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경험을 했다. 뒤늦게 과거의 어떤 기억이오래된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나타나듯선하게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연재 수필 2>에서 전태원과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가 1974년 여름에 삼척에서 만난 것처럼 기술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971년 구() KBS 사옥 부근의푸른 화실에서 만났던 기억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푸른 화실은 전태원 이종렬 친구와 2년 선배 최치현의 아지트였다. 형식은 화실이지만 실상은 춘고 재학시절 과학관 건물 1층에 있었던 미술실의 재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친하게 지냈던 종렬이를 따라 푸른 화실에 처음 가 봤는데 실내에는 그리다 만 그림들과, 특주라는 이름의 막걸리 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요즘처럼 제 모양을 갖춘 막걸리 병이 아니다. 간장 병을 재활용한 것이다. 물론 흡연은 기본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숨어 있는 해방 구역에서 벗어나마음껏 해방 구역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최치현 선배는 이종렬 전태원보다 내가 더 먼저 알았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가 아닌, 특별하게도 교대 부속국민학교로 갔는데 그 때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에서 만난 이가 최치현 선배였다. (내가 2016년에 펴낸 소설집숨죽이는 갈대밭그분을 생각한다작품에 관련 내용이 일부 있다.) 내가 1학년 때부터 4학년 1학기까지 3년 반이나 최선배와 함께 교대부속국민학교 미술반이었음에도 최선배는 나를 기억 못했다. 그저 문학 하는 춘고 후배로만 알고 있었다. 훗날 안타깝게도 세상을 일찍 뜨고 만 최치현 선배. 다른 곳은 몰라도 춘천 지역에서 미술 하는 후배들은 그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 선배가 그리도 세상을 일찍 하직할 줄 알았더라면 생전에선배님. 제가 교대부국미술반이었습니다. 선배님과 3년반이나 같은 공간에서 지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까?’ 하며 한바탕 웃고서 막걸리를 대접했을 텐데안타깝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마음껏 해방 구역인 예의푸른 화실’.

종렬이 태원이를 거기서 만나 시내로 나갔다가 황당한 일을 나는 목격했다. 정말 배꼽 잡을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