, 안 그래도 작가 소설 다 읽어볼까 이러는 중이랍니다. 진짜 너무 정말 잘 썼어요. 그리고 작가 사진! 와우, 뭐 이건 할 말을 잃었어요. <나의 사촌 레이첼>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 저도 왠지 사면 안 읽을 것 같아요. 이게 또 꼭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단편집을 도전해볼까 하는 중이랍니다. ˝소설의 기쁨을 알려준 책˝ 이 표현 정말 정확하네요. 흑, 너무 좋아서 안 읽은 눈 사고 싶어요.

moonnight 2020-06-10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프니 듀 모리에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참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레베카는 아직 못 읽었는데 blanca님 리뷰 너무 멋집니다. 꼭 읽고싶어요^^

blanca 2020-06-10 15:03   좋아요 0 | URL
달밤님, 꼭 읽으셔야 합니다.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게 책을 손에서 못 내려놓을 정도인데 작품성까지 탁월해요. 재미있는데 우아하고. 이 작가는 뭐지? 싶다니까요.

테레사 2020-06-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레베카가 그 레베카인가요?
히치콕이 만든 그 놀라운 레베카.......와우..놀랍네요..원작이 있었다니..저도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히치콕의 작품 중에 아주 많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blanca 2020-06-10 15:05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새‘ 원작자도 이 작가랍니다. 그건 단편집에 있다 해서 찾아 읽어보려 합니다. 저는 ‘새‘도 참 좋았어요. 그냥 타고난 작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저는 원래 흑백사진이 너무 영화배우처럼 예뻐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레베카> 읽고 그냥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는 작가더라고요.

테레사 2020-06-10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에...즐거운 일이 한개 생겼네요 ㅎㅎ 요새 즐거운 일이 없어서..꿀꿀하던 차에...ㅎ 고맙습니다..

blanca 2020-06-11 09:07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즐거운 일에 일조를 담당했다니 으쓱합니다.

페크pek0501 2020-06-1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영화로 보았던 작품이네요. 반전이 일어나서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저도 책을 사 봐야겠네요. 좋은 소개에 감사^^

blanca 2020-06-11 09:06   좋아요 0 | URL
책과 영화가 약간 다르다고 하네요. 페크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간만에 참 몰입해서 읽었어요.

테레사 2020-06-26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히치콕의 레베카를 7월1일 저녁 7.30 광화문 씨네큐브서 한답니다^^

blanca 2020-06-27 09:03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몇 년 전인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나는데 이비에스에서 히치콕 특별전으로 영화를 쭈욱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때 ‘이창‘도 참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요. 기대되네요.
 

아프기 전까지 몸과 의존의 문제는 타인의 것, 다른 영토의 일이다. 작은 수술로 입원하며 수술에서 깨어나던 시간, 옆병실 환자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은 아무리 지성과 관념을 얘기해도 결국 한 평도 안 되는 육체에 갇혀있다는 뼈아픈 인식과 더불어 '돌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수술 당일 나는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없었고 다음 날 모든 일상이 갑자기 대단한 일이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많은 환자에게는 보호자가 있었고 그들의 투병은 누군가의 간병, 희생과 얽히고설켜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생애 주기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회는 그 기간의 생산성과 독립성을 전제로 삶을 규정한다. 그 나머지 기간, 우리는 소위 민폐가 된다. 비용이 되고 성가심이 된다. 건강하고 젊은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우리 모습만이 반드시 어떤 생산력을 보이고 타인에게 돌봄을 구걸하지 않아도 될 때의 기간만이 진짜 삶처럼 얘기될 때 우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김영옥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이 책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낯설다. 여섯 편의 글은 새벽 세 시, 우리가 가장 유약해지고 감상적이 되는 시간, 가장 고독해지는 시간 감당해야 하는 늙음, 고통, 투병, 간병 등 이 모든 육체의 쇠락, 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족 안에 가두어두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의 담론의 현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시민'이고 그 돌봄이 오롯이 사적인 영역으로만 할당되지 않는 그곳에 대한 지향과 소망이 펼쳐지는 장이다. 특히나 이러한 돌봄노동이 성차별적으로 가부장 제도 안에서 여성의 희생이자 도리로 간주되는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 두드러진다. 병실에서 아내나 부모를 간병하는 남성의 모습은 흔하지 않은 풍경이다. 남자 간병인들도 보기 힘들다. 


돌봄위기는 '독박'의 구조로부터 온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는" 사회는 모두게 불안하고 힘겨운 사회일 뿐이다.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


가족의 돌봄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만 간병인과 전문 요양 기관에서의 삶은 어쩐지 좀 서글픈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잔인하다. 그것은 간병을 하는 가족에게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어긋난 역학 관계, 죄채감, 부책감, 억울함을 남긴다. 우리 나라에서 공론화하기 참 힘들고 민감한 사안이다. 할머니의 말기암과 치매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가족은 불화했다. 그것은 이미 중년이 된 손녀인 나에게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가족 전체가 감당하려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타인의 손길을 좀 빌려도 괜찮지 않았을까? 누군가 온전히 자식이라는 몫으로 감당하려다 했던 실수들, 감정의 예기치 않은 표출들이 효의 연장선상에서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가족이 다 감당하려 했을 때의 비극을 나는 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훌쩍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사람, 약자를 가족 안에서 감당하지 못할 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얘기들이 담론화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치유의 느낌이 있었다. '시민적 돌봄'이라는 용어가 낯설고 생경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모든 돌봄이 가족 안에서 감당되어야 하는 사회는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이지은의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에서 소개된 알라나 샤이크의 TED 강연을 직접 찾아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학구적인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치매는 공격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의 생을 그대로 닮은 듯다정하고 부드럽다. 못 알아보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전면에 나서는 치매의 풍경에서 아버지의 차분하고 너그러웠던 마음은 그대로 남아 돌보는 사람들과 감응하고 조응한다. 아무리 지적인 작업을 의식적으로 계속한다고 해도 치매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논리적인 확신은 없다면 그녀는 소위 '착한 치매' 환자가 되기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손으로 하는 종이접기 취미들, 몸의 독립성을 연장시켜 줄 운동, 그리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기, 이 세 가지의 준비는 그녀의 인지 기능이 쇠퇴해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들을 예비시켜 줄 것이었다. 취약하고 의존적인 자신의 내일을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대목이다. 인간의 취약성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모습은 슬프지만 현실적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항상 독립적인 나의 모습이 나의 자아의 본질이라 여기면 우리는 제대로 잘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듦은 어렵다. 아픈 가족을 나이 든 부모님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시리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고 늙고 아프고 죽는다. 이 명확한 생애 주기를 외면하는 사회는 기만이다. 언제나 생산하고 소비하고 활력 징후가 뚜렷한 구성원만이 대우받는 사회는 무섭도록 잔인한 곳이다. 아프고 늙고 유약해지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렵지는 않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은 큰 이정표가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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