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즈음 춘천 시내 명동 풍경은 요즈음과 많이 달랐다. 우선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많았다. 인파(人波)라는 단어가 실감났다. 게다가 허름한 길바닥이라니. 아스팔트를 깔았지만 기술이 부족했던지 여기저기 파이고 가장자리는 흙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요즈음 춘천 명동 풍경은 어떤가. 행인들부터 대폭 줄어들었다. 90년대에 지하상가를 만들어 놓으면서 적지 않은 행인들이 그리로 유입된 탓이다. 이제 인파라는 단어는 최소한 춘천 명동에서는 사용되기 어렵다. 길바닥은 예전의 아스팔트가 아닌 최신건설재료로 빈틈없이 포장돼 있어 흙 한 줌 발견할 수 없다. 글쎄, 그런 바뀐 풍경에 나는 숨이 콱 막힌다. 몇 년째, 웬만해서는 명동 거리에 나가지 않는 까닭이다.

종렬이 태원이와 함께 그 인간미가 넘치는 71년 여름의 어느 날 춘천 명동 거리에 나갔다. 넘쳐나는 인파 속을 헤쳐 나가다가 장난기 많은 종렬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잠시 후에 내가 태원이랑 법원 마당에서 한바탕 싸울 테니까 지켜봐.”

당시에는 법원이 명동에 있었다. 나는 종렬이가 한 귓속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둘은 법원 마당으로 앞서 갔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마주보고 서서 주먹 싸움을 대판 벌이는 게 아닌가! 처음에 나는 기겁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 영화의 스턴트맨들처럼 가짜로 싸우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주먹들을 날리는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그런 흉내를 낼 뿐이라는 것을.

불구경과 사람들 싸우는 구경만큼 재미난 구경도 없다는 속설이 있다. 다른 곳도 아닌, 명동 거리에 접한 법원 마당에서 주먹 싸움을 벌이는 두 청년. 이내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섣불리 말릴 엄두를 못 내는 것은,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빗나간 주먹에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고 솔직히 모처럼 좋은 구경을 중단시키고 싶지 않는 대중심리도 있었을 듯싶다.

5분 남짓 종렬이와 태원이는 거짓 결투를 연출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아마, 달려온 법원 수위한테 잡혀가지 않았을까? 둘은 구경꾼들이 에워쌀 정도로 모이자 돌연 결투를 중단하고 인파 속으로 달아나버렸다. 나도 어이없는 둘의 잠적에 기겁하여 찾아서 따라가기 바빴다. 간신히 따라잡은 종렬이한테 물었다.

왜들 그랬니?”

그냥.”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미술반 친구들은 그 여름, 한창 젊은 혈기들을 주체 못했던 게 아닐까? 푸른 화실의 작은 공간만으로는 그들의 해방 구역이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한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3년 뒤 두 친구는 바다가 보고 싶어서불쑥 여행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삼척중학교 교사로 있는 나를 만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태원이보다는 종렬이와 더 친했다. 그런데 7년 뒤 외수형 집에 갔다가 목격한 특이한 인물화 때문에 태원이를 각별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19811월 어느 날이다 

전태원 화백의 ‘The Wave 시작도 끝도 없는‘ (2018.09.04. ~09.16.) 전시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이상한 경험을 했다. 뒤늦게 과거의 어떤 기억이오래된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나타나듯선하게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연재 수필 2>에서 전태원과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가 1974년 여름에 삼척에서 만난 것처럼 기술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971년 구() KBS 사옥 부근의푸른 화실에서 만났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푸른 화실은 전태원 이종렬 친구와 2년 선배 최치현의 아지트였다. 형식은 화실이지만 실상은 춘고 재학시절 과학관 건물 1층에 있었던 미술실의 재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종렬이를 따라 푸른 화실에 처음 가 봤는데 실내에는 그리다 만 그림들과, 특주라는 이름의 막걸리 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요즘처럼 제 모양을 갖춘 막걸리 병이 아니다. 간장 병을 재활용한 것이다. 물론 흡연은 기본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숨어 있는 해방 구역에서 벗어나마음껏 해방 구역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최치현 선배는 이종렬 전태원보다 내가 더 먼저 알았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가 아닌, 특별하게도 교대 부속국민학교로 갔는데 그 때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에서 만난 이가 최치현 선배였다. (내가 2016년에 펴낸 소설집숨죽이는 갈대밭그분을 생각한다작품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다.) 내가 1학년 때부터 4학년 1학기까지 3년 반이나 최선배와 함께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이었음에도 최선배는 나를 기억 못했다. 그저 문학 하는 춘고 후배로만 알고 있었다. 훗날 안타깝게도 세상을 일찍 뜨고 만 최치현 선배. 다른 곳은 몰라도 춘천 지역에서 미술 하는 후배들은 그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 선배가 그리도 세상을 일찍 하직할 줄 알았더라면 생전에선배님. 제가 교대부국미술반이었습니다. 선배님과 3년반이나 같은 공간에서 지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까?’ 하며 한바탕 웃고서 막걸리를 대접했을 텐데안타깝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마음껏 해방 구역인 예의푸른 화실’.

종렬이 태원이를 거기서 만나 시내로 나갔다가 황당한 일을 나는 목격했다. 정말 배꼽 잡을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춘고를 졸업 후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강원대 사범대를 갔고 태원이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1974년 여름이었다. 나는 저 먼 삼척의 삼척중학교 국어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교무실로 전화가 왔다. 전태원과 같은 미술반인이종렬이란 친구의 목소리였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동해안을 여행 중인데 마침 네가 삼척중학교에 있다기에 전화 걸었어. 태원이도 지금 나랑 같이 있어. ***여관에 있으니까 시간 나는 대로 들러.”

태원이가 아닌, 이종렬이가 전화한 건 당시만 해도 내가 태원이보다 종렬이와 더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기억나는데 종렬이는 학천이와 친했다. 그런 연유로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된 게 아닐까? 그리고 종렬이는 미술이 전공이면서도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강대 다니던 시절에 불쑥 찾아와 자기가 쓴 거라며 공책에 빼곡하게 정리된 소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워낙 전위적인 소설이라 나는 뭐라 소감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종렬이는 기대했던 칭찬이 나오지 않아 실망한 듯 고개를 연실 갸우뚱하던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는데 나는 삼척중학교 교무실에서 종렬이의 그런 전화를 받고 반갑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종일 수업하느라 고생하는데 자기들은 한가하게 바다가 보고 싶어동해안을 여행 중이라니. 나야말로 강대 다니던 시절, 무엇에 매이지 않는 아주 자유분방한 학생이었다. 예를 들겠다. 어느 학기 시험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오후에 있는 모 과목의 시험을 보려고 학교 가다가 문득오늘같이 햇살 화창하고 좋은 날 그 지겨운 시험을 보러 간단 말인가?’하는 의문에 그 길로 대폿집으로 가 막걸리를 마시며 시험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학점이 안 나와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에 고생깨나 했다.

그런 이력의 소유자였기에, 중학교 교사가 되어 꼼짝 못하고 교무실과 교실을 오가는 생활에 마음 한편으로는 늘이 지겨운 생활을 언제 그만 둘 수 없나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처럼, 동해안 여행 중 친구 얼굴도 보고 가겠다는 미술반 친구들한테 빈정이 상해 그리 잘 대해주지 못했다. 밥 한 끼 내고 말았던 것 같다. 이제 후회한다. 인생이 이리도 빠르게 지나가는 것임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 때 만사 제치고 잘해주었을 것을.

더욱이 먼 훗날 내가 첫 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낼 때 전태원한테 단단히 신세질 수밖에 없었던사정까지 생각한다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태원과 나는 춘고(春高) 42회 동기다. 나는 춘천에서 태어나 춘중을 거쳐 춘고를 갔지만 태원이는 평창에서 태어나 평창중을 거쳐 춘고에 온 경우였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춘고를 같이 다니면서도 그의 존재를 잘 몰랐다. 뒤늦게 알게 되기는이학천이란 시를 쓰는 친구 때문이다. 학천이는 인제 출신 아이였는데 무슨 까닭인지 미술반 애들을 많이 알았다. 그 중 한 아이가 전태원이었던 거다.

그래서 나와 태원이의 첫 만남은 고3 때 예비고사를 치른 겨울날 소양로에 있는 학천이의 자취방에서 이뤄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날마다 학교 미술실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키가 큰 아이로서 그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그냥 그림 그리는 키 큰 아이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에는 교복 아닌 검게 물들인 군복 차림이었고, 어떤 때에는 소주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학천이란 친구한테 술을 배워 주말이면 그의 자취방에서 소주에 취해 문학이니 인생이니를 논하곤 했던 것이다.

당시 춘고 과학관 건물 내 1층에 있던 미술실. 수시로, 졸업한 미술반 선배들이 후배들을 찾아와 그림에 대해 얘기 나누고 담배 피우고 그러는 것 같았다. 큰 사각 화판들에, 유화 재료에서 풍기는 페인트 냄새에, 창의 커튼만 치면 이내 깜깜한 밤처럼 될 듯한 흐릿한 형광등 불빛에, 한복판에 놓인 난로의 열기에, 소주 냄새에, 담배 연기에 그 즈음 춘고 미술실은 학교 내 숨어 있는 해방 구역이었다.

어쨌든 태원이와 내가 정식으로 만나기는 예비고사를 치른 날, 저녁, 학천이란 친구의 소양로 자취방에서다. 우리는 지겨운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그 날 엄청 소주를 마셨다. 다섯 명이서 마셨다. 의도한바 아니었지만 문학 하는 애들과 미술 하는 애들의 합동 만취(滿醉)가 돼 버렸다. 문학 쪽은 학천이와 나, 미술 쪽은 태원이를 포함한 미술반 동창 셋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초겨울이었다.

 

 

 http://www.lswmuseum.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초기만큼 기능에 철저한 기계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칼날을 회전시켜 풀을 깎는 기능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달리 보탠 게 없다. 칼날을 강하게 회전시키려면 엔진이 있어야 한다. 엔진을 가동하려면 휘발유가 있어야 한다. 휘발유를 담으려면 휘발유 통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삼자(三者) 연동()에 가감(加減) 없는 기계, 예초기. 사진으로 올린 춘심산촌의 예초기를 보면‘살과 내장이 다 빠진, 뼈만 남은 인체 해부도’가 연상된다. 아아 예초기,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