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회의 - 뒷춤에 앉아 지루해져올 즈음.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애벌생각을 모아 끄적인다.
1. 과정치화 - 과한 표현은 삼가하기도 하구
2. 탈정치화 -
3. 내면화 및 구조화 -
4. 성찰이 아니라 부정, 신랄함 -
060726
이 주제로 난 시달리고 있다. 부정이란 것의 칼날이 나를 향하고 있기도 하다. 생각을 추스리다보면, 선잠 속에 정리되었다싶으면, 그 칼날의 예리한 끝은 나를 향하고 있다. 허술하거나 시간의 흐름때문에 지나갔던 것들이 겹쳐지고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면... ... 이러다보니 잔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을 품지만 두려움도 함께 품어지는 것이다.
060726 memo
어쩌면 <머리>로만 하는 활동은 소멸해야 할지 모른다. 지식으로 세뇌시키는 것보다, 실제한 일은 반추가 가능하므로, 얼마나 움직였느냐?는 <몸>의 반경으로 평가를 다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얼마나 성장되었으며, 실질적인 결과물은 무엇인가라고..<머리>와 <지식>은 언제든 수혈가능하다. 하지만 <몸>의 기억은 쉽게 충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조합원과 얼마나 만나는지?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 폭을 얼마나 넓혔는지? 임금이나 법제화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내 노선으로 얼마나 동원했는지 표결했는지는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얼마나 주입-강요했는지의 결과물밖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운동, 활동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도배되었는가? 그 현실을 얼마나 아파하는가? 극구 <엘리트>가 아니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머리>와 <행동>, <몸>과 <머리>의 어긋남. <머리>의 과욕이 문제중심에 있는 것은 아닐까?
060918
<몸>의 경험은 어떻게 끌고, 함께하고, 어울릴 것인가? 머리에 경도되지 않고, 몸에 경도되지 않고, 열어두고 넓어질 것인가?
060918
도식을 그리고 난 뒤, 벌써 두달이 흐른다. 다가오는 것보다 흐른 것에 시선을 돌리는 자신이 굽굽해지기도 한다. 기력이 소진해서일까?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보다 주저함이 붙어있는 것 같아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병리라는 생각,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되돌아봄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느낌을 표현해야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 생각이 혼자 생각으로 머무르길 바란 것은 아닐까?
한정된 사람, 한정된 공간. 끊임없이 자중심으로 다른 활동이 돌기 바란다. 그리고 수렴하여 편집한다. 자신의 활동궤적을 한번쯤이라도 냉정하게 반성해보면 시시비비를 가리기 쉬울텐데. 어느 하나 지난 궤적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편집증. 놀라운 꿰어맞춤. 능력이라고 하기엔 사상누각같다. 문화적 궤나, 활동경험의 공유. 그것도 지난 날의 흔적만을 쫓는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상에 무너지기 쉽다. 제 혼자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자본-변화의 그늘은 자신을 옭죈다. 순진무구한 활동가가 아니라 벌써 자본에 훈육되거나 인이 부지불식간에 배여버린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렇게 세월에 묻혀가는 다수.
활동을 완장처럼 두르고 지난 향수에 기대거나, 가학적인 단련?에 익숙하게 헌신하는 모습. 모든 활동의 공간을 동원에 지난 향수를 끌어모으는 일들. 끊임없는 가분수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머리가 비대해져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내 것으로만 자라나서 손을 마주 잡더라도 쓰러지고 마는 지경은 아닐까?
비루한 자본과 소외된 욕망을 해소하기위한 비인권에 몸담기- 온몸은 자본주의 속도만큼이나 자생성은 하나 둘 잘려나가며 구호만 외치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구석이라곤 ... ... 하나 없이 그냥 올라만 가는 것은 아닐까?
활동하는 사람들이 <과정치화>되었다고, 자신의 부문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생활인들이 탈정치화되듯, 타 부문 활동엔 관심조차 없이 그렇게 <탈정치화>된 한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060919
나르시즘
쪽빛 하늘 한 가장자리가 울어 빛에 비친다. 사람들 뒤란, 빛이 울어 비추인다. 눈동자에도 되비추는 빛은 일렁인다. . 무수한 거울 속에 갇힌 나, 시간이 점점 좁혀지는 공간. 굴절되고 모인 반사광은 끊임없는 나로 함몰. 침몰하는 자아의 복제. 끊임없는 자맥질. 그곳으로 자살. 자살하고 있는 시대의 우울. 시대를 감싸고 있는 거울집같은 쪽빛하늘
몰지각
오늘도 일용했다. 중독된 몸을 추스리러 오늘도 복용했다. 속이 편하다. 이렇게 중독되면 파렴치가 필요하다. 파렴치.
벙어리
한노인은 겨우 40년 걸려 350미터짜리 한강그림을 완성했다. 이 사회는 똑똑한 졸업장만 찍어낸다. 뭘하고싶은지, 뭘하고 노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자본의 풀장
사람밖에 사람이 없다. 나만 있을 뿐. 나만 있을 뿐. 관계엔 남이 없다. 사람의 합은 사람이 아니다. 잔인한 관계만 남는다. 자본의 풀장엔 언제나 외로운 나만 있을 뿐이다.
일상
끊임없는 , 만족을 모르는 허기. 만들어진 과잉욕구. 끊임없이 채워넣는다. 그 쳇바퀴란 무한궤도의 순환. 다른 세상은 없다. 조작된 욕망과 기계적으로 채우는 반복된 동작만 남는다.
060926
'민주주의'는 머리로 배우는 것일까? 많이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은 머리로 배우는 것일까? 세미나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일까? 경험과 느낌, 찰라에 만나는 순간. 뇌리에 박히는 기억은 무엇때문일까? '머리'만 키우는 세미나, 토론 위주만은 경도된 방법은 아닐까? 그렇다고 무차별적인 내적동기없는 경험, 몸의 경험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뭔가 때와 적절한 지적 굶주림, 몸에 대한 굶주림이 전제되지 않고 올바르게 느끼고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경도된 방법, 획일화된 방식만, 획일화된 일상만 차고 넘치는 것은 아닌가? 주어서 느끼는 풍요로움을 아는사람만이 준다. 줄 것이 넘치고, 받아서 기쁜.. 끊임없이 베푸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몸의 활동망이 넘치는 사람. 나눠서 주체할 수 없는 지적욕망. 어렵더라도 어려움속에 피는 위트,해학...여유로움, 몸의 반경이 전제되지않고선, 머리의 반경이 접목되지 않고선...그것을 서로 소통하고 풍요로워지지 않고선 우린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머리로의 침몰, 몸으로의 해산...흩어져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061022
고진 <트랜스크리틱>, 르페브르 <현대의 일상성> 서언과 마지막장을 다시 읽다. 일상성은 자본주의 시대에 특이한 것이며, 설득과 강제에 의해, 저자말로는 스스로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좀먹는 테러리스트(표현이 적확한 것 같지 않지만-듣기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라는 구조의 한계를 지적한다. 해고에 대한 공포...등등 <일의 발견>에서 읽은 열망까지도 내재화된 구조라는데...거기에서 나오는 출구. 그럴 듯한 대목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지만, 고진은 네이션(민족)-국가-자본의 동일체라는 관점으로 맑스와 칸트를 불러낸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조목조목 말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
그 논리에 따르면 분절된 사회운동의 통일성과 개인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작품으로서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