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15주년 기념판, 양장)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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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교과서 같은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15주년 리커버 판이 나왔기에 기념 삼아 구입하기 잘했다. 15년 전에 초판이 나온 책이니 낡은 느낌이 들 법도 한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고, 오히려 2021년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문장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페미니즘(여성주의)이 양성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라는 사실이다(애초에 양성평등이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성性은 남성과 여성,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애초에 사회가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주의, 즉 남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성주의란,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사회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대안적이고 저항적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운동이며, 남성도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공부할 수 있다.


나아가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권력의 근거로 삼고 차별을 권력의 목표로 삼는 현재의 사회 체제와는 다른 - 전혀 새로운 사회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처럼 된다는 것은, 장애인에게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처럼 살라는 말과 같다. 페미니즘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더욱 많은 여성의 목소리, 더욱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오로지 여성性으로만 환원한다는 점에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여성들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여성 해방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을 더 많이 알고 공부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파괴하는 것은 가부장제지, 여성의 ‘직설적인’ 목소리가 아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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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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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은 자신이 코끼리인 줄 알았다. 주변에 있는 동물들이 죄다 코끼리였으므로,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코끼리이며 평생 코끼리들과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노든은 자신이 코끼리 고아원의 유일한 코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앞으로 걱정 없이 코끼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이제라도 코뿔소 무리를 찾아 떠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런 노든에게 할머니 코끼리가 이렇게 말해준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15쪽) 


바깥세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찾아 떠난 노든. 예상은 했지만, 바깥세상은 노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기도 하고, 잔혹한 사냥꾼들에게 코뿔을 베일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전쟁이 발발해 동물원이 무너지고 주변 동물들이 떼죽음 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든은 꿋꿋이 살아간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펭귄 치쿠의 알을 무사히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다. 


이 책에는 노든과 치쿠 외에도 다양한 연대와 협력의 관계가 등장한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게 서툰 노든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준 노든의 아내, 분노에 찬 노든의 이야기를 언제나 말없이 듣고 위로해 준 앙가부,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치쿠를 위해 항상 치쿠의 오른쪽에 서서 대신 눈이 되어주었던 윔보 등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불안정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는 곁에 나로 인해 살아가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로 하는 존재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침내 펭귄은 바다 앞에 선다. 그 옛날 노든이 코끼리 어른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말이다. 이제부터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고 기적과도 같은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긴긴밤을 견뎌내기만 하면, 삶은 무엇이든 준다. 그 밤을 함께 견딜 존재가 있다면, 삶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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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날씨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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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미국의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환경 에세이다. 환경에 관한 책은 종종 읽었지만 환경 에세이는 처음이라 어떤 형식과 내용을 담은 책일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가 그동안 환경에 관한 언론 보도나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보면서 생각하고 느낀 바를 저자의 문체로 풀어쓴 책이라는 느낌.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좋지만, 저자가 논지를 풀어내는 방식이나 이해를 돕기 위해 드는 예화, 문장들이 좋아서 글 자체로도 만족스러웠다. 


물론 이런 감상은 저자가 의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에 따르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저자의 할머니는 유대인 학살 직전인 폴란드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갔다. 나치가 쳐들어오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믿지는' 않았던 할머니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을 '믿고' 이를 막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기후 위기가 과장되었거나 실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나아가 저자는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채식을 실천하자고 제안한다. 채식은 유명한 환경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권력이 막강한 축산업계의 반발을 걱정해서일 수도 있고, 앨 고어 자신이 채식을 할 용기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저자 역시 채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루 한 끼만이라도 채식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한 사람이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열 사람, 백 사람이 한 끼라도 채식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침식사로 지구 구하기'라는 부제의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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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만만해지는 책 - 넷플릭스부터 구글 지도까지 수학으로 이루어진 세상의 발견
스테판 바위스만 지음, 강희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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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 걸까. <수학이 만만해지는 책>을 쓴, 유럽에서 가장 촉망받는 수학자 스테판 바위스만도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학 입시를 위해 수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난해한 공식이나 직선 또는 포물선 모양의 그래프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 상당한 커리어를 쌓은 지금은 수학만큼 쉽고 유용한 학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수학을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쓸모를 지닌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이 책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흔히 겪는 상황 속에 어떤 수학 원리나 수학적 접근법이 숨겨져 있는지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례로 넷플릭스는 어떻게 내가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를 미리 알고 추천하는 걸까. 여기에는 수학의 '그래프이론'이 숨어 있다. 이용자가 추천 목록에 포함된 영화를 보면 넷플릭스는 그 결과를 그래프로 만들어 목록을 갱신한다. 때로는 이용자가 추천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영화를 선택할 때도 있다. 넷플릭스는 그 모든 과정을 추적해 이용자의 취향을 감지하고 특정 장르물을 선호하는 이들을 해당 그룹에 추가한 뒤 추천 목록을 작성한다. 이는 구글 같은 검색 엔진 서비스나 내비게이션의 시스템과도 유사하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미분이나 적분이 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적분을 몰라도 충분히 잘 살 수 있고, 수학과 관련된 직업을 선택해도 컴퓨터가 대신해주기 때문에 직접 다룰 일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적분이 어떤 영역에서 쓰이고 있는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가 속도를 조절하는 원리나 의사가 종양이 전이되는 속도를 예측할 때 미분이 사용된다. 자동차 충돌 시 차량 안전도를 검사할 때나 기상 전문가가 온도나 습도를 예측할 때는 적분이 사용된다.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를 이해하는 데에는 통계 지식이 필수다.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도 여성 임금이 남성 임금의 8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의 임금격차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남성 전체와 여성 전체를 비교했을 때 여성이 15퍼센트 덜 받는다는 뜻이다. 애초에 고용 단계에서 탈락한 여성이나 고용 후 결혼이나 임신, 출산 등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임금 수준을 포함하면 실제 남성과 여성의 임금 차이는 훨씬 더 크다. 또한 전체 여성의 평균 연봉이 낮은 까닭은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하는 빈도가 낮기 때문이다. 정부 부 고위직이나 대기업 간부들의 성별이 대부분 남성인 점, 간병이나 간호, 교육 등 전형적인 여초 직종의 임금이 경찰 같은 남초 직종의 임금보다 낮은 점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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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존의 법칙 인간 법칙 3부작
로버트 그린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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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 <전쟁의 기술>을 쓴 로버트 그린의 책이다. <전쟁의 기술>에서도 정수만을 요약한 이 책에는 치열한 전쟁과도 같은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남는 기술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전쟁은 과거의 전쟁보다 어렵고 또 치열하다. 과거에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오늘날에는 자기편인 줄 알았던 이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뿐만 아니라 앞에서는 나를 위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나를 해치는 '수동적 공격'을 일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전략'이 필요하다. 역사상 최고의 전략서로 손꼽히는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피 흘리지 않고 승리한다', 즉 '싸우지 않고 이긴다'를 최고의 전략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그 비법은 무엇일까. 


싸우지 않고 이긴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도의 간디가 있다. 간디는 1906년 남아프리카의 법정 변호사로 일하면서 수동적 저항이라는 형태의 투쟁을 창안했다. 1920년대 초에는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1930년에는 비폭력 거리 행진에 나섰다. 처음에는 효과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후 수천 명의 인도인들이 행진에 가세하면서 인도 내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국제 사회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다. 결국 간디는 경찰에 의해 투옥되었지만, 인도 내의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었고 영국의 식민 통치가 큰 위협을 받았다. 


저자는 이런 식의 '수동적 공격'이 상당히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거나 대놓고 공격하는 전략은 하수(下手)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고 복종적으로 굴면서 속으로는 음모를 꾸미며 적대적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야말로 고단수다. 반대로 자신이 수동적 공격의 대상이 될 때는 관계를 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다. 상대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만큼 교활하고 뻔뻔하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은 나만 손해다. 


수동적 공격을 일삼는 상대와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수동적 공격을 뒤집어서 '공격적 수동성'을 가장해보는 건 어떨까. 공격적 수동성이란 말 그대로 겉으로는 적대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비우호적인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당신이 공격을 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방어를 할 텐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하니 스스로 탈진할 것이다. 이 밖에도 실용적인(!) 팁이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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