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요철과 굴곡, 그리고 횡단

 

 

횡단이라는 말을 참 쓰고 싶지 않은 말이다. 요철과 굴곡도 편한 말이 아닌데 삶의 요철과 굴곡을 쓰고 가로지르면서 아니라고 관통해야 한다. 결국 답이 아닌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삶의 겹침이라고 쓸까?


운동(활동)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은 질문이 되지 않는다. 활동(운동)은 왜 앞으로 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가 약간 나은 질문이 되겠다. 질문에서 시작하는 답을 과거에서 찾을 수 없다. 뒤지고 살펴본다고 해도 화려한 영광의 흔적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더 안될 수밖에 없는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니 너무 서글프지 않는가?  우울하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지역을 들 수 있다. 지역에서 중앙의 소비자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같은 말로 지역에서 중앙으로 머무르고자 하는 관성이다.

 

서울에 중심에 나를 끼워맞춘다는 일은 참 곤혹스럽다. 정해진 룰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다수결도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별 생각이 없으니 몸빵이라도 해야 중간이라도 가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렇게 해왔고 하는 수밖에 없다. 지역만의 문제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보이도록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중앙의 시각과 시선, 입장에 또 다른 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늘 소외되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던 소수단체의 기죽은 소수의견들을 기억해내고 살려낼 수 있다면 조금은 발화의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앎이 횡행하고, 정세가 횡행하고, 선거가 자라던 일들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상황에서 버티기만 해도 큰 역할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비자가 생산자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중앙의 의제를 빌려쓰고 빌려서 움직이고 빌려서 살았다. 구차하게 얘기하자. 얼마나 중앙이 되고 싶어 안달했던가를 얘기해보자. 단체가 만들어지고 단체의 가치와 색깔이 생기고 모든 다른 단체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주기를 바라왔던가.

 

통일, 노동, 교육, 문화, 자치, 참여, 환경, 녹색, 생태, 민주, 양심, 여성, 과학, 선거...이루 셀 수 없는 가치는 자신을 의심할 수 없다. 한번도 의심해내지 못했다. 복음의 전도사이다. 어깨걸고 합심해서 지금까지 헤쳐나왔다. 그런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럼 다시 묻자. 그 가치만으로 지금 여기를 설득시킬 수 있으며, 앞으로를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느냐고 묻자. 모든 단체가 당신이 추구하는 색깔로 번지면 살만하냐고 묻자. 스스로 상처를 내지도 아파 피고름을 흘리지도 못했고 아문 상처로 걸음도 걷지 못했다. 아픔이 번지지도 않고 번질 수도 없고, 같이 아파하지 않는다.

 

회원과 조합원은 열정과 아픔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저기 회원일뿐 애틋한 소속감도 없다. 조합원은, 당원은 여기저기 보험을 든 객체로 대행을 바랄 뿐이다. 회원은 자신의 아픔 한바가지 단체에 부어넣을 마음도 삶도 없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는 하고싶은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회원의 후원으로 대행하면서 스스로 빛나기를 원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다른가치도 다른 색깔도 다른목적도 원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족하다. 됐다. 회원은 풍족하다 조직은 다른 가치를 탐색하고 시도할 수 없다. 더이상도 더이하도 없다. 닫혔다.


 

2.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도 삶을 살피지 않았다. 삶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삶을 걸려고 삶을 섞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삶이 아니라 대상으로 삼는 저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삶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교 역할을 하는 활동가들은 안심할 수 없다. 헌신을 넘어 고난과 역경을 무릅쓰고 청춘을 뭍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열악함을 베개삼아 하루를 버텨내고 싸워낸다. 안부를 물을 수 없다. 왜 물어야 하는가? 내 삶도 아닌데 말이다. 보따리를 싼다. 애정과 열정을 담아 조직을 자라게 만든다. 피와 땀이 배여 있는 곳이다. 힘들다. 관성화되는 조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어볼 곳이 없다. 하고싶은 것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조직에 갇혀있다는 느낌이다. 슬그머니 관성이 생긴다. 이용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뒤를 봐줄 수 없다. 너의 길이다. 

 

조폭이냐 뒤를 봐주게. 거꾸로 물어보자 조폭은 뒤라도 봐준다. 이게 쿨한 것인가. 삶과 일이 만나고 풍부해지는 것이 이 시공간이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보험처럼 대행하고 대리하게 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자원해서 해야 하는 것인가 되물어 보았는가. 단체가 다르면 정파가 다르면 입장이 다르면 활동을 할 수 없을까? 단체와 단체 사이와 틈을 벌리거나 풍요롭게 하는 역할은 없을까 정녕 보장이 되지 않는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쓸 재원도 한정되는데 활동가의 삶의 일정부분까지 책임져야 한다니 이건 오버가 아닌가?

 

10년치 활동가 월급을 계산해보자. 10년동안 쓰고 생활했던 스스로 돌아보자.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은 온도차이만큼 달라야 하는가? 쓸모에 따라 여기저기 움직일 수밖에 없는 부품인가? 삶을 봐주는게 조직과 단체에 그렇게 부담되는가 부담될 수밖에 없는가? 왜 활동가는 일에 질질 끌려다녀야만 하는가? 이것의 우리의 수준이고 능력이라고 생각은 못해봤는가? 왜 활동가는 멋지고 부럽고 생산자이자 창조자이가 예술가이기를 바라면 안되는가? 사실 이런 면을 보자고 외치던 사람은 우리였지 않은가? 그래야만 활동이 운동이 발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합원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던가? 당원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던가? 어떤 마음인지? 그(녀)의 일상이 어디로 닿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귀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조합원이 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생태에 눈을 뜰 수밖에 없으며, 기대고 나눌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사람안에 우주가 들어있다던때는 언제고 입장이 사뭇 다르다고 냉정하게 팽겨칠 수 있단 말인가? 단체를 뒤돌아보기도 싫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엔엘이고 피디고 어떤 라인이고 어떤 사람들과 친해서 모든 것이 넘사벽이다.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주홍글씨때문에 일상은 만나지지 않는다. 고민은 섞어지지 않는다. 다른 이견은 들리지 않는다. 만나고 만나고 싫어도 만나고 나누고 나누고 싫어도 나누고 해야할 판이지만 모두 다 소에 닭이다.  이런 원심의 효과가 어떤지 10년전과 지금을 본다면, 역시 지금과 10년뒤를 비교할 수 있으리다. 대면할 수 없다. 물과 기름처럼 갈라진 기억만 선명하다. 그래서 10년뒤가 더 암울하다. 가치가 아니라면 이견으로 이견이 아니라면 일상으로, 일상에 마음을 얹고 이견을 듣고 일을 나누고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보고싶어 안달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렇게 다가가고 싶은 회원과 조합원과 당원에게 나눠줄 앎고 삶도 지혜도, 실천도 없을 것이다. 백이면 아흔아홉.

 

 

3. 뭔가 아름답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 뭔가 빠졌다는 느낌, 뭔가 찜찜한 무엇. 왜 산뜻함을 느끼지 못할까. 어떤 일을 하던 뒷끝이 남는 것은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운동의 그림자, 활동의 그림자는 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지시한다.


엘리트 의식은 문화로 볼 때 단순하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게 몸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새누리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새정치연합, 민주당보다 낫다고 여기는 진보정당, 일반인보다 낫다고 여기는 친환경구매자, 시민보다 낫다고 여기는 시민단체 구성원은 낫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가치는 부여잡는다. 노동이 통일보다 낫고, 통일보다 평화가 낫고, 환경이 낫고, 교육이 낫고, 복지가 낫고, 낫고 낫고... ....


사람들은 그래도 안다. 자세히는 몰라도 뭐가 잘못되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뭔가 안심하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뭔가 잘 안맞는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답은 설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아름다울 때까지... ...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정말 구차하지 않은가? 구차하고 싶다면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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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애완견)의 시대

 

사람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 사회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사회는 사람을 밀치고, 밀쳐진 사람은 사람과 부딪힌다. 사람은 사람이 싫다. 사회는 사람의 기대를 받아 안지 못한다. 사회는 사람을 뱉어내고, 뱉어낸 사람은 기를 쓰고 사람을 누르고 눌러야지만 사회에 발을 한쪽이라도 담근다. 사회는 가정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가정의 구성원은 가족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다. 사람의 기대는 어김없이 무너진다. 사람은 사람에게 기댈 수 없다. 사람보다 더 사람같아진 반려견은 사람 마음을 읽는다. 버림받고 치인 마음의 상처를 달랜다. 기대를 꿀꺽 삼키지도 않는다.

 

가족독립 국가 또는 1인 독립국가


무릎이 좋지 않아 살찌지 않게 케어한다. 털빛이 좋지 않고 몸에 좋지 않아 유기농을 먹여야 한다. 행여 다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마음 졸인다. 네겐 싼 것을 먹일 수 없다. 애지중지 너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 열자식 소용없다. 전부다.

 

노숙자 또는 사람


오늘도 역앞에 길게 줄이 늘어서있다. 초췌한 몰골에 노숙자들은 한끼의 일용한 양식으로 주린 배를 움켜쥔다. 욕설과 싸움, 술, 냄새 난 사람을 좋아할 수 없다. 사람은 사람을 피할 수밖에 없다. 유기농인지 친환경인지 궁금할 수 없다. 끼니를 채울 수 있다는 건만으로 온몸은 순간 따듯해진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용납도 되지 않고 용서할 수 없다. 까스통에 불신지옥이라. 누구누구의 부모이나 아버지라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세상의 쓰레기만 쳐바르고 사는지 만난다는 것이 끔찍스럽다.

 

반려견 또는 애완견


난 문밖에 없다. 난 문안의 식구다. 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대부분을 사람 품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떻게 보아도 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문밖을 나서자 사람마음을 잃어버린다. 사람은 문밖을 나서자 사람에 치인다. 사람은 사람을 뱉어내고, 사람은 사람으로 가는 길조차 잊어버린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흐르는 마음길도 놓쳐버렸다. 사람으로 살아있다는 건 참 견디기 힘든 일이다. 상팔자다. 사람이 사람을 어루만지지도 다가서지도 다가설줄도 다가가게 하는 법도 몰라 위무의 공간에 머무른다. 더 사람같은 사람을 만나 건강도, 돈도, 마음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돈은 사람도 삶도 가린다. 삶은 삐죽빼족 돈의 온기를 나눠갖지 못하게 한다. 일렬로 늘어서 백수에서 비정규직의 굴곡을 거쳐 장애인과 세모녀와 시집장가 못가는 처녀총각 병들어 마음가눌 수 없는 사람과 삶들은 신기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볼 수도 없다. 섞이지도 못한다. 안부조차 물을 수 없다. 사회는 가둬져있고 세상은 격막에 분리되어 있다.  아프다. 받은 상처는 그렇게 갈지자로 뿔뿔이 돌아가 사람같은 사람을 만난다. 

 

 

볕뉘.  저울 양쪽에 올려놓는다. 사람과 반려견을 찬찬히 놓는다. 눈을 꼬옥 감는다. 그리고 실눈을 뜬다. 안개처럼 보이도록 찬찬히 마음으로 본다. 어디로 기울고 있는 것일까  오르락내리락 중심을 잡으려고 하는가? 어느쪽이 시야에 사라져버렸는가?  옛날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개판 오분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조심스럽다. 개도 사람도 화낼 일이기때문이다. 말 조심해야 한다. 개 고양이 취급한다는 말은 새로 생겨야 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비루하지 않은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기분을 헤아려야 한다는 사실이 비극이지 않는가? 생물이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만큼, 아파하는 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다는 것은 일면은 맞고 일면은 틀리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과 기술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당분간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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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함에 의한 산만함으로 산만해진 상태의 우리들

 

모서리.

 

"굳이 책을 찾아볼 이유가 있겠는가? 전자 데이터라는 숲에 사냥감이 널려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수집하는 맛이 짭짤한데 왜 책을 봐야 하고 토론을 해야하는가? 네모난 유리상자에 쳐박혀 있으면 되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책을 읽는 경우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를 비교했을 때, 같은 내용에 대해 후자가 오답율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연구사례는 나타낸다. 인터넷의 경우 F 패턴을 따르면서 정보를 습득하는데 첫줄은 길게 아래쪽은 짧게 짧게 신문의 리드기사와 보조기사를 읽은 것처럼 본다고 한다. 물론 머무르는 시간도 극히 짧다. 

 

흔히들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찬반의 입장으로 나뉜다. 이것 자체가 본질을 올바로 보는 방법은 아니다. 인터넷과 SNS는 천국이요 희망이라는 것과 반대로 모든 관계를 극으로 몰고 서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라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전문가나 학자가 논지를 전개하는 것 역시 먼저 입장을 갖고 출발하는 것이기에 전체를 보지 못할 확율이 높다.

 

그렇다고 인터넷과 네트워크나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이고 올바로 쓰면 상관없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찬반과 중립을 넘어서 기술이 미치는 영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어 한다. 

 

뇌에 대한 지식은 많기도 하거니와 일반화되어 있기도 하다. 단기기억, 장기기억 학습효과나 공부방식에 의해 관련 연구가 응용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사람과 이어진 기계의 한부분으로 인식한다. 그런 인식으로 인해 잘쓰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기술들이 습관을 변화시키고, 의식을 변화시키고, 기억력에 영향을 미치고, 신경에 영향을 미치고 뇌에까지 생체, 생물학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하면 조금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라마찬드라, 최근 뇌에 대한 연구는 뇌의 가소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뇌는 끊임없이 변화고 진화할 수 있다한다. 영국의 택시운전사들의 해마에 대한 연구, 원숭이, 사고환자에 대한 연구, 몸이 반신마비가 되었지만 몸의 활용과 정기적인 치료는 뇌를 활성화시키고 기능을 복구시키는 능력으로 치유된다는 결과들.  뇌는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들자면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쯤 있다라고 위치만을 기억해둔다. 카드, 전화번호, 주소 모두 기억하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십여년 이상 블로그나 인터넷과 친숙하기 때문이고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단기기억, 암기력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짬짬이 하는 일들은 문장을 외우고, 반복하고 하는 일이다. 하지만 쉽게 단기기억이 회복되지 않는다. 아직도 연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SNS와 네트워크의 과도한 집중은 십자말퀴즈를 풀면서 책을 보는 일들, 흔히 말하는 멀티태스킹이다.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하는 습관들이다.  당연히 그러는 것 아닌가라고 여길 수도 있다. 네트워크에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일들을 병행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게 여길 수 있지만, 네트워크에 접속한 뇌는 끊임없이 문제해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뇌는 여기에 길들여지면서 진화한다. 짧고 얕은 것에 반응하고 뇌는 활발해진다.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통합되고 긴 신경다발, 장기기억의 단락들이 얇아지며 끊어진다는 것이다. 뇌에 화학적 생체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점이다.

 

산만하고, 산발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과 깊이나누고 토론하지 못하고, 숙고하지 못하는 흐름이 생긴다는 것이다.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 전체적인 느낌이나 소소한 감정들을 관계에 있어 잘못 읽어낼 수 있는 경향이 안착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정보원으로서 네트워크가 문턱을 넘어 관계원으로서 네트워크가 되었다. 끊임없이 잔감정과 감성을 나누고,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에서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속에서 문제해결하고 접촉하는 방법은 바꿀 수 없다. 굳어져 있고, 빠져나오려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과'한 지점에 서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10대와 예비10대는 중독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지도 모른다. "과"함에 따라 피로도를 보일 것이며 또 사람들은 유행처럼 "아무것도 하지않기" 모임, "혼자내버려두기"모임, "휴대폰없이 일주일나기"에 열광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극단에는 역할 빼껴쓰기에 취해 다른 인물을 가장하고, 오프모임에서 대면하는 방법조차 몰라 여전히 네트워크 속에서만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가지 살펴볼 것이 있다. 네트워크에서 자아의 확장이라는 이유로 연결을 가속화시켰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자아는 무뎌지고 손상을 보인다. 이성적이 아니가 더욱 감정적이고 쉽고 분노하고 감정을 쉽게 조절하지 못하는 군상들과 습속이 몸에 배이게 된다. 미디어와 기술은 가치중립이 아닌 것이다.  기술이 사람을 조정하거나 끌려다니게 하고 있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한가지만 원하는대로 보면 안된다. 시간에 길게 어떻게 요동치는지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보려고 해야 한다. 네트워크가 사람을 움직이고 조종할 수 있다. 사람을 바뀌게 할 수 있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을 문화의 그물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고, 떨어져 나온 개인은 네트워크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아라는 것이 깊이도 없고 찰라적이고 얇고 넓은 팬케이크 같은 것이라면, 더구나 사회적 관계 형성도 서투르기 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문화가 문제인가, 문화 속에 개인이 문제인가, 네트워크 기술을 조정하지 못하는 개인이 문제인가, 기술이 문제인가

 

 


 

 

우리의 뇌는 변할 수 있는가?


 

머제니치 원숭이 실험(뇌의 세포재건) -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 신경가소성의 증거를 목격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주류 신경과학계에서는 누구도 가소성이 이 정도의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49


오늘날 헤브의 법칙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정의로 신경가소성이 보여주는 중요한 역동성을 정리한다. "동시에 활성화하는 신경세포는 한다발로 묶인다." 51


경험주의자와 이성주의자들의 상반되는 철학은 시냅스에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뉴욕대학교의 신경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시냅스와 자아]라는 책에서 천성과 양육은 실상, 같은 이야기라고 적었다. 양쪽 모두는 궁극적으로 뇌의 시냅스 조직 형성을 통해 정신적, 행동적인 영향을 받는다. 53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검사 역시 뇌가 얼마나 집중적으로 스스로를 재정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 사고 당사자들의 뇌 속에서 잃어버린 사지의 감각을 접수하던 부분들은 신속하게 다른 신체 부분이 느끼는 감각을 접수하는 회로로 교체된다(신경학자 라마찬드란)54


진화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여러 번 사고를 반복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뇌를 안겨주었다.  데이빗 불러는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책 [Adapting Minds]에서 자연 도태 과정은 "미리 만들어진 적응으로 이루어진 뇌를 설계한 것이 아니며 도리어 개개인의 일생을 통해 또는 며칠에 걸쳐, 요구를 담당하는 특별한 구조를 형성하면서 주변의 환경적 요구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적었다. 57


뉴런들을 연결시키는 화학적으로 활성화된 시냅스들은 실상 이 뉴런들이 형성한 회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싶어 하도록 우리를 조종한다. 도이지는 일단 우리가 뇌 속에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낼 경우 오랫동안 이 회로를 활동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뇌가 그 기능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방식이다. 일상적인 행동은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반면 사용되지 않는 회로들은 가지치기 당하는 식이다. 61


뉴런과 시냅스는 우리 사고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뇌의 유연성이라는 특성 속에 지적 쇠퇴의 가능성이 이미 내재해 있는 셈이다.....우리 뇌 속의 살아 있는 통로는 지극히 저항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대부분이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통로이며, 더 깊이 내려갈수록 되돌아오기는 더욱 어렵다.  63


검색과 기억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기억할 만한 인용구를 적어야 한다는 에라스뮈스의 조언은 광범위하고도 열정적으로 지켜졌다. '비망록'으로 불리게 된 이 같은 공책들은 르네상스 교육의 특징이 되었으며, 모든 학생들이 이 비망록을 작성했다. 17세기 무렵에는 학교를 넘어 폭넓게 사용되었다. 비망록은 학식을 갖춘 사고를 함양하기 위한 필수 도구로 인식되었다. 263


인터넷은 어느새 개인 기억의 보조물이 아닌 대체물로 인식되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인공 기억이 생물학적인 기억과 비슷한 것인 양, 인공 기억에 대해 일상적으로 이야기한다. 264


생물체의 기억이 하드 드라이브처럼 기능해 비트로 구성된 데이터를 정해진 장소에 저장하고 뇌의 예측 범위에 입력함과 동시에 정보들을 제공받는다면 저장기능을 웹에 떠넘기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톰슨과 브룩스가 언급한 대로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는 더 의미 있고 심지어 더 인간적인 예측을 위한 뇌 공간을 확보하면서 우리에게 더 넓은 기억 공간을 제공한다. 이 같은 유추는 쉽게 설득당할 만큼 간결하며, 이는 우리 기억을 압착된 꽃으로 만들어진 책이나 벌집의  꿀과 같다고 묘사하는 것보다 확실히 더 과학적인 듯하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이 후기 인터넷적인 개념에는 문제가 있다. 이는 틀렸다. 267


뮐러와 필젝커는 기억이 머릿 속에서 고정되기까지, 즉 "강화되기"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린다고 결론 내렸다. 단기 기억은 즉시 장기 기억이 되지 않고, 강화 과정도 까다롭다. 머리를 두들겨 맞았건, 단순한 산만함이건 관계없이 어떤 방해물로도 머릿속에서 초기 기억을 쓸어버릴 수 있다. 269


반복은 굳히기의 효과가 있다. 개별 신경과 시냅스에 대한 반복이 가져오는 생리학적 효과를 관찰했을 때 이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 냈다. 시냅스 내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변하면서 뉴런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들의 강도를 바꾸어놓을 뿐 아니라 뉴런들은 완전히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생성한 것이다. 즉 장기 기억의 형성은 생화학적인 변화뿐 아니라 해부학적인 변화도 수반한다는 것이다. 캔델은 이 같은 발견이 왜 기억 강화가 새로운 단백질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백질은 세포 내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70


"단기 기억은 이전에 존재했던 연결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킴으로써 시냅스 기능의 변화를 낳으며, 또한 장기 기억은 해부학적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271 신경가소성에 대한 발견과 꼭 맞아떨어진다.


"인간 뇌에서 장기 기억의 형성 과정은 컴퓨터와 같은 '인공 뇌'와는 명확히 다른 매우 믿기 힘든 과정 중의 하나다. 인공적인 뇌가 정보를 빨아들이고 즉각 기억 속에 저장하는 반면 인간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인 지 한참 후에 처리하며, 기억의 질은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생물체의 기억은 살아 있는 데 비해 컴퓨터의 메모리는 그렇지 않다. 278


인터넷은 개인적인 기억의 대안물로 사용하면서 내부적인 강화 과정을 건너뛴다면 우리는 그 풍부함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280


우리가 기억하고 잊어버릴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기억 강화의 핵심은 집중이다. 외현 기억을 저장하고 이와 동일한 힘으로 중요한 것들을 연결하는 일은 반복이나 집중적인 지적,감정적인 개입을 통해 확대되는, 강한 정신적 집중을 요구한다. 예리하게 집중할수록 기억도 더 예리해진다. 켄델은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유입되는 정보는 철저하고 깊이 있게 처리되어야 한다. 이는 정보를 처리하고 기억 속에 이미 잘 형성되어 있는 지식과 체계적으로 잘 연결시킴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정보를 작업 기억으로 처리할 수 없다면 이 정보는 이를 유지시키고 있는 뉴런이 전기 전하를 유지하는 동안에만 지속되는데, 이는 기껏해야 몇 초에 불과하다. 그 후 이 정보는 머릿속에 거의 또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282


인터넷의 하이퍼링크는 우리의 시냅스와 같은 유기적인 풍부함이나 민감성을 가지지 못했다. 웹이 만들어낸 연결들은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검색과 서핑에 쏟는다 해도 결코 웹의 연결이 우리 것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기계에 기억을 아웃소싱할 때 우리는 지성이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 역시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1892년 기억에 대한 강의를 끝맺으며 "연결은 진정 사고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연결은 진정 자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85


기억을 외부 데이터뱅크에 저장하는 것은 단순히 자아의 깊이와 특성만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의 깊이와 특성 또한 위협한다. ..문화는 이진법으로 축소되고 또 인터넷으로 업로드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는 모든 세대의 구성원의 마음 속에 새로 수정되어야 한다. 기억을 아웃소싱하면 문화는 시들어간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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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동화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가?
    from 木筆 2014-11-19 13:27 
    모서리. 기술은 설계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기술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설계자들의 의도를 넘어선다. 왜냐고 묻지만, 답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설계자의 의도를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긍정적인 영향만 의도적으로 부풀릴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기술에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문화, 심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에 과도한 혜택을 받은 연유로 기술만 도드라져 보일 뿐 기
 
 
 

1. 일주일이 일터일로 정신없이 지나는 와중, 막내가 영화를 보자고한다. 유니는 수능이 끝나 저녁식사를 하고 부산스러운 금요일이다 싶다. 어찌하여 늦은 시간 막내 녀석과 함께 오랜만에 인터스텔라를 본다. 공상 과학이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이다. 스토리도 좋고, 짜임새도 있고 만화책과 기초되는 책들 몇권을 권해본다.

 

 

 

 

 

 

 

 

 

인터스텔라 허구인가 과학인가(강연안내)

 

 

 

 

펼친 부분 접기 ▲


 

2. 단풍을 놓친 줄 알았다. 잡목이 많아 단풍이 남아 있을 거라는 소식. 손화중이 비책을 꺼냈다는 미륵불과 도솔암의 지장보살을 보고 오르내리는 길 단풍이 참 곱다. 예정된 시간보다 다소 늦긴했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선운사 초입 부도와 비문이 있는 곳에 들르다. 시종 눈길을 끄는 비문은 역시나 추사의 백파비문이다. 오석을 자유자재로 놀린 듯 부드럽게 패이고 맺힌 것이 붓글씨를 허공에 놀린 듯하다. 정신없이 쳐다보다 담아오다. 싸가지 없던 추사가 돌아가기 2년전 논쟁을 벌였던 백파에게 따듯한 마음들을 남겼다한다. 초입의 문도 연잎처럼 부드럽고 아담하다.

 

 

3. 생협자료들을 이번 기회에 다시보았는데 생각보다 현실이 암담하다. 관료조직과 성향상 쉬운 길만 가려는 경향을 가질 것이고, 중산층 조합원들도 엘리트 소비자의식만 남아있을 것이고 가는 길이 쉽지 않았고, 멀기만 해보인다. 일에 지쳐가는 모습도 안스럽다. 겸사겸사  정리도 할 겸 공부가 몸에 박히도록 해본다.


4. 능가산에 있는 개암사와 도솔산의 선운사에 다녀오다. 동백이 조금씩 피기 시작하는데 오히려 끝없이 하늘로 피고 맺힌 감나무에 눈길이 간다. 동학도 두갑이 지났는데 찾는 이도 알아주는 이도 없는 매체의 흔적에 애잔한 마음이 든다.


 

5. 인터넷이 뇌에 미치는 영향, 자동화기술이 갖는 기술의 그림자가 궁금하여 책들을 구입하여 보고 있다. 생각보다 맥을 집지 못한 책들까지 수중에 닿아 아쉬웠는데, 유리감옥과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저자 니콜라스 카가 맥루한에 힌트를 얻어 여러 논지와 맥락을 잡고 있는 듯하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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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특구 과학자 주민과 함께 문집 펴내 - 10주년기념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41112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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