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생생하고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마치 인류역사의 대서사시를 그린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제 아무리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지라도 식량만이 인간을 먹여 살리고 대지가 식량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인류문명에 대한 핵심적인 지적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대담에 참여한 이들은 경제 분야에서 외국 자본의 한국 금융 장악, 주주자본주의 등이 가속시키고 있는 사회 양극화 문제에 주목한다. 정치 분야에서는 노무현식의 정치적 신자유주의와 이로 인한 민주주의의 후퇴를 비판한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노동 주도형 국민경제 모델', 국민들에 의해 강력히 통제되는 '국민직접정치', 그리고 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며 코리아 경제공동체인 통일민족경제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들 대안 모델에 대한 각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과연 싱크탱크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싱크탱크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라거나 혹은 부정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싱크탱크의 역할이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바탕으로 유권자와 정책 결정자 간의 가장 효과적인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는 긍정론에서부터 정치 엘리트주의를 조장하고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만을 도모한다는 부정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 본문 15p 중에서

 


이 책은 유럽통합 과정에서 정치·경제적 결정에 주요 행위자로 관여했던 거대기업의 역할에서 힌트를 얻어 유럽보다 다양성과 이질성이 훨씬 강하고 민족주의가 팽배한 동아시아에서의 경제통합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른 거대기업의 정치·경제적 역할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역설하고 동아시아 경제통합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쓰레기는 쓸모없고 더럽고 보고 싶지 않으며 만지기는 더더욱 싫다. 하지만 싫다고 외면할 수만도 없는 것이 쓰레기이다. 과연 우리가 매일 버리는 쓰레기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할까.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사회가 아닌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자원순환형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책을 통해서 그 해답을 하나씩 찾아 나서보자. - 유정수

 

뱀발.

1. <빵의 역사>. 학자란 무엇일까? 이 사회는 걸출한 학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여년간 4천권의 참고서적을 바탕으로, 기술한 빵의 역사 부문학문사이를 가로지르는 그의 시선은 경쾌하고도 날카롭다.

2. <새사상>. 후배로부터 받은 책이다. 세밀한 독서는 하지 못했지만, 하고자 말하는 바는 십분이해하고 남는다. 단. 민족경제론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다른 부분에서 갖던 긴장감이 몹시 떨어지는 느낌이다. 활약을 기대해본다.

3.<한국적 싱크탱크>. 시의적절하다. 미국의 싱크탱크의 발전 요약-사회적 배경이 한눈에 쉽게 들어온다. 대안-담론 추세가 힘을 얻고 있지만 그 흐름이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 시선을 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추세가 정확함이나 올바르게 방향을 잡고 있는 것과 간극이 있음은 현실이기때문이다.

4.<쓰레기로 보는 세상>. 폐기물을 낳는 것.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는 더 더구나 아니다. 안전하다고 강변하는 핵폐기물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폐기물에 대한 제도-시스템을 다 다르다. 과소비와 넘치는 정신과 몸의 똥으로 허황되게 사는 현대인에게 '아낀다' 嗇의 의미을 되새기는 체험과 마인드-교육의 연계성이 없는 한, 그 똥에 깔려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5.<동아시아 경제통합>. 저자의 낭만성이 걸리는데, 거대기업의 역할에 과잉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세리보고서이기에 부제로 있는 <거대기업 역할론>은 더욱 거슬린다. 사회적 책임을 하고, 그를 못함으로 인해 추가비용이 더 들기에 세련된 자본주의, 천박한 한류문화 이식에서 좀더 세련되자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만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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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해콩님의 "'노동인권'교육..."

기본권에 대한 교육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연륜을 떠나 우리에게 선생님으로서 배우는 학생으로서, 교수로서 학생으로서 하여야 할 것, 말아야 할 것, 주장해야 할 것, 같이 풀어가야 할 것 등 관계에 대한 교육은 전무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법정교육처럼 의무적으로 인권에 대한 교육은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기술-지식 중심의 교육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관계중심의 교육의 복원으로 탈정치화에 대한 무관심을 제도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만 때우는 예비군 교육, 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교육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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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18 (아카*)

0. 발제

0.1 문제제기 - 사회운동은 위기인가?(역사와 내용)/5.31 지방선거와 사회운동

0.2 사회운동이 당면한 한국사회 -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자본의 전일적 지배/사회운동 세력의 영향력 감소와 보수세력의 재편; 보수세력이 새로운 의제 개발과 시민에 다가가는 이슈제기, 사회운동이 새로운 경쟁자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처럼 일방적 무시나 도덕적 우위만 차지하고 있다는 당위만으로는 어려움./생활의 보수화/ 동북아정세의 불안과 외세의 영향력 증가

0.3 사회운동의 위기와 과제

0.3.1 사회의 변화; 절차적 민주주의의 안착:비가역적인가? 정치와 제도만이 아닌 사회/경제 영역의 민주화필요/다원화, 다양화(부안,새만금)/탈정치 또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새로운 운동의 흐름(담론 형성 단체 증가)

0.3.2 사회운동 위기의 내용; 외적 - 영향력 운동의 축소/보수세력의 반격/동원정치 운동세력의 무능/내적-이념 및 운동양식의 변화에 따른 분화와 대림;재정및 재생산구조의 취약;비전 및 대안제시 부재;연대와 소통 미약 및 조직 우선주의;일상프로그램의 부족;지역의제 설정주체 및 방법; 정치세력화,정치운동에 대한 합의

0.4 무엇을 할 것인가? 운동의 내용에 대한 합의/소통과 연대강화/지역의 중심축 구축/실생활에 기반한 모임만들기 외

1. 토론

운동의 목적, 이유, 지향점에 대한 되물음/지역순례가 화두가 되는데 이것또한 서울중심주의나 퇴행은 아닌가?/메니페스토운동 등으로 인한 시민단체의 영향력,운동 재고/활동가교육의 비지속성과 비주기성/합리적보수의 시각에 대한 실력없음으로 일관하지말고 실력으로 대응 필요

2. 논의

2.1 사회제단체에 대한 요구수준 변화와 기본 역량 인식:(우리 수준에 대한 인식)

2.1.1 견제와 감시기능만으로도 시민사회의 요구를 충당할 수 있었으나, 요구수준은 견제-감시에서 복지/대안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변화함. 요구변화에 대하여 지자체는 수용의 사회제단체의 요구를 수용할 의사가 비침에도 역량부족으로 접근하지 못함--> 허약함에 대한 냉정한 평가/회원간의 밀착력 저하/선거 참여시 동원력 저하, 활동가의 능력저하게 대해 고려하여야 함.

2.1.2 사회단체의 무의식/무능에 대해도 되새겨야

2.1.3 시민사회단체의 위기는 중산층의 범위가 좁혀지고 축소되는데도 이유가 있고 풀뿌리에서 밀착도도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임.  제도화의 관점에서 완충역할도 중요하다고 봄.

2.2 정치세력화(왜? 어떻게? 어떤 관점으로?)

2.2.1 민중당 진정추,사회당,초록정치연대, 정대화 당선운동 등 정치세력화에 대한 부분적인 논의는 있었으나, 유형의 권력 획득을 목표로한  방법, 통로에 대한 사회 제단체 논의도 그룹도 전무한 것이 아닌가? 정치중립이냐, 정치참여냐 하는 논의만 있었음

2.2.2 사회단체후보-민*당후보라 하는 사람이 제 사회단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등 우리의 현재 수준과 대표성

2.3 소통과 운동에 대한 되물음(왜 하며? 공통분모의 공유는 어떻게?)

2.3.1 90년대 부문운동이 분화되고 발전하였지만 분화의 시점에 서서 본 고민이 논의되거나 나누어진 적이 없음.

2.3.2

2.4  현실정치참여(제도화)와 운동(문화)의 지속성, 연계성

2.4.1 기초 정당공천제가 양당체재의 고수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 찬/반논의, 제도에 대한 문제는 논의를 달리 해야 함

2.4.2 구단위에서 활용한 공간이 많다고 여기나 원칙에 충실해 실제 놓침. 적극적 활용도 고려하여야 함.

3. 기타 논의

- 제한된 시간 많은 논의 주제를 소화시키지 못하여, 주요 쟁점들을 전자우편 등으로 나누고 재정리, 2차 토론회가 필요함으로 모음.

- 전망/희망찾기란 주제도 괜찮을 것임. 등등 가능한 열린상태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제한된 주제보다 토론의 의미를 갖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개진.

4. 뒤풀이

4.1 쟁점이 된 부분 외 산개하여 세부논의를 하였음. 나중에 오신 분, 차수 변경해도 자리를 뜨지 않는 분. 인시부근에서 겨우 파함.

4.2 활동과 세력화, 현재 할 일에 대해 미세한 차이, 입장, 이념 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우리의 수준과 활동을 보는 관점,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각자 명료화하는 것이 차이와 이해, 그리고 논의확산 지점을 명확히하는데 도움될 것으로 여겨짐. 상호 설득보단 자신의 의견과 관점,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관점과 세밀히 비교해보는 과정도 필요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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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회의 - 뒷춤에 앉아 지루해져올 즈음.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애벌생각을 모아 끄적인다.

1. 과정치화 - 과한 표현은 삼가하기도 하구

2. 탈정치화 -

3. 내면화 및 구조화 -

4. 성찰이 아니라 부정, 신랄함 -

060726

이 주제로 난 시달리고 있다. 부정이란 것의 칼날이 나를 향하고 있기도 하다. 생각을 추스리다보면, 선잠 속에 정리되었다싶으면, 그 칼날의 예리한 끝은 나를 향하고 있다. 허술하거나 시간의 흐름때문에 지나갔던 것들이 겹쳐지고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면... ... 이러다보니 잔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을 품지만 두려움도 함께 품어지는 것이다.

060726 memo

어쩌면 <머리>로만 하는 활동은 소멸해야 할지 모른다.  지식으로 세뇌시키는 것보다, 실제한 일은 반추가 가능하므로, 얼마나 움직였느냐?는 <몸>의 반경으로 평가를 다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얼마나 성장되었으며, 실질적인 결과물은 무엇인가라고..<머리>와 <지식>은 언제든 수혈가능하다. 하지만 <몸>의 기억은 쉽게 충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조합원과 얼마나 만나는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 폭을 얼마나 넓혔는지? 임금이나 법제화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내 노선으로 얼마나 동원했는지 표결했는지는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얼마나 주입-강요했는지의 결과물밖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운동, 활동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도배되었는가? 그 현실을 얼마나 아파하는가? 극구 <엘리트>가 아니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머리>와 <행동>, <몸>과 <머리>의 어긋남. <머리>의 과욕이 문제중심에 있는 것은 아닐까?

060918

<몸>의 경험은 어떻게 끌고, 함께하고, 어울릴 것인가? 머리에 경도되지 않고, 몸에 경도되지 않고, 열어두고 넓어질 것인가?





060918

도식을 그리고 난 뒤, 벌써 두달이 흐른다. 다가오는 것보다 흐른 것에 시선을 돌리는 자신이 굽굽해지기도 한다.  기력이 소진해서일까?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보다 주저함이 붙어있는 것 같아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병리라는 생각,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되돌아봄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느낌을 표현해야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 생각이 혼자 생각으로 머무르길 바란 것은 아닐까?

한정된 사람, 한정된 공간. 끊임없이 자중심으로 다른 활동이 돌기 바란다. 그리고 수렴하여 편집한다. 자신의 활동궤적을 한번쯤이라도 냉정하게 반성해보면 시시비비를 가리기 쉬울텐데. 어느 하나 지난 궤적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편집증. 놀라운 꿰어맞춤. 능력이라고 하기엔 사상누각같다. 문화적 궤나, 활동경험의 공유. 그것도 지난 날의 흔적만을 쫓는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상에 무너지기 쉽다. 제 혼자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자본-변화의 그늘은 자신을 옭죈다. 순진무구한 활동가가 아니라 벌써 자본에 훈육되거나 인이 부지불식간에 배여버린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게 세월에 묻혀가는 다수.

활동을 완장처럼 두르고 지난 향수에 기대거나, 가학적인 단련?에 익숙하게 헌신하는 모습. 모든 활동의 공간을 동원에 지난 향수를 끌어모으는 일들.  끊임없는 가분수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비대해져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내 것으로만 자라나서 손을 마주 잡더라도 쓰러지고 마는 지경은 아닐까?

비루한 자본과 소외된 욕망을 해소하기위한 비인권에 몸담기- 온몸은 자본주의 속도만큼이나 자생성은 하나 둘 잘려나가며 구호만 외치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구석이라곤 ... ... 하나 없이 그냥 올라만 가는 것은 아닐까?

활동하는 사람들이 <과정치화>되었다고, 자신의 부문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생활인들이 탈정치화되듯, 타 부문 활동엔 관심조차 없이 그렇게 <탈정치화>된 한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060919

나르시즘

쪽빛 하늘 한 가장자리가 울어 빛에 비친다.  사람들 뒤란, 빛이 울어 비추인다.  눈동자에도 되비추는 빛은 일렁인다. . 무수한 거울 속에 갇힌 나,  시간이 점점 좁혀지는 공간.  굴절되고 모인 반사광은 끊임없는 나로 함몰.  침몰하는 자아의 복제. 끊임없는 자맥질. 그곳으로 자살. 자살하고 있는 시대의 우울. 시대를 감싸고 있는 거울집같은 쪽빛하늘

 

몰지각

오늘도 일용했다. 중독된 몸을 추스리러 오늘도 복용했다. 속이 편하다. 이렇게 중독되면 파렴치가 필요하다. 파렴치.

 

벙어리

한노인은 겨우 40년 걸려 350미터짜리 한강그림을 완성했다.  이 사회는 똑똑한 졸업장만 찍어낸다. 뭘하고싶은지, 뭘하고 노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자본의 풀장

사람밖에 사람이 없다. 나만 있을 뿐. 나만 있을 뿐. 관계엔 남이 없다. 사람의 합은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관계만 남는다. 자본의 풀장엔 언제나 외로운 나만 있을 뿐이다.

 

일상

끊임없는 , 만족을 모르는 허기.  만들어진 과잉욕구. 끊임없이 채워넣는다.  그 쳇바퀴란 무한궤도의 순환. 다른 세상은 없다. 조작된 욕망과 기계적으로 채우는 반복된 동작만 남는다.

 

060926

'민주주의'는 머리로 배우는 것일까? 많이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은 머리로 배우는 것일까? 세미나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일까? 경험과 느낌,  찰라에 만나는 순간. 뇌리에 박히는 기억은 무엇때문일까?  '머리'만 키우는 세미나, 토론 위주만은 경도된 방법은 아닐까? 그렇다고 무차별적인 내적동기없는 경험, 몸의 경험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뭔가 때와 적절한 지적 굶주림, 몸에 대한 굶주림이 전제되지 않고 올바르게 느끼고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경도된 방법, 획일화된 방식만, 획일화된 일상만 차고 넘치는 것은 아닌가? 주어서 느끼는 풍요로움을 아는사람만이 준다. 줄 것이 넘치고, 받아서 기쁜.. 끊임없이 베푸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몸의 활동망이 넘치는 사람. 나눠서 주체할 수 없는 지적욕망. 어렵더라도 어려움속에 피는 위트,해학...여유로움, 몸의 반경이 전제되지않고선, 머리의 반경이 접목되지 않고선...그것을 서로 소통하고 풍요로워지지 않고선 우린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머리로의 침몰, 몸으로의 해산...흩어져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061022

고진 <트랜스크리틱>, 르페브르 <현대의 일상성> 서언과 마지막장을 다시 읽다. 일상성은 자본주의 시대에 특이한 것이며, 설득과 강제에 의해, 저자말로는 스스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좀먹는 테러리스트(표현이 적확한 것 같지 않지만-듣기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라는 구조의 한계를 지적한다. 해고에 대한 공포...등등 <일의 발견>에서 읽은 열망까지도 내재화된 구조라는데...거기에서 나오는 출구. 그럴 듯한 대목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지만, 고진은 네이션(민족)-국가-자본의 동일체라는 관점으로 맑스와 칸트를 불러낸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조목조목 말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

그 논리에 따르면 분절된 사회운동의 통일성과 개인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작품으로서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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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11-1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파도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몰상식과 비합리의 '대한미국'
[한국사회, 희망의 모색⑥] 김정훈 성공회대 연구교수 기고
텍스트만보기   오마이뉴스(news)   
'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편집자 주>
▲ 북핵저지시민연대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방한한 지난 19일 오후 외교통상부 청사 앞에서 UN의 대북제재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누가 나에게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나는 비합리, 몰상식이라고 대답한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지역감정, 부정부패 등의 다양한 원인보다 나는 몰상식과 비합리가 만들어내는 광기와 증오, 무지와 적대가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치이념을 보자. 소위 보수라는 사람들에게 전세계 모든 우파들이 갖고 있는 민족주의가 없고, 역으로 진보라는 사람들에게 진보주의의 핵심인 평화주의가 없다. 행태는 어떤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를 놓고 합리적으로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정파의 이익을 위해 무조건 우기고, 필요하다면 진실도 왜곡한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게' 한국 정치고,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게' 한국 사회다. 잘 나신 분들이 그렇게 외치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합리성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정치,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한국정치가 희망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이성을,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성과 상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몰상식과 비합리를 가져오는 사유와 대결해야 한다. 사람들을 무지와 몽매로 몰아넣는,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신화와 대결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신화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합리적 사고가 부족하던 시절, 신화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지배를 재생산하는 도구였다. 쉽게 말해 왕은 하느님이나 용의 아들이어야 했다. 그런데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21세기 한국에 아직도 전근대사회에서나 통하던 신화가 있고, 그 신화가 현실을 재단하고 있다.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비현실적 관념이 살아있는 인간을 광기와 증오로 몰아넣고 있다.

광기와 증오의 정치를 넘어

한국 사회를 떠도는 가장 강력한 신화 중의 하나는 절대선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신화이다. 미국신화에 기반한 친미반북주의는 한국 기득권세력의 탄생신화이고, 존재증명이며, 지배논리이다. 그래서 친미반북주의에는 친미와 반공이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논리는 정말 무섭다. 친미·반북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환경문제가 나와도 자신과 다르면 빨갱이이기 때문이다. 상식은 없어지고 광기와 증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신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한국의 우파는 정의하기가 힘들다. 소위 우파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적용하면 우파라고 할 때는 민족주의의가 빠지면 안된다. 그런데 우울하게도 현재 한국의 우파에는 민족주의가 없다. 한국의 우파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이 코메디를 외국의 우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난감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우파에게도 이런 황당함은 여전하다. 뉴라이트는 한국 정치에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주의가 부족하다는 주장을 하며 등장했고 나는 이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유주의가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자유주의는 국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태동되었고,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주의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싸운다. 이게 글로벌 스탠다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역으로 자유주의를 공격했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개인적으로 거부했을 때, 이들은 그 교사를 위해 싸우기는커녕 그 교사를 비난했다. 자유주의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실천적 자유주의자를 비판하다니. 이건 아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들이 민주주의마저 무시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불확실성의 제도화'이다. 즉 선거에서 누가 이길지 모르기 때문에 정치보복도 할 수 없고, 대화와 타협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우파에겐 내일이 없다. 같은 보수들에게 조차 비난 받은 한나라당의 대안없는 반대를 보면, 그리고 어디선가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다음정권에서 보자', '전쟁불사'라는 발언을 들으면 나는 무섭다. 신화가 현실을, 증오가 이성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우파가 우파다워야 우파다. 우파는 민족주의자여야 하고, 또 자유주의자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우파는 근대적 합리성도 체득하지 못한 채 전근대적 미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빨리 북한을 개방시켜 유라시아로 진출해야하는 자본의 이해마저 대변하지 못하는 우파는 우파의 본분을 버렸다. 우리 정치에 희망이 없는 것은 합리적인 우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물신주의와 계급 물신주의를 넘어

▲ 통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19일 오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회담을 앞두고 대북제재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국의 우파가 우파가 아니듯 불행히도 좌파도 좌파가 아니다. 여기서 먼저 소위 한국의 좌파를 정의해야한다. 우파가 볼 때 국민 대다수가 좌파겠지만, 사실 한국에서 좌파는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소수세력이다. 그런데 이 좌파도 시대의 희망이 되기보다는 우파처럼 신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북한 핵문제가 터지면서 민주노동당이 서글픈 코미디를 보여주고 있다. 진보정당이 평화주의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점은 이 코미디에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신화가 민주노동당 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신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북한 물신주의자들은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판하지만 김일성이 독재자임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공과에 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독재자는 독재자다. 일단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상식적이다.

이렇게 상식적인 수준에서 출발하면 북한이 인권탄압을 하고 있고, 북한 정권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북한 핵문제가 북한 정권의 실수이며, 북한이 이러한 벼랑 끝 전술 말고 다른 전술을 택하는 것이 북한 인민을 위해서는 보다 나은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북한의 주장을 따르는 좌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우파도 웃기는 일이지만,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정당이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민주노동당의 또 하나의 신화는 계급이다.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적 약자를 조직하는데 있어 계급보다 중요한 개념은 없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나 계급은 머릿속에 있지 않고 혁명하자고 해서 그대로 하지도 않는다. 당장 대형마트를 가보자. 한 직장 안에 여러 개의 고용형태와 다양한 의식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계급신화는 항상 이상적이고 단일한 계급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계급신화는 엘리트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계급 물신주의자들은 계급의 이름으로 진리를 독점하고 대중을 지도하려하지만, 엘리트주의가 만들어낸 계급 속에는 불행하게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이 없다.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불행은 이 두 신화가 동거한다는 점이다. 소위 NL과 PD라는 정파대립을 통해서 이들은 선순환이 아니라 오히려 악순환을 하고 있다. 이 이론들이 민족과 계급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우리사회에 제기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이론도 변해야 한다. 그런데 철지난 이야기들이 서로를 악화시키는, 다시 말해 민족이 강조되면 역으로 계급이 더욱 강조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참으로 난감하다.

맹목적 세계화를 넘어

사실 위의 우파와 좌파가 갖고 있는 신화는 흘러간 옛 노래이다. 아무리 죽어라 틀어봐야 LP판은 언젠가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이 흘러간 옛노래보다 무서운 것은 현재의 신화, 즉 세계화라는 신화이다. 이 신화는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설명할 뿐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하고 있는 파괴력있는 신화이다.

세계화는 객관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문제는 세계화가 아니다. 문제는 세계화를 미국식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게 세계화가 신화인 이유이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이고, 경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세계화신화는 미국신화의 신버전이며, 기득권 집단의 새로운 탄생신화이다.

적어도 두 가지는 명확하다. 세계에는 참 많은 나라들이 있고, 이들의 세계화 전략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북구 방식이 있고, 네델란드 방식이 있고, 스위스 방식 등등이 있다.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적합할지는 논쟁에 부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에 맞는 세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명확한 것은 현재 상태의 세계화를 진행시킨다면, 보다 정확히 말하여 한미FTA 식의 세계화를 진행한다면 특단의 보완정책이 없는 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양극화 구조가 정착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한미FTA에 있어 더 큰 문제는 위의 인식이 없다는 것을 넘어 무모하다는 점이다. 정부가 발표하는 자료에는 '세계화는 대세이고, 경쟁은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주장 이외에 구체적인 지표가 없다. 심지어 과장과 거짓말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게 신화는 현실에서 너무 몰상식하다. 무지가 만들어내는 맹목적 돌진, 국가의 중대사를 토론이 아니라 광고이미지로 해결하려는 이 무모함에 조순 전 시장 같은 보수주의자마저 반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한미FTA에 임하는 정부의 입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배우 이준기에게 했던 "자신감을 갖자"는 말로 요약된다. 자신감, 좋은 애기다. 그러나 만약 자신감이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면 우리는 월드컵에서 열 번은 우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운이 겹쳐 우리는 단 한번 4강에 들 수 있었다. 인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구호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래를 위하여

▲ 민주노동당은 지난 24일 오후 국회 본청계단에서 `정부에 북핵사태 평화적 해결 촉구하고 전쟁정당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누군가 나에게 한국 정치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현 정당구조로 대변되는 한국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그리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신화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한다고 대답한다. 신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는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현실은 이렇다. OECD 최고의 자살율, 10%가 넘는 절대빈곤층, 50%가 넘는 비정규직,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 대기오염, 그리고 불안정한 군사적 대치, 이것이 우리가 처해져 있는 현실이다. 아이들은 아토피과 비인간적 교육에 신음하고, 어른들은 전세값과 취업과 실직을 걱정한다. 최악의 경우 전쟁이 일어날 수 도 있다.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와 구조적인 전쟁위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이 현실에서 출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력의 출현이다. 미국을 절대악이나 선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가진 패권국가로 보는 시각, 사회적 양극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국민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각, 그리고 우리식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시각을 가진 세력이 등장한다면 한국 정치에는 희망이 있다.

그럼 우리에게 이런 세력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안에 신화론자들 때문에 목소리는 못 내지만 합리적인 세력들이 있다. 그리고 정치권 밖에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왔던 사회운동세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21세기의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들은 이미 합리적이다.

나는 이들을 합리적 신진보세력이라 부르고 싶다. 합리적인 신진보세력들에 의한 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한국 정치에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서는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합리적 세력의 형성을 촉구해야 한다.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노사모는 시민이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시민들이 주도가 되어,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정책을,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선택할 능력과 권리를 인정하지만, 또한 책임을 묻는다. 이제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1.

속내를 들어주길 바래, 마음을 낚시 드리우 듯 드리웠습니다.  어려운 일상이 지나가고, 부대꼈던 과거가 지나고, 힘들었을 나날들이 물결에 일렁거렸습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덜컥 맘이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열심히 하란 소리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의 낚시에  님의 마음을 보쌈한 돈도, 명예도, 우리에 대한 애정도 한웅큼 걸렸습니다. 그리고 치사한 인간들도 걸렸습니다. 경쟁에 잡혀버린 마음들도 나중에 걸렸습니다.

2.

속내를 보고싶어, 지난 흔적들을 쫓았습니다. 이렇게 몰랐던 것이 많았는지? 아무래도 님에겐 내가 권력이고 힘이었던 모양입니다. 나에게 보이지 않던 그것들이 남들과 관계속엔 그림자처럼 붙어있었습니다.  경쟁과 성공에 대한 강박증이 한웅큼 더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3.

속내가 들켰습니다. 이쁜 짓, 고운 짓, 열정적인 모습. 당에 대한 헌신-애정에 놀랐습니다. 애정과 열정만 보였으면 좋았을텐데. 어떻게 하다 님의 마음속엘 들어갔습니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고스란히 어디로 옮겨질 줄 모르는 떠다니는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시간은 님의 하수인이고 성공은 님을 떠받치고 있는 시녀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원없는 속내입니다.

 

4.

일상이란 터, 내 마음의 낚시를 던져놓습니다. 나란 놈은 수시로 걸려들었습니다.

 

5.

세상에 대고 창을 힘차게 던져봅니다.

창은 힘차게 부딪쳐 작은상처 하나내고 되돌아옵니다.

또 힘차게 던져봅니다.

세상은 더 힘차게 내 몸에 상처기를 냅니다.

 

철판같은 세상을 둥글게 말아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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