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92호 - 2010.가을 역사비평 92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8월
품절


천정환 선생의 <신자유주의 대학체제의 평가제도와 글쓰기>중 일부를 옮겨본다. / '학진 시스템'은 학문적으로 기여한 바가 많다.젊은 학자들이 정당한 학문적 이니셔티브를 갖게 됐으며,지원제도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대규모 기초연구가 수행됐다. 또한 고식적인 학문 간 경계가 흔들리고 융합적 학문연구도 확산되었다.그러나 그늘도 깊어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 학의 세계를 평균화,전일화,국가화하며,모든 학자와 연구를 거대한 하나의 창구,하나의 틀 속에 밀어넣고 있다.그럼으로써'학진 시스템'은 모든 '외부'를 재빨리 지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194쪽

'국가 안에서의'학의 자율성은 외관상 커졌지만,인문학이 가져야 할 가치인 '자유'는 위축되고 있다. 이는 양가성을 갖는다. '국가'는 인문학의 최후 보루이며,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오히려 극단화시키는 장본인이다.특별한 실천력과 신념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연구자의 모든(194) '연구 성과'가 거기 '등재'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근대적 글쓰기와 근대자가 탄생한 이래 미증유의 일이며,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라 본다. '학진 시스템'하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학자'인 것이다.그래서 '학진 시스템'은 지식 생산의 문화를 전변시켜 인문,사회과학자의 존재방식을 바꾸어놓았다.'지식인'은 이제 소멸했다.'연구자'혹은'전문가'만 존재한다.'국가'에 대한 인문학자의 의존성은 지나치케 커졌다.-194,195쪽

2000년대 초에 일어난 '인문학의 위기'담론은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상시제도화하다시피 했다.이제 그것은 모종의 중독상태를 만들고 있다.이제 HK--BK같은 제도가 없는 한국 인문학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과정에서 '학진'은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리바이어던이 되던가,또는 리바이어던의 한쪽 팔이 되어 인문학을 지배하고 있다.'국가'에 의한 지원이란 언제나 정치(논리)와 절합될 가능성도 있다.과연 이 거대한 기계-동물을 제어할 수 있을까?-195쪽

'학진 시스템'하의 '학문'의 어떤 마디들은 점점 희화화,화석화되고 있다.학회의 정착,확산과 심사제도의 일상화는 '관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특히 '글쓰기'가 획일화되고 있다. 비슷한 문체,구성을 가진 수없이 많은 '논문'이,거의 똑같은 '원고 투고 규정'을 가진 '학회지'에 의해 대량생산되고 있다.모두가 [등재]학술지에 논문 쓰기와 심사평가-업적 보고에 목을 매달고 있지만,그것을 진실하고 온전한 인문학 활동이라 생각하는 인문학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이 제도는 그야말로 움직이기 힘든 '현실'로 실정화되었다.그래서 본연성에 대한 의식과 별도로 '현실'에 맞추어 살기 위한 적응력과 테크닉이 점점 고도화된다.또한 서론-본론-결론의 구성과 국문 초록-영문 초록-국문 핵심어-영문 핵심어 등의'액세서리'는 거추장스러운 '현실'이면서,점점 글쓰기의 본연을 잊게 만드는 매개다. -196쪽

더 큰 문제는 등재지 학술논문 중심의 '학진 시스템'인정구조가 강력한 경계벽이 되어 대학과 현실,학문과 현실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논문'은 그야말로 양산되어 인문학이 발전하고 있는 듯하지만(196),그것은 '글쓰기'의 다른 존재방식인 비평과 '책'을 죽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196,197쪽

'인문학의 위기'가 중,고등학생들까지 입에 올리고 다니는 상투어가 된 것이 2006~2007년경이다.그런데 불과 3~4년 사이에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오늘날 '인문성'을 규정짓는 한 변수가 시민을 향한,시민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하는 인문학 강좌의 붐이다.전국의 지자체와 큰 지역 도서관과 대학 뿐 아니라,고급 백화점이나 대기업들도 '인문학'을 위해 나서고 있다.그리하여 이전에는 상상해보기 어렵던,극적이고 때론 코믹한 광경이 '인문학'덕분에 벌어지고 있다. -200쪽

'인문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한국 사회의 양극에 있는 집단들이 각각 인문학 강좌를 듣고 있다.가장 돈 많고 권세 많은 대기업 CEO와 고위 공무원,그리고 '돈과 명예'양면에서 가장 '비천한'자리에 있는 노숙자,성매매 피해 여성, 재소자들이 그들이다. 인문학 강좌를 들은 CEO들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실행자로 변신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또한 '인문학'이 가장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그 '비참'을 덜 수 있는 힘과 보람이 될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200쪽

그럼에도 인문(200)학자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무수한 스펙트럼의 '시민'들이 인문학 강좌를 듣고 있다.요컨대,몇 년 사이에 인문학 독서시장은 황폐해지고 대학원생도 줄고 있는데,'인문학'은 교양시장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시민'과의 접촉 부면을 넓힐 것이다.따라서 '편수'나 '논문 쓰기'는 제도 내부의 인문학과 외부의 인문학의 성격 및 주체를 지금보다 더 확연히 갈라놓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하기에 누가 '시민 인문학'의 주체이며,시장의 '인문학 서적'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그리고 인문학자들이 이런 흐름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거나 동참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진 시스템'과 '업적 점수'에 타락하고 있는 '제도' 종속적인 정신을 세척하는 물줄기를 트는 일이다. 공부 결과를 '공공적인'생산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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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9-13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한 지적이 많네요. 전 정권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아마 곧 종료되겠지만, 저희 과도 bk를 받는 입장에서 평소에 느꼈던 답답함이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Die Zeit des Weltbildes>를 빌려봤는데 하이데거도 이미 그런 말을 써 놨더라구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철학은 이제 사유denken하지 않고 연구나forschen 하고 있다'였나? 그 여백에도 어김없이 누군가 bk라고 써 놨었지요; 사실 제일 역겨운 것 중 하나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인지 뭔지 하는 거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10-09-13 02:22   좋아요 0 | URL
바라님 오랜만입니다. 아, 하이데거가 그런 말을 했었군요. 좋은데요. 천정환 선생이 우려하는 걸 좀 감히 줄여보면 결국 '인문학의 국가화'와 '인문학의 (과한) 사회화(?)' 같은데요..요즘 제 주변도 그렇고,,'아카데미 내의 일정한 패배주의'라고 할까요..그런게 느껴져서 두렵더군요. 더 두려운 건 그 패배주의를 극복할 방안을 함께 모색하지 않고,그냥 돈 좀 내고..아카데미 바깥에서 좀 더 배우고 오면 되지와 같은 움직임들이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강하던데..천정환 선생 글을 읽으면서,,고민을 더 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라님이 전념하시는 연구 분야와 이런 학문 '사업'의 결합에서 바라님을 포함한 공부하시는 분들의 상처 같은 게 감히 떠올려지네요..어떤 선까지 악수를 해야 하고, 어떤 선까지 거부를 해야 하는지 점점 그 고민의 두께가 두터워지는 요즘입니다. 그 시기에 또 이런 아티클이 다가왔네요..크윽. ㅜ.ㅜ (독립영화도 관변화하려는 이 시대에,,인문학의 국가화라..가끔 제가 콘텐츠 생산자는 아닌가하는 고민도 드네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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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 영화광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하여 중 /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걸 영화광이라고 부르든(197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 영화주의자들이라고 부르든(198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영화 마니아라고 부르든(199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21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시네필이라고 부르고 있다.하지만 '하여튼'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여기서 나를 이끄는 것은 우리들을 부르는 호명의 방식이다. -66쪽

내게 문제는 영화 마니아가 오디오 마니아와 같은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1990년대에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우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시스템에 관심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나는 지금 홈시어터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말 그대로 영화를 '감상하는'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실제로 영화를 제법 보았다는 사람들조차 영화 촬영이나 사운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는 만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중략)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대부분의 경우)문학적으로나,아니면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뿐이다.-68쪽

게다가 대부분 집에서 말 그대로 '그냥'비디오로 영화를 본다.집에서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오직 하이-파이 음질과 화질의 영화를 고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는 하지만,'하이-엔드'시스템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기계의 버전 업에 비례해서, '하이-테크'한 최신 할리우드 영화들로 그들의 라이브러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취행이니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과 나는 점점 더 나눌만한 이야기가 없어지고 있다. -68쪽

첫 번째 오해에 대하여.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수집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영화를 음미하기보다는 영화(들)을 남들보다 많이 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며,희귀한 영화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중략)물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과거의'채팅상에서 벌어지는 영화 퀴즈방(속칭 '영퀴방')을 들러 보면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유머 버전일 뿐이다. 왜냐하면 영화 제목을 알아맞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을 놓고, 그 다음이 문제의 시작이다. 영화는 결코 수집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음악이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이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음미하고,그 안에서 자기의 자아가 반영되어 가는 과정을 다시 되짚으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글이란 결국 자기의 기대의 지평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69쪽

그런데 1970년대에 영화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타자로 취급하던 것이,그리고 1980년대에 부르주아적 변종으로 분류되어 비판받던 계(70)급의 분류가 이제는 그 무언가 하나의 분류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인데,문제는 그 분류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을 어리둥정하게 만드는 지점이다.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종종 당당하게 활동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을 분류해 낼 만한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영화 마니아는 존재한다. 이 숨바꼭질을 분류해 내기 위해서는 역설이 필요하다. -70,71쪽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물론 감식안이 있지만,우리들이 갖고 있는 감식안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결국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안겨 준 홀림에 사로잡혀서 만들어 낸 환상에 대한 굴복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형태의 페티시즘이라는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그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쳐 놓은 결계가 있다.그렇다. 이것은 경계가 아니라 일종의 결계이다. 우리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감식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티시즘에 의한 굴복이라면,그 어떤 판단도 오류를 피해 갈 수는 없다.이것은 지난 30년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내는 방식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정교한 분류-처리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공격의 목표가 영화가 아니라 (그렇다면 아주 반론은 쉬워진다),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1쪽

세 번째 오해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있다.우리들 자신 중에는 영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영화를 빌려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전적으로 영화 마니아라는 호칭에 대해서 자유롭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이다. 일종의 페티시즘에 관한 증세로 만들어 버리는 규정에 대해서 이들은 가볍게(72)벗어난다.그런데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를 빌려 이론을 전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이들이 처음부터 영화를 개념으로 설정하고,그 안에서 그 안의 구성 요소들을 끌어내어 이루어지는 사건들과 그 정황들을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솔직하지 못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다.-72,73쪽

종종 그것이 영화에 관한 글도 아니면서 정작 영화가 그 글 안에 들어가서 다른 개념들조차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종종 마주치는 실수이다.그것이 유하처럼 시인의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그러한 혼란의 경험은 새로운 예술적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세워,그리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영화 마니아라는 나르시시즘에겨워 심심풀이로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은 그 사유 자체를 나쁜 의미에서(그리고 아주 진지한 의미에서) 법도 질서도 없는 혼란으로 이끈다.그는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73쪽

우리는 자유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정하게 된 방식을 사후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칸트의 조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사회가 호명하는 방식과의 투쟁이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위해서 이 투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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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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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0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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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산책자 에쎄 시리즈 7
안톤 지더벨트.피터 버거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10년 7월
절판


20세기에 들어 수립된 종교사회학에서는 근대를 종교 쇠퇴의 시기로 보려는 이런 시각을 '세속화 이론'이라고 부른다.이 이론에 따르면,과학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근대 사회제도가 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허묾에 따라 세속화, 즉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축소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이런 시각은 어떤 반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그 시각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험적 자료에 근거한다(그런 자료는 대부분 유럽에서 찾을 수 있으이 의미심장하다).-15쪽

참된 다원성이 존재하는 조건은 지식사회학에서 '인지 오염cognitive contamination'이라고 부르는 용어로 풀이된다.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행태에 바탕을 둔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그렇게 '오염'이 일어나면,남들의 신념과 가치를 이상하다,기묘하다,사악하다 등으로 규정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차차,하지만 확실히,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그것은 앞서 당연시했던 현실 인식이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5쪽

전경과 배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배경적 행동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거의 숙고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이때 개인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반면 전경적 행동은 숙고를 필요로 한다.이렇게 할까,아니면 저렇게 할까 하고 묻는 과정이 필수적이다.-30쪽

적극적 관용과 소극적 관용을 구분 짓는 것이 유용하다.적극적 관용은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개인 또는 집단과 마주쳤을 때 순전한 존중과 개방성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반면 소극적 관용은 무관심을 나타낸다."저희들 멋대로 하라고 해."여기서 '저희들'이란 다른 신념이나 행동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용은 대체로 두 번째 유형이다.-54쪽

진리에 이르기란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상대적 포용론의 최종 국면은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며 폐기되어(84)야 한다는 입장이다.우리는 처해 있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따른 편향성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가능하며,결국 그처럼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극단적 상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고,심지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서로 다른 '서술'이 있고,그런 서술은 모두 옳다.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내세우는 입장-84,85쪽

인식론적 엘리트는 유일하게 진리를 담지하며,다른 모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결국 상대주의자들은 바로 자신들이 그 엘리트이며,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91쪽

집단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도덕을 고려하게 하는 상대주의는 니힐리즘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또한 그것은 데카당스로도 볼 수 있다.사회를 지탱하던 규범이 유명무실화되고,허울뿐이거나 숫제 조롱의 대상이 되며,누구나 남들도 그런 규범에 따라 행동하리라 믿지 않게 되는(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퇴폐적인 사회상,그것이 데카당스인 것이다.-106쪽

상대주의가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이유가 의심을 과대화하는 데 있다면,근본주의의 위협은 의심의 과소화에서 온다.극단적인 불확실성도 극단적인 확실성도 위험하다.-132쪽

철학적 인류학은 인간 조건의 구성 요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한다.한 가지 근본적인 요소는 '제도의 필수성 institutional imperative'이다.인간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도(에밀 뒤르켐의 정의를 따르면,행동,사고,감각의 전통적인 패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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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품절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14쪽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31) / 진정한 지도자는 종교적,정치적,학문적 지도자를 막론하고,자기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배반을 도발해야 한다.-31,33쪽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을 때,그 사람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에게 아기처럼 완전하게 의지할 때,이러한 신뢰를 배반하고,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그의 존재 전체를 부수고 싶다는 이상하고 그야말로 도착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32쪽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균열 자체,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Otherness)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다.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은 일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의 정반대,즉 일자의 내재적 이중화의 정반대다.즉 타자성에 대한 단정은 타자성 자체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동일성(sameness)에 다다른다. -42쪽

오늘날의 섹슈얼리티와 예술이 마주친 딜레마를 생각해 보자.끊임(59)없이 새로운 예술적 탈선과 도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보다 재미없고 기회주의적이고 쓸데없는 짓도 없다-59,60쪽

종교의 광신적 옹호자 가운데 오늘날의 세속 문화를 지독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종교 자체를 저버리는 것(의미 있는 종교적 체험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자유주의 전사들은 반민주적 근본주의와 대결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린 나머니 테러와 싸울 수만 있다면 자유와 민주주의 자체를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은가?그들은 비기독교적 근본주의가 자유에 대한 주된 위혐임을 증명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리다,심지어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후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63쪽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공식적으로'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게 되는 것이다.이렇듯 행복은 본래 위선적인 것이다.즉 행복이란 사실은 원치 않는 것들을 꿈꾸는 것이다.오늘날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를 상대로 자본주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요구 사항(완전고용 실행하라!복지국가 유지하라!이민자 권리 보장하라!)을 퍼부을 때,그들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릭한 도발의 게임-주인(Master)이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주인의 무능력을 노출시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전략의 문제점은 체제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73)들이 사실은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73쪽

불안의 원인은 죄가 규범으로 승격되는 상황,즉 욕망을 지탱하는 금지가 결여되는 상황이다.이러한 결여로 인해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답답할 정도로 가까워진다-금지가 주었던 숨 쉴 공간이 없어진다. 우리가 규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체성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규범에 먼저 우리에게 저항할 것, 위반할 것,갈 데까지 갈 것을 명한다.(중략)인류 역사상 상호 작용에 대한 규정들이 이토록 빡빡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더 이상 상징적 금지로 작용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러한 규정들은 위반의 양식들 자체를 규정한다.-94쪽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쾌락과 제약을 결합한다. 쾌락과 제약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얘기가 아니다.오히려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대립항들의 무매개적 일치(작용과 반작용의 일치)라는 일종의 사이비 헤겔적 개념이다. 해가 되는 그것이 이미 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쾌락의 궁극적 사례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초콜릿 판매약(cgocolate laxative)일 것이다. 이 약의 역설적인 광고문을 읽어보자.변비에 시달리고 있나요? 그러면 초콜릿을 좀더 드세요!(변비를 일으키는 바로 그것을 좀 더 드세요)-157쪽

국가 제도가 선포하는 비상시국은 진정한 비상시국을 피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는 절박한 전략의 일부다.-216쪽

정말 어려운 일은 묵묵히 혁명을 준비하는 일도 아니요,혁명적 폭발이라는 '사건'의 조건을(218)마련하는 일도 아니다.진짜 힘든 일은 사건이 일어난 후 -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시작된다.-218,219쪽

라캉이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배설이 문제가 된다는 점인 것은 그 때문이다.인간에게 배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이 똥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똥을 통해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 노출/외화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똥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243쪽

헤겔의 지양(Aufhebung)의 최고의 사례는 이것이다. 즉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제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이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체험을 버리는 것이다).여기서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277쪽

그러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한다.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기독교,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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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63호 - 201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품절


나르시시즘이 '민족'이 아닌 '주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라면,우리는 또한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이는 매듭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필자의 가정은 그중에서도 각 세대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 특정한 나르시시즘이 발현되며,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의 나르시시즘과 독특한 매듭을 형성하는 것에 우리의 '민족성'의 이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467쪽

사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는 상상적인 차원에 속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각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 요구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쉽게 변질되며,그런 한에서 그들은 때때로 타자들과 양립할 수 없는 민족의 고유성을 내세워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부터 예외의 자리에 놓기 마련이다. 타자에게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망은 그 주체를 여전히 타자에 종속된 주체, 이타적 주체로 남겨놓기 때문이다.반면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묻는 순간, 상대의 호응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닫고 피해자적 태도로 변질되는 특이한 입장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다."그리고 여기서 상실감으로 인한 자의식이 피해자적 위치에서 공고해진 민족주의와 중첩된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눈과환상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타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470쪽

에 있는,서구인들을 보는 우리의 태도, 즉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470)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던 우리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다.-470,471쪽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의 가장 밑바탕,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 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 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 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이제 그 자식 세대,어느 정도는 상실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 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471쪽

버지의 우상일 것이다.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애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닌 상상적 '경쟁'이다.-471쪽

실제로 현 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 세대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지를,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472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사회와 스펙사회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 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480쪽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480,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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