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도 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시대가 있습니다.대체로 해방 3년사나 한국전쟁에대해선 상당히 묵직한 연구서들이 있는 반면 50년대 60년대는 사각지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주변에서 이야기들은 많이 합니다만 실제로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참 드뭅니다.그 시절 성인기를 보낸 이들도 가물가물한 기억 빼고는 잘 모르지요.특히 공안사건이라고 통칭하는 사건들은 워낙 미묘한 구석이 많아서 쉬쉬하기도 합니다.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시국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수기나 기사들을 읽는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개 알아냈는데 인혁당 사건과 통혁당 사건에 대한 현재의 기억에 관한 차이입니다.일반인들도 그렇고 과거사 진상규명위에서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명은 꽤 한 듯한데 통혁당 사건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기껏해야 통혁당 하면 우선 생각나는인물이 성공회 대학교수 신영복 씨 정도? 문근영 씨가 유명해진 2005년 이후엔 그녀의 외조부인 류낙진 씨가 검색어로 오르고 있더군요.사실은 그 무렵 류 씨는 고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통혁당 사건을 공부하게 된다면 김종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될 겁니다.당시 대공수사기관에선 통혁당의 수괴라고 선전한 인물입니다.지금의 제 나이 또래들도 영남 지방 하면 군사정권의 아성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혁당이나 통혁당 사건의 주동 인물들은 영남의 혁신세력들이었다는 점을 우선 밝혀둡니다.항간에선 박정희가 이들을 유례없이 탄압한 이유가 영남의 혁신세력들을 없애버리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최근 신영복 씨가 '청맥'이란 잡지에 대한 추억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교양잡지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해서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진보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잡지의 주간이 김질락.그는 김종태의 조카였습니다.숙부인 김종태는 그에게 우상이었다고 합니다.둘 다 경북 영천 출신.김종태가 통일혁명당을 공식결성한 시기는 1964년 무렵이며 청맥은 당 기관지같은 성격도 있었습니다.물론 중정이 이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요.1967년 청맥은 강제로 정간당하다가 그 뒤 복간과 폐간을 거듭합니다.
1968년이 통혁당이란 조직이 신문방송에 등장하게 된 계기입니다. 7~8월 무렵.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서울 조직의 지도급들이 체포되고 호남에선 최영도,정태묵 등이 체포됩니다.(호남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칭 임자도 사건인데 야당 의원을 지원하려고 했다 하여 나중에 1980년 5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공판 당시 김대중 씨가 정태묵과 접선을 했다는 계엄사령부의 주장이 등장하게 되니 그 여파가 얼마나 길게 계속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이때 육사에서 부교관이었던 신영복 중위는 군대내에 통혁당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지요.이른바 ps혁명론입니다.FROM PAPER TO STEEL의 약자이지요.무투(무장투쟁)혐의입니다.김종태,최영도,이문규는 모두 1969년 사형됩니다.정태묵,김질락은 1972년 사형.신영복 씨는 20년 징역형.
인혁당도 제 1차 사건이 1964년이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통칭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듯 통혁당 사건도 통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습니다.1979년의 일이죠.그 전인 1971년. 조직이 파괴되던 호남쪽에선 류낙진 씨가 체포됩니다.류낙진 씨는 통혁당 관계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며 류낙진 외 11명 체포라고 나옵니다.1980년대 이후의 통혁당과 한민전은 그전과는 성격이 많이 변하는데 이에 대해선 그저께 올린 저의 페이퍼를 참조하십시오.
김질락은 체포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중에 수기를 씁니다.일종의 반성문 겸해서 쓴 글인데 자신의 우상이던 숙부 김종태를 여기선 애증이 교차하는 비판도 합니다.감옥 속에서 쓴 글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글은 통혁당에 대해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입니다.나중에 책으로도 나왔지요.<어느 지식인의 죽음.김질락 옥중수기,원제:주암산>행림출판사1991 .주암산이란 1967년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20일 동안 있었던 평양의 숙소 뒤의 작은 산.임진왜란 당시 계월향과 김응서 장군의 사랑 이야기가 된 무대.김질락의 사형이 집행되던 때는 7,4공동성명으로 온 한반도가 통일의 열기가 뜨겁던 1972년 7월 15일이었습니다.
김종태를 비롯한 통혁당 지도부를 체포한 이가 중정부장 김형욱.그와 김종태의 일문일답이 흥미롭습니다.
김형욱: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
김종태: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
김형욱:그러나 우리는 그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고 생각한다.당신의 죄목만도 181가지나 된다.
김종태:어떻게 내 죄명이 181가지인가? 정치탄압을 가한다면 나에게 1810가지 죄명을 덮어씌워도 좋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