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몰락
서보명 지음 / 동연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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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하다. 대학은 신(8)학과 철학이 부여하는 이상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그 이상은 한 시대, 그 문화권의 선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의 체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생산과 소비와 경쟁이라는 이념을 따라 대학이 움직이기를 요구한다.(중략)대학의 학문과 제도를 기업자본주의의 생산과 판매의 모델로 이해하는 것은, 오래된 대학의 자의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은 필수적이다.-8,9쪽

대학을 개혁할 프로그램이나 이념을 앞세우기 이전에, 과거의 대학이란 어떤 곳이었고,현재의 대학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런 질문을 과거에는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논의했다면, 과연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본질과 사명은 무엇인지 물어야만 한다.이를 위해 대학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논쟁과 이론과 역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9쪽

대학의 사명과 본질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란 조건하에 가능하다. 정신적 간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거리는, 중세 때에는 신학이라는 형이상학으로 가능했고, 근대의 대학에서는 순수한 과학과 문화라는 이념으로 가능했다. 현실의 역사에서 폐해도 많았던 대학이었지만,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는 공간이라는 이해를 빼면 대학의 자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27쪽

이미 많은 대학이 기업화되어버린 상황에서 대학이 기업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기업이 곧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으로 등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비판적 배움의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 서구 사회에서는 이상적으로나마 그 역할을 교회에서 감당했다. 교회가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세속 사회에서, 대학이 그 기능을 해온 면이 있었(42)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할뿐더러, 대학의 그런 이상적 가치가 부정되는 시대이다. 대학의 위기나 대학의 몰락을 언급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2,43쪽

미국에서도 인문학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을 리서치란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술적인 사고와 증명과 증거를 바탕으로 새것을 추구하는 리서치는 인문학의 고유한 양식이라 할 수 없다. 인문학 공부를 나타내는 말로 '학문'이라는 옛 표현이 영어로는 'scholarship'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 Professor(교수)와 Professional(전문인)의 임무는 profess(공언, 고백)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51쪽

인문학에서 professor의 원래적인 의미는 지식의 창출이나 기술적 능력과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고백적 증언은 게산으로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또 그 진리를 명확한 증거로 구분할 수 없다. 신뢰라는 뜻의 trust는 옳다는 뜻의 true와 어원이 동일하다. professor가 researcher로 이해될 때, 인문학은 형식에 매이게 된다. 각주를 제대로 달고, 인용을 어떻게 하느냐가 인문학의 기초가 되고 trust와 true의 기준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표절 plagiarism이란 최악의 죄를 범하게 된다. -51쪽

근대 대학의 모든 새로운 변화를 담아냈던 표현은 '자유'였다. 이 자유는 양심의 자유 곧 인간의 자유였다. 중세 대학이 '신의 자유'를 사고와 세계의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대학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그 중심이 되고, 모든 당위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가 된다. 종교개혁 시대의 양심의 자유가 18세기에는 '생각의 자유'로 등장해 대학의 신조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 의미까지도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88쪽

칸트는 신학, 법학, 의학의 상위 학부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대학을 상상했다. 더 나아가 철학이 신학이나 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이성의 지배만 받는 자유로운 학문이기 때문에 이성의 이름으로 상위 학부를 견제하고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 이유는 철학의 중심은 모든 배움의 조건인 진리이지만, 상위 학부의 가르침은 국가 차원의 실용성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92-중략)철학은 상위 학부의 가르침이나 연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통해 대학을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철학은 이성의 관심을 지키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자유가 보장될 때 국가까지도 이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92,93쪽

칸트는 당시 대학 내부의 학문을 두 가지로 분리했다. 통제가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과 절대 자유를 필요로 하는 비실용적이고 사색적인 학문이다. 그 구분은 당시 전문화(Professionalization)되어 가는 대학을 자유로운 학문의 전당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 결과는 칸트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과학이 철학의 한 부분으로 남게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실용적인 학문으로 철학에서 분리되었다.또 철학을 인간의 본성을 가다듬는 학문으로 여겼지만, 철학 자체도 전문화되어, 대학과 제도에 구속된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95쪽

베를린 대학은 독일 역사의 큰 위기 상황에서 출발했다. 1806년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정신적 공황기를 맞았다. 1807년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 프러시아는 계몽과 근대를 지향하면서 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 이유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정신적 가치를 책임질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1810년 베를린 대학의 설립은 이런 상황에서 가능했고, 곧 프러시아의 으뜸가는 대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근대 리서치 대학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대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99쪽

베를린 대학은 기존 대학의 제도와 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99)다. 대학이 아직도 중세 대학의 종교적인 진부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중략) 베를린 대학은 이런 민족 문화를 살리고 학문을 꽃피우는 시대적 요구를 안고 태어났다. 이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한 개념이 과학적 연구(Research)였고, 이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대학이 국가를 섬기는 방법이 되었다. 그 후 대학은 지성과 지적인 행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헤겔은 '대학이 곧 우리의 교회'라는 의미 깊은 주장까지 펼친다. -99,100쪽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은 어떻게 되었는가. 물론 신학부가 없어지진 않았다. 피히테는 신학이 리서치 대학에서 존재하려면 교회나 계시의 전통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려면 다른 종교로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학이나 종교의 가르침은 이미 인간의 양삼에 녹아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103쪽

베를린 대학의 신학부를 책임졌던 슐라이어마허 역시도 대학 내에서의 신학이 과학적 학문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신학이 시대를 읽고 변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 틀을 제공해준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당위성과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103)했지만, 대학 내의 신학이 합리적인 학문성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그 이후 독일 대학에서 과학성을 추구하던 신학은 고등비평과 역사비평 등을 발전시키면서 대학 내 신학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나갔다. 종교의 과학을 추구한 종교학이 나온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다.-103,104쪽

19세기 중반 이후 현대까지 미국 대학의 발전사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는 기업 운영(business)을 다루는 경영학이 대학에 등장한 것이다. 경영학부도 19세기 말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고, 그 합법성을 의심받던 기업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측면 때문에, 경영대학은 초기에 기존 인문학 교수들에게 견제도 많이 받았다.-111쪽

교육의 목적을 인적 자원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교육을 응용과학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이념적인 배경에서 나온 발상이다. 인간을 자본주의 생산의 한 요소로 보고, 교육을 그 자원을 만드는 과정으로 판단하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상황은 글로벌 자본주의 이념이 승리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124)그와 더불어 지식과 교육에 대한 공학적인 인식도 늘고 있다. 오차 없는 계산을 통해,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공학의 방법으로 생산해내고자 하는 것은 예측과 측정이 가능한 인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험 걱정을 해야 하는 인간, 스스로를 경영의 대상이라 믿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124,125쪽

한국 대학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학 모델은 해방 후 미군정 체제하에서 도입된 미국의 주립대학 모델이다. 해방 직후 일제강점기에 대학으로 인가를 받지 못했던 학교들이 군정기에 정식 대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대학이란 고등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해결해주는 차원도 있었고, 미국식 고등교육의 보편화를 제도화하는 것이기도 했다.(중략) 미국의 주립대학 모델이 이식되는 과정은 한국의 대학이 학문의 백화점으로 변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식의 학문화, 학문의 분업화가 대학을 단과대학 위주로 편제한 것에서 이 점은 드러난다. -150쪽

현재 한국에서는 한국의 대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보다 현대 서구 자본주의의 대학론을 시대의 개혁적인 흐름으로 수용하는 타율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대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보다 공리적이고 기술적인 담론만 성행한다. 그 관점에서 볼 때 대학은 문제일 수밖에 없고, 그 존재 이유까지도 의심받게 된다. -154쪽

중세 스콜라 신학이 대학 내에서 신학의 위상을 높게 세워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신학은 이미 분열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신학이 합리적인 분석으로 흘러, 대학 이전 세대의 신학 곧 수도원 신삭의 기도와 묵상과 실천의 전통을 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의 우선권을 설파했지만, 철학과 의학과 법학이 신학적 사고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신학이 학문의 연결성과 통합성을 연구하는 학문(243)적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 철학은 사변적인 학문으로 의학은 영혼과 분리된 몸만 다루는 기술로, 법학은 왕권을 유지하는 세속법의 영역으로 발전해나갔다. -243,244쪽

이런 학문의 세분화 내지는 분열화의 과정은 현재까지 진행중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대학은 독립적인 학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학과는 내적인 방법론과 독특한 주체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 섭렵하고 다른 학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인정받는 학자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세분화된 영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만을 학문적이라고 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기독교 대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신학이나 종교적 가치가 어떻게 다양한 학문을 연결시키고, 어떻게 한 학문이 전체적인 가치의 부분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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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3-1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아니라, 부탁받은 서평을 위해 접어놓은 구절을 옮겨놓은 것.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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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이템으로 바꾸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또한 아이템으로 바라보는 속물. 그런(67) 속물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속물이 인간의 탈을 쓴 동물이라면 동물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속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속물들은 인간이 동물로 퇴행하였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사실 동물은 인간의 퇴화가 아니라 속물의 진화이다. 속물이나 동물이나 내면이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동물은 속물이 형식적으로나마 필요로 하던 타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67,68쪽

인간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윤리적 존재가 된다. 그래서 윤리적 존재임을 가장하는 속물에게는 타자가 알리바이로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물은 아예 그런 알리바이도 필요 없다. -68쪽

속물들은 도덕이 사기임을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도덕이라는 외피를 필요로 한다. 도덕을 자기를 돌아보기 위한 윤리로서가 아니라 남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로서 필요로 한다.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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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What's Up 7
다리안 리더 지음, 박소현 옮김 / 새물결 / 2010년 9월
품절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즉 예술작품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20쪽

일단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안 우리가 시각 예술을 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거기서 이전에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 - 종종 <모나리자> 자체와 관련해 - 을 이야기해왔다.-26쪽

미학을 둘러싼 대중적인 논쟁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큰 쟁점 중 하나는 모던 아트 작품을 아이들의 그림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그림은 애라도 그리겠다"라는 말을 어떤 작품이 예술작품이 아니라는 말, 즉 '임금님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아이의 작품이 공모전에 출품되기도 하는데, 만약 화가의 나이가 밝혀진다면 미술계의 자만심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33쪽

"이런 그림은 애라도 그리겠다"는 말을 무지의 표시로 해석하거나 이해의 표시로 해석할 때,사람들은 어떤 작품과 그(33)것이 놓여 있는 장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한다. 소년 화가 따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어떤 소년의 그림이 적시적소에 놓인다면 그것을 그림이 아니라고 잽싸게 부인할 수 있을까? -33,34쪽

'문화'는 시각적 장이 이미지로부터 무언가를 배제시키면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라서 배제된 요소가 돌아오면 우리는 세계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좌표를 상실하게 된다. -36쪽

정신분석의 시각 이론은,(중략)우리는 보기 전에 보여지며, 우리의 시선은 소위 시선들의 동력학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시각적 미적 반응을 연구하려면 관찰자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통념과 얼마나 다른지 주목하라. 우리는 보는 사람과 대상이라는 2항이 아니라 적어도 3항을, 즉 보는 사람과 대상,그리고 보는 사람을 보고 있는 제3의 인물이라는 3항을 가정해야만 한다.-40쪽

(오스트리아 예술가 아니타 비텍의 작품에 대하여) / 결국 카메라들은 그것들이 기록하는 대상들은 안중에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카메라들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하나하나 확보해 하나로 편집하는 비텍의 작업이 카메라들에게 본다는 기능을 되돌려준다. -42쪽

엄밀히 말해 다른 많은 미술 형식들과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옵아트 - 이처럼 방향 감각을 혼란시키는 기하학적 양식의 작품에 주어진 이름-는 어떻게 그림이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시선을 그림에 두고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애쓰지만 이미지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면서 저항한다. 초기 라캉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 바로 이런 보는 사람과 시각적 이미지 사이의 비대칭성이었다. -54쪽

오늘날에는 카메라에 워낙 친숙해져 누군가가 사진을 한 두장 찍는다고 해서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한두 장이 아니라 수백 장을 찍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가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81쪽

예술적 창조는 종종 희생을 통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꿰뚫고 들어오는 힘들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된다. 거기서 희생은 즐거움을 주는 수단이 아니라 어떤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는 예술가들이 작품의 생산을 중단한다면 수많은 나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최근 일군의 예술가들에게 예술 생산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대부분은 평범한 대답을 내놨지만 쇼니바레 만큼은 예술 생산이 병원에 가지 않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독특한 대답을 들려주었(109)다. -109,110쪽

원초적인 성적 본능 같은 것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승화를 원초적인 성적 본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것이 승화의 역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원초적인 성적 본능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처음 나오게 되었을까? 왜 그것이 그토록 매력적인 생각일까? 그에 대한 답은 충동이라는 정신분석적(119)개념에 있다. -119,120쪽

인간이 될 때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우리의 욕구는 양육자의 언어 체계 속에서 소외당한다. 우리는 쾌락을 얻기 위해 신체 표면을 자극하는 일을 멈추고, 도덕과 품행과 청결의 규칙들을 배우며, 법과 금지들로부터 가득 찬 기호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빈 공간, 텅 빈 곳이 생겨난다. 그러면 쾌락은 국부 기관들에서, 잔여 또는 남은 부분과 같은 성감대에서 피난처를 구할 것이다.(중략) 섹스는 우리가 인간 세계에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대신한다.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항상 모든 사람이 쉼 없이 섹스에 몰두하고 있는 사회 이전의 세계, 문명화되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는 이유가 있다. 섹스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쾌락을 대신할 적절한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120쪽

라캉의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초기 경험에는 재현이나 의미 부여라는 관점에서 직접 포착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하나이고, 재현과 의미 부여라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실패에 의해 텅 빈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다른 하나다. 전자의 측면이 우리가 그러한 공간에 다가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124)의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공간에 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텅 빈 공간은 우리가 분리되어 나오게 된 것,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것을 구체화하게 된다. 우리의 욕망은 그것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포착하지 못할수록 그것이 끌어당기는 힘은 한층 더 강력해진다. -124,125쪽

라캉은 우리 욕망의 그러한 지평을 가리키기 위해 가능한 한 최소한의 용어를 선택한 듯하다. 라캉은 그것을 '물'[일종의 부재하는 원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승화에 대한 연구에서 핵심은 사고와 언어 차원에서 이 물이 공백, 텅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126) 듯한 근접성(괴물들)또는 더 없는 고적감(텅 빈 공간에 빠지는 것)의 이미지들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부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고와 언어는 어디까지나 근사치들, 즉 자체의 경계선에 가장 가깝게 보이는 것을 불러내려는 우리 상상력의 노력일 뿐이다. 물은 항상 그러한 경계선을 넘어서 있으며, 우리가 공포나 부재의 이미지를 투사할 뿐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것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으로 재현될 수 없다. 재현의 차원에서 그것은 대상이라기보다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장소 안으로 들어갈 때 대상들은 새롭고 독특한 속성을 갖게 된다. -126,127 쪽

라캉의 주장에 따른다면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루브르에 몰려든 군중들은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을 입증해주었다. 미술작품의 진정한 기능이란 물이라는 텅 빈 장소, 다시 말해 미술작품과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 사이의 틈새를 환기시켜주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을 보러 몰려든 군중들에 대해 한 신문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134) 미술작품 자체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술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 때문에 미술 작품을 좋아한다."-134,135쪽

요소와 장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하면서 지젝은 쓰레기나 마찬가지인 또는 배설물로 된 오브제를 미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논리를 발견했다. 쓰레기나 배설물을 화랑에서 보게 되면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이것도 미술이야?"이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미술은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그것이 점하고 있는 장소로 이끈다. -156쪽

욕망에 우선권이 주어지면 그로 인한 고유한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화가들은 '순수 욕망'을 보여주고 특별히 선택된 인종일 수 있으나 고맙게도 그들의 실천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그들의 실천은 안티고네가 거부한 모든 것에 포획되어 있다. 그래서 성공한 화가들이 자신들에게는 실용적이고 금권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보도되면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 화가들도 다른 우리처럼 그러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반대로 중요한 것은 화가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놀라움이나 분노이다.-181쪽

많은 화가들이 공인이라는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들의 파격적 행위와 광대 짓은 계속 각광받으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각광받는 것에 대한 파멸적인 반응인 경우가 더 많다. 만약 어떤 화가가 성공을 거두자마자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면 공인인 그가 벌이는 코미디는 공인이 되어버린 상황을 대처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정체성에 맞춰 살 수 있겠는가? 특히 그러한 정체성이 이제 꼬리표나 상(294)표가 된 예술가들의 고유한 이름이라면? 이런 종류의 딱지 붙이기가 초래하는 분리 효과는 결코 화가가 감당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화가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말이다.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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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1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시사인북에서 낸 <사라진 미소>를 보고
더 미룰 수 없다 싶어서 책을 구입했는데
짬을 못 내고 있네요ㅠㅠ 빨리 봐야겠군요.

바뀐 이미지 말인데요...
친구분이 그려주신 거라면...
얼그레이님을 그린 건가요 ㅋㅋ
미남이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2-12 18:34   좋아요 0 | URL
친구가 아이폰으로 제 얼굴 그려준거랍니다.^^;

수양 2011-02-12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뀐 이미지 말인데요(2)... 저 뜨거운 불길은 아마도 향학열인가 보아요^^ 다리안 리더가 쓴 <라캉>(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은 개인적으로 영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어떤지 궁금허네요...

얼그레이효과 2011-02-12 19:21   좋아요 0 | URL
앗 반갑습니다. 향학열의 의지이면 좋으련만, 불만 머리에 잔뜩 붙었습니다. 크크. 이 책을 읽는 느낌을 뭐라고 할까요? 지젝식 대중문화 비평서를 보는 느낌 고대로였어요. 책 내용이 그렇게 막 신선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베이직하더군요. 번역은 나름 깔끔해보였는데, 또 관련 연구를 하고, 원서를 읽으신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나중에 리뷰를 한 번 써 볼 생각입니다.^^;

2011-02-1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0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6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경꾼의 탄생
바네사 R. 슈와르츠 지음, 노명우.박성일 옮김 / 마티 / 2006년 1월
품절


영상문화연구의 필독서가 된 슈와르츠의 책 중 내용 일부를 옮겨본다 / 이 책은 도시 생활의 구경거리화와 대중문화 출현의 상호 관련에 주목한다. 대중문화는 대로문화, 대중출판, 파리의 모르그 구경, 밀랍 박물관, 파노라마와 디오라마 그리고 영화처럼 명확하면서도 의도적으로 '현대적'이고 '대중적'이려 했던 문화 형태들의 짜임관계를 보여준다.많은 인기를 끌었던 이러한 문화 형태들은 동시대의 삶을 놀라운 방법으로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악투알리떼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실재와 흡사한 재연물은 일상생활에서 따온 주제에 따라 전시되었다. 이러한 전시는 당시 대중문화를 설명해주는 것이 이상의 효과를 지녔다. 전시의 소비를 통해 대중문화와 새롭게 출현한 도시의 군중은 구경거리의 사회로 편입되었다. -45쪽

19세기 후반 도시문화의 시각성을 연구하는 이 책은 도시에 대한 재현이 생산자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이 만들어낸 문자 텍스트와 시각 텍스트의 연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이 책은 문자와 시각 텍스트의 독특한 특성에 주목하면서 서로 다른 매체를 횡단하는 기호학적 분석을 지지한다. 문자와 이미지가 '구경거리화된 실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도시문화는 '보다 문자적'이 됨과 동시에 보다 시각적으로 변모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46쪽

구경꾼들에게 본다는 것 자체보다 '보는 위치'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현대적 삶의 쾌락 가운데 하나는 재현이 현실과 교환될 수 있을 정도로 증가하는 문화에 집단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첫 번째 장에서는 파리의 삶이 현실을 볼만한 것으로써 경험하게 하는 구경거리와 동일시되었음을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현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볼만한 것'은 현대적 삶과 닮았으며, 현대적 삶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54쪽

19세기 후반 파리의 구경꾼 사이에서 파노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이것이 현실을 구경거리로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략) 실제로 파노라마의 현실 효과는 19세기 동안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계속 변화했다. 풍경은 현실의 착시를 불러 일으키는 '파노라마 효과'를 만들어내는 대 아죽 적합했기 때문에 파노라마는 처음에 풍경 묘사를 선호했다. 하지만 세기말이 되자 파노라마는 밀랍 박물관처럼 신문을 각색하여 현실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도 발전했다. -232쪽

환영은 파노라마가 특정한 장소를 사실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관객들 가운데 실제 장소에 가봤던 사람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복제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술적 환영주의 때문에 발생했다. 처음으로 파노라마를 본 관람객들은 그 효과에 감탄했고 실재의 대체물로 높이 평가했다. 재현된 원본 자체는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다. -236쪽

1880년대와 1890년대의 대대적인 유행은 시사적인 사건들이나 현대적 생활, 유명 인사를 재현하고자 하는 열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이는 이후 밀랍 박물관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252쪽

(전략) 20세기 초에 영화가 파노라마나 밀랍 박물관의 인기를 사그라지게 하고 최고의 진귀한 볼거리 지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는 독창성이나 혁신적 기술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세기말 파리에 내재되어 있는 영화적 문화를 구체화시켰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265쪽

필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영화사는 수용을 다루든 생산을 다루는 간에 영화를 그 당시의 다른 문화 생산 형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영화와 영화 관객은 영화 이외의 다른 문화들과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영화적 '효과'는 파노라마나 밀랍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기술의 산물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은 이미 다른 장소에서 체득한 현실을 파악하고 바라보는 풍부하고 복잡한 관람 습관을 영화로 가져왔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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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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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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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컬처 - 이미지 시대의 이해, 비너스에서 VR(Virtual Reality)까지
존 A. 워커.사라 채플린 지음, 임산 옮김 / 루비박스 / 2004년 8월
절판


영상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보았을 존 워커, 사라 채플린의 책 <비주얼 컬쳐> 중 시각성 부분을 옮겨본다. /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신체, 젠더, 개성, 역사를 가진다. 어린아이의 눈은 '순수'하다. 하나 유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언어를 말하는 것을('모국어'에 의해 현실은 독특한 방식으로 불려지고, 분류된다)배운다. 그리고 세계 혹은 과거의 이미지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 그 지식은 정보를 부여하고, 보기 방식을 조정한다. 또한 인식과 의미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시각'이란 용어와 '시각성'이라-51쪽

는 용어 사이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다. 이론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각'은 빛의 자극이 눈에 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학적, 생리학적 과정을 지시한다. 이에 반해 '시각성'은 사회적 과정을 지시한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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