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주*샘, 장마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불볕도 마다하지 않는 여름도 무척 깊어졌네요. 삼계탕이든 국밥이든, 영양보충을 해줘야 한계절 지낼 만 하다죠.  보양식과 함께  청원 부용에 있는 부강이란 동네가 떠오르네요. 세종시 편입 문제로 동네가 들썩였던 곳이기도 하고, 대전 갑천에서 흐르는 물과 청주 무심천을 따라 내려오는 강물이 합강하려는 부근이기도 하지요.  부강이란 동네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초원(장경숙샘)의  상상잡지 준비호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이란 비평글을 본 연유도 있네요. 일제에는 큰 시장이었기도 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고모네집에 식모살이를 하다시피 한 곳이죠. 한번 걷고, 두번 걷고 골목길을 걸으며  그 간절함을 나눌 수는 없었지만, 이내 몸에 익숙해져 이제 그 길들과 아담한 시장풍경이 그립기도 하네요.

 

 


 

가네코 후미코를 생각하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엠마골드만이 겹쳐요. 불우하다고 하기보다도 더 처참한 환경, 노예의 삶을 벗어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뜨겁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네요. 눈물겨운 삶 속에 어떻게 그렇게 꽃처럼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면, 상징자본이니 문화자본이니 하는 이론의 함정이 부질없이 보이기도 해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삶이 이렇게 다시 필 수 있다고 여겨요.  두 분다 아나키스트이죠. 역사에도 지워지고 발굴조차 되지 않고 있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폄훼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죠. 그녀들이 만났던 크로포트킨, 바쿠닌, 프루동.......가네코 후미코는 막스 슈티리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온전히 번역된 번역서도 없는 실정이긴 하지만, 그 얘기도 살짝 들려주면 좋겠어요.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읊었네요. 초원님이 상상잡지에 소개한 가네코 후미코와 옥중수고를 이제서야 완간한 나는나란 제목의 책도 있더군요. 그리고 손수 디자인한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란 책 좀 소개해줘요.  이곳 인근에는 구룡포라는 통영 풍의 일본인 마을과 골목, 일제시대 아나키스트의 흔적이 많은 마을들 속에 있어요. 가네코 후미코의 연인이었던 박열의 고향이 이 근처이기도 하죠.

 

 

 

 

 

 

주*샘, 저도 같이 읽어보려합니다. 여름 더위를 식혀줄 안내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파도보러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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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계량화되고 수치화되는 정책의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

데이터로 집행되는 정책의 강압도 믿고 싶지 않다.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며 데이터로 만들어진 자료로 획일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정책에 반영한다면서 듣는 귀는 대부분 현실의 먹이사슬과 출렁임을 설명을 해대어도 느끼지 못한다. 이해의 한계에 갇힌 엘리트-결정사슬을 구원할 길이 없다.
양심적인 엘리트는 끙끙대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각조각 끼워맞추며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 정책은 이해관계를 자르지도 반영하지도 못하고 유행에 바랜다.
누더기가 된 정책의 기준은 개인의 이익과 힘에 쏠려 갈 곳을 잃어 배회한다.

 

1.


삶을 맛보려하지도 맛을 살리려고도 하지 않는 정책들,
애초 삶의 실뿌리는 다 잘려나가면서 처리하거나 처리되는 행정들.
행정들은 또 다른 정해진 삶은 사는 이들에게 접수되고 처분되어 애초에 날 것은 소멸되어간다.

 

3.

내려간다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만 해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괴물이 되어 삶을 짓밟는 정책의 무게는 누구를 위해 짓누르는 것일까
바닥이나 그 지친 삶의 말, 느낌이 전율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정책이나 안을 해결하는 것이 되돌아오기는 한 것일까? 정책의 결과물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줘야 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가? 처리라는 괴물같은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들, 다른 삶의 자장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만들어지는 대안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생명력이 있는 것일까? 그 유효기간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4.

 

비루함과 처절함, 처연함이 행정이라는 필터 속을 통과하며 살아남는 법이 있을까? 행정의 결재라인에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실감나는 정책이 운신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안은 또 필터에 걸리고 느낌이라는 온기는 다 걸러지고 나면 대체 누구를 위해 정책은...조직과 제도를 위해 봉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직을 모시는 정책...늘 삶보다 상위의 목적에 함몰되는 것은 아닐까?

 

 

5.

 

정책이란 화롯불처럼, 삶과 절규의 온기가 고스란히, 때로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그 온기를 고스란히 여럿에게 느낄 수 있게 전달해주는 것은 아닐까?

 

6.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사이, 그 막다른 절벽에 엘리트가 서있는 것은 아닐까? 아는 것에서 끝이나 느낌의 싹을 잘라버리는 데에 익숙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다른 진리에는 관심도 없는 전문가와 엘리트주의의 몽매에 대해 개탄스럽지 않을까?

 

7.

 

 엘리트주의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일까?  느끼지도 살아 숨쉬지도 못하는 행정의 그물에 파닥거리는 엘리트를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숱한 경륜과 경력을 뱃지에 귀속시키려는 명예욕의 누추함을 공공연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일까? 조직의 논리보다 고발과 갈등이 그 곪은 상처를 오히려 시원하게 소독할 수 있다고 장려하는 길은 없을까?

 

뱀발.  엘리트의 아둔함은 다른 삶의 끈을 잡아보거나 이식하려고 하지 않는 버릇의 반복때문은 아닌가 영원히 구제되지 않는 습관, 영원히 구제되는 습관들, 삶을 빠져나가는 정책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 연관된 맥락의 그물이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느낌들이 오지 않는 겉핥기의 답습... ...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어떤 사람의 어떤 삶의 자장까지 느껴야 되고, 어떻게 어디까지 어떤 제도, 시스템까지 꿰어야할 정책이 삶의 아귀를 벗어나 빠지지 않는 것인지...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험이 없는 정보만을 선택하려는 버릇.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평가잣대를 만든다는 일, 이해가 될 듯 말듯하며 정책에 반영한다고 하는 일, 맥락이나 연관사슬의 출렁임도 느끼지 못한 채로 기한에 밀려 처리하려는 습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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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1. 주말 결혼식과 희망식당도 있는데도 책을 주문해두다. 식구들과 저녁 겸 반주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사이 책이 도착했다는 기척이다.  누스바움 책이 더 보고 싶었고, 이학사 책을 몇권 추스려본다.  중고매장에도 구경 겸 마실할 시간이 있어서 노년의 역사와 종의 기원을 염가에 구매하다.  삶의 미학이나 사회생물학 논쟁이나 생태사회주의를 다룬 그린레프트는 생각보다는 미치지 못한다. 각론에서 좀더 따져보기로 한다. 사회생물학의 기억은 오래되었는데 있던 책을 꺼내어 같이 보기로 한다. 누스바움의 책은 인터뷰 내용과 겹쳐보고 있다. 진척이 있을 것인지는 또 다른 책을 통해서 일 것 같다. 아직 보류이다. 공동체, 공유에 대한 문제점은 프루동의 상식적인 통찰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눈여겨 보고 있는 책이다.

 

2. 빌리거나 대면하는 책들과 몇차례 대면이 있고, 쿼터처럼 경기를 펼쳐야 할 듯 싶다. 흔적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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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좋은 삶, 더 나은 삶,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키워드나 목차에 끌려 빌린 책들이다. [교육혁명]은 평생교육, 평생학습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에 끌려서다.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는 너스바움과 갓만의  좋은 삶과 민주주의 교육이란 키워드에 끌려들어갔다. 너스바움 여성철학자의 삶과 이력에 많이 놀라게 되었다. 책소개나 논문을 통해 본 듯한데, 아리스토텔레스 사회민주주의나 가능성으로서 접근 방식으로 드러나는 곁가지는 만만치 않을 듯 싶다. 박홍규교수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는 저번에 찜해두고 이참에 가져왔다. 진화심리학자가 쓴 [인간은 야하다]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구석기로 세팅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관점에서 쓴 책이다. 어젠 본 장은 왜 나이든 남자는 나이 어린 여성을 더 좋아하는가였다. 그 연구조사 결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결론은 지구상 여기저기 살펴보니 '그렇다'였다.

 

2. 한글민주주의는 영어공용화, 한글만능주의 등 관련된 논제에 대해 몽골어, 중국 소수민족언어, 일제시대, 그 이전의 현황들을 제시해 좀더 고정적인 시각을 풀어준다. 한번 살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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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몸이 일만 있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해 온전한 책마실을 하기 쉽지 않다. 이 책들도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림만 가볍게 본다고 빌렸다. 아니나 다를까 관심있는 작가들의 그림들만 살피다가 제대로된 미술가 평을 읽은 것도 몇 편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 문봉선 외  땡땡이다. 간송 전형필을 쓴 작가는 의외다. 미국에 거주하는 작가가 간송미술관에 와서 반한 뒤, 전기 수집과 인터뷰를 거쳐 나온 호흡이 열정의 힘이 미치는 자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미술관이 다시 궁금해진다. 짧고 긴 만남이었는데... ...

 

 

2.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는 생각지 않고 빌렸는데 마음에 많이 남는다. 반납 겸 도서관에 가서 마저 읽고 돌려주었다. 부제가 지성사로 읽는 예술이다.  구석기-신석기 역사의 구분보다도 당대의 삶의 호흡으로 예술을 보려는 노력이 인상짙다. 애초에 구성한 듯 시대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삶이 예술을 낳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딱딱함과 부드러움은 반복되기도 한다. 삶과 현실, 세상이 늘 배반하기에 예술이 시대를 앞서거나 뒤서거나... 간결하지만 깊이가 있는 책이다.

 

 

3. 교과서에서 말하는 시대 구분에 따라 억지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보다 당대의 삶과 인식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을 해주는 것 같다. 앎의 전달이 아니라 느낌이나 통찰의 씨앗을 던져주는 면에서 말이다. 곰브리치, 진중권 미학강의도 유효하지만 좀더 큰 호흡에서 보면 지금도 이어지는 흐름과 예술의 혼을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비코가 많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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