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한국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 중의 하나는 한국전쟁과 1963년의 박정희 민정참여라고 한 이들이 있습니다.그만큼 1963년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그 해 2월에서 4월까지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에 참여 안한다 한다 말을 여러번 뒤집고 또 뒤집고 합니다.국내정치인은 물론 외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민정엔 불참하고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다가 한달도 안되어서 다시 민정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하다가 결국 민간정치인과 미국을 모두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그 해 대선에 출마하게 되지요.이 과정을 보면 박정희가 고도의 책략을 썼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가 물러가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낫다고 해야하는지 참 어지럽습니다.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처음에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펄펄 뛰면서 "당신이 물러나고 민간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강하게 나오더니 결국은 박정희 뜻대로 하라고 양해를 해버리지요.알 수 없는 일입니다.박정희와 케네디 시대는 정말 생각해 볼 거리가 많습니다.특히 미국의 제3세계 정책에 비추어서도.
윤보선과 박정희의 대결은 표차이가 별로 안났습니다.아슬아슬했지요.이때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은 아마 우리나라 선거역사상 가장 독특했을 겁니다.혁신계 인사들 상당수가 박정희를 찍었으니까요.제 어머니는 윤보선을 찍었다고 했습니다.하지만 이 곳 호남지역에선 당시 윤보선의 매카시즘에 전전긍긍하던 박정희가 불쌍하다고 박정희 찍은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특히 여수순천 쪽 사람들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우리더러 빨갱이라고 하는 손가락질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질 거라고 여기고 박정희 찍은 사람들이 많았지요.물론 그 후의 역사는 이런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나 하는 걸 보여줍니다만.
이 당시 박정희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수많은 결단을 해야했던 순간인데....전기작가라면 가장 고심할 대목인데요.요즘 조선일보 하단에 강경한 반공단체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하는 의견광고를 많이 내고 있는데 조갑제<박정희>전 13권을 판매하니 전화로 주문하라는 광고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시작된 전기가 <박정희>라는 제목으로 완간된 모양입니다.하기야 올초인가 <박정희 최후의 그날>이란 책이 나왔으니 이제 거의 10년에 걸친 집필이 완료된 모양입니다.올해 보수진영에선 이현희가 또다른 박정희 전기를 냈지만 그 분량에선 조갑제의 <박정희>를 따라갈 수는 없지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나온 책을 몇 권 봤는데 굉장히 자세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조갑제의 글솜씨가 매우 좋습니다.어떤 때는 비장하게 어떤 때는 눈물을 자아내게도 합니다.특히 서독의 광부.간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 작가들도 이렇게 쓰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동적으로 썼습니다.이국땅에서 대통령 내외를 만나는 그들이 환영성명을 읽다가 우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하지만 서독 대통령이 박정희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같이 울었다는 대목은 픽션으로 밝혀졌지요.그러나 글의 힘은 셉니다.그 대목은 나중에 박정희를 호의적으로 보는 이들에 의해 계속 인용되더군요.이미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리니 진실은 고개를 숙이지요.
조갑제의 책이 한때 한길사에서 여러권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사실은 조갑제는 월간 마당의 편집장 출신입니다.이후 월간조선사로 갔지요.한길사에서 책이 나오던 때는 월간조선사 차장이던 시절(1983년 입사)입니다.이때가 1987년 전후인데 사형폐지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억울한 사형수이야기를 다룬<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의 희생자가 다시는 생겨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담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등을 냅니다.한길사에선 현대사 추적 시리즈로 이 책들을 내지요.이때만 해도 조갑제 씨는 인권에 관심이 많은 인도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책도 이때 냅니다.부마항쟁 르포<유고>입니다.광주항쟁에 대한 책은 많습니다만 부마항쟁에 대한 책은 거의 없지요.이 책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한길사에선 이 책을 우리시대 실록문학의 충격적 성과라고 띄웠지요.조씨는 이 책을 쓰려고 7년간 500명을 인터뷰했다고 합니다.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집필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이 책은 저도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그의 다른 책들은 지금도 구입하려고 합니다.특히 고문을 통해 빨갱이 만드는 수법을 폭로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은 제가 관심을 갖고 있지요.그가 지금과 같은 강경한 반공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경부터입니다.
이승만 전기는 이승만에 호의적인 이한우 씨도 썼고 이승만에 비판적인 정병준씨도 썼습니다.특히 후자의 책은 그 분량에서 압도하지요.이현희도 이승만 전기를 썼습니다.그런데 박정희 전기는 조갑제나 이현희 같은 보수파들의 것은 있는데 박정희에 비판적인 이가 쓴 전기는 없습니다.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전인권이나 정운현의 책은 본격적인 박정희 전기라고 말하긴 힘들지요.정병준 씨의 이승만 전기처럼 두툼한 박정희 전기를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쓸만도 한데요.박정희 전기는 보수파나 쓰는 거야 하고 손도 안대는 동안 조갑제류의 박정희 관만 더 널리 퍼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저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전기를 읽고 싶은 사람에겐 꿩대신 닭이라고 이병주<그해 5월>을 권합니다.방대한 소설이지요.하지만 이병주 특유의 역사허무주의 때문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습니다.진중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진중권 특유의 재기가 넘치긴 하지만 본격적인 전기는 아니지요.글 잘쓰는 강준만,한홍구 같은 이들이면 두툼한 박정희 전기가 나올까요?
예전에 귄터 그라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2차대전에서 독일이 지고 독일 땅이 폴란드 령이 되면서 그 지역의 독일인들이 강제로 쫓겨날 떄 상당히 비참한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 문제를 진보주의자들이 다루지 않으니 보수파들에게 담론의 주도권을 뺏겨버렸다고.아마 박정희 문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박정희는 수구꼴통이나 다루는 것이라는 사고방식때문에 그 결과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지식을 조갑제 같은 인물의 책을 통해서만 얻을 지도 모릅니다.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