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아직도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7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이었다. 벼르고 별러서 선풍기 한 대를 사 갖고 집에 와 시원하게 작동한 것이다 그 날에.

직장생활이 얼마 안 돼 봉급이 적었던 것일까. 무더운 여름을 이겨나가도록 도와줄 선풍기 하나 장만하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고 그래서 그 날 가전제품 판매장에서 선풍기 하나를 사 갖고 셋방집으로 오면서 의기양양했던 자신의 모습. 하긴 그 시절은 흑백 TV라도 한 대 집에 들여놓으면 더 이상의 소일거리 도구는 없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렀다. 동네 쓰레기장에서, 멀쩡해 보이는 선풍기를 내다버린 것을 발견하는 일이 흔해졌다. K의 친지 분이 그런 선풍기를 하나 주워서 집에 놓고 틀었는데 과연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게 아닌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가전제품 회사가 여럿이 있는 대한민국이라 그럴까 기능은 이상 없지만 구닥다리 디자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전제품이 폐기처분되는 시대다.

 

그렇기에 10년 가까이 진득하게 K 곁을 지킨 모() 선풍기는 골동품 소리를 들을 만했다. 여름만 되면 K는 그것을 책상 바로 옆에 놓고 작동시켜가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런데 작년 여름 어느 날이다. 그 선풍기가 사망했다. 가전제품이지만 K는 사망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어느 일부분이 고장난 게 아니라 순식간에 폭삭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전원에 연결하고 작동스위치를 누르자 팬이 잠시 도는 듯싶더니 팬을 보호하는 망과 함께 마치 골판지로 만든 장난감처럼 폭삭 부서져 버리던 것이다. 수리 대상이 아니었다. 온전한 폐기 대상이었다. 단단한 쇠붙이도 피로도(疲勞度)라는 게 있어 어느 순간 부서진다더니 그런 경우일까. 정말 K는 지금도 그 선풍기의 최후를 생각하면 비록 가전제품일망정 경건하게 조의를 표하고 싶다.

 

나이 탓이다. 근년에 들어 K는 몸의 여기저기가 안 좋아져 병원 신세도 지고 복용하는 약도 늘어났다. 나름대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며 살아왔으나, 젊었을 적 툭하면 소주나 고량주를 마시며 밤을 지새운 죄가 그 벌을 받는 거라고 마음을 다독여본다.

그러면서 K는 이런 생각도 한다. 몸의 여기저기가 탈이 나면서 아픈 데가 늘어난 노후를 보내느니 그 선풍기처럼 한순간에 갔으면 싶다. 얼마나 대단한 그 선풍기의 생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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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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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두 그루가 작은 집을 사이에 두고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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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결혼한 지 2년이 돼 간다. 오늘, 빈 아들 방에 제 엄마가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가 옆 집 아주머니와 대면했다. 옆 집 주방과  아들  방 창문 사이 거리는 3미터쯤이다.
"아드님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요?"
"작년에 장가 갔어요."
"어머 전혀 몰랐네." 
"그냥 친척분들  모시고 조촐하게 식 올리느라 동네 분들한테는 연락을 못 드렸지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아드님이 창문을 열었다가 저를 보기만 하면 안녕하세요 하고 늘 인사했는데 창 문이 언제부턴가 닫혀만 있으니 이상했지요. 참 상냥한 아드님이었는데."
그 말을 엿들으며 내 눈앞에 착하게  생긴 우리 아들 웃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당사자가 떠나도 기억이 그 빈 자리에  남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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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살고 있는 도시의 한 병원에 입원했는데  바깥 풍경이 낯설다. 동서남북 방향조차 가늠이 안 된다. 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쯤인지 모호한 현재. 몸이 아프게 되자 정처 잃은 마음. 몸과 마음은 별도의 것이 아니었다. 몸 가는 데 마음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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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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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창은 밖의 빛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의 어둠을 보관하려고 설치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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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7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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