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르트르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의 현실, 나의 지평 내에 존재하는 노동자대중의 육중한 현존, 바꾸어 말해서 맑스주의를 살고 실천하며 원거리에서 소시민 지식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견인력을 행사하는 거대하고 어둠침침한 집단의 현존이었다.” -원거리 견인력 250

 

 

 

싸르트르는 자기 세대에 대해 우리는 사적유물론만이 현실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접근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맑스주의는 역사의 객관적 차원을 바깥에서부터 이해하는 방식이며, 실존주의는 주관적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방법 탐구는 상반된 것들을 화해시키는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두가지 완전히 다른 존재론적 현상이 일련의 공통된 등식을 공유할 수 있고 단일한 언어적 술어적 체계로 표현될 수 있는 일종의 통일장 이론의 형태를 취한다. 251

 

발레리의 구체적 작품을 하나의 추상적 관념과 결부해서 그것으로 번역해내는데, 이는 곧 소시민의 개념인바, 실제 이런 사고양식과 동시대에 속하는 독일식 정신사의 그 어떤 개념에 못지않게 플라톤적이고 초시간적인 개념이다. 발레리를 실제 소시민, 즉 일정한 역사시기에 나타난 특정 형태의 소시민과 결부시키는 일은 사실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터인데, 발레리 자신과 같은 다수의 개인적 구체적 실존들을 의미있게 다루지 않고서는 그 사회계급을 파악할 수 없으며, 이것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싸르트르는 이런 추상관념의 지적결합을 진정한 체험적 결합으로 대체하려 하며, 사회적 개인적 생활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시간의 중복이나 지체 및 상이한 시간도식들의 동시적 공존과 접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를 다시 역사 속으로 던져넣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관겸과 인간실존의 관계를 역동적 관계로 대체한다. 이는 즉 기투이며, 과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미래를 향해 투사되는 역할의 자유로운 창출로서, 계급관계 및 귀속의 문제다. 259-260

 

역사의 의미는 총체화에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의미는 있는 것이라기보다 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에 입각해, 우리는 인류가 상호 무관계한 집단과 부족으로 생활했던 선사시대에는 실상 역사에 어떤 단일한 의미도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고 있으며 특정 지역의 사건이 전혀 다른 나라와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와도 관련되고 영향을 끼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의 삶이 단일한 기투로서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단일한 총체화 과정을 구성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를 막연하게나마 실감하게 된다. 278

 

존재와 무의 문맥에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시대와 주위 세계 전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직면한 전쟁은 단지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내면화하고 그것에 반응해야 하며, 어떤 반응에 의해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의미에서만이라도 나의전쟁이다. 282

 

싸르트르는 힘의 반목적성 내지 실천적 타성태란 두가지 부정의 도식이 가져오는 결과는 인간이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작용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손과 팔을 도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대상에 작용하기 위해 자신을 대상화하며 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타성화한다. 따라서 인간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될 궁극적 가능성은 애초에 인간이 물질에 대해 취하는 이러한 최초의 기본 관계 구조 속에서 주어진다. 283

 

우리는 결코 단둘이 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항상 좀 성급하게 사회라 지칭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군의 인간관계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한쌍이라는 개념, 그리고 3개념에 대한 저항은 이 세계가 텅 빈 공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고독이나 사생활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으려 함으로써 우리 주위에 공간을 마련하려는 방편이다. 싸르트르 체계에서 타인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사물에 의해서도 충족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면상 고립된 두사람에게 부재하거나 잠재적인 제3자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물들인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신혼여행 중인 부부는 모텔에 단둘이 있지만, 다른 모든 미국 중산층사회와 함께 있는 셈이다. 289

 

이와같이 3자관계가 우선한다는 생각은 갖가지 풍부한 시사점과 가능성을 지니는 것 같다. 우선 이 개념은 인간의 삶이 그 구조 자체에서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 집합적이라는 사상에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또 이것은 3자 관계의 기초 위에 구축된 완전히 새로운 심리학 체계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양자관계의 개념이 정적 순환적임에 비해 3자관계 개념은 동적이다. 이것은 개인 간의 경험이 집단경험에 선행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비판과 존재와무의 책으로 시도한 분석과 같은 개인주의적 차원을 즉시 넘어 고독한 개인이 집단행동과 집단단위를 창출해 그의 존재론적 사회경제적 약점을 극복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실어준다. 291

 

산업문명에 특유한 대부분의 행동을 수행할 때, 나는 혼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며, 이것은 외적이기보다 내적 동일성인데, 나는 자신을 타인 내지 타자로 만들며, 나의 행동양식을 타인의 행동양식이라 생각되는 것에 의도적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존재양식이 지니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는 내가 나자신과 나의 행동을 외부 타인의 존재에 맞추고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타자란 없으며 무한퇴영과 사방으로의 무한도주만 있을 따름이다. 각자는 스스로에게 타자인 그만큼 타자들과 동일하다.”고 싸르트르는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열성은 거대한 착각이며, 개인의 고독으로부터 여론이나 그냥 그들이라 간주되는 가상의 존재로 투사된 일종의 집단환각이다. 그러나 여론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개인을 수열체 속에 통합하는 것은 여론에 대한 믿음과 그 효과일 뿐이다. 295

 

싸르트르는 우리에게 관료조직이 다시 게릴라집단으로 변신할 수 없으며, 경화된 집단은 쇄신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집단형성의 충격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320

 

개인적 인간관계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집단행동의 실패에 대한 싸르트르의 기술도 경험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사랑하고자 하는 기투는 존재론적 실패라고 말할 때, 이것은 사랑이라는 실제 체험이 실제로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사랑 그 자체란 스스로 정한 존재론적 기능, 즉 어떤 궁극적 충만함을 가져오거나 다른 말로 해서 시간 자체의 궁극적 종말을 달성하는 기능을 실현하는 데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집단 차원에서 존재론적 실패설은 시간 경과, 집단과 상황의 계속적 변화, 세대 계승 등을 강조한다. 이 설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기능을 지니는바, 곧 존재의 윤리라는 환상을 불식하고 우리를 시간 속의 삶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한다...우리는 대부분 본능적으로 유토피아를 역사가 정지하는 지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판이란 책의 실존적 요소는 이를 엄격히 불식하려 한다. 323

 

중산계급의 존재환상이 취하는 형태란 바로 후회와 가책, 또는 아마 후회보다 훨씬 더, 후회와 가책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두갈래 길로 나아간다. 가책은 과거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반면, 가책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앞으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결정적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런 두려움의 복합심리는 사용가능성 개념에서 적극적 형태로 나타난다.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을 자유롭게 열어두려 애쓰는 나머지, 나는 미래의 필요에 대비해 현재의 낭비를 두려워하며 수전노처럼 현재를 저장한다. 자아에 대한 이런 완강한 집착과, 이른바 개성으로 알려진, 중산계급적인 내면의 사생활권과 행동여지를 포기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싸르트르의 작품에 낯익다. 326

 

자아의 죽음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를 특별히 변호하기를 포기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새로운 심리적 익명성과 비개인성을 획득함으로써 처음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며 최초로 자신의 입장을 모든 타인으로 구성되며, 어떤 타인과 마찬가지 가치를 지니되 누구보다 낫지 않은 한 전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330

 

세대 간에 이어지는 중산계급 유산의 본질적 부분은 그들이 행한 과거의 폭력, 즉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행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앞의 한 절에서 혈통적 죄라고 불렀다. 이것은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 개념이다. 1848년 세대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는데, 노동자들은 그 기억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하며, 새로운 세대의 공장주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사전에 작정한, 퉁명스럽고 불신적이며 분노에 가득 찬 노동자계급을 대면해야 한다. 이처럼 한번 저지른 행위는 세계 자체의 구조에 편입되어 한편으로는 억압적 입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의혹으로 그 자취를 남기며, 그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으로 제2, 3의 세대에게 돌아온다. 334

 

내가 근본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결코 그런 결정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결정을 회피하는 것은 일부가 해결되거나 일부가 문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동의를 뜻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단일한 상황과 문제에 반응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계급투쟁의 연속성 때문이다. 337

 

소외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자신에게 행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340

 

순수 인간적인 작인보다 경제적인 작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왜곡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행위자나 개별 계급으로부터 자유와 유효성을 박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행위가 역사에서 취하는 기본적인 구체적 형식, 즉 계급간의 투쟁을 추상화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 속에서 인간행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간과하는 것도 바로 이것, 즉 인간행위가 작용하는 대상인 타인과 타 계층이다. 342

 

싸르트르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물화된 관계의 복합체를 인간행위와 인간관계라는 최초의기본적 현실의 측면에서 다시 진술하려고 결심했다. 이는 맑스주의 모형이 역이다. 346

 

안에서 바라본 나와 바깥으로부터 나의 객관적 존재에 대해 내려진 판단 사이의 거리는 타인을 통한 소외’, 즉 타자와의 기본 투쟁의 모든 형태를 특징짓는데, 우리는 그러한 투쟁에 항상 연루되어 있으며, 나는 항상 그것에 책임이 있고, 내가 그냥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것에 죄가 있다....본 적도 없는 낯선 먼 이방인의 시선은 나의 삶이 영위되는 맥락인 수많은 계급적 집단적 투쟁 중의 하나를 형성하는 만큼, 그 판단으로 나를 엄밀히 에워싼다. 이제 서두에 언급한 바 있는 노동자의 원격 작용평가할 수 있는 좀더 나은 위치에 도달했다. 어떤 구체적 역사적 접촉도 발생하기 전에 단순히 그들이 실존한다는 사실만으로 노동자들이 행사하는, 거의 중력같은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바로 시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53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그러나 먼저 악몽의 넓이와 세기를 헤아려보지 않고서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354

 

 

볕뉘. 싸르트르의 책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은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부분은 500페이지가 넘어서 드러낸다고 하다. "구체의 차원과 역사 자체의 장"을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앞에서 지쳐 떨어져나간다고 한다. 끝까지 들여다보면  싸르트르이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실존주의를 그저 따로 떨어진 것으로만 느꼈지 맑스주의를 품에 안거나 안긴 모습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고 일러준 이도 없다.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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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적 대립이 현재 통용되는 더 낯익은 소외 개념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이니, 추상적인 것이나 소외된 것이나 분명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다만 왜 서구 사상가들이 대체로 소외 개념을 더 좋아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소외 개념은 명백히 타락하고 퇴락한 현실의 진단을 허용하되, 인간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는, 상응하는 노력을 정신에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외는 따라서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개념으로, 유토피아의 계기를 은연중 배제한다. 반면 추상이라는 술어는 반명제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사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성의 관념을 보존, 발전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202

 

우리는 예술에서 구체성이 갖는 두가지 기본 특징을 강조해야 한다. 첫째로, 구체성이 획득된 상황이란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순수히 인간적 견지에서, 즉 개인적 인간경험과 개인적 인간행위의 견지에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황이다. 둘째로, 그러한 작품은 삶과 경험을 하나의 총체성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작품의 모든 사건과 모든 부분적 사실 요소들은 한 총체적 과정의 일부로 즉각적으로 파악된다. 207

 

루카치는 인간의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를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가 자신에게서 본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성공하며, 실로 소설가의 창작이야말로 주인공이 헛되이 추구할 뿐인 물질과 정신의 그 순간적 화해를 가르킨다. 소설가의 창조활동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소극적 신비주의. 소설은 따라서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 삶의 궁극적인 윤리적 목표는 유토피아, 즉 의미와 삶이 다시금 불가분해지고 인간과 세계가 하나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는 추상적인데, 유토피아는 관념이 아니라 비전이다. 따라서 모든 유토피아적 활동의 실험장은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구체적인 서사 자체며, 위대한 소설가는 바로 자신의 문체와 줄거리의 형식적 구성 속에서 유토피아의 문제들의 구체적 실례를 제공한다. 반면 유토피아 철학자는 다만 창백하고 추상적인 꿈, 실체가 결여된 소원충족을 제공할 뿐이다. 211-21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제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인데, 사실 이 책은 정치적이기보다 인식론적이며, 새로운 맑스주의 인식론의 기초를 전문적인 방식으로 확립하고자 씌어진 책이다. 루카치의 계급의식이란 그러므로 경험적 심리적 현상이나 혹은 사회학에서 탐구하는 그 집단적 표현물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귀속성 자체가 정신의 외부현실 파악능력에 가하는 선험적 한계 내지 이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구의 이데올로기 비판과는 처음부터 구별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미 신비화(현혹)를 함축하며, 일종의 부유하는 심리학적 세계관, 정의상 이미 외부세계 자체와는 무관한 일종의 주관적 그림이라는 발상을 담기 때문이다.....루카치가 적절한 프롤레타리아 인식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이른바 부르주아 철학을 진지하게 취급한 덕분이었다. 루카치는 거짓된 것은 고전적인 중산계급 철학의 내용보다 그 형식이라고 보았다. 220-221

 

맑스의 중산계급 경제이론 비판이 그렇듯,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도 중산계급 철학의 한계를 바로 총체성의 범주를 감당할 능력이나 의지의 결여에서 찾는다. 이것은 외재적 판단기준만이 아니라 고전철학자들 자신도 관심을 기울인 딜레마였으니, 맑스 이전의 독일철학은 개별적 주체 내지 인식자의 보편성(칸트의 선험적 자아나 헤겔의 절대정신의 개념에서 비로소 추상적인 형태로 제기된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었다. 루카치의 독창성은 이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바로 사회현실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구체적 위치에 되돌려놓은 점, 그리고 인식론 차원의 보편성과 개별 사유자의 계급귀속성이 갖는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223

 

루카치가 보기에는 칸트 체계가 그 기념비가 되는 고전철학의 딜레마는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태도란 철학에 선행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이 딜레마는 우리와 외부대상의 관계를 (그리고 결국 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정태적이고 관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중산계급의 성향에서 비롯한다. 마치 우리가 바깥세계의 사물과 갖는 원초적 관계가 만들고 사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시간이 정지된 한순간, 사고로는 결국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 꼼짝 않고 응시하는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물자체의 딜레마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나 거짓문제인 셈이며, 중산계급적 인식의 특권적 계기인 이 애초부터 고정된 상황의 일종의 왜곡된 반영인 셈이다. 224

 

바깥세계를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이 노동자에게는 불가능한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가 바깥세계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이를 직관할 여유 내지 여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가 바깥세계의 요소를 사고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도 전에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니, 노동자 자신 속의 이 원초적 소외가 다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그러나 노동자 위치의 강점은 바로 이 끔직한 소외에 있다. 그의 최초의 운동은 작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지식, 즉 자기의식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자기의식은 애당초 대상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바깥세계의 상품적 성격에 대해 중산계급의 객관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참된 지식을 가져다준다.그의 의식은 상품 자체의 자기의식, 바꿔 말하면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의식 내지 의식화다.” 225

 

호의적인 현대이론가들에 비해 루카치가 우월한 점은 변별적이며 철저히 비교적인 사유양식에 있다. 그는 현대적 현상 내부에 위치하면서 그 근본적 가치들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이 현상을 오직 그것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그것을 규정짓고, 하나의 역사적 계기로서 그것의 경계를 확정하여 그것이 아닌 것들과 구분지을 수 있다. 238

 

루카치의 작업은 서사와 총체성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이런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관찰들에 하나의 이론틀을 제공해준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다름 아닌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전문가의 견해를 재확인해주는데, 하이데거는 맑스주의를 단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존재론으로, 그리고 우리와 존재 자체의 관계를 회복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사회적 역사적 실체로 파악된 이런 존재로의 열림에 대해 형식적 기호이자 구체적 표현이 되는 것은 바로 서사. 245

 

 

볕뉘.

 

  루카치와 벤야민편을 읽다보니, 국내에서 미학이나 복제로서 예술 등으로 소개되어 진면목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한다. 미학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맑스를 다시 읽으며, 사회 역사적 변증법을 살려내고 현실에 기반한 인식론의 확장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점이 정작 회자되고 논의되어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 자료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4장 사물화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뭇 책소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인식론이자 현실을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접혀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대위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살아날 핵심인식이 아닌가 한다. 부디 편견과 오독 왜곡에서 벗어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함께 맛보기를 바란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다보니 이론의 씨앗도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번갈아 읽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제임슨의 책 제목이 맑스주의와 형식이다. 왜 형식, 역사화하는 것이 중요한지, 변증법과 자신의 문체, 전체성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다음편 싸르트르가 더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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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제 3의 충동이란 다름 아니라 예술활동 일반의 근저에 자리한 유희충동으로서, 여기서는 형식과 질료를 향한 욕구들이 한꺼번에 충족된다. 이 충동의 대상인 순수가상부터가 형식인 동시에 질료이니, 질료인가 하면 형식으로 화하고 형식인가 하면 또 질료임이 드러나면서, 인간이 통일성을 획득하고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발달상의 결함과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쳐야 할 일종의 훈련의 징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자유란 (질료와 형식을 향한) 이 두가지 강력한 충동의 상호중화나 다름없다. 프로이트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긴장에서 벗어남이며, 양이 질로 대치되고 힘과 무게와 질량이 우미로 대치되거나 변하는 그런 세계에의 접근 내지 일별이다. 117
 

실러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미학적 체계이기보다는 정치적 체계이며, 또한 그에게 미의 중요성은 다가올 진정한 정치적·사회적 자유에 대한 실천적 훈련을 쌓을 가능성을 미적 경험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예술 속에서 의식은 세계 자체의 변화에 대비하며 동시에 이런 변화를 촉진하라고 현실세계에 요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상적인 것의 경험은, 현실 세계를 단죄하며 유토피아 이념, 즉 혁명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준거가 되는 인성과 존재의 총체적 실현을 (상상적 양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18


실러는 독일의 중산계급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계획 또한 앞의 성찰에서 짐작되는 것보다는 더 구체적이었다. 그 계획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우선적으로 민족극장과 민족연극을 통해 건설될 새로운 민족적 중산계급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즉 극장을 통해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정치적 통일과 자율을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118


실러의 사유는 예언적이라기보다 진단적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토피아는 고대 그리스라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신고전주의자로, 당대 독일 중산계급의 지평에 사유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예술문제에서조차 그의 이론의 기획으로 보이는 그 소박과 감상 및 자연과 자의식의 종합은 결국 ‘시대극’과고대의 교훈에 대한 성찰에 불과해지고 만다. 122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초현실주의가 전성기에 지녔던 뜨거운 현실성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하단말인가? 답은 질문 속에 들어 있다. 실천은 그렇지 않지만 이론은 여전히 현실적이다. 132


2.


탈산업주의라는 거대한 분수령의 반대편 비탈에 선 마르쿠제에게는 사태가 달리 비치는데, 가중되는 조작과 더없이 세련된 형태의 사고 통제, 날로 영락해가는 정신적,지적 삶, 삶의 타락과 비인간화 등에 수반되는 것은 오히려 늘어난 성적 자유, 더 큰 물질적 풍요와 소비, 교양에 대한 더 자유로운 접근가능성, 더 나은 주거, 더 널리 확산된 교육 수혜기회, 자동차의 이동성은 물론 사회적 이동성의 증대 등이다. 결국 우리는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사회경제체제의 힘에 더욱 확고하게, 그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137

마르쿠제가『억압적 관용』, 『해방론』에서 표현된 그의 전술적 입장과 갖는 공통점이란 다만 풍요한 사회인 소비사회는 모든 형태의 부정의 경험을 잃어버렸는데, 그러나 개인적 관점에서나 문화적 관점에서나 궁극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은 부정밖에 없으며, 진정 인간적인 삶은 오직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 138

  

이렇게 볼 때 아도르노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마르쿠제의 관계는 이론에 대한 실천이 관계와 같다. 아도르노는 부정적 혹은 비판적 사유의 (혹은 ‘부정변증법’) 이론을 창안하고 문학 철학 음악 등을 다룬 평론에서 부정의 약화가 상부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 반면, 마르쿠제의 저작은 바로 이 거대한 역사적 변혁의 심리적·사회경제적 하부구조를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138


정치건 심리건 행동이건 성찰이건, 현대 삶의 모든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근본적 변화는 바로 가족의 붕괴, 권위적 아버지의 소멸, 즉 핵가족 단위 차원에서 억압의 소멸이다. 이 해방과 더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초자아 자체가 대폭 약화되면서, 겉보기에 해방된 개인은 또한 예전처럼 부권에 대한 반역을 통해 진정한 심적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취할 수 없어졌다. 현대인의 자아는 “원본능과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다양한 양태의 반복의 과정들이 고전적 형태로 전개될 수 없는 지경까지 위축되었다... 그 본래의 역동성이 정태적으로 바뀌며, 자아 초자아 원본능의 상호작용은 자동반응으로 응고된다. 초자아의 체현은 자아의 체현을 수반하는데, 이는 적절한 계기와 시간에 나타나는 고정된 특징과 동작으로 드러난다. 갈수록 자율성의 부담을 떨쳐낸 의식은 개인이 전체에 조화되도록 조절하는 과제로 축소된다.” 거의 마찬가지로, 사회 차원에서는 사회적 억압이나 강요된 승화의 명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심적 자본의 원시적 축적’시기의 특징인 과거의 속박이 ‘억압적 탈승화’로 바뀌면서, 성적 풍요의 사회는 체제 내에서 의식적 불행을 줄이고 체제에 대한 의식적 불만을 미리 봉쇄하는 동시에, 환경의 점진적 궁핍화를 정서적 혹은 리비도적 관점에서 보상하는 수단으로 노골적이되 특수화된 성적 활동을 고무하니, 이것이 곧 우리가 앞에서 묘사한 그 현상이다. 139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약화, 계급투쟁의 소멸, 반항이 연예적 가치에 동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산업자본주의의 풍요사회에서 부정의 소멸이 취하는 형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의 과제는 현상에 대한 보편적 굴종에 눌려 절멸되다시피 했고 자연이나 자유 등의 개념과 함께 현실원칙에 억압당해 지하로 쫓겨들어간 부정의 관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이 과제를 마르쿠제는 유토피아 충동의 부활이라고 표현한다. 140

3.


블로흐 주저 『희망의 원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처럼 상승하는형식들의 사다리라기보다는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희망의 현현에 대한 방대하고 어지러운 탐구이다. 즉 인간적 시간에 대한 핵심적이며 결정적인 분석의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점점 확산되어 실존심리학(불안 실망 같은 현상들의 의미), 윤리학(전통적 이상과 가치로 제도화된 희망에 대한 연구), 논리학(가능태의 개념적 범주들), 다양한 국가와 사회의 조직이론 연구처럼 통상적인 유형과 혁명전략 분석처럼 맑스주의적인 성격의 것 모두를 포괄하는 정치학, 모든 유토피아 개념에 내재된 사회계획, 미래세계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변대상들의 관계를 바꾸어놓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광고나 대중문화에서 이루어지는 소원충족을 분석하는 형태의 사회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 신화 종교 등에 나타난 유토피아의 원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문학비평 등에 접근해간다. 그러므로 책은 구상에서부터 비체계적일 수밖에 없다. 그 기본도식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아서 서너페이지로 복창할 수도 있고 세계 자체의 무한한 현실들에 필적할 만큼 무한정 확대될 수도 있다. 151

  

하지만 이런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가능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즉 ‘희망’, 유토피아를 향한 만물의 감지하기 힘든 이끌림, 광대한 우주의 아무리 작은 세포 속에서도 문득그러나 미세하게 작동하는 미래 등의 이런 형상들이 내부 및 외부 세계에서 흔적, 즉 자취, 발자취, 표지, 기호 “내가 여기서 읽어낼 모든 것의 조짐들”로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아야 한다. 블로흐에게 흔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심적인지는 벤야민아니 데리다에 견주어 보면 알 수 있는데, 벤야민의 사본과 우의적 단편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만이 잊혀진 재앙의 표지로 남아 있게 되며, 데리다의 ‘흔적’이론에서는 대상이나 문자 속에 자리잡은 의미작용 자체의 순수한 시간적 운동만이, 그 운동의 방향이나 의미에 대한 어떤 궁극적 감각도 결여된 채 홀로 남아 있다. 이에 반해 블로흐의 흔적은 외적 대상인 동시에 직접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의식적인 지적 해석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본래성(진정성)은, 뭔가 긴박하면서도 철저히 개인적인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이 강렬한 징표들 앞에서 우리가 순간 멈칫 놀라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확증된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가 세계 자체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의 구체적 개진인 철학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마치 우리를 놀라움 자체 속에서 더 본원적인 사고의 갱신으로 거듭 돌려보내려는 듯 종종 선가의 화두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이 소묘들이 더 공식적인 철학적 탐구와 번갈아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152-153

블로흐식 놀라움의 경험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의 한층 제의적인 신비와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블로흐는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식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거부하는데, 블로흐에게 존재란 바로 아직은 통째로 거기 현존하지는 못하는, 미완이자 진행 중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거기 작동하는 생겨남의 잠재성이며, 미래 존재의 조짐과 전조 들이다. 154


블로흐가 등한시된 주된 이유는 희망과 존재론적 예기의 가르침인 그의 체계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기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보편적 문화와 보편적 해석학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의 체계는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거대하고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부의 특이한 온기와 힘을 방사하는, 철자와 그 철자의 열쇠들부터가 결국 해독될 순간을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신비로운 상형문자로 뒤덮인 채. 그 사이 그의 저작은 마르쿠제와 벤야민의 저작처럼 우리의 문화라는 책 속에 보존되어 있는 상충하는 텍스트들에 참된 정치적 차원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맑스주의 해석학이 사용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에 대해 하나의 실물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원작업은 어떤 안이한 상징적 우의적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텍스트 자체의 내용과 형식충동이 (심적 완전성의 형상이건, 자유의 형상이건, 유토피아적 변형을 향한 추동의 형상이건) 억누를 수 없는 혁명적 소망의 형상임을 읽어냄으로써 수행된다. 193

 

볕뉘. 

 

1. 연관된 도서는 읽지 못했다. 사유의 풍성함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만 확인해둔다. 

 

2. 모바일로 제목을 수정하다가 강조톤이 날라가 버렸다.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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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일터 선배를 보다. 스치듯이 지나간 2년의 기억 외에 다른 것들이 없는데, 그를 기억해내는 이들은 다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비쳤던 모습들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삶의 자장에서,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나, 단조로운 톤의 농담이나 표현방법이 막내외삼촌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단편만 삼키고 편리로 취했던 나날이 붉혀지기도 하였다.

 

 

2. 너무도 가까이에서는 나도 볼 수 없다. 적정한 깊이감과 질감은 거리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조금 떨어지거나 실루엣을 잡는 위치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오월을 제대로 맞으려면 불쑥 다가서는 유월을 경계할 일이기도 하다. 3월같은 그늘에 서지 않도록 유념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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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발터 벤야민, 혹은 향수

 

근대 삶의 모든 국면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소외와 비인간화 등에 대해 많은 근대의 철학자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이런 사상가들과 달리 벤야민은 자신의 삶 또한 구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글의 독특한 매력이 나오니, 그것은 변증법적 예지나 표현된 시적 감수성에서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엇보다도 그 정신의 자서전적 부분이 객관 형태로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관념의 형상에서 상징적 만족을 얻는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7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사건들을 계승해 넘겨주는 전통의 고리를 주조해낸다“ ”유물론이란 자신의 주관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의 주관성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능이란 외부환경의 충격에 대해 유기체를 방어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외상, 신경증적 반복, 꿈 등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충격이 의식을 뚫고 나와 결국 진정되는 방식이다. 이런 발상은 벤야민의 손에서 역사기술의 도구가 되며, 현대사회에서는 (이는 아마 유기체에 가해지는 온갖 충격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일텐데) 이런 방어기제들이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법이 된다. 즉 방어기제의 갖가지 기계적 대체물들이 의식과 그 대상 사이에 끼어드는데, 이것은 우리를 보호해주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동화되거나 우리의 감각을 진정한 개인적 경험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앗아간다. 88-89

 

상징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상징의 의미를 전혀 못보는 것 사이의 불모의 대립을 넘어선 데 벤야민이 독창성이 있다......우리는 상징적인 대상들을 두 제곱으로 읽어내야, 다시 말해서 이 대상들에서 직접 일대일의 의미를 풀어내기보다는 상징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징후로서 가리키고 있는 그것을 감지해내야 하는 것이다. 93

 

벤야민의 감수성은 인간이 사물의 힘에 굴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순간들 쪽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끄 비극의 낯익은 내용은 서서히 형식의 문제로, 대상의 문제로, 말하자면 우의 자체의 문제로 바뀌어 간다. 우의란 어떤 이유에서건 사물이 의미, 정신, 진정한 인간실존과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그런 세계의 지배적 표현양식이기 때문이다. 97

 

언어보다는 사본, 말의 속뜻보다는 문자, 이것들은 바로끄 세계가 분쇄되어 생긴 파편들이고, 지나친 호기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괴롭히는 야릇하게 읽히는 기호와 징표들이며, 불가사의한 의미를 담고 천천히 무대 위로 지나가는 행렬이다. 이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나는 우의가 우리의 시대에 다시 복원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순전히 역사적 관심거리인 고딕풍 괴물로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정신의 중세적 건강을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라,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 병리학적 현상으로 말이다. 99

 

상징은 찰나적인 것, 서정적인 것, 즉 시간적으로 말하면 단 한순간이다...이와 반대로 우의는 현대인이 시간을 살아가는 가장 주도적인 양식으로서, 순간순간 서툴게나마 의미를 해독해내는 것이며, 이질적이며 불연속적인 순간들에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힘겨운 시도다. “상징은 스러지는 가운데 구원의 빛을 띤 자연의 얼굴을 보이는 반면, 우의의 경우 보는 사람의 눈앞에 얼어붙은 풍경처럼 펼쳐지는 것은 역사의 사상 死相이다. 그 얼굴, 아니 그 해골 속에서는 시의에 맞지 않고 고통스럽고 무위로 돌아간 온갖 것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역사를 세계가 수난을 겪는 이야기로 보는 바로끄적이며 현세적인 설명이야말로 바로 우의적 지각의 정수다. 역사는 고통과 쇠락의 정거장에서만 의미를 띤다. 의미의 양은 죽음의 존재와 쇠락의 힘에 정확히 정비례한다. 죽음이란 자연과 의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세기에 우의는 외부세계를 버리고 떠나는데, 내면세계를 식민화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100

 

안락은 고립을 낳는다. 동시에 안락은 그것을 누리려는 자를 물리적 메커니즘의 힘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19세기 중엽에 성냥이 발명된 이후로 갖가지 새 물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복잡한 일련의 조작을 한번의 손동작으로 대치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발전은 서로 다른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벤야민은 노동자와 노동자와 공장 기계의 작동에 심리적으로 종속됨을 기술함으로써 이 목록을 완결한다....이 평론은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심리상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새로운 언어상황과 저널리즘의 타락에, 또한 대도시 주민으로서 도시의 일상생활의 나날이 심해지는 충격과 지각마비 등에 맞딱드린 시인에서 출발한다....기계와 일련의 발명품이 바로 이 이미지다. 독자들도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앞의 인용이 겉보기에는 역사적 분석 같지만 실제로는 우의적 성찰의 연습, 즉 벤야민의 제재인 그 독특하고 불안한 현대적 심리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찾아내는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아우라나 카리스마는 사라지는 순간 감지하기가 더 용이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소멸의 원인은 전반적인 기술적 발명, 곧 지각의 대체물이자 그 기계적 확대인 기계에 의해 인간의 지각이 대치되는 현상이다. 103

 

연극배우들이 복제 가능한 예술작품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맞부딪친 것처럼, 이야기 tale도 현대의 의사소통체계, 특히 신문에 맞부딪치게 된다. 신문은 신기함의 충격을 흡수하고, 유기체를 충격에 둔감하게 만들어 충격의 강도를 둔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신기한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반대로 충격의 힘을 보존하도록 되어 있다. 기계적 형태의 의사소통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새로운 자료들을 소진하는 반면, 구전을 통한 더 오래된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는 근본적 특징을 지닌다. 이야기의 복제가능성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의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사실,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또 기억할 만한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이 줄거리를 듣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동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105

 

옛날의 이야기는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단발의 선택과 기회가 주어지며, 모든 것을 한번의 주사위에 걸어야 하고, 따라서 자연히 개인의 삶이 운명 내지 숙명의 모습, 즉 이야기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의 모습을 띠게 된 사회적 삶을 표현했다. 반면 현대세계(서구와 미국의 세계)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나 기회란 전무할 정도의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철학도, 싸르트르가 그 이론가인 모더니즘의 의식의 문학도 다 여기서 나온 것이며, 플롯의 쇠퇴 또한 여기서 비롯한 것인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사라질 때(벤야민의 의미에서 죽음이 부재할 때) 이야깃거리 역시 사라지고, 다만 아무렇게나 순서를 뒤집을 수 있는 동등한 무게를 지닌 일련의 경험들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107

 

이야기란 과거와 관계를 맺고 과거를 추억하는 심리적 양식만이 아니다. 벤야민에게 이야기란 또한 사라진 사회적·역사적 삶의 형식과 접촉하는 양식이다. 바로 이처럼 이야기행위와 역사적으로 특정한 생산양식의 구체적 형식을 서로 연관짓는 점에서 벤야민은 가장 계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의 모델이 될 수 있다.....이야기는 장인문화의 산물이며, 도자기나 구두장이가 만든 구두처럼 수제품이다. 그리고 이런 수제품과 마찬가지로 도공의 손자취가 유약을 바른 표면에 남는 것처럼 이야기에는 이야기꾼의 손길이 남아 있다.” 108

 

 

볕뉘. 발터 벤야민의 독해는 다양한 것 같다. 읽어내는 사람마다 그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 애초의 의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 이야기는 다시 그곳을 응시해야지만 연결된 것이 다시 살아오른다라는 눈치이겠다.  저자의 시각을 쫓아가다보면 이렇게 근거가 확실하면서 뿌리깊다. 출발점을 분명하고 남을 수 있도록, 읽고나면 저자인지 벤야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못을 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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