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고를 졸업 후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강원대 사범대를 갔고 태원이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1974년 여름이었다. 나는 저 먼 삼척의 삼척중학교 국어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교무실로 전화가 왔다. 전태원과 같은 미술반인이종렬이란 친구의 목소리였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동해안을 여행 중인데 마침 네가 삼척중학교에 있다기에 전화 걸었어. 태원이도 지금 나랑 같이 있어. ***여관에 있으니까 시간 나는 대로 들러.”

태원이가 아닌, 이종렬이가 전화한 건 당시만 해도 내가 태원이보다 종렬이와 더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기억나는데 종렬이는 학천이와 친했다. 그런 연유로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된 게 아닐까? 그리고 종렬이는 미술이 전공이면서도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강대 다니던 시절에 불쑥 찾아와 자기가 쓴 거라며 공책에 빼곡하게 정리된 소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워낙 전위적인 소설이라 나는 뭐라 소감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종렬이는 기대했던 칭찬이 나오지 않아 실망한 듯 고개를 연실 갸우뚱하던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는데 나는 삼척중학교 교무실에서 종렬이의 그런 전화를 받고 반갑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종일 수업하느라 고생하는데 자기들은 한가하게 바다가 보고 싶어동해안을 여행 중이라니. 나야말로 강대 다니던 시절, 무엇에 매이지 않는 아주 자유분방한 학생이었다. 예를 들겠다. 어느 학기 시험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오후에 있는 모 과목의 시험을 보려고 학교 가다가 문득오늘같이 햇살 화창하고 좋은 날 그 지겨운 시험을 보러 간단 말인가?’하는 의문에 그 길로 대폿집으로 가 막걸리를 마시며 시험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학점이 안 나와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에 고생깨나 했다.

그런 이력의 소유자였기에, 중학교 교사가 되어 꼼짝 못하고 교무실과 교실을 오가는 생활에 마음 한편으로는 늘이 지겨운 생활을 언제 그만 둘 수 없나갈등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처럼, 동해안 여행 중 친구 얼굴도 보고 가겠다는 미술반 친구들한테 빈정이 상해 그리 잘 대해주지 못했다. 밥 한 끼 내고 말았던 것 같다. 이제 후회한다. 인생이 이리도 빠르게 지나가는 것임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 때 만사 제치고 잘해주었을 것을.

더욱이 먼 훗날 내가 첫 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낼 때 전태원한테 단단히 신세질 수밖에 없었던사정까지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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