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문예신서 142
미셸 푸코 지음, 박정자 옮김 / 동문선 / 1998년 12월
구판절판


차라리 이것은 앎들의 봉기이다. 한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 개념들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사회와 같은 한 사회에서 형성된 한 과학적 담론의 기능과 제도화에 관련된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봉기이다. 이 과학적 담론의 제도화가 대학 안에서 또는 매우 광범위하게 교육장치 안에서 구체화되거나, 정신분석과 같은 상업적 이론의 망 안에서 혹은 마르크시즘의 경우처럼 그 모든 관련성과 함께(26)정치기구 안에서 구체화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계보학이 싸워야 할 것은 소위 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담론이 갖는 고유한 권력의 효과에 대항해서이다. -26,27쪽

따라서 계보학이란 앎들을 과학 고유의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 편입시키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앎들의 예속상태를 풀고 그것을 자유스럽게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하면 통일적이고 형식적이며 과학적인 이론적 담론의 강제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반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업이다.(중략)고고학은 국부적 담론성의 분석에 적합한 방법이고, 계보학은 그렇게 묘사된 국부적 담론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거기서 끄집어 낸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이것은 전체적인 기획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다.-28쪽

지난 몇 년 간의 강의에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은, 물론 투쟁-억압의 도식편에 들어 있다. 내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도식이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나는 그것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거슨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번째는 여러 관점에서 아직 그것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 전혀 다듬어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두번째로는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이 종국에 가서 포기되지 않으려면 적지 않은 부분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하튼 '억압'과 '전쟁'이라는 두 개념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할 것이다.-36쪽

어느 면에서 나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터이다. 권력의 관계들이 진실의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규칙들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가진 진실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권력의 유형은 어떤 것인가?-42쪽

두번째 수칙은 권력을 의도나 결정의 차원에서 분석하지 말 것이다.즉 그것의 내면에서 포착하려 하지 말 것(중략)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잠정적으로 권력의(46)대상이나 표적 또는 적용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외적 측면에서 권력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즉 권력이 뿌리를 내려 실제적인 효과를 발생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권력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중략)그러니까 남의 육체를 예속시키고 그의 행동을 이끌며 그의 행위를 관장하는 그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어떻게 군주가 저 높은 곳에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고, 수많은 육체와 힘,에너지,물질,욕망,사유 들에서부터 어떻게 실제로 물질적,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신하들 혹은 신민이 형성되는지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46,47쪽

결국 리바이어던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자동적이며 동시에 통일적이고 실제의 개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모든 시민을 몸체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그 정신은 주권앤,그러한 인위적 인간의 모델을 제거해야만 한다.권력에 대한 연구는 리바이어던의 모델 밖에서,즉 국가제도와 사법적 주권에 의해 구획지어진 범위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지배의 기술과 전술에서부터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53쪽

결국 내가 지난 몇 년 사이에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어떻게 정밀과학의 전진기지에서 인간행동의 불확실하고 까다롭고 희미한 영역이 조금식 과학에 병합되었는가가 아니었다.인간과학이 조금씩 형성된 것은 과학의 합리성의 진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인간과학의 담론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과정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두 타입의 담론의 대립과 병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에는 주권 주변에 법의 조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규율들에 의해 행사되는 강제들의 기제가 있다.우리 시대에 권력이 이 법과 기술들을 통해 행사된다는 것,규율에서부터 생겨난 이 담론들과 규율의 기술들이 법에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규격화의 과정이 점점 더 법의 과정들을 식민화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내가 소위 '규격화 사회'라고 이름짓는 것의 전체적 기능을 설명해주는 것이다.-58쪽

(전략)역사 안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은,그 첫단계로 자신을 의식하고 앎의 질서 안에 자신을 재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4쪽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일종의 지속적인 전쟁과 같은 힘의 관계를 사회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마키아벨리식의 분석을-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용어로-복원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는 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군주의 손에 놓여져야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힘의 관계는 군주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시 말해서 민족 같은 것(귀족 혹은 나중에는 부르주아지 개념으로)-자신의 역사 한가운데에 표시하여 확정지을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원래 정치적 대상이었던 힘의 관계는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정치적 대상이 되었다.왜냐하면 귀족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앎을 되찾아 정치세력의 장 안에서 다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힘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였기 때문이다.-194쪽

자기 분석의 축과 무게 중심을 약간 바꾸어 놓음으로써 불랭빌리에는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을 했다.우선 소위 권력의 합리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원칙을 정했다.권력이란 소유의 가능성이 아니고, 상호관계가 작동하는 대립항의 차원에서만 연구해야 하는, 또는 연구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계일 뿐이다.(200-중략) 불랭빌리에에게 있어서(이것이 중요한 것인데)힘의 관계와 파워게임은 역사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사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어떤 것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관계,어떤 파워게임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00,201쪽

다시 말하면 불랭빌리에는 그때까지 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원칙이었던 것읅 역사의 이해원칙으로서 작동하게 했다.역사기술과 국가 경영이 서로 연속성을 갖게 된 것,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국가 경영의 합리성의 모델을 역사이해의 암호판으로 사용하는 것.그것이야말로 역사-정치적 연속체를 형성하는 것이다.이 연속체 덕분에 이제부터는 역사를 말하는 것과 국가 경영을 말하는 것은 같은 용어, 같은 암호판, 같은 산술계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203쪽

문제는 역사 담론에서 내부적으로 통제되었던 전쟁관계가 어떻게 그 자리를 옮김(쇠퇴라고까지 할 수 없다 해도)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한다.전쟁관계가 다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외부적인 부정적 역할을 하면서이다.더 이상 역사를 구성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회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역할이며, 이때 전쟁은 더 이상 정치적 관계나 사회의 조건이 아니고,다만 그 정치적 관계 안에서의 생존조건이다.이때부터 사회 그 자체 속에서,그리고 사회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위험들에 대항해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호장치로서의 내적 전쟁의 개념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그것은 사회적 전쟁이라는 사유가 역사에서 생물학으로,법률적인 것에서 의료적인 것으로 대선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52쪽

(얼그레이효과 주 : 1976.3.17 강의분이 그 유명한 생정치에 대한 푸코의 견해가 나오는 대목이다.본 책 277쪽부터 시작) 19세기의 기본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하는 것,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아니면 적어도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경도현상이다.-277쪽

삶과 죽음의 권리란 사실상 무엇을 뜻하는가?그것은 물론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권리는 항상 죽음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된다.삶에 대한 군주권의 효력은 군주가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때부터 발생한다.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권리란 결국 죽일 수 있는 권리이다.군주가 삶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죽일 수 있는 순간에 한해서이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칼의 권리이다.그러므로 삶의 권리와 죽음의 권리는 대칭이 아니다.그것은 살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아니라,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이다.이것이 명백한 비대칭성이다.-278쪽

19세기의 정치적 권리의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 오래된(278)군주의 권리-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를 새로운 권리로 대체까지는 아니다 하더라도,그것을 보완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새로운 권리는 구 권리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침투하고 관통하고 수정하여 정반대의 권리,아니 차라리 살게'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권력이 되었던 것이다. 군주의 권리는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롭게 정착된 이 권리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278,279쪽

규율적이 아닌 이 새로운 권력기술이 적용되는 영역은-신체를 상대하는 규율과는 달리-사람들의 생명이다.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극단적으로 말하면 종으로서의 인간을 상대한다.(중략)새롭게 정착한 기술은 다수의 인간을 상대하기는 하되,그것이 개체로 요약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다수가 모든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출산,질병 등 인류 전체의 과정에 영향받는 글로벌한(280)전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이다.그러므로 개인화의 모델에 따라 권력이 인체를 장악한 후 두번째로 시도된 권력의 인체 장악은 개인화가 아니라 전체화였으며, 다시 말하면 육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을 향해 행해지는 권력 행사였다.18세기에 이루어진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 이후 18세기말에 더 이상 해부정치학이 아닌 어떤 것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인종에 대한 '생물정치학'이라고 부르고 싶다.-280,281쪽

요컨대 질병을 인구현상으로 본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갑자기 덮치는 죽음-그것이 전염병이다-으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 미끄러져 들어와 끈질기에 그것을 파먹고 점점 작게 만들어 마침내 그것을 약화시키는 그러한 점진적인 죽음으로서의 질병인 것이다.18세기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현상이었다.그리고 이것이 의료행위의 조정과 정보의 집중,앎의 규격화와 함께 공중보건을 주임무로 하는 의학을 만들어 냈다.이 의학은 전인구의 의료화와 보건교육 캠페인의 모습을 띠었다.그러므로 출산,출생률,사망률 등이 문제였다.-282쪽

생물정치에 의해 작동된 메커니즘은 우선 예측과 통계,그리고 전체적인 측정 다음에 그런 특정의 현상이나 개별적인 개인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이고 글로벌한 현상의 결정 수준에서 개입을 한다. 사망률을 수정하고 낮추어야 하며,수명을 연장시키고 출산을 권장해야 한다.우연적인 요소가 많은 인구 전체 안에서 균형상태를 고착시키고,평균을 유지하며,일종의 항상성을 수립하고,보상을 확보할 수 있는,요컨대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구에 반드시 있게 마련인 우연적인 요소들 주변에 최대한의 보장장치를 마련하고, 삶의 질을 최적 수준으로 만드는 그러한 규제 장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284쪽

죽음은 권력의 영향권 밖에 나오고,권력은 죽음을 전체적,일반적,통계적 수준에서만 장악하게 되었다.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이다.이런 관점에서 죽음이 사적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중략)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은 죽음을 내팽개쳤다.-2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