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관념에 대한 반론 - 인간의 본성, 기준점에 대해 성선설, 선악설로 규정짓는 것은 세세하게 살피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동한 생각하거나 나누었던 고정관념들을 살펴보고, 다소 유연한 경계를 살펴보는 것이 오히려 논의를 확장해나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피터싱어의 행동경제학의 게임이론 등을 통해 살펴보는 협력적 진화를 차용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경직되게 생각하여 찬반으로 정황을 설명하는 것은 이렇게 다소 유연하게 살펴보는 것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인간본성이라는 것의 경직된 해석과 선입견에 가득한 생각을 보수든 진보든 열어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유보적인 입장에 두게 되면 제도와 변화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물과 정황을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서로 좋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책에서 피터싱어가 말미 마무리하면서 생각을 모아둔 것이다.

 


- 인간의 본성을 부정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무한히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 정치적 혁명에 의해서든 사회적 변화에 의해서든 혹은 보다 나은 교육에 의해서든,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 모든 불평등이 차별, 편견, 억압 혹은 사회적 조건들로부터만 기인한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의 일부는 이들로부터 유래했겠지만 모든 경우에 그럴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책을 제시할 때에는 그 정책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제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어떤 것이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식의 추론을 거부해야 한다.
-어떤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 아래에서 살든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친족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경쟁보다는 협조를 촉진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착취해도 된다는 생각은 사람과 동물 간의 간극을 과장하는 다윈주의 이전의 유산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들의 도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 약자, 빈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 한다. 105-106

 

다윈주의 좌파들은 상호 협조가 가져다줄 이득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전제들을 이해함으로써, 사회의 낙오자들을 낳게 되는 경제적 조건들을 가능한 한 없애나가려고 노력한다. 일부 좌파들은 협소한 경제적 관점에 입각해서 사회정책을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 심리에 대한 진화이론으로부터 출발하면, 순전히 경제적으로만 이해했을 때 고용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들을 실제로 고용에서 배제했을 때 발생하게 될 잠재적 사회적 비용이 얼마인가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경쟁시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낙오된 자들이 증가하여 밤길 다니는 일이 위험해질 정도가 되느니, 정부는 고용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경쟁시장에 간섭을 하는 것이 낫다.  89

 


생디칼리슴과 집산주의와 아나키즘의 목표는 모두 현재의 경제적 위계 및 사적 소유 전반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산주의는 모든 이의 소유를 지향하고 아나키즘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소유를 지향한다. 따라서 생디칼리슴은 사회주의가 설파한 경제이론 및 계급투쟁론을 순전히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입장이다. 생디칼리슴은 집산주의가 의존하는 대의제 정치 활동을 완강히 거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아나키즘과 다른 점은 사실상 행동의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109-110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자가 보기에 국가는 소비자 자격을 지닌 공동체의 연합인 반면, 전국 길드는 생산자 자격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의회와 길드 평의회는 저마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대표하는 양대 권력으로서 동등하다...길드 사회주의자가 보기에 국가 사회주의는 사람을 소비자로만 파악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오로지 생산자로만 파악한다. 그래서 길드 사회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그 두 관점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국 길드를 지지하는 이들의 목표이다. 생디칼리스트는 모든 것을 생산자들의 노동 조직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산주의자는 소비자들의 지역 조직 또는 정치 조직에 모든 것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 모두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단지 한쪽으 관점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두 관점을 일치시킬 수 없다고 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순전히 상업적인 활동으로, 생기도 기쁨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소수를 배불리는 활동 대신 전국 길드와 함께 일하자. 노동을 돈으로 사고파는 대신 책임감을 갖고 일하자. 오늘날 끔찍할 만큼 비대해진 국가와 주식회사의 관료주의 대신 자치 정부와 권력 분산을 추구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동의 기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양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케케묵은 표어도 있고 '노동의 기쁨'같은 표어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표어를 믿고 따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집산주의의 철학, 즉 노동은 결코 즐거워질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노동자의 유일한 희망은 소소한 오락거리를 한가득 안고서 더 길게, 더 풍요롭게 누리는 여가 시간뿐이라고 단언하는 그따위 철학에 영원토록 굴복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과로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다. 그것을 일이 아니다. 과로는 소수에게 사치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의 복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은, 노동은, 생리적으로 필요한 것, 몸에 축적된 힘을 소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자체가 건강이자 삶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부문의 유익한 일들이 마지못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단지 그 일이 과로이기 때문이거나 부적절하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145

 

범죄를 바라보는 견해


예방 과정에 따르는 고통은 외과수술에 뛰따르는 통증처럼 안타까워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폭력 충동에 이끌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삶이 아니라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조치는 범죄자의 시야 및 욕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다....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한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간다.... 172

 

대의제 민주주의의 보완


지역이든 산업이든 아니면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든 간에, 오로지 작은 부문에만 관련된 문제를 전 국민이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같은 해악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현재로서는 국가 내의 모든 주요 집단에 자치를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집단보다 해당 집단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모조리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길드사회주의자들이 생디칼리슴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개념이 바로 개별 산업을 자치 단위로 조직하여 내부 문제에 관한 한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나는 명백히 별개의 이해관계를 지닌 다른 부문까지 이러한 조치를 넓혀 가면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가 스스로 드러낸 해악들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80


산업별 길드의 자치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 그들의 제안은 오늘날 지역을 기반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해당 공동체를 소비자의 처지에서 대표하는 의회와 더불어 '길드 의회'를 만들자는 것이다...공장법이나 탄광 규제법 같은 법안들을 지금은 국가가 제정하지만 미래에는 길드 의회가 제정할 것이며, 그러한 법률을 집행하는 길드 의회의 권력은 오늘날의 국가 권력과 똑같을 것이다. 181

 

예속관계


자본주의 공동체라면 어디에나 명령을 내리는 이들과 대개는 고분고분히 복종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여론은 흑과 백의 양 극단 사이에서 조금씩 짙어지는 회색 띠처럼 분포하지만, 이 두 계급의 가치관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반대에 부딪힐 경우 분개하기 마련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반대를 사악한 것으로, 따라서 반드시 분쇄해야 할 것으로 확신한다.

 

경쟁심의 진실은 권력욕에서도 진실로 드러난다.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형태의 권력은 명령을 내리는 권력이자 공개적으로든 비밀리에든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권력이다. 이러한 형태의 권력은 타인이 바라지 않는 일을 강제로 시킬 때에만 드러나므로 본질 자체가 타인에 대한 방해이다. 210


 경쟁심이 전적으로 해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공공에 대한 봉사나 발견, 예술 작품 창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쟁심은 매우 유용한 자극이 되어 사람으로부터 한층 더 유익한 노력을 이끌어 낸다. 그것이 해로운 경우는 수량이 제한된 재화를 얻고자 할 때, 따라서 한 사람의 소유가 다른 사람의 궁핍을 초래할 때이다. 이러한 형태를 띤 경쟁심은 공포를 수반하게 마련이며 공포는 필연적으로 잔인성을 낳는다. 210

 

편견의 폐해


인종이나 지역의 반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경쟁의 해악으로 눈을 돌릴 뿐, 협력의 미덕에는 눈을 감는다. 그런 사람은 동료들의 결점에는 너그러우면서 익숙지 않은 이방인의 결점에는 혐오감을 느낀다. 201

 

경쟁교육의 폐해


경쟁을 유발하는 장학금 제도는 아예 없느니보다는 낫지만 여러 관점에서 비판할 만하다. 그러한 제도는 한참 어린 아이들의 학업에 경쟁심을 불어넣는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지식을 그 자체에 내재한 흥미나 중요성보다 시험에 쓸모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느긋이 생각하느라 둔해 보이는 인재보다 일찌감치 판에 박힌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인재가 더 높이 평가받는다. 가장 해로운 단점은 아마도 어린 나이에 과로한 나머지 장성했을 때 활력과 흥미를 잃는 경향일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영재들이 이러한 이유 탓에 촉이 무뎌지고 감이 떨어지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다. 222

 

예술이 과학보다 덜 융성한 한가지 이유


오늘날 창조적 업적의 상당 부분은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학 및 연구 부문의 업적은 대개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성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학자들은 교직 활동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한 이러한 관행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나마 과학과 교직은 결합하기가 쉽기 때문에 오늘날 과학 분야는 활기를 띠고 있다. 음악 분야에서는 연주를 병행하는 작곡가가 비슷한 이점을 누리지만, 연주자가 아닌 음악가는 부자이거나 대중의 취향에 냉큼 영합하지 않는 한 곤궁할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에는 순수 예술 분야에서 순전히 훌륭한 작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창작 시간을 넉넉히 보장하는 부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유일한 이유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날 예술이 과학보다 덜 융성한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225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소유보다 창조를 추구하는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근원적인 행복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복은 적대적인 환경이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서가 권하는 삶의 방식이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찾은 이들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외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장애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끌어모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정치 및 경제를 개혁하여 세상을 재창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개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저절로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낼 기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239

 

절대 다수는 돈을 벌어야만 하는 운명의 노예이다. 그들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도록 압박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본업 밖에서 즐거움이나 여가를 얻기 힘들다. 중년의 막바지에 은퇴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리는데 이는 그들이 막상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며, 한때 일 이외의 활동에 지녔던 흥미가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경우이다. 대다수는 눈앞에 도사린 빈곤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년까지 일을 해야 한다......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기 일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내지 못한다. 일하는 동기는....일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처럼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웃음을 사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악들 가운데 태반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만약 인류 가운데 문명화된 일부로 하여금 남의 고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 탐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또한 다른 계급이나 국가가 몰래 앞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파괴 행위 대신 건설적인 개선 작업에 전념하여 그 성과를 전 세계와 함께 나누도록 유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한 세대가 끝나기 전에 세상사의 기준이 되는 체제 전체를 뿌리부터 가지까지 송두리째 개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45-246


우리가 애타게 보고 싶어 하는 세상에는 오늘날 일상에서 반복되는 비극적인 단조로움보다 삶의 기쁨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유년기를 벗어나면 으레 앞날의 걱정에 고개를 수그리고 더는 마음 편히 즐거워하지 못하며, 다만 때맞춰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듣고 일종의 진지한 의식 같은 환락에 탐닉할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살아라'는 많은 사람에게 여러 모로 유용한 충고인데, 그 속에는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는 교훈 또한 담겨 있다.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이런 교훈을 따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느지막한 나이에도 아이 같은 단순함을 간직한 사람이 적지 않다.... 261-262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세상은 창조적 정신이 살아있는 세상, 삶이 곧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모험인 세상이다. 그 세상의 토대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지키려는 욕구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충동이어야 한다. 그 세상에서 애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연애는 지배 본능을 벗어던질 것이며, 잔인성과 시기는 행복한 삶을 일구고 그 삶을 정신적 환희로 채우기 위하여 자유롭게 진보하는 모든 본능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은 실현될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뱀발. 책갈피를 펼쳐둔다. 할 말은 많지만 남겨두자. 진리는 우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드는 즐거움보다는 그 말이 맞는니, 보잘 것 없느니 따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은 뒷걸음치든 말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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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회를 비오는 날 잠시 쭈삣거리며 다녀왔습니다. 87년체제, 97년체제....학자의 욕망과 학문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이것저것 끌어모아 꾸깃꾸깃 잇는 일들이 불편해보였습니다. 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일이 벌어진 뒤 시체나 수습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때문이었죠. 지식인 수입상들이 그나마 발언권이 약해져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은 온갖 아이들까지 데모를 해도 법 한톨, 삶한자락 바뀌지 않죠. 무엇을 어떻게 건드려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두툼한 제도의 껍데기는 요지부동인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드문 시절 그렇게 학문의 실타래를 잡으려 애쓰는 모습은 감동스럽기 까지 합니다. 창밖에 비는 내리고 꽃은 그 비해 더 진해져 향기가 뚝뚝 긋습니다.

 

또 한차례 유행은 협동으로, 또는 조합으로 배회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쪽지처럼 꾸깃꾸깃 버려져 있는 앎의 지도를 다시 펴봅니다. 볼세비키 혁명의 뒷그늘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미국의 여성아**스트가 고발합니다. 청년 마르크스가 몸의 족적이 남은 아나키스트의 삶과 행동을 단지 공상이라는 꼬리표 하나로 질식시켰습니다.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이탈리아에 자취와 흔적은 아직도 흥건하리라 여겨집니다. 불러내고 서로 논쟁의 풍요로움으로 사회를 다시 그리는 일은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환원에 대한 강열한 욕망을 숨죽인다면, 그 숱한 과정을 지금에 조금씩 생각의 정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주의, **키즘 아직도 생디칼**키즘의 흔적을 쫗아 가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 그늘이 남아 있는 그릇이 시큼하고  어쩌다 막 발효가 될 듯 싶은 데, 날이 더운 듯하여  숲그늘 인적이 드문 곳에 옮겨둡니다.

 

협동의 그늘에 붙어있는 배후들, 삶과 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손에 쥐기 쉬운 것만 가로채려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늘은 없는 것처럼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칩니다. 민*의 집이라고 하지만 집만 봅니다. 이면과 지금여기의 현실은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맑스의 역사는 아니었을까요. 그 굵고 단단한 매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매듭이 짓는 과정과 역사의 그늘로 밀려난 인물들의 흔적들이죠. 지적인 습속이 남아, 여기 저기 그래도 협동의 씨앗을 근근히 부여잡고 있는 현실을 되새김질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본주의로 서툰 발길을 디뎠다면, 더 서툰 사회주의의 걸음을 디디고 있다면, 그 발디딘 지층은 견고한 것일까? 아마 그리로 가는 길, 그 곳으로 가는 길 사이사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갑각류같이 단단해져만 가는 세상의 속이 얼마나 허술한지 다시 확인해보면서 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 꽃이 더 화려한 봄날, 중견학자는 소장학자?들의 반론에 토론회장은 술렁였고, 그 말들과 의견을 안고 고민하는 중견학자의 모습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사회학회와 사회학도의 꿈틀거림 속에 열정과 반가움의 물결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87년과 지금의 현실을 자꾸 80-90년으로 부여잡으려는 노력은 허망하기 그지없을 것 같습니다. 출렁이는 현실의 파고 속에 노조조직율 9% OECD최하위이지만 300인이상 노조조직율 60%, 5인미만 업체 노조조직율 0.3%의 대기업공기업 정규직노조의 섬만 남은 현실의 존망은 이제 하나의 가치와 이념으로 부여잡을 수 없습니다. 단추를 잘못끼게 된 시점과 현실의 파고을 깊고 엄중하게 분석하려는 비례균형의 시각의 되짚는 간절함이 깃들여야 되는 것은 아닐까요. 노동만 신자유주의만  만의 문법으로 가두려는 습속, 그 만찬의 세계가 이곳이 어는 순간, 사회면 한줄의 주검에 분개하던 우리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주검의 도살장이 되어버린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 주범은 아닐까요.

 

뱀발. 비틀비가 오랜만의 산책이라 주책이군요. 알량한 동전하나 줏고서는 ... ... 거침있는 로우 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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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원문으로 출력해서 보다가 끙끙대던 러셀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제서야 건너건너 알게된다. 반갑다. 피터싱어의 책도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논쟁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러셀의 책도 아나키즘의 왜곡된 현실과 맥락을 짚어주는 좋은 책이다. 마르크스 이전과 논쟁까지 흥미롭지 않은가? 지금을 다시보고 풍부해지기 위해서 꼭 거쳐야 될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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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과학의 달을 마감하며

척박한 과학문화 현실을 돌아본다

 

과학의 달 4월이 지나갔다. 한 달 내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과학행사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사에 과학기술이 옷 입혀졌음에도, 정형화된 행사들 속에 과학의 향기는 없었다. 마흔여섯 번째 과학의 달을 보냈지만, 우리나라 과학문화의 토양은 여전히 척박하기만 하다.

 

월초부터 창조경제가 화두가 되었고, 대통령은 국민 개개인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상상력 및 창의성, 나아가 창조경제에 대한 사회적 토대를 형성하는 과학문화에는 관심 없이 경제적 성과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규모가 큰 과학기술 전담부처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했지만, 과학문화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토대 강화 업무는 여전히 미미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은 아직까지도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남아있다.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유독 시민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소비자만 존중될 뿐이다. 시민들이 수동적 존재로만 취급되는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상상력과 창의성의 발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 과학기술에서도 시민참여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우리가 과학의 달을 맞이한 그 햇수만큼이나 서구 여러 나라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의 역사는 깊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기술을 만나고 활용하고 과학기술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에 우리는 올바른 과학문화의 확산과 정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회적·정치적 과제를 제시한다.

 

1. 파행 위기에 있는 대전엑스포과학공원을 시작으로, 과학기술과 시민이 만나 창의적 문화를 싹틔울 수 있는 새로운 과학문화 공간의 창출과 확산이 필요하다.

2.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책임성 있는 연구개발과 결과물의 사회적 활용, 전문지식을 활용한 사회적 지원 등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적 참여를 모색해야 한다.

3. 과학기술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온 시민들이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 및 제도적 기반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4. 과학문화 창출 및 확산을 위한 정부 차원의 체계적 정책 수립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기반의 확보가 시급하다.

5. 과학문화의 확산과 시민참여 확대, 정부 주도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감시 및 견제와 대안 마련을 위해 국회 내에 과학기술 전문기구의 설립을 제안한다.

 

 

2013. 4. 30

시민참여연구센터

 

 

 

[입장 전문]

 

4, 과학의 달을 마감하며

뿌리 깊은과학기술 문화를 위한 사회적·정치적 과제를 제안한다

 

 

창조경제와 패러다임의 전환

과학의 달 4월에 창조경제논란이 뜨거웠다. 정치권은 물론 산업계에서도 뜨거운 이슈로 다뤄졌지만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대통령을 비롯해 미래창조과학부 장차관까지 나서 과감한 패러다임의 전환과 추격형 경제로부터의 탈피 필요성을 언급하고, 구체적 모델로 이스라엘의 사례를 거론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대부분의 설명이 모호하기만 하다.

 

경제규모 15, 무역규모 8, 과학경쟁력 5, 기술경쟁력 14. 세계 속의 대한민국 현주소다. 모방 위주 기술전략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인식변화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분명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은 관점의 변화를 기본으로, 목표의 수정과 수단의 변경, 나아가 관심사의 범주와 현실을 해석하는 기준 및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미래부 정책은 여전히 산업과 경제 위주의 성장주의 관점과 이의 달성을 위한 기존 정책요소들의 재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419일 과학기술·정보통신인 한마음대회의 박근혜 대통령 축사 중 국민 개개인의 상상력과 창의성이란 언급이 눈길을 끈다. 미래부가 놓친 중요 시사점이 그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경제·기술적 수준에 걸맞게 창의와 혁신을 밑천으로 미래를 열어가고자 한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과제로 다뤄져야 한다. 오히려 창조경제에 담긴 경제 중심 가치를 내려놓고, 상상력과 창의성 발현을 돕는 사회문화적 환경 조성을 핵심으로 내세우는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산업과 시장, 일자리 창출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다양한 열매들 중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2. 뿌리 내려야 할 과학기술

과학기술에서 창업과 혁신으로, 다시 경제로 이어지는 정책 마인드는 해묵은 선형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이런 정형화된 틀 바깥에서 이질적 사회문화 요소들의 충돌 속에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경제적 성과를 최고 가치로 삼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효율성과 속도의 논리에 창의성이 질식될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 열매를 얻겠다고 꽃 달린 가지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창의성과 상상력의 발현을 위해 우리가 시선을 돌려야 할 곳은, 그렇기에 오히려 경제가 아닌 과학기술적 문화의 토대인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통찰 없는 상상은 공상에 지나지 않고,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발상들이 맞부딪히지 않고서는 창의가 꽃피지 못한다.

 

과학의 달 4월이면 전국 각지에서 과학문화행사를 표방하며 다양한 경진대회와 체험행사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사들이 의례적 기념행사에 머물고 과학기술문화의 성숙에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해진 방식으로 만들고 작동 결과에 따라 순위를 정하는 행사에서 남는 것은 단지 수상 여부일 뿐이다. 체험·견학행사 또한 과학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기회가 되기보다 단체나 기관 홍보와 성과 자랑에 머문다. 이런 행사들에서 과학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 과학이 우리 삶으로 한층 다가온 느낌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일반인들에게 과학기술의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제공된 것을 잘 수용하는 것이며, 과학기술 행위란 자신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이란 인식을 재확인하게 할 따름이다.

 

3. 문화적 토양 강화를 위한 과제

과학기술도시를 표방하는 대전에 연구기관들이 자리 잡은 지 35년이 흘렀다. 그러나 대덕연구단지는 여전히 지역에 융화되지 못한 채 동떨어진 섬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문화 현실이 이보다 더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있을까? 대덕연구단지에서 국립중앙과학관과 더불어 일반시민들이 편하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이 바로 엑스포과학공원이다. 그러나 1993년 대전엑스포 이후 몇 차례 활성화 계획의 좌초를 겪었고, 지난해 롯데 복합테마파크 조성 관련 논란에 이어 올해는 미래창조과학산업단지 조성과 기초과학연구원 이전 논의가 불거지며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이런 방안들은 모두 엑스포과학공원의 조성 취지와 지역특성, 주변여건을 무시한 개발 관점의 빗나간 계획일 뿐이다. 엑스포과학공원이 박제화된 전시·홍보 공간이 아닌 과학기술과 시민의 자유로운 만남의 창구로, 또한 창의적 과학기술문화가 싹트고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정부와 대전시, 지역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기술문화의 기반 강화에 정부·지자체 뿐 아니라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책임과 역할 또한 중요하다. 과학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고,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해결해 할 새로운 과제들도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여전히 사회적 소통 필요성을 간과한 채, 정부·민간기업 등 연구비 지원 주체만을 어쩔 수 없는 소통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드물게 발생되는 일반인과의 공개적 소통에서는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들거나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한 장점과 정당성만 내세우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정보를 일반인들에게 제공하길 기피하고, 특히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침묵을 선택한다. 결국 과학기술을 사회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데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카르텔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성에는 항상 그에 맞는 책임성이 따른다. 과학기술 전문가들 또한 연구개발 결과의 사회적 활용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자문활동 등 다양한 방법의 사회적 기여 방안을 이제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기술 영역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참여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보장되어야 한다. 시민들을 기술홍보의 대상이나 제품소비의 주체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기술영향평가, 합의회의 등의 시민참여 제도가 국내에서도 시도된 바 있으나 아직 안착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전문가와 시민의 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과학상점 활동 또한 전문가들의 사회참여 부재 현실에 부딪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기술의 활용이나 거시 기술전망 혹은 정책수립 등의 범주를 넘어 구체적인 연구의 기획과 수행에 있어서도 시민참여를 도입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연구개발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현실적인 활용 적합성을 제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참여의 확대와 안착을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 지원 및 기회 마련과 함께 전문가들의 자세 전환과 지원 또한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야만 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과학문화 확산을 위한 정책 발굴과 마스터플랜 수립이 시급히 요구된다. 과학기술의 성과가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국민들의 창의성이 자유롭게 발현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계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과학문화와 관련된 정부의 업무는 과학관 운영, 과학의 날 등의 행사 추진, 과학기술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 정도에 머무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문화 육성을 추진하고 지원하기 위한 변변한 법적 토대조차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과학문화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관심 수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회 차원의 제도적 기반 또한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과 시민참여의 필요성이 커지는 현실에 맞추어, 과학기술 문화의 확산과 시민참여의 확대, 과학기술에 의한 또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 및 이슈에 대한 개입과 중재, 그리고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및 투자 방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위한 국회 내 과학기술 전문기구의 설립이 절실하다. 미국에서 시작되어 영국, 덴마크 등의 나라에서 과학기술국, 기술영향평가위원회 등의 전문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바람직한 국내 모델을 정립하고 관련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활동을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2013. 4. 30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참여연구

시민참여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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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질문보기 - 사회단체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질문의 의도에 끌려갈 필요가 없겠지. 되묻기도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박원순시장의 추천사와 들어가기전 90%를 위한 기술의 시대만 인상적이다. 다른 내용들은 별반 다가서지 않았다.

 

 

 

 

 

 

 

 

 

 

 

 

  자칭진보들은 버림받는 노동자나 노동문제를 직시하지도 않았다. 타협과 진보행세가 사물의 겉만 보고, 그 행태만 따라가 더욱 현상태를 유지시켜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되묻는다.  사물을 꿰뚫으려고 하는 노력도, 관점도, 통찰도 부족하여 당위의 깃발만 내세운 것이 현실을 한치도 헤쳐나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 미국의 현실이나 여기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3부에 중점을 두고 보다.

 

 

노동의 배신에 이은 화이트칼라 취재기다. 상대적으로 나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 선입견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경험록이다.

 

 

 

 

 

 

 

 

 

 

 

나르시소스, 히스테리아....부정속긍정, 긍정속부정....단언하기가 어렵다. 팜플렛이라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괜찮겠다. 굳이 답을 찾으려하지 말고... ...

 

 

 

 

 

 

뱀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돌려주고 몇주지나 흔적이다. 가벼운 책들로 골라보다나니 깊은 맛은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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