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회를 비오는 날 잠시 쭈삣거리며 다녀왔습니다. 87년체제, 97년체제....학자의 욕망과 학문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이것저것 끌어모아 꾸깃꾸깃 잇는 일들이 불편해보였습니다. 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일이 벌어진 뒤 시체나 수습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때문이었죠. 지식인 수입상들이 그나마 발언권이 약해져서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세상은 온갖 아이들까지 데모를 해도 법 한톨, 삶한자락 바뀌지 않죠. 무엇을 어떻게 건드려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두툼한 제도의 껍데기는 요지부동인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드문 시절 그렇게 학문의 실타래를 잡으려 애쓰는 모습은 감동스럽기 까지 합니다. 창밖에 비는 내리고 꽃은 그 비해 더 진해져 향기가 뚝뚝 긋습니다.

 

또 한차례 유행은 협동으로, 또는 조합으로 배회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쪽지처럼 꾸깃꾸깃 버려져 있는 앎의 지도를 다시 펴봅니다. 볼세비키 혁명의 뒷그늘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미국의 여성아**스트가 고발합니다. 청년 마르크스가 몸의 족적이 남은 아나키스트의 삶과 행동을 단지 공상이라는 꼬리표 하나로 질식시켰습니다.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이탈리아에 자취와 흔적은 아직도 흥건하리라 여겨집니다. 불러내고 서로 논쟁의 풍요로움으로 사회를 다시 그리는 일은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환원에 대한 강열한 욕망을 숨죽인다면, 그 숱한 과정을 지금에 조금씩 생각의 정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사회주의, **키즘 아직도 생디칼**키즘의 흔적을 쫗아 가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직 그늘이 남아 있는 그릇이 시큼하고  어쩌다 막 발효가 될 듯 싶은 데, 날이 더운 듯하여  숲그늘 인적이 드문 곳에 옮겨둡니다.

 

협동의 그늘에 붙어있는 배후들, 삶과 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손에 쥐기 쉬운 것만 가로채려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늘은 없는 것처럼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칩니다. 민*의 집이라고 하지만 집만 봅니다. 이면과 지금여기의 현실은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맑스의 역사는 아니었을까요. 그 굵고 단단한 매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매듭이 짓는 과정과 역사의 그늘로 밀려난 인물들의 흔적들이죠. 지적인 습속이 남아, 여기 저기 그래도 협동의 씨앗을 근근히 부여잡고 있는 현실을 되새김질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본주의로 서툰 발길을 디뎠다면, 더 서툰 사회주의의 걸음을 디디고 있다면, 그 발디딘 지층은 견고한 것일까? 아마 그리로 가는 길, 그 곳으로 가는 길 사이사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갑각류같이 단단해져만 가는 세상의 속이 얼마나 허술한지 다시 확인해보면서 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 꽃이 더 화려한 봄날, 중견학자는 소장학자?들의 반론에 토론회장은 술렁였고, 그 말들과 의견을 안고 고민하는 중견학자의 모습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사회학회와 사회학도의 꿈틀거림 속에 열정과 반가움의 물결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87년과 지금의 현실을 자꾸 80-90년으로 부여잡으려는 노력은 허망하기 그지없을 것 같습니다. 출렁이는 현실의 파고 속에 노조조직율 9% OECD최하위이지만 300인이상 노조조직율 60%, 5인미만 업체 노조조직율 0.3%의 대기업공기업 정규직노조의 섬만 남은 현실의 존망은 이제 하나의 가치와 이념으로 부여잡을 수 없습니다. 단추를 잘못끼게 된 시점과 현실의 파고을 깊고 엄중하게 분석하려는 비례균형의 시각의 되짚는 간절함이 깃들여야 되는 것은 아닐까요. 노동만 신자유주의만  만의 문법으로 가두려는 습속, 그 만찬의 세계가 이곳이 어는 순간, 사회면 한줄의 주검에 분개하던 우리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주검의 도살장이 되어버린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 주범은 아닐까요.

 

뱀발. 비틀비가 오랜만의 산책이라 주책이군요. 알량한 동전하나 줏고서는 ... ... 거침있는 로우 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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