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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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한다 - 이 상상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적게 믿는 것이 아니라 훨씬 많이 믿고 있다.-10쪽

'공산주의'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 그것은 여전히 분석과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가?라는 자명한 물음을 묻는 대신 정반대의 물음, 즉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옛것과 새것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새 용어들('포스트모던 사회' '위험사회' '정보사회' '포스트산업사회' 등)을 끊임없이 창조해내기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16) 것의 윤곽을 놓치고 있다. 새것의 진정한 새로움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것 안에 있는 '영구한' 것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16,17쪽

우리가 왜 위기에 책임이 있는 '월스트리트'쪽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메인스트리트'의 평범한 주태담보 대출자들에게 그 댓가를 치르도록 요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경제학 이론에서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것 - '어떤 사람의 행동이 유발할 수 있는 여하한 손실에 대해서도 보험이나 법률, 또는 다른 어떤 기관이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위험'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가령 내가 화재보험을 들었다면 나는 화재예방에 덜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29쪽

그러면 구제금융안은 정말 '사회주의적' 조치, 미국 내 국가사회주의의 탄생에 해당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사회주의인바, 그 '사회주의적' 조치의 주요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구원에 복무할 때 은행씨스템의 '사회화'는 용인된다. (중략) '도덕적 해이'가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다면? 두가지를 분리시킬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31쪽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없는-진리의 차원에서만, 즉 세계시장 메커니즘의 '실재(the real)'로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쏘르망의 주장처럼 항상 현실이 불완전하고 항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완전함에 대해 몽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병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5쪽

'지배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다시 말해 지배계급은 하층 계급이 경제의 현 상태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71쪽

(전략)현재의 위기로부터 정말로 헤게모니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판본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생태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자유시장 체제가 과도한 착취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동원은 생태적 목표, 빈곤에 대한 투쟁,그리고 다른 가치 있는 목적들에 봉사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어떤 새로운 정향의 징후가 포착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72쪽

자본가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데, 그들의 삶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모토는 사회적 책임과 감사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치고 큰 부를 축적하게 허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말할 수 없이 잘 대해주었으며, 따라서 사회에 뭔가를 돌려주려고 보통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이다.오직 사회를 배려하는 이런 종류의 접근법만이 사업의 성공만을 가치있게 만든다. -73쪽

전지구적 책임감의 새로운 기풍은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공익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dispositif)- '도구적 이성', '기술적 착취', '개인주의적 탐욕', 혹은 그밖의 무엇으로 불리든 - 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분리되어, 이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는 손상되지 않게 놓아둔 채 어떤 새로운, 더욱 '정신적인'관점에 의해 (73) 극복되어야 할(그리고 극복될 수 있는) 하나의 자율적 삶 혹은 '실존적 태도'로 이해된다.-73,74쪽

체제 자체에 내재한 (팽창의)강박은 사적인 심리 성향,개인적 죄의 문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자본의 자기추진적 순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의 궁극적 실재(Real)로서 존속한다-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초하는 가장 명백한 위험에 대해서조차 맹목이 되도록 만들면서 우리 활동을 통제하는 주체이기에 규정상 통제될 수 없는 어떤 짐승으로서.이는 하나의 거대한 물신적 부정이다- '나는 내가 자초하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궁극적 붕괴의 불가(77)피성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붕괴를 조금 더 연기할 수 있고,조금 더 위험을 무릅쓸 수 있고,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 하층계급의 '비합리성'과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 자기맹목화의 '비합리성'이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77,78쪽

주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나의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 교수 등등으로서)공적 생활에서 떠안고 있는 상징적 결정들과 책임들에 대비되는 나의 '진정한 존재'다. 이에 관한 정신분석학의 첫번째 교훈은 이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은 근본적으로 가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막, 혹은 거짓 간격인데 그 기능은 말하자면 체면을 유지하는 것, 나의 진정한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을 감지 가능한(나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을 실천하는 방식 중 하나는 그러므로 '내면생활'과 그 '진실한' 감정의 이 위선을 까발리는 전략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83쪽

소비의 차원에서 이 새로운 정신은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상품의 유용성 때문에, 또는 지위의 상징으로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이 제공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그것을 구매하며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소비한다. -109쪽

오늘날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경관은 이처럼 물신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냉소적인 것과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두 경우 모두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물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면서 논증을 무시하는(혹은 적어도 불신하는)반면 냉소주의자는 논증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그 상징적 효율성은 무시한다. -140쪽

자본주의의 경우가 그러한데,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한계의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서만 자신을 재(252)생산할 수 있다. -252,253쪽

이제 우리는 더이상 "몫이 없는 부분"의 입장에서 질서를 전복하는 게임을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질서가 이미 자기 자신의 영구전복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개와 더불어,끊임없는 역전,위기,재발명을 동반하며 어떤 면에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정상적'삶 자체이며,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254)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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