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유의 난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불편함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13


그는 엄숙주의와 거리가 먼 철학자다. 인간은 무한을 사유할 능력이 있는 동시에 유한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존재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무한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결코 유한을 완전히 극복하고 무한으로 나아가는 종교적 초월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무한은 유한 속에 내재해 있는 소진되지 않는 가능성이다. 14

 

 철학은 언제나 분리의 몸짓 안에 있다. 철학은 항상 참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분리한다. 그러한 분리를 통해 기존의 규범과 낡은 질서를 지적인 수준에서 전복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결국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의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조직을 변경시킨다. 15

 

철학적 행위란 질서를 변경하려는 모험적 행위이고, 그것은 기존 질서의 완강한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철학은 고급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실천이다. 모든 비난과 조롱, 왜곡과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태로운 실천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16

 

절망으로 점철된 것 같은 오늘의 세계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무척 힘들고 요원하다. 그러나 또한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주체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없다. 그 길은 만들어져야 하는 길,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미증유의 길이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은 바로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21

 

이 욕망은 전대미문의 것, 법의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고, 지식을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혁명적 정치란 식별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유적인 것의 국지적 창조인 것이다.23

 

이 부정성들은 우리에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저 그뿐이다...자원이 없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무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떤 가능에 대한 사유의 길을 찾으려 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시다. 항상 시간을 선취하는 시는 우리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는 좁은 통로를 가리킨다. 27

 

"나는 새로운 철학자다"라고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장을 섞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철학은 끝났고, 철학은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통해 완전하게 새로운 어떤 것이 시작한다고 제언한다. 철학이 아니라 사유가! 철학이 아니라 삶의 힘이! 철학이 아니라 합리적인 새로운 언어가! 실제로 낡은 철학이 아니라 경이로운 운명을 통해 나의 것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철학이." 39

 

철학은 인식의 인식이 아닌 것처럼 인식도 아니다. 그것은 행동이다. 철학을 판별하는 것은 담론의 규칙들이 아니라 행위의 단독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의 적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지칭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행위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요컨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철학적 행위를 지칭하는 데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여기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43


철학은 새롭고 거대한 규범적 분리를 제안함으로써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경험들을 재조직하는 행위인데, 이러한 분리는 기존의 지적 질서를 뒤집고, 진부한 가치들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들을 격상시킨다. 그러한 모든 것의 형식은 다소간 제한 없이 모두에게 향하는데, 특히 이는 젊은이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삶을 결정해야한다는 점을 그들이 빈번히 더 논리적 봉기의 위험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46

 

우리는 거의 20세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전면적인 부정과 '최후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것을 창조할 수 없다.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충돌의 그물망에 조여진 진리의 국지적 긍정 속에서 새로운 진리들을 애써 옹호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태양을, 달리 말하면 새로운 정신적 배경을 찾아야 한다. 당분간 우리의 발명이 갖는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스티븐스가 말하는 것처럼, "태양은 어디에 있건 배경"이기 때문이다. 90


코헨은 구성가능하지 않는 집합에 '유적인' 집합이라는 멋진 이름을 부여했다....코헨에게-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 다수성과 집합들의 순수한 보편성은 정확한 정의나 명료한 기술의 편에서가 아니라 비-구성 가능성의 편에서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106

 

정치적 투쟁은 직접적으로 유적 속성과 구성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순전히 형식적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법, 질서, 욕망, 유적 속성, 구성 가능성이 뒤섞인 복잡한 구성물이다.109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새로운 허구의 문제라고 믿는다. 우리는 허구와 이데올로기를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과학, 진리 또는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진리 그 자체는 허구의 구조 안에 있다. 진리의 과정은 또한 새로운 허구의 과정이다. 따라서 새롭고 위대한 거구를 찾는 것은 궁극적인 정치적 믿음을 갖는 가능성이다. 111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어둡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빛나는 허구를 통해 우리의 궁극적 믿음을 지탱해야 한다. 도시 젊은이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어떤 허구도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사회 문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문제는 위대한 믿음을 떠받치는 위대한 허구가 없다는 것이다.(예를들어 유적인 진리들에 대한 궁극적 믿음, 유적인 의지를 정상적 욕망들과 맞서게 하는 궁극적 가능성, 이러한 유형의 가능성과 그런 종류의 가능성에 대한 유적인 진리들에 대한 믿음, 자! 우리의 새로운 허구란 이런 것이다...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허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위대한 허구가 없다면 우리에게 궁극적인 믿음과 위대한 정치는 없을 것이다.-아마도 고유명 없는 허구를 갖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 계급, 정당 사이의 또 다른 배치, 정치적 영역의 또 다른 구성을 갖는 것이다.112-3)

 

그것은 가능하며,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허구란 새로운 형식 아래에 있는 유적인 허구다. 새로운 위치설정은 틀림없이 새로운 정치적 용기에 대한 문제다. 그 허구를 찾는 것은 정의와 희망의 문제다. 그러나 허구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용기의 문제다. 용기는 법으로도, 욕망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 일상적인 형식 아래에서 법과 욕망의 변증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주체성의 이름이다...법이나 욕망으로 환원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의 장소, 유적인 의지로서의 어떤 것의 국지적 장소를 창조하는 어떤 것이다.그것은 가능하며,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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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림] 맑스재장전 상영과 저자와 대화
    from 木筆 2013-12-04 17:16 
    뱀발. 행사를 겸해서 책들을 다시 챙겨봅니다. 대담자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이란 질문을 건네지만, 어느 누구도 예,아니오를 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것이죠. 대담자의 답변이 중요한 것은 아닐겁니다. 리뷰와 다시보기로 혹 스스로 갖고 있는 교조적인 틀에 박힌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혼자든 모임이든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관념에 집착하지 않게된다면 조금 더 나은 관계가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