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도에 우리 집을 지었다. 직장에 매여 직접 지을 수는 없기에 건축청부업자한테 맡겼다. 나는 시간이 날 때 집 짓는 현장을 잠깐씩 구경하곤 했는데 각 방의 벽과 문을 건축하는 과정을 보며 조금 놀랐다. 내 상식으로는 먼저 벽을 만든 뒤 문을 내는 거로 알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먼저 문의 틀을 지지대로 세워놓은 뒤에 벽을 쌓는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깨달았다. 벽을 쌓는 일은 단순하고 쉬운 작업이지만 문을 다는 일은 벽에 비해 무척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어서 그리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벽이야 벽돌들을 줄에 맞춰 쌓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문이 어디 그런가. 문짝도 있어야 하는데다가 문틀이 벽과 빈틈없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천생 벽보다 문이 먼저였다.

 

춘심산촌에 고라니니 멧돼지니 하는 분들이 예고 없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결코 반갑지 않은 그분들의 방문을 막고자 울타리 망을 밭에 두르기로 했다. 울타리 망도 여러 종류이지만 우리 내외는 저렴하고 보기 좋은 푸른색 비닐 울타리 망을 농협에서 사다 쳤다. 집 지을 때와 달리, 급한 대로 먼저 벽 같은 울타리부터 쉬 둘러쳤는데 문제는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히 여겼다. 울타리 한구석을 문으로 여겨 그곳을 젖혀두었다가, 밭일이 끝난 뒤 다시 복원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쉽게 여닫는 문이 되니 쉽게 쓰러지는 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문틀 같은 것도 없이 벽의 한 부분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식이었으니. (지금도 밭에다 비닐 울타리 망을 친 분들은 대개 이런 방식이다. 말 그대로 임시방편 울타리다.)

철학적인 깨달음이 왔다. ‘벽은 문이 있어야 존재한다. 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벽도 제대로 존재 못한다. 비닐 울타리 망이더라도 제 구실하기를 바란다면 문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문을 목공소에 의뢰해서 해결하기는 멋쩍었다. 돈도 돈이고 그런 문을 달아야 할 만큼 대단한 울타리가 아니지 않은가.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우리 밭 울타리 망에 어울리는 문을 만들어다는 데 성공했다. 들어간 재료는 '남은 울타리 망 일부와 폐()고추지지대 열 개 정도, 농사용 가느다란 끈 정도이다.

원리는 안방 벽에 거는 족자처럼거는 방식이다. 밭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는 그저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잡아 위로 올려 걸어놓으면 된다. 밭일을 마치고 나올 때는 위로 올려놓았던 문을 그냥 내려놓으면 된다. 중력의 원리로써 당연히 문은 아래 땅바닥까지 쉬 내려온다. (첨부해 올린 사진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조금도 반갑지 않은 고라니 멧돼지 분들. 당신들이 밤에 내려와 우리 밭의 작물들을 맛보려다가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울타리 망을 두고 아무리 돌아도 밭으로 들어갈 구멍 하나 없는 현실. 울타리 중 이상한 데()가 있어서 왠지 그곳으로 출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러나 네 발 짐승이라 그것을 들어 올릴 수 없으니 결국 입맛을 쩝쩝 다시며 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그렇다. 당신들이 네 발 짐승이길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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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지난 밤에 다녀갔다. 예고도 없이 춘심산촌을 누비고 갔다. 우리 내외는 오늘 종일 울타리 망을 새로 더 쳐야 했다. 그분은 멧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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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하수도 공사를 지켜봤다. 골목길을 파서 헌 하수도관을 꺼낸 뒤 그 자리에 새 하수도관과 흙을 채워 넣는데 이상한 것은 그 상태로 사나흘 간 공사를 않고 내버려두는 광경이었다. 즉시 흙을 다져 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그것은일부러 내버려두는광경이었다. 새 하수도관과 함께 새로 채워 넣은 흙들이 자연스레 알아서 빈 공간을 메우도록 일부러 시간을 두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하기는 집을 지을 때도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가을에 기초공사까지 하고 그냥 겨울을 나는 것이라 했다. 기초공사한 것이 알아서 대지(大地)와 한 덩어리가 되도록 긴 겨울이란 시간을 일부러 부여하는 것이다. 대지와 한 덩어리가 된 이듬해 봄, 그만큼 기초가 든든한 집이 어디 또 있을쏜가.

 

가슴 아픈 실연도 묘약이 따로 없다. 그저 세월이 흐르기를 바랄 뿐. 가수 송대관이 일찍이 노래 부르지 않았나?

세월이 약이겠지요 당신의 슬픔을/ 괴롭다 하지 말고 서럽다 울지를 마오/

세월이 흐르면 사랑의 슬픔도 잊어버린다/이 슬픔 모두가 세월이 약이겠지요/

세월이 약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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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에서 주례 맡은 어른이 신랑 신부한테 말씀하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하지만 그 말씀을 주의 깊게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신랑 신부의 부모님들은 어쩌면 당신의 자식들 아파트 전세자금 마련 문제에 골몰하며 앉아있을지 모른다. 사회자는 결혼식 끝날 무렵에 펼쳐질 신랑 신부 골탕 먹이는 프로그램(언제부턴가 이런 이상한 일이 자리 잡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멀쩡한 신랑을 환자로 만든다. 잘못된 이런 프로그램을 어서 바로 잡아야 한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하객들 중 일부는 신랑 신부 중 누구 인물이 더 났는지 비교하느라 바쁘고 또 다른 일부는 식이 끝나기 전에 어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 바쁘다. 하물며 오늘의 주인공들인 신랑 신부까지 먼 신혼여행지로 날라다 줄 비행기를 그리느라 주례사가 영 귓전에 담기지 못할 수도 있다.

 

세월처럼 덧없이 후다닥 지나가는 것도 없다. 오늘의 젊고 예쁜 신랑 신부들이 환갑 넘고 칠순을 바라보는 노년이 되는 것은 잠깐이다. 그렇게 늙었을 때 몸의 여기저기가 병이 나기 시작하면서 병구완에 나서야 할 사람이 바로 곁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오래 전 결혼식장에서 무심히 들었던 주례사의 한 구절이 뜻밖에 금과옥조가 되어 당신의 노후를 지켜줄 줄이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무심히 들었던 주례사. 그러나 그처럼 무겁고 금빛 나는 말씀도 없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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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푸린 흐린 하늘 아래 습기 가득한 숲과 밭. 눈앞의 춘심산촌 풍경을 두 손으로 움켜쥔다면 짙은 초록 물이 줄줄 흐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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