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 안주거리: 굴전, 김치찌게 약간, 꼬들빼기 김치 약간,  벌교꼬막, 매운닭발, 부추전, 동태전... ...에 막걸리, 그리고 콩나물밥, 국에 쐬주...(에퀴녹스 2. 밈 강사, 풀뿌리교육 1 그리고 2)

 


 

 

 S N S

 

 #1. 이야기를 나눈다. 소셜네트워크가 어떠냐고 묻는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분노가 사르르 녹아버리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사람(행정집행단위)에게 느낌이 전달되지 않으며 광장의 야성이 없다. 예를들어 (구) 학생데모는 버스, 주점 어디에서 건 시비도 붙고 이야기도 전달되기때문에 여론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인터넷의 공간은 다른 성향의 사람과 대면이 없다. 다른 정치적? 성향의 사람과 격정과 열정이 만나지 못한다. 하물며 행정에 반영된다는 것은 더 소원하지 않을까? 체감이 없으므로... ...


 

무엇을? 어떻게?

 

#2. 무엇을 해야하는가? 정당의 선택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제도밖에서 묵묵히 시민단체의 성원으로 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별반 묻지 않기에 그 길이 서로 만나는 것인지도 관심이 없다. 가는 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분분하다. 이론의 용도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어떻게 설계를 할 수 있는지? 있다하더라도 경중이 없다. 있다하더라도 장단의 길이감이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접붙여야 살아나는지에 대한 감이 없다.

 

 


 

 

생각지렛대 밈

 

 #3. 청소년 교육에 대해 말을 나눈다. 합이 0이 되지만 관계는 덧셈이 되는 그런 교육? 아는 것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재배치하거나 다른 욕망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교육은 아닐까? 어떤 색깔을 가져야 하는가? 그 원칙을 논의하고 세우는 것이 먼저는 아닌가? 제도권 교육이 일방의 앎의 수수에만 관심과 욕심이 있다면, 그래도 다른 시공간에서는 그렇게 잘리워진 연구와 관심사에 대한 동선, 시간, 표현력을 잊지 않게해준다면 어떨까? 그러기 위한 기예는 가르쳐주면서(인터뷰기술, 글쓰기, 영상, 사진, 애니...) 그것을 바탕으로 100팀에게 100가지 주제로 100일간 기사를 낼 수 있다면 지역도 바뀌고, 청소년도, 부모도 바뀌지 않을까? 작심한다면... 어느 곳보다도 많은 관계망으로 개인 멘토는 물론 자신의 관심사를 담고 키울 수 있게 하는 곳이 있을까?


 

#4. 나름의 색깔을 논의한 사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 놓고 시작하면 한다. 또 다시 조합원에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를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뒤에 결정한 것과 미리 예단한 것은 별개의 사안이기도 하다. 기업을 할 것인지? 영리기업을 할 것인지? 제로의 사회적 기업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구성원이 더 가닥을 잡아봐야할 것 같다.  대상의 문제도 교사분들에게 조언을 들어본 결과 동구와 중구와 둔산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대상을 어떻게 정하는지도 많은 변수를 낳을 수 있다.

 

 


 

 

뱀발.

 

1. 이러한 저러한 일들로 정작 방향에 대한 고민을 나눠보지 못해 아쉽던 차, 자리가 마련된다. 조금 일찍 일터에서 부산을 떨며 열차에 몸을 싣는다.  맑스재장전 몇꼭지를 읽는다.  올라가는 사이 지하철에서 민*수샘의 부고가 뜬다. 십여분의 시간이 지나면서 아쉽고 안타깝다는 느낌이 목을 치밀고 올라온다. 이리도 일찍 따듯함과 미소가 어른거리다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들의 삶관계가 혈연의 가족관계가 아니라면 좀더 열려진 공동(면역)체라면 다를까?  그 시공간들이 삶의 열정이나 최소한 먹고살 궁리가 해결되었다면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논쟁이나 투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러기에는 현실이 먹고사는 길도 다르고 이어지는 관계들도 점선으로 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반짝, 번쩍거린 그녀의 미소와 앎의 유연함이 더 두드러지는지도 모르겠다.

 

2. 다음달 참* 발제를 준비해야 하는데 마음도 무겁다. 잠 자리에서 얕은 생각이 번져 계속 꿈에서 제목을 정한다. 잠에서 깨기만 하면 잊어버리는 악순환이지만...  과학(기술)...제도 안, 제도 곁, 제도 밖...제도정치의 변화, 활동, 운동, 혁명 그리고 삶..짙은 안개 투성이에 길은 보이는 것인지? 있는 것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 신기루일 뿐인지? 허황스럽더라도 컹컹 짓는 이들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속바램을 썼다 지운다. 컹컹~~

 

3. 밈은 오랜만에 본 영*샘이 참*의 아이디어를 이어준다. 그간의 경험이 녹아있어 고마웠다. 이*샘도 훨씬 부드러워진 듯하다. 좀더 작정들 하고 덤볐으면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치과에 갔다. 그리고 경영이사님에게 혼났다. 이리 얼굴보기 힘드냐고 말이다. 점점... 이번주 하루 날잡아 치료하기로 한다. 선물도 챙겨야겠다. 덜 혼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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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20세기에 우리는 이 말에 따라 너무 많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변화보다도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 - 지젝 83


예술은 무엇이라도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상 특수한 경험의 영역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와 감성론(미학)의 관계를 정의한다. 이 관계는 분리된 두 세계 사이의 외적 관계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이는 정치로서의 행위와 감성론으로서의 감정, 예술적인 것으로서의 대상 또는 수행을 동일시할 수 있게 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 형식 속에서의 전환이다. - 랑시에르 111

 

[프롤레타리아의 밤] Gauny - 그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해 행하는 것은 글쓰기를 통한 자기의 재전유 작용이다. 이런 작용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나눔에 이른다. 그것은 노동자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분배/나눔 속에 기입된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을 수정한다. 그는 노동자의 능력을 손의 힘에서 시선의 힘으로 옮겨놓는다. 그는 노동자가 말하는 방식, 언어를 활용하는 방식, 노동자가 낮과 밤에 할 일을 분배하는 방식, 그의 생산과 소비를 관계 짓는 방식을 바꾼다. 해방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고니는 그것을 개인적인 경험의 틀 안에서 표현한다. 그러나 이 개인적 경험은 노동자들이 서로 말하고 그들의 고용주에게 말하기 위해 모이는 방식, 그들이 그들의 말의 지위를 바꾸는 방식, 그들이 동시에 새로운 삶의 수단과 투쟁의 능력을 창안하는 방식 속에서 즉시 연장된다. 랑시에르 125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이론에서 실천으로의 이동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이론과 실천을 그 관계와 더불어 다시 사유하는 방식이었다...반란은 또한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는 단언, 사유가 구상되는 세계와 그것이 적용되는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는 단언이기도 하다...노동 해방이 생산의 과학에 기초한 운동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자들에 의한 그들의 사유능력, 의식/지각 능력, 그때까지 특권계급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을 실천하는 능력의 단언임을 보여주었다...랑시에르 127


소비주의와 분수에 넘친 삶이 캄캄한 복도로 우리 자신을 밀어넣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미래 세대를 대가로 지불하고 나눠 가져야 할 미래를 저당 잡힌 상태다. 그러나 당신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증가하고 있는 청년 실업은 특별한 무게감을 갖는다. 이 문제는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바우만 139

 

치열하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열심히 트윗을 보냄으로써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무를 다하고 훌륭하게 정치적인 삶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소셜네트워크는 정치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으로 대체하고 있는가?정치에 대한 환상?오프라인의 현실성으로 전이될 수 없는 온라인의 인공성? - 바우만 142

 

우리는 취득한 소비의 대상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쾌락-용량이 모두 소진되거나 시장에 나타난 다른 대상보다 쾌락의 가능성이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 소비의 대상을 폐기해버린다. '소비주의'라는 개념은 협소한 전통적인 개념에 갇힌 소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소비시장과 쇼핑객들에게 제공되기 위해서 발전한 태도와 전략에 물들고 침윤되어 있는 우리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총체성을 의미한다. - 바디우 148

 

대안적 주체성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훨씬 덜 편안하고 훨씬 더 위험하고 지루하기 십상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오랫동안 무가치한 것으로 방치되고 관심도 받지 못하고 망각되었다. 대안적 주체성을 추구하기 위해 능력과 천재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우리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압도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또는 '오프라인'의 즐거움을 지키는  것은 이제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되거나 방기되고 있다. 인간의 연대가 제공하는 경이와 도전, 그리고 상호협력과 우애로 가득한 그 세계는 이제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삶의 양식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다른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바우만 150

 

교육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모든 교육은 억압을 없애는 문제다. 욕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이런 교육의 목적과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괴리가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은 강제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계획과 다른 것이다. - 스피박  160


영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회주의적 전통은 마르크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게서도 비타협적인 사회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전통에서도 사회주의를 말한다. 감리교 교회의 활동이 노동자당에 비견할 만했다. 종교의 경우 충분히 교회가 좌파적 경향을 띨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것을 단순하게 상부구조의 문제로 볼 뿐이다. 부차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 크리츨리  192

 

아나키즘이 상호주의를 체현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어떤 대안을 찾기 위해 독립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 같은 정치철학자에게 인간은 나약하고 사악한 존재다. 이런 까닭에 절대 권력을 가진 국가를 통해 개인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전혀 반대의 입장이다. 정부가 본질적으로 악이고, 개인은 독립적인 상호주의를 체현하고 있다. 이처럼 아나키즘으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내포한다. 인간-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해명하려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크리츨리 193

 

대안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옆'에 다른 사회 체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은 '다른 세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안에서 내재적인 것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추상적부정이 아니라 결정적인 부정이다. 문제는 대안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 이행의 개념이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인 매개를 만들어내는 양식에 대한 도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지만 우리는 계획, 시장, 화폐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토스카노 216

 

바커 - 인터뷰를 중심으로 책을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읽고 그림을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림은 지적 성장에 아주 좋은 훈련이다. 덧붙여 유머를 잃지 말라.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유머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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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림] 맑스재장전 상영과 저자와 대화
    from 木筆 2013-12-04 17:16 
    뱀발. 행사를 겸해서 책들을 다시 챙겨봅니다. 대담자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이란 질문을 건네지만, 어느 누구도 예,아니오를 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것이죠. 대담자의 답변이 중요한 것은 아닐겁니다. 리뷰와 다시보기로 혹 스스로 갖고 있는 교조적인 틀에 박힌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혼자든 모임이든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관념에 집착하지 않게된다면 조금 더 나은 관계가 되지
 
 
 

그 사유의 난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불편함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13


그는 엄숙주의와 거리가 먼 철학자다. 인간은 무한을 사유할 능력이 있는 동시에 유한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존재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무한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결코 유한을 완전히 극복하고 무한으로 나아가는 종교적 초월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무한은 유한 속에 내재해 있는 소진되지 않는 가능성이다. 14

 

 철학은 언제나 분리의 몸짓 안에 있다. 철학은 항상 참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분리한다. 그러한 분리를 통해 기존의 규범과 낡은 질서를 지적인 수준에서 전복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결국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의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조직을 변경시킨다. 15

 

철학적 행위란 질서를 변경하려는 모험적 행위이고, 그것은 기존 질서의 완강한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철학은 고급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실천이다. 모든 비난과 조롱, 왜곡과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태로운 실천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16

 

절망으로 점철된 것 같은 오늘의 세계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무척 힘들고 요원하다. 그러나 또한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주체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없다. 그 길은 만들어져야 하는 길,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미증유의 길이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은 바로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21

 

이 욕망은 전대미문의 것, 법의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고, 지식을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혁명적 정치란 식별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유적인 것의 국지적 창조인 것이다.23

 

이 부정성들은 우리에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저 그뿐이다...자원이 없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무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떤 가능에 대한 사유의 길을 찾으려 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시다. 항상 시간을 선취하는 시는 우리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는 좁은 통로를 가리킨다. 27

 

"나는 새로운 철학자다"라고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장을 섞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철학은 끝났고, 철학은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통해 완전하게 새로운 어떤 것이 시작한다고 제언한다. 철학이 아니라 사유가! 철학이 아니라 삶의 힘이! 철학이 아니라 합리적인 새로운 언어가! 실제로 낡은 철학이 아니라 경이로운 운명을 통해 나의 것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철학이." 39

 

철학은 인식의 인식이 아닌 것처럼 인식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이다. 철학을 판별하는 것은 담론의 규칙들이 아니라 행위의 단독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의 적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지칭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행위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요컨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철학적 행위를 지칭하는 데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여기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43


철학은 새롭고 거대한 규범적 분리를 제안함으로써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경험들을 재조직하는 행위인데, 이러한 분리는 기존의 지적 질서를 뒤집고, 진부한 가치들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들을 격상시킨다. 그러한 모든 것의 형식은 다소간 제한 없이 모두에게 향하는데, 특히 이는 젊은이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삶을 결정해야한다는 점을 그들이 빈번히 더 논리적 봉기의 위험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46

 

우리는 거의 20세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전면적인 부정과 '최후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것을 창조할 수 없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충돌의 그물망에 조여진 진리의 국지적 긍정 속에서 새로운 진리들을 애써 옹호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태양을, 달리 말하면 새로운 정신적 배경을 찾아야 한다. 당분간 우리의 발명이 갖는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스티븐스가 말하는 것처럼, "태양은 어디에 있건 배경"이기 때문이다. 90


코헨은 구성가능하지 않는 집합에 '유적인' 집합이라는 멋진 이름을 부여했다....코헨에게-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 다수성과 집합들의 순수한 보편성은 정확한 정의나 명료한 기술의 편에서가 아니라 비-구성 가능성의 편에서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106

 

정치적 투쟁은 직접적으로 유적 속성과 구성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순전히 형식적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법, 질서, 욕망, 유적 속성, 구성 가능성이 뒤섞인 복잡한 구성물이다.109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새로운 허구의 문제라고 믿는다. 우리는 허구와 이데올로기를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과학, 진리 또는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진리 그 자체는 허구의 구조 안에 있다. 진리의 과정은 또한 새로운 허구의 과정이다. 따라서 새롭고 위대한 거구를 찾는 것은 궁극적인 정치적 믿음을 갖는 가능성이다. 111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어둡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빛나는 허구를 통해 우리의 궁극적 믿음을 지탱해야 한다. 도시 젊은이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어떤 허구도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사회 문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문제는 위대한 믿음을 떠받치는 위대한 허구가 없다는 것이다.(예를들어 유적인 진리들에 대한 궁극적 믿음, 유적인 의지를 정상적 욕망들과 맞서게 하는 궁극적 가능성, 이러한 유형의 가능성과 그런 종류의 가능성에 대한 유적인 진리들에 대한 믿음, 자! 우리의 새로운 허구란 이런 것이다...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허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위대한 허구가 없다면 우리에게 궁극적인 믿음과 위대한 정치는 없을 것이다.-아마도 고유명 없는 허구를 갖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 계급, 정당 사이의 또 다른 배치, 정치적 영역의 또 다른 구성을 갖는 것이다.112-3)

 

그것은 가능하며,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허구란 새로운 형식 아래에 있는 유적인 허구다. 새로운 위치설정은 틀림없이 새로운 정치적 용기에 대한 문제다. 그 허구를 찾는 것은 정의와 희망의 문제다. 그러나 허구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용기의 문제다. 용기는 법으로도, 욕망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 일상적인 형식 아래에서 법과 욕망의 변증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주체성의 이름이다...법이나 욕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의 장소, 유적인 의지로서의 어떤 것의 국지적 장소를 창조하는 어떤 것이다.그것은 가능하며,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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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림] 맑스재장전 상영과 저자와 대화
    from 木筆 2013-12-04 17:16 
    뱀발. 행사를 겸해서 책들을 다시 챙겨봅니다. 대담자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이란 질문을 건네지만, 어느 누구도 예,아니오를 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것이죠. 대담자의 답변이 중요한 것은 아닐겁니다. 리뷰와 다시보기로 혹 스스로 갖고 있는 교조적인 틀에 박힌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혼자든 모임이든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관념에 집착하지 않게된다면 조금 더 나은 관계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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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4 [친구 2] - 욕과 피탕물에 잠겨있다 겨우 빠져나온 듯 싶다. 학대받는 자라면, 학대의 그늘에 신음하는 친구라면 그 쾌감을 은밀히 받아들였으리라. 어른과 시대에 대한 반감이 내재화되어 있어 비릿하게 대리만족시키는 영상을 편취할 수 있으리라. 압박받고 있는 일터에서도 그런 가학의 짜릿함이 배여날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참혹하다. 형님, 큰형님  그래 양아치가 더 늘어나는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변태의 퇴비로 쓸지도 모른다. 돈! 돈! 돈!! 원색적이고 감각적인 처리, 근육과 살의 공화국에 어울리는 영화인가? 새로운 패션으로 장착한... ... 왜 봤을까?

 

131112 [기록의 힘] 삶과 일상을 그저 데이터 하나로 담는 정책, 공약/삶과 일상을 무색무취한 행정용어로 만들어 집행하는 관료들 - 태안에 바깥물질(제주도 외에서 하는 해녀일)을 하는 해녀의 삶을 추적하여, 평범한 공공근로가 아니라 바다에 관련된, 바다의 일상과 관련된 최소한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추적 연구자 김도균박사에게 짧막한 강연을 듣다. 평소 이 문제에 대한 관심에 덧보태어,  경제사회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문화심리적인 요인은 처리해야할 명분도 없이 그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상황이 안타까워 질문을 보탠다. 

 

그는 엘리트 패닉이라고 명명한다. 재난이 발생하면 오히려 주민들은 현실적인 상황타개를 해나가지만, 관료나 행정조직은 그 상황을 약탈, 방화 등 문제요소, 데이터로 치환하여 바라보는 경향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엘리트, 행정의 시각과 시선은 대부분 3차원의 시점이다. 원근법으로 사물, 데이터의 하나로만 바라봐...오히를 삶이나 일상의 중력을 가진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등한히 한다. 예를 들어 국물맛이 시원하다라고 하면..오감이 들어있는 말 시원하다는 행정용어로 부적합하며...딴짓을 해버려 정작 시원하다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대부분이 시원하다를 육감으로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연륜이 있는 일마다 단위가 다르다. 그 단위는 일과 사람이 섞인 묶음이기도 한데 애써 이를 지우는 행정용어는 오히려 하나 하나 분해하여 헤아리는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김박사는 인터뷰와 심층면접을 하면서 바다에 물질을 하고 오면 시원한 맛이 있다고 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육지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도 말이다. 해녀의 삶은 바다와 연관되어 있고, 이런 심리적인 측면이 받는 임금을 떠나 잠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공약, 정책, 행정들은 노동 사이의 차이를 헤아리지 않는다. 그저 표준화한 평균값고 시간으로 환산한 양적인 개념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삶의 단위, 일의 단위, 일상을 포함하려는 안간힘을 쓰는 노력은 행정이나 정책, 공약이 삶의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삶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심리와 문화측면까지 감안된 행정이나 정책, 정치가 과연 무리일까? 정치와 힘을 제것을 부풀리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어리석음과 추함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대전시민아카데미 기획강좌: 기록의 힘, 사실의 감동,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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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3 신병[훈련]을 마치고나서 큰녀석과 함께하다. 짧은시간인데 면회외출은 오히려 엄마가 나온 듯 따듯한 방에서 단잠을 잔다. 준비한 먹을 거리, 그리고 더 갈증이난 단것의 행진으로 이어지는 이등병의 군것질..그리고 그 사이사이 동료들의 삶과 일상이 보태져 좋다. 귀대시간 바래다주는 차의 행렬로 마감시간에 맞춰 뛰어가는 녀석의 해맑은 인사가 좋다. 편해도 바닥부터 시작하는 생활은 힘든게 맞다. 아이들도 현장학습과 조퇴를 시켜 함께 했다. 좋단다. 그래 좋은 기억,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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