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여성학자라는데 선입견을 잡혀 있었나보다.  책 제목도 정희진처럼 읽기라고 해서 출판사 기획이 아닌가하는 오해까지 겹쳐져서 책을 조금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책이 앞뒤로 개인의 책이력과 성장 과정, 책을 대하는 모습들을 살펴보면서 그런 근거없는 편견은 사라졌다. 이렇게도 모르고 있다니 스스로 한심해지는 것이다. 

 

여성학자라기보다는 평화학자로 읽힌다. 그러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전천후 독서가 필수적이고 몇차례 책를 다루는 산고를 겪는 과정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책읽기는 연애다. 책은 도끼다. 하지만 이렇게 아프게 읽는 이가 있을까 싶다. 비판의 날은 늘 서있다. 그녀는 책읽기를 강을 건너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여울을 건너기 위해 발을 담그기도 해야 하고, 어쩌면 몸을 담그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로는 몸을 맡기면서 헤엄을 쳐야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말은 참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늘 뼈아픔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고통스럽다. 책갈피를 붙여두는데 여기저기 붙어있다. 공감이라기 보다는 이해하지 못해 절감하지 못해 붙여두는 것이다. 나는 남자다. 그녀의 말대로 결핍을 결핍한 존재다.  포말이 일지 않아 스스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습속이 배인 남성이다. 그녀가 말한다. 제주도 민박집에가서 주인이 아침에 내놓는 밥상을 받으면서 생각한다. 하루종일 뭘해먹일까 걱정하는 여성의 삶에서 아무 생각하지도 않고 때만 되면 나오는 밥상을 누리는 권력을 왜 마다하겠는가 하고 말이다.

 

진보의 시선은 늘 비장애인, 주류의 평균적인 삶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국익을 이야기하고 경제 성장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우파와 같은 발전주의자다라고 한다. 그녀는 독후 감 사이사이 가해자와 피해자, 악의 규정 등등 권력관계에 미묘하게 생각에 쪼임새를 넣고 틈을 벌린다. 군사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생동감이 있다.  강자와 악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벌리고 했을 뿐이다.  약자와 피해자는 거기에 왜 그랬느냐고 물음표를 던지고 해석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는 순간 약자의 비극과 비참은 더 자신을 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중적인 위계와 관계, 그 언어를 명민하게 살핀다.

 

책의 절반을 펼쳤다. 고통, 주변과 중심만을 접어두고 보면서 책속의 책을 담아둔다. 저자가 재추천하는 책들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은 많이 권했다. 사실 여성학이 아니라 읽는 내내 진보라는 관점으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마음은 주류에 걸쳐있지 않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비주류로 중심이 내려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진보는 발전주의에 사로잡혀 민주주의로 내려오는 길도 모르리라. 저자가 말했듯이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노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나는 헛똑똑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빌미 삼는다.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가는 삶"이라는 말에 조금 위안을 삼아본다. 

 

멋진 사람이다. 

 

 

 

 


 

독서가, 조금 '다른 책'이 나한테 확신과 자신감을 준 것은 여성학 책을 통해 획득한 위치성때문이다. 위치성은 구조(역사, 사회, 상황 ....)속에서 나를 알고 상대를 아는 방법이다. '식민지 민중'인 나는 파농의 말대로 나의 언어와 지배 언어 '2개 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35


여성학은 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두 기둥으로 삼고 생물학, 문학, 인류학, 지리학, 역사학, 의학 등 망라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실제로 서구 여성주의자들의 전공은 신학, 핵물리학, 정신분석, 영장류 동물학, 군사학 등 다양하다.  36


고 3때 성적으로 위계화되는 이 사회, 우리는 창피해야 한다. 근대성, 합리성까진 기대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모태 차별 사회이고, 그것을 '실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학별은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신분 사회이고 인종 사회다. 38


나는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정체화하거나 특정 분야의 전공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기 탐구와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반정공주의 입장을 지닌 시민이다. 40


 

고통


저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45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 -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 공감, 수용받고 싶은 욕구는 생존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살하기도 하는 관계적 존재다. 소통을 위해 죽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도 잘못된 선택도 아니다. 이 책 페이지마다 나오는 말, 정신 질환을 앎으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 죽도록 아픈데, 아니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인데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살아 있는 죽음을 살 것인가, 죽음으로써 살 것인가.....경쟁과 생산력 중심 사회에서 머리가 아픈? 마음이 아픈? 아니 몸이 아픈! 사람들은 '진정한' 낙오자로 간주된다. 달리기하다가 넘어진 것이다. 흔히 사회적 소수자로 나열되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들은 '타고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그렇지 않다) 관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건강 약자에게는 안도감과 공포가 뒤섞인 마음에서, 선을 긋는 가혹함을 보인다. 중년 이후의 정신 질환자에게는 특히 그렇다. 51


경험한 나, 말하는 나 -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차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갈등한다. 고통과 억울한 심정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지만(하소연이라도 실컷 해봤으면) 내 처지를 수용해줄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고 더욱이 상황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소문만 나고 결핍된 인간으로 취급받을 위험이 더 크다. 53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라는 목소리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 간의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이다. 58


파이이야기 - 사람은 인연 덕분에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스스로 부여한 의미일 뿐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최대치의 관심이라고 해봤자 '너희는 지구의 재앙이야' 문명대 자연 이런 문법은 없다. 우리는 모든 인식 대상에 그렇듯 자연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알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없다....그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자연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닐까  68


생존자라뇨? -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하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 숭배와 '창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70


성 판매는 당연히 노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중노동이다. 그러나 나는 '성 노동'에 반대한다. 노동이되 '어떤 노동'인가, 수천 년간 왜 '여성 직종'인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너무 오래된 노동을 두고 '노동이다 vs 아니다'를 논하는 이 사회의 지성이 민망하다. .............여성은 '생존자'보다 '성 노동자'라는 정의에 더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성 판매가 기존의 노동 범주에 포함되기보다는 노동 개념의 변화를 촉진하는, 새로운 문제 제기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대다수 민중에게(나에게) 노동과 폭력, 괴로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문맹을 포함해 누구의 언어도 투명하지 않다. 문제는 약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공유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역량이다. 71


손무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의식)도 몸이다. 의식은 몸의 어느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몸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은 사회적 위치성과 당파성의 행위자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 당한 몸', '노동하는 몸', '성 폭력을 겪은 몸'에서 시작하는 삶, 이것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은 모두 몸이다. 74


벼랑에서 만나자 - 제도 (가족주의, 동창회.....)적 관계만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계층별 유유상종이 아닌 만남은 시간 낭비를 넘어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격자에 갇힌 것이다. 이해 관계든 진실한 관계든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영원한 관계는 두 사람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거나 끝없는 자기 갱신의 매력이 교환될 때 가능하다. 전자는 죽는 것이고 후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끔찍한 관계를, 제도의 천막으로 대충 가리면 산다. 외로움은 이 풍경의 상처다. 인맥 관리, '밀당', 포커페이스....몸 사리고 계산해봤자다. 남김없이 준다고 해서 바닥나는 마음은 없다. 그러니 목숨처럼 해다오.  77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그 괴로움, 그 부끄러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몸에 접촉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공간에 사는 방법은? 보내지 못한 편지, 멀리서 바라봄, 생각, 생각, 생각....나는 열등하므로 통화는 위험하다. 받지 않을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만이 행복과 안전을 동시에 보장받는 길이다. 80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습니다 - 2014년 2월에 일어난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그 고통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삶의 반대편에 죽음을 상정하여 '없는 죽음'이 '있는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안보이데올로기 처럼) 83


 

주변과 중심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 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잇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재해석은 상호 역사를 모두 고려하는 개입이요, 생각하는 노동이다. 88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이 글의 제목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89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 '사자'의 요구, 무례, 폭력, 게으름은 꿈쩍하지 않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교정한다. 그들은 작은 침대를 바꾸지 못하고 자기 발을 스스로 잘라야 하는 처지다. 가벼운 예는, 연애를 시작할 때 여성이 외모 관리를 필두로 해서 대대적인 자아 구조 조정에 들어가는 경우다. 이처럼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제는 한없이 복잡하다. 가정 폭력처럼 사자에게 맞춰 산다고 해서 뜯어 먹히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91


권력 관계가 지배자의 성찰로 뒤바뀌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모든 권력 관계에 해당한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re/action)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91


시집을 뒤적이다. [사랑법 첫째]라는 시에 연필을 꽂아  둔다. 관계, 즉 권력의 본질을 아는 순정한 사람은 사랑에도 통달하는 법이다. 시의 전문. '그대를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아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놓습니다." 92


"내게 설명해줘!" -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트라우마는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같은 것은 필요 없다. 95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사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101


성의 변증법 - 부모 사랑 금기는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 동성애 혐오를 낳았다. 파이어스톤은 이 세 가지 억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본 장치이며 가족 폐지를 통한 근친상간 금기의 종식은 성, 계급, 차아 개념을 바꾸는 인류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다. 현재 가족은 계급 우월과 인생 성패의 기준으로 절대시되고 있다. 가족 제도가 만악의 근원이라거나 인간이 발명한 가장 폭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가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인위적인 제도라는 인식이다. 104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 - 정체성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성장' '정치 개혁' 따위의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 혐오,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 106


공포는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 존재한다 - 공포는 반응이지 현실이 아니다. 공포는 겁을 먹은 자에게만 효과가 있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인간의 행위 동기여서 오랫동안 편리한 통치 수단으로 쓰였다...."세계화를 겪는 훈련이 아니라 '세계화로부터 빠져나오는' 훈련을 함으로써 세계화에 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금 이 체제에 시너를 부을 것인가? 폭탄을 설치할 것인가? 자폭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앎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110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마음의 욕망이다.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없이 못 살 뿐이다. 희망보다는 신앙을 갖는 게 낫다. 희망은 관념론이고 신앙은 유물론이다. 113


진보운동과 성평등, 함께 갈 수 있을까 -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122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누가 먼저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력도 필패다. '쉽고 익숙한' 망을 경계하는 이유다. 126


이 남자들의 공통점 - 인류, 특히 핵가족 출현 이후 역사는 주인공 남성을 보조하는 여성 혹은 백설 공주(비장애인)를 돕는 일곱 난장이(장애인)가 '짝'이 되어 유지되어 왔다. 성별 관계에서 이 착취와 보상(에 대한 기대)은 아내다움, 내조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계급, 인종, 성별,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모두 신분 제도로서 '돕다'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다. 133


사회 구성 원리로서 성별 분석이자 관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이다. 문제는, 그래도 되는 사회와 남자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134


고물이 보물 -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 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137


마음 솟는대로 지껄이는 -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남성는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140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143


 

 

 

 

 

 

 

 

 

 

 


 

 

볕뉘. 신발끈을 고쳐매고 있는데 참 성큼성큼 멀리도 가있다. 고맙다. 가는 길 사이사이 잡풀이나 숲이 길을 가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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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과 죽음의 대립 대신, 고통에 대한 이해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져야 한다 (1)
    from 木筆 2014-11-24 17:37 
    권력 징병제-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185팍스코리아나 - 어떤 가치도 온 누리에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 미국 밖에서 전쟁이 없다면 미국 군수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뻔뻔한 이의 마음의 평화는 억울한 사람이 겪는 마음의 고통의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