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제 3의 충동이란 다름 아니라 예술활동 일반의 근저에 자리한 유희충동으로서, 여기서는 형식과 질료를 향한 욕구들이 한꺼번에 충족된다. 이 충동의 대상인 순수가상부터가 형식인 동시에 질료이니, 질료인가 하면 형식으로 화하고 형식인가 하면 또 질료임이 드러나면서, 인간이 통일성을 획득하고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발달상의 결함과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쳐야 할 일종의 훈련의 징표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자유란 (질료와 형식을 향한) 이 두가지 강력한 충동의 상호중화나 다름없다. 프로이트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긴장에서 벗어남이며, 양이 질로 대치되고 힘과 무게와 질량이 우미로 대치되거나 변하는 그런 세계에의 접근 내지 일별이다. 117
 

실러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미학적 체계이기보다는 정치적 체계이며, 또한 그에게 미의 중요성은 다가올 진정한 정치적·사회적 자유에 대한 실천적 훈련을 쌓을 가능성을 미적 경험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예술 속에서 의식은 세계 자체의 변화에 대비하며 동시에 이런 변화를 촉진하라고 현실세계에 요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상적인 것의 경험은, 현실 세계를 단죄하며 유토피아 이념, 즉 혁명의 청사진을 구상하는 준거가 되는 인성과 존재의 총체적 실현을 (상상적 양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18


실러는 독일의 중산계급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계획 또한 앞의 성찰에서 짐작되는 것보다는 더 구체적이었다. 그 계획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우선적으로 민족극장과 민족연극을 통해 건설될 새로운 민족적 중산계급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즉 극장을 통해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정치적 통일과 자율을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118


실러의 사유는 예언적이라기보다 진단적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토피아는 고대 그리스라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신고전주의자로, 당대 독일 중산계급의 지평에 사유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예술문제에서조차 그의 이론의 기획으로 보이는 그 소박과 감상 및 자연과 자의식의 종합은 결국 ‘시대극’과고대의 교훈에 대한 성찰에 불과해지고 만다. 122

이론이자 실천으로서 초현실주의가 전성기에 지녔던 뜨거운 현실성이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하단말인가? 답은 질문 속에 들어 있다. 실천은 그렇지 않지만 이론은 여전히 현실적이다. 132


2.


탈산업주의라는 거대한 분수령의 반대편 비탈에 선 마르쿠제에게는 사태가 달리 비치는데, 가중되는 조작과 더없이 세련된 형태의 사고 통제, 날로 영락해가는 정신적,지적 삶, 삶의 타락과 비인간화 등에 수반되는 것은 오히려 늘어난 성적 자유, 더 큰 물질적 풍요와 소비, 교양에 대한 더 자유로운 접근가능성, 더 나은 주거, 더 널리 확산된 교육 수혜기회, 자동차의 이동성은 물론 사회적 이동성의 증대 등이다. 결국 우리는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사회경제체제의 힘에 더욱 확고하게, 그것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137

마르쿠제가『억압적 관용』, 『해방론』에서 표현된 그의 전술적 입장과 갖는 공통점이란 다만 풍요한 사회인 소비사회는 모든 형태의 부정의 경험을 잃어버렸는데, 그러나 개인적 관점에서나 문화적 관점에서나 궁극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은 부정밖에 없으며, 진정 인간적인 삶은 오직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 138

  

이렇게 볼 때 아도르노 내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마르쿠제의 관계는 이론에 대한 실천이 관계와 같다. 아도르노는 부정적 혹은 비판적 사유의 (혹은 ‘부정변증법’) 이론을 창안하고 문학 철학 음악 등을 다룬 평론에서 부정의 약화가 상부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 반면, 마르쿠제의 저작은 바로 이 거대한 역사적 변혁의 심리적·사회경제적 하부구조를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138


정치건 심리건 행동이건 성찰이건, 현대 삶의 모든 차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상황이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근본적 변화는 바로 가족의 붕괴, 권위적 아버지의 소멸, 즉 핵가족 단위 차원에서 억압의 소멸이다. 이 해방과 더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초자아 자체가 대폭 약화되면서, 겉보기에 해방된 개인은 또한 예전처럼 부권에 대한 반역을 통해 진정한 심적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취할 수 없어졌다. 현대인의 자아는 “원본능과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다양한 양태의 반복의 과정들이 고전적 형태로 전개될 수 없는 지경까지 위축되었다... 그 본래의 역동성이 정태적으로 바뀌며, 자아 초자아 원본능의 상호작용은 자동반응으로 응고된다. 초자아의 체현은 자아의 체현을 수반하는데, 이는 적절한 계기와 시간에 나타나는 고정된 특징과 동작으로 드러난다. 갈수록 자율성의 부담을 떨쳐낸 의식은 개인이 전체에 조화되도록 조절하는 과제로 축소된다.” 거의 마찬가지로, 사회 차원에서는 사회적 억압이나 강요된 승화의 명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심적 자본의 원시적 축적’시기의 특징인 과거의 속박이 ‘억압적 탈승화’로 바뀌면서, 성적 풍요의 사회는 체제 내에서 의식적 불행을 줄이고 체제에 대한 의식적 불만을 미리 봉쇄하는 동시에, 환경의 점진적 궁핍화를 정서적 혹은 리비도적 관점에서 보상하는 수단으로 노골적이되 특수화된 성적 활동을 고무하니, 이것이 곧 우리가 앞에서 묘사한 그 현상이다. 139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약화, 계급투쟁의 소멸, 반항이 연예적 가치에 동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산업자본주의의 풍요사회에서 부정의 소멸이 취하는 형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의 과제는 현상에 대한 보편적 굴종에 눌려 절멸되다시피 했고 자연이나 자유 등의 개념과 함께 현실원칙에 억압당해 지하로 쫓겨들어간 부정의 관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이 과제를 마르쿠제는 유토피아 충동의 부활이라고 표현한다. 140

3.


블로흐 주저 『희망의 원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처럼 상승하는형식들의 사다리라기보다는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나타나는 희망의 현현에 대한 방대하고 어지러운 탐구이다. 즉 인간적 시간에 대한 핵심적이며 결정적인 분석의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점점 확산되어 실존심리학(불안 실망 같은 현상들의 의미), 윤리학(전통적 이상과 가치로 제도화된 희망에 대한 연구), 논리학(가능태의 개념적 범주들), 다양한 국가와 사회의 조직이론 연구처럼 통상적인 유형과 혁명전략 분석처럼 맑스주의적인 성격의 것 모두를 포괄하는 정치학, 모든 유토피아 개념에 내재된 사회계획, 미래세계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변대상들의 관계를 바꾸어놓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의 기술, 광고나 대중문화에서 이루어지는 소원충족을 분석하는 형태의 사회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 신화 종교 등에 나타난 유토피아의 원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문학비평 등에 접근해간다. 그러므로 책은 구상에서부터 비체계적일 수밖에 없다. 그 기본도식은 너무 길거나 너무 짧아서 서너페이지로 복창할 수도 있고 세계 자체의 무한한 현실들에 필적할 만큼 무한정 확대될 수도 있다. 151

  

하지만 이런 탐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가능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즉 ‘희망’, 유토피아를 향한 만물의 감지하기 힘든 이끌림, 광대한 우주의 아무리 작은 세포 속에서도 문득그러나 미세하게 작동하는 미래 등의 이런 형상들이 내부 및 외부 세계에서 흔적, 즉 자취, 발자취, 표지, 기호 “내가 여기서 읽어낼 모든 것의 조짐들”로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아야 한다. 블로흐에게 흔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심적인지는 벤야민아니 데리다에 견주어 보면 알 수 있는데, 벤야민의 사본과 우의적 단편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만이 잊혀진 재앙의 표지로 남아 있게 되며, 데리다의 ‘흔적’이론에서는 대상이나 문자 속에 자리잡은 의미작용 자체의 순수한 시간적 운동만이, 그 운동의 방향이나 의미에 대한 어떤 궁극적 감각도 결여된 채 홀로 남아 있다. 이에 반해 블로흐의 흔적은 외적 대상인 동시에 직접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굳이 의식적인 지적 해석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것의 본래성(진정성)은, 뭔가 긴박하면서도 철저히 개인적인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이 강렬한 징표들 앞에서 우리가 순간 멈칫 놀라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확증된다. 여기서 철학은 우리가 세계 자체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의 구체적 개진인 철학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마치 우리를 놀라움 자체 속에서 더 본원적인 사고의 갱신으로 거듭 돌려보내려는 듯 종종 선가의 화두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이 소묘들이 더 공식적인 철학적 탐구와 번갈아 규칙적으로 나타난다. 152-153

블로흐식 놀라움의 경험이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의 한층 제의적인 신비와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블로흐는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식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거부하는데, 블로흐에게 존재란 바로 아직은 통째로 거기 현존하지는 못하는, 미완이자 진행 중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놀라운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거기 작동하는 생겨남의 잠재성이며, 미래 존재의 조짐과 전조 들이다. 154


블로흐가 등한시된 주된 이유는 희망과 존재론적 예기의 가르침인 그의 체계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기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보편적 문화와 보편적 해석학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의 체계는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거대하고 수수께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내부의 특이한 온기와 힘을 방사하는, 철자와 그 철자의 열쇠들부터가 결국 해독될 순간을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는, 신비로운 상형문자로 뒤덮인 채. 그 사이 그의 저작은 마르쿠제와 벤야민의 저작처럼 우리의 문화라는 책 속에 보존되어 있는 상충하는 텍스트들에 참된 정치적 차원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맑스주의 해석학이 사용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에 대해 하나의 실물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원작업은 어떤 안이한 상징적 우의적 해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텍스트 자체의 내용과 형식충동이 (심적 완전성의 형상이건, 자유의 형상이건, 유토피아적 변형을 향한 추동의 형상이건) 억누를 수 없는 혁명적 소망의 형상임을 읽어냄으로써 수행된다. 193

 

볕뉘. 

 

1. 연관된 도서는 읽지 못했다. 사유의 풍성함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만 확인해둔다. 

 

2. 모바일로 제목을 수정하다가 강조톤이 날라가 버렸다.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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