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계량화되고 수치화되는 정책의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

데이터로 집행되는 정책의 강압도 믿고 싶지 않다.
책상 위에서 만들어지며 데이터로 만들어진 자료로 획일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정책에 반영한다면서 듣는 귀는 대부분 현실의 먹이사슬과 출렁임을 설명을 해대어도 느끼지 못한다. 이해의 한계에 갇힌 엘리트-결정사슬을 구원할 길이 없다.
양심적인 엘리트는 끙끙대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각조각 끼워맞추며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느끼지 못했으므로 그 정책은 이해관계를 자르지도 반영하지도 못하고 유행에 바랜다.
누더기가 된 정책의 기준은 개인의 이익과 힘에 쏠려 갈 곳을 잃어 배회한다.

 

1.


삶을 맛보려하지도 맛을 살리려고도 하지 않는 정책들,
애초 삶의 실뿌리는 다 잘려나가면서 처리하거나 처리되는 행정들.
행정들은 또 다른 정해진 삶은 사는 이들에게 접수되고 처분되어 애초에 날 것은 소멸되어간다.

 

3.

내려간다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만 해서 만들어지는 정책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괴물이 되어 삶을 짓밟는 정책의 무게는 누구를 위해 짓누르는 것일까
바닥이나 그 지친 삶의 말, 느낌이 전율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정책이나 안을 해결하는 것이 되돌아오기는 한 것일까? 정책의 결과물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줘야 되는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가? 처리라는 괴물같은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는 정책들, 다른 삶의 자장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만들어지는 대안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생명력이 있는 것일까? 그 유효기간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4.

 

비루함과 처절함, 처연함이 행정이라는 필터 속을 통과하며 살아남는 법이 있을까? 행정의 결재라인에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실감나는 정책이 운신할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안은 또 필터에 걸리고 느낌이라는 온기는 다 걸러지고 나면 대체 누구를 위해 정책은...조직과 제도를 위해 봉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직을 모시는 정책...늘 삶보다 상위의 목적에 함몰되는 것은 아닐까?

 

 

5.

 

정책이란 화롯불처럼, 삶과 절규의 온기가 고스란히, 때로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그 온기를 고스란히 여럿에게 느낄 수 있게 전달해주는 것은 아닐까?

 

6.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사이, 그 막다른 절벽에 엘리트가 서있는 것은 아닐까? 아는 것에서 끝이나 느낌의 싹을 잘라버리는 데에 익숙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다른 진리에는 관심도 없는 전문가와 엘리트주의의 몽매에 대해 개탄스럽지 않을까?

 

7.

 

 엘리트주의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일까?  느끼지도 살아 숨쉬지도 못하는 행정의 그물에 파닥거리는 엘리트를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숱한 경륜과 경력을 뱃지에 귀속시키려는 명예욕의 누추함을 공공연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일까? 조직의 논리보다 고발과 갈등이 그 곪은 상처를 오히려 시원하게 소독할 수 있다고 장려하는 길은 없을까?

 

뱀발.  엘리트의 아둔함은 다른 삶의 끈을 잡아보거나 이식하려고 하지 않는 버릇의 반복때문은 아닌가 영원히 구제되지 않는 습관, 영원히 구제되는 습관들, 삶을 빠져나가는 정책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 연관된 맥락의 그물이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느낌들이 오지 않는 겉핥기의 답습... ...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어떤 사람의 어떤 삶의 자장까지 느껴야 되고, 어떻게 어디까지 어떤 제도, 시스템까지 꿰어야할 정책이 삶의 아귀를 벗어나 빠지지 않는 것인지...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험이 없는 정보만을 선택하려는 버릇. 어쩌면 느끼지 못하고 평가잣대를 만든다는 일, 이해가 될 듯 말듯하며 정책에 반영한다고 하는 일, 맥락이나 연관사슬의 출렁임도 느끼지 못한 채로 기한에 밀려 처리하려는 습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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