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절판


옮긴이(얼그레이효과)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편 /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 논의가 있었다고 보는 챕터였다. / '투명성'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선호하고 채택하며 강제해 온 정의의 윤리 중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선호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290쪽

신자유주의가 다른 점은 정의를 '시장의 윤리'에 가깝도록 대담하게 수정하고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광범한 테크놀로지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사회적인 영역에 뿌리내(290)리도록 에씀으로써 '정의 사회'구현을 위해 분투한다는 점이다.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사회가 더없이 정의롭다 말하는 것은 절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윤리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이데올로기가 지닌 속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윤리 역시 여느 이데올로기처럼 사회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적대를 부인한다. 그 대신 신자유주의적 윤리가 도입되는 사회에 관한 허구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낸다. -290,291쪽

기호학에서 쓰이는 표현을 빌려온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에 고유한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체화하는 다양한 스타일을 전개한다. 그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우리는 '정의'의 담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비롯되는 다양한 윤리적 담론의 스타일을 책무성, 투명성, 공정성, 청렴 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91쪽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몸짓은 외려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면서부터 그 내부에 장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비판으로부터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한다. -291쪽

무엇이 정의의 윤리를 구성하는가, 과연 정의의 윤리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따지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외려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292쪽

정의의 윤리는 무엇보다 개인적인 주체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자유주의가 정의의 윤리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통적인 공동체를 윤리적 주체의 자리에 놓고자 했던 보수주의자들이나 아니면 그 자리에 '인민'이나 '근로 대중'을 놓으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이란 주체를 대신할 만한 효과적인 주체를 고안하지 못했다. 그 대신 사회주의자의 경우 이기심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공리주의자란 이유로 개인을 규탄하거나 보수주의자의 경우 보편적인 전통을 무시한 타락한 쾌락주의자란 이유로 그 개인을 성토했을 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자유주의는 그런 비판을 수용하거나 혹은 그와 타협하면서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293쪽

환언하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보완할 윤리를 언제나 동반한다.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돌이켜 보아도 좋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87년 체제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급진적인 사회운동이나 반정부운동이 제기했던 비판을 신자유주의적 비판으로 흡수할 수 있었(296)던 것은 정의의 윤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의 기획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윤리적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것을 꼽자면 바로 '감사(audit)'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파워는 198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감사 사회'의 도래, 혹은 '감사 폭발(audit explos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96,297쪽

감사 사회란 단적으로 책무성(accountablity)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conduct)를 관찰,측정,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직접적인 통제나 명령과는 달리, 다시 마이클 파워의 표현을 빌자면 '통제의 통제(control of control)'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각 개인이나 조직, 기관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다.-297쪽

감사는 무엇보다 책무성이라는 윤리를 따르면서 수행되는 실천이다. 여기서 책무성이란 교사든 사회복지사든 아니면 기업가나 공무원이든 자신의 행위를 과연 공정한가, 형평성이 있는가, 투명한가와 같은 다양한 정의의 규범에 따라 스스로 되돌아보고 평가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 감리, 사정과 같은 다양한 감사 활동은 바로 정의의 윤리를 가리키는 신자유주의적 명칭인 '책무성'을 겨냥한다. -299쪽

물론 이제 책무성이란 말은 더 이상 회계 활동에 묶여 있지 않다. 책무성은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의 규범들, 즉 투명성,형평성,대응성(responsiveness),책임성,청렴 나아가 경제성, 효율성(effectiveness)등을 망라하는 일반적인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무성이 회계적인 실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니 거꾸로 회계적인 실천은 책무서을 통해(300) 전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동원된다. 숫자를 세고 계산을 맞추며 장부를 기재하는 회계사는 또한 동시에 윤리의 수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300,301쪽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이다. 그때야 비로소 정의의 윤리는 다른 모습을 가진 정의의 윤리로 둔갑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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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구 좀 어렵네요. ^^ 읽다가 텍스트를 잘 이해를 못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란 생각을 하구요. 저 책에는 박홍규 교수님도 저자로 포함돼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라 읽을까 망설이고 있어요. ^^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도 못 읽어 봤지만, 정말 사색을 엄청하고 살아야 할 듯해요. 헛소리하는 댓글만 남겨서 죄송해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2   좋아요 0 | URL
박홍규 선생님은 번역된 책으로만 선생님의 간접적 목소리를 느껴 언제 저작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 몇 년간 사회학에서 '책임성', '투명성'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학자는 시민사회 - 기업 간의 '협치'를 위한 대안으로,,어떤 학자는 제가 올린 서동진 선생의 본 글처럼 이런 '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대립각이 있더군요. 관심분야라서 한번 올려봤습니다.

루쉰P 2011-05-15 07:44   좋아요 0 | URL
전 박홍규 교수님 오타쿠라서 거의 모든 책을 사서 가지고만 있어요. ^^ 강준만 교수와 이 분의 책만 모두 모아 놓고 혼자 흡족해하는 독서인이죠. ㅋㅋ

호~'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의견은 왠지 설득력이 있는데요. 하나 하나씩 들어가는 사회학 지식 뿌듯한데요. ㅋ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즐거운 박홍규 교수님 독서기 부탁드립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구판절판


차라리 이것은 앎들의 봉기이다. 한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 개념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사회와 같은 한 사회에서 형성된 한 과학적 담론의 기능과 제도화에 관련된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봉기이다. 이 과학적 담론의 제도화가 대학 안에서 또는 매우 광범위하게 교육장치 안에서 구체화되거나, 정신분석과 같은 상업적 이론의 망 안에서 혹은 마르크시즘의 경우처럼 그 모든 관련성과 함께(26)정치기구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계보학이 싸워야 할 것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의 효과에 대항해서이다. -26,27쪽

따라서 계보학이란 앎들을 과학 고유의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앎들의 예속상태를 풀고 그것을 자유스럽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하면 통일적이고 형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론적 담론의 강제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반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업이다.(중략)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이것은 전체적인 기획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28쪽

지난 몇 년 간의 강의에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물론 투쟁-억압의 도식편에 들어 있다. 내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도식이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그것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거슨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번째는 여러 관점에서 아직 그것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 전혀 다듬어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두번째로는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이 종국에 가서 포기되지 않으려면 적지 않은 부분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하튼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36쪽

어느 면에서 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가진 진실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권력의 유형은 어떤 것인가?-42쪽

두번째 수칙은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 것이다.즉 그것의 내면에서 포착하려 하지 말 것(중략)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권력의(46)대상이나 표적 또는 적용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외적 측면에서 권력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즉 권력이 뿌리를 내려 실제적인 효과를 발생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권력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중략)그러니까 남의 육체를 예속시키고 그의 행동을 이끌며 그의 행위를 관장하는 그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어떻게 군주가 저 높은 곳에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고, 수많은 육체와 힘,에너지,물질,욕망,사유 들에서부터 어떻게 실제로 물질적,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하들 혹은 신민이 형성되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46,47쪽

결국 리바이어던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자동적이며 동시에 통일적이고 실제의 개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시민을 몸체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그 정신은 주권앤,그러한 인위적 인간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권력에 대한 연구는 리바이어던의 모델 밖에서,즉 국가제도와 사법적 주권에 의해 구획지어진 범위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지배의 기술과 전술에서부터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53쪽

결국 내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어떻게 정밀과학의 전진기지에서 인간행동의 불확실하고 까다롭고 희미한 영역이 조금식 과학에 병합되었는가가 아니었다.인간과학이 조금씩 형성된 것은 과학의 합리성의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인간과학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과정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타입의 담론의 대립과 병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에는 주권 주변에 법의 조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규율들에 의해 행사되는 강제들의 기제가 있다.우리 시대에 권력이 이 법과 기술들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규율에서부터 생겨난 이 담론들과 규율의 기술들이 법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규격화의 과정이 점점 더 법의 과정들을 식민화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내가 소위 '규격화 사회'라고 이름짓는 것의 전체적 기능을 설명해주는 것이다.-58쪽

(전략)역사 안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은,그 첫단계로 자신을 의식하고 앎의 질서 안에 자신을 재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4쪽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일종의 지속적인 전쟁과 같은 힘의 관계를 사회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마키아벨리식의 분석을-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용어로-복원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군주의 손에 놓여져야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힘의 관계는 군주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시 말해서 민족 같은 것(귀족 혹은 나중에는 부르주아지 개념으로)-자신의 역사 한가운데에 표시하여 확정지을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원래 정치적 대상이었던 힘의 관계는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정치적 대상이 되었다.왜냐하면 귀족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앎을 되찾아 정치세력의 장 안에서 다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힘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였기 때문이다.-194쪽

자기 분석의 축과 무게 중심을 약간 바꾸어 놓음으로써 불랭빌리에는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을 했다.우선 소위 권력의 합리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원칙을 정했다.권력이란 소유의 가능성이 아니고, 상호관계가 작동하는 대립항의 차원에서만 연구해야 하는, 또는 연구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계일 뿐이다.(200-중략)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이것이 중요한 것인데)힘의 관계와 파워게임은 역사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사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어떤 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관계,어떤 파워게임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0,201쪽

다시 말하면 불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읅 역사의 이해원칙으로서 작동하게 했다.역사기술과 국가 경영이 서로 연속성을 갖게 된 것,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모델을 역사이해의 암호판으로 사용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이다.이 연속체 덕분에 이제부터는 역사를 말하는 것과 국가 경영을 말하는 것은 같은 용어, 같은 암호판, 같은 산술계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203쪽

문제는 역사 담론에서 내부적으로 통제되었던 전쟁관계가 어떻게 그 자리를 옮김(쇠퇴라고까지 할 수 없다 해도)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한다.전쟁관계가 다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외부적인 부정적 역할을 하면서이다.더 이상 역사를 구성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회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역할이며, 이때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관계나 사회의 조건이 아니고,다만 그 정치적 관계 안에서의 생존조건이다.이때부터 사회 그 자체 속에서,그리고 사회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위험들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호장치로서의 내적 전쟁의 개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그것은 사회적 전쟁이라는 사유가 역사에서 생물학으로,법률적인 것에서 의료적인 것으로 대선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52쪽

(얼그레이효과 주 : 1976.3.17 강의분이 그 유명한 생정치에 대한 푸코의 견해가 나오는 대목이다.본 책 277쪽부터 시작)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하는 것,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아니면 적어도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경도현상이다.-277쪽

삶과 죽음의 권리란 사실상 무엇을 뜻하는가?그것은 물론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권리는 항상 죽음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된다.삶에 대한 군주권의 효력은 군주가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때부터 발생한다.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권리란 결국 죽일 수 있는 권리이다.군주가 삶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죽일 수 있는 순간에 한해서이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칼의 권리이다.그러므로 삶의 권리와 죽음의 권리는 대칭이 아니다.그것은 살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아니라,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이다.이것이 명백한 비대칭성이다.-278쪽

19세기의 정치적 권리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 오래된(278)군주의 권리-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를 새로운 권리로 대체까지는 아니다 하더라도,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새로운 권리는 구 권리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침투하고 관통하고 수정하여 정반대의 권리,아니 차라리 살게'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권력이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권리는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정착된 이 권리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278,279쪽

규율적이 아닌 이 새로운 권력기술이 적용되는 영역은-신체를 상대하는 규율과는 달리-사람들의 생명이다.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극단적으로 말하면 종으로서의 인간을 상대한다.(중략)새롭게 정착한 기술은 다수의 인간을 상대하기는 하되,그것이 개체로 요약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다수가 모든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출산,질병 등 인류 전체의 과정에 영향받는 글로벌한(280)전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이다.그러므로 개인화의 모델에 따라 권력이 인체를 장악한 후 두번째로 시도된 권력의 인체 장악은 개인화가 아니라 전체화였으며, 다시 말하면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 행사였다.18세기에 이루어진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 이후 18세기말에 더 이상 해부정치학이 아닌 어떤 것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인종에 대한 '생물정치학'이라고 부르고 싶다.-280,281쪽

요컨대 질병을 인구현상으로 본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갑자기 덮치는 죽음-그것이 전염병이다-으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끈질기에 그것을 파먹고 점점 작게 만들어 마침내 그것을 약화시키는 그러한 점진적인 죽음으로서의 질병인 것이다.18세기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현상이었다.그리고 이것이 의료행위의 조정과 정보의 집중,앎의 규격화와 함께 공중보건을 주임무로 하는 의학을 만들어 냈다.이 의학은 전인구의 의료화와 보건교육 캠페인의 모습을 띠었다.그러므로 출산,출생률,사망률 등이 문제였다.-282쪽

생물정치에 의해 작동된 메커니즘은 우선 예측과 통계,그리고 전체적인 측정 다음에 그런 특정의 현상이나 개별적인 개인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이고 글로벌한 현상의 결정 수준에서 개입을 한다. 사망률을 수정하고 낮추어야 하며,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해야 한다.우연적인 요소가 많은 인구 전체 안에서 균형상태를 고착시키고,평균을 유지하며,일종의 항상성을 수립하고,보상을 확보할 수 있는,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장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 수준으로 만드는 그러한 규제 장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284쪽

죽음은 권력의 영향권 밖에 나오고,권력은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만 장악하게 되었다.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이다.이런 관점에서 죽음이 사적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중략)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쳤다.-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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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품절


윤리와 정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이고, 그 둘은 모두 필요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들이 각각 갖는 본질적인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그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 둘의 차이도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윤리가 필요하고,그리고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윤리의 복귀를 고찰하기 위해 내놓는 이 첫 번째 설명은 한 세대에서 다른 한 세대로, 즉 정치가 가장 우선인 세대(68세대)에서 윤리가 가장 우선인 세대('윤리의 세대', 또한, 역설적이긴 하지만, '미테랑세대')로 이행한 과정에 대한 실증적,객관적 관찰로도 바꾸어 묘사할 수 있다.-29쪽

그런데 이 이행은 근본적으로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중대한 위기가 생겨난다는 징후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운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기능이다-하려는 감정을 차츰 잃어갈수록, 그들은 윤리적 가치들의 영향력 아래 폐쇄된 채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내게 이 첫 번째 설명은 근본적으로 중의성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우리는 젊은이들이 윤리적 혹은 인도주의적 실천으로 복귀한다는 사실에 물론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복귀의 과정이 고유하게 정치적인 모든 영역을 희생하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0쪽

내가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는 가장 위협하는 건 내가 '보편화된 무관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즉, 무엇에 대해서건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우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작은(51) 사적 영역만을 무한정 개발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회적 연결이 순전하고 명백하게 해체된 현상-사회학자들이 개인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현상, 혹은 우리 프랑스의 사회학자들이 익숙해진 영어식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면, 커쿠닝cocooning이다-51쪽

(각주 22) 나는 여기서 보다 빠른 시간 안에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기 위해, 일종의 "임시적 칸트주의"에 의지했을 따름이다.(중략)칸트는 윤리에 관하여, 적어도 현상학적으로는 옳다. 그는 윤리를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그린다.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각자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뤄지는 행위(예를 들어 보상을 바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고유하게 윤리적인 가치를 상실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누구도 윤리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효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는 이러한 효용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만 고유하게 윤리적인 것이 된다.-61쪽

신문이나 세미나들에서 일상적으로 기업윤리라고 말하는 것이 이런 상인의 행위를 실천하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보통 윤리의 요구사항에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그것은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중략)그런데 윤리가 이윤의 원천이라면, 그 이윤을 창출하는 일에서 윤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이윤을 창출하는 일은 경영의 영역, 마케팅의 영역, 관리의 영역에 속하지, 더 이상 윤리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65쪽

윤리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간주하는 것 모두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선험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칸트와 대조된다)우리가 모든 보상이나 처벌, 심지어는 모든 바람과 관계없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모두를 가리킨다. 윤리는 한 양심에게 무조건적으로 의미 있거나 강제되는 것(92) 모두를 가리킨다.-92,93쪽

윤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윤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94쪽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된다면,윤리는 정치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정치가 자신의 영혼이나 양심을 달래는 데 사용하는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153쪽

기업의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업 내에 윤리가 존재해야 한다. (중략)나는 조금 전에 "여러분 대신에 시장이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또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여러분 대신에 회사가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176쪽

이타성과 연대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타성이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면,연대는 사회적 효용성을 위해 지적인 방식으로 이타성을 조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시대에 뒤진 언어로 보이는 '이타성'이라는 표현을 더(183)이상 사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거의 항상 입에 담고 다니는 말이 '연대'인데(그런데 오늘날에 정치적으로는 이 말이 적합하다),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한 나머지 두 단어의 개념을 혼동해서('윤리의 세대'와 비슷하게)'연대'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갖는 선의의 감정'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대'라는 말의 내용,기능성,효과를 무시한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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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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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한다 - 이 상상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적게 믿는 것이 아니라 훨씬 많이 믿고 있다.-10쪽

'공산주의'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 그것은 여전히 분석과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가?라는 자명한 물음을 묻는 대신 정반대의 물음, 즉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옛것과 새것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새 용어들('포스트모던 사회' '위험사회' '정보사회' '포스트산업사회' 등)을 끊임없이 창조해내기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16) 것의 윤곽을 놓치고 있다. 새것의 진정한 새로움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것 안에 있는 '영구한' 것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16,17쪽

우리가 왜 위기에 책임이 있는 '월스트리트'쪽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메인스트리트'의 평범한 주태담보 대출자들에게 그 댓가를 치르도록 요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경제학 이론에서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것 - '어떤 사람의 행동이 유발할 수 있는 여하한 손실에 대해서도 보험이나 법률, 또는 다른 어떤 기관이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위험'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가령 내가 화재보험을 들었다면 나는 화재예방에 덜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29쪽

그러면 구제금융안은 정말 '사회주의적' 조치, 미국 내 국가사회주의의 탄생에 해당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사회주의인바, 그 '사회주의적' 조치의 주요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구원에 복무할 때 은행씨스템의 '사회화'는 용인된다. (중략) '도덕적 해이'가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다면? 두가지를 분리시킬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31쪽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없는-진리의 차원에서만, 즉 세계시장 메커니즘의 '실재(the real)'로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쏘르망의 주장처럼 항상 현실이 불완전하고 항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완전함에 대해 몽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병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5쪽

'지배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다시 말해 지배계급은 하층 계급이 경제의 현 상태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71쪽

(전략)현재의 위기로부터 정말로 헤게모니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판본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생태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자유시장 체제가 과도한 착취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동원은 생태적 목표, 빈곤에 대한 투쟁,그리고 다른 가치 있는 목적들에 봉사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어떤 새로운 정향의 징후가 포착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72쪽

자본가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데, 그들의 삶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모토는 사회적 책임과 감사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치고 큰 부를 축적하게 허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말할 수 없이 잘 대해주었으며, 따라서 사회에 뭔가를 돌려주려고 보통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이다.오직 사회를 배려하는 이런 종류의 접근법만이 사업의 성공만을 가치있게 만든다. -73쪽

전지구적 책임감의 새로운 기풍은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공익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dispositif)- '도구적 이성', '기술적 착취', '개인주의적 탐욕', 혹은 그밖의 무엇으로 불리든 - 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분리되어, 이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는 손상되지 않게 놓아둔 채 어떤 새로운, 더욱 '정신적인'관점에 의해 (73) 극복되어야 할(그리고 극복될 수 있는) 하나의 자율적 삶 혹은 '실존적 태도'로 이해된다.-73,74쪽

체제 자체에 내재한 (팽창의)강박은 사적인 심리 성향,개인적 죄의 문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자본의 자기추진적 순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의 궁극적 실재(Real)로서 존속한다-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초하는 가장 명백한 위험에 대해서조차 맹목이 되도록 만들면서 우리 활동을 통제하는 주체이기에 규정상 통제될 수 없는 어떤 짐승으로서.이는 하나의 거대한 물신적 부정이다- '나는 내가 자초하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궁극적 붕괴의 불가(77)피성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붕괴를 조금 더 연기할 수 있고,조금 더 위험을 무릅쓸 수 있고,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 하층계급의 '비합리성'과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 자기맹목화의 '비합리성'이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77,78쪽

주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나의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 교수 등등으로서)공적 생활에서 떠안고 있는 상징적 결정들과 책임들에 대비되는 나의 '진정한 존재'다. 이에 관한 정신분석학의 첫번째 교훈은 이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은 근본적으로 가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막, 혹은 거짓 간격인데 그 기능은 말하자면 체면을 유지하는 것, 나의 진정한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을 감지 가능한(나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을 실천하는 방식 중 하나는 그러므로 '내면생활'과 그 '진실한' 감정의 이 위선을 까발리는 전략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83쪽

소비의 차원에서 이 새로운 정신은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상품의 유용성 때문에, 또는 지위의 상징으로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이 제공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그것을 구매하며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소비한다. -109쪽

오늘날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경관은 이처럼 물신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냉소적인 것과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두 경우 모두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물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면서 논증을 무시하는(혹은 적어도 불신하는)반면 냉소주의자는 논증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그 상징적 효율성은 무시한다. -140쪽

자본주의의 경우가 그러한데,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한계의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서만 자신을 재(252)생산할 수 있다. -252,253쪽

이제 우리는 더이상 "몫이 없는 부분"의 입장에서 질서를 전복하는 게임을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질서가 이미 자기 자신의 영구전복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개와 더불어,끊임없는 역전,위기,재발명을 동반하며 어떤 면에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정상적'삶 자체이며,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254)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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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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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진보단체와 지식인에게 수없이 들어온 '신자유주의 반대', '성찰'과 '연대' 등의 사회과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말들이 나에게는 마치 방언처럼 들렸다. 사회과학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내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삶의 총체적 진보는 아닌 듯 했다. 제도와 정책은 진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삶의 내용과 생활문화는 한참 후진 듯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장은 옳을지 몰라도 내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과 사람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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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3-1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1년 3월 10일은 고대 교정에 <김예슬 선언>이 나온 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선언은 참 '잔인하게' 잊혀져 갔네요.

Arch 2011-03-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기호 책에서 김예슬 선언에 대해 나왔어요. 보셨죠?
책을 보니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느낌이랑 냉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보였어요. 그렇다고 김예슬씨가 섣부르게 행동했다거나 잊혀질만하다는건 아니지만.

저도 직장을 다니면서 이게 아닌건 알겠는데 구조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얼그레이효과 2011-03-13 15:55   좋아요 0 | URL
저도 확 땡기는 그런 '전략'은 사실 없어요..다만.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이 갖는 '분노의 힘'들이라고 할까.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직, '대학의 위기'는 더 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위기들은 상당히 표면적이라고 생각되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김예슬 선언은 대학의 위기보다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의 위기를 깨우치게 해 준 '사건'이 아니었나, 1년을 정리하게 되네요. 분발해야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