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이택광 외 지음 / 마티 / 2011년 1월
절판


옮긴이(얼그레이효과)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편 / 이 책에서 유일하게 건질 논의가 있었다고 보는 챕터였다. / '투명성'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선호하고 채택하며 강제해 온 정의의 윤리 중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가장 선호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290쪽

신자유주의가 다른 점은 정의를 '시장의 윤리'에 가깝도록 대담하게 수정하고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광범한 테크놀로지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모든 사회적인 영역에 뿌리내(290)리도록 에씀으로써 '정의 사회'구현을 위해 분투한다는 점이다.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사회가 더없이 정의롭다 말하는 것은 절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윤리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이데올로기가 지닌 속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윤리 역시 여느 이데올로기처럼 사회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적대를 부인한다. 그 대신 신자유주의적 윤리가 도입되는 사회에 관한 허구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이를 통해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낸다. -290,291쪽

기호학에서 쓰이는 표현을 빌려온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에 고유한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만들어내고 이를 구체화하는 다양한 스타일을 전개한다. 그 윤리적 담론의 장르를 우리는 '정의'의 담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비롯되는 다양한 윤리적 담론의 스타일을 책무성, 투명성, 공정성, 청렴 등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91쪽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몸짓은 외려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면서부터 그 내부에 장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비판으로부터 면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한다. -291쪽

무엇이 정의의 윤리를 구성하는가, 과연 정의의 윤리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따지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다. 외려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292쪽

정의의 윤리는 무엇보다 개인적인 주체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자유주의가 정의의 윤리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통적인 공동체를 윤리적 주체의 자리에 놓고자 했던 보수주의자들이나 아니면 그 자리에 '인민'이나 '근로 대중'을 놓으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개인이란 주체를 대신할 만한 효과적인 주체를 고안하지 못했다. 그 대신 사회주의자의 경우 이기심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공리주의자란 이유로 개인을 규탄하거나 보수주의자의 경우 보편적인 전통을 무시한 타락한 쾌락주의자란 이유로 그 개인을 성토했을 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자유주의는 그런 비판을 수용하거나 혹은 그와 타협하면서 개인을 윤리적 주체의 위치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293쪽

환언하면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보완할 윤리를 언제나 동반한다.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돌이켜 보아도 좋을 것이다.흔히 말하는 87년 체제를 형성하면서 기존의 급진적인 사회운동이나 반정부운동이 제기했던 비판을 신자유주의적 비판으로 흡수할 수 있었(296)던 것은 정의의 윤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의 기획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윤리적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것을 꼽자면 바로 '감사(audit)'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파워는 198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감사 사회'의 도래, 혹은 '감사 폭발(audit explos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96,297쪽

감사 사회란 단적으로 책무성(accountablity)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conduct)를 관찰,측정,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직접적인 통제나 명령과는 달리, 다시 마이클 파워의 표현을 빌자면 '통제의 통제(control of control)'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각 개인이나 조직, 기관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다.-297쪽

감사는 무엇보다 책무성이라는 윤리를 따르면서 수행되는 실천이다. 여기서 책무성이란 교사든 사회복지사든 아니면 기업가나 공무원이든 자신의 행위를 과연 공정한가, 형평성이 있는가, 투명한가와 같은 다양한 정의의 규범에 따라 스스로 되돌아보고 평가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 감리, 사정과 같은 다양한 감사 활동은 바로 정의의 윤리를 가리키는 신자유주의적 명칭인 '책무성'을 겨냥한다. -299쪽

물론 이제 책무성이란 말은 더 이상 회계 활동에 묶여 있지 않다. 책무성은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의 규범들, 즉 투명성,형평성,대응성(responsiveness),책임성,청렴 나아가 경제성, 효율성(effectiveness)등을 망라하는 일반적인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무성이 회계적인 실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니 거꾸로 회계적인 실천은 책무서을 통해(300) 전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동원된다. 숫자를 세고 계산을 맞추며 장부를 기재하는 회계사는 또한 동시에 윤리의 수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300,301쪽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이다. 그때야 비로소 정의의 윤리는 다른 모습을 가진 정의의 윤리로 둔갑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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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구 좀 어렵네요. ^^ 읽다가 텍스트를 잘 이해를 못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란 생각을 하구요. 저 책에는 박홍규 교수님도 저자로 포함돼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라 읽을까 망설이고 있어요. ^^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도 못 읽어 봤지만, 정말 사색을 엄청하고 살아야 할 듯해요. 헛소리하는 댓글만 남겨서 죄송해요.^^;;;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2   좋아요 0 | URL
박홍규 선생님은 번역된 책으로만 선생님의 간접적 목소리를 느껴 언제 저작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 몇 년간 사회학에서 '책임성', '투명성'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학자는 시민사회 - 기업 간의 '협치'를 위한 대안으로,,어떤 학자는 제가 올린 서동진 선생의 본 글처럼 이런 '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대립각이 있더군요. 관심분야라서 한번 올려봤습니다.

루쉰P 2011-05-15 07:44   좋아요 0 | URL
전 박홍규 교수님 오타쿠라서 거의 모든 책을 사서 가지고만 있어요. ^^ 강준만 교수와 이 분의 책만 모두 모아 놓고 혼자 흡족해하는 독서인이죠. ㅋㅋ

호~'책임성'이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의견은 왠지 설득력이 있는데요. 하나 하나씩 들어가는 사회학 지식 뿌듯한데요. ㅋ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즐거운 박홍규 교수님 독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