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적 대립이 현재 통용되는 더 낯익은 소외 개념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이니, 추상적인 것이나 소외된 것이나 분명 똑같은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다만 왜 서구 사상가들이 대체로 소외 개념을 더 좋아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소외 개념은 명백히 타락하고 퇴락한 현실의 진단을 허용하되, 인간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는, 상응하는 노력을 정신에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외는 따라서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개념으로, 유토피아의 계기를 은연중 배제한다. 반면 추상이라는 술어는 반명제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사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성의 관념을 보존, 발전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202

 

우리는 예술에서 구체성이 갖는 두가지 기본 특징을 강조해야 한다. 첫째로, 구체성이 획득된 상황이란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순수히 인간적 견지에서, 즉 개인적 인간경험과 개인적 인간행위의 견지에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황이다. 둘째로, 그러한 작품은 삶과 경험을 하나의 총체성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작품의 모든 사건과 모든 부분적 사실 요소들은 한 총체적 과정의 일부로 즉각적으로 파악된다. 207

 

루카치는 인간의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이미지를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가 자신에게서 본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는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성공하며, 실로 소설가의 창작이야말로 주인공이 헛되이 추구할 뿐인 물질과 정신의 그 순간적 화해를 가르킨다. 소설가의 창조활동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소극적 신비주의. 소설은 따라서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 삶의 궁극적인 윤리적 목표는 유토피아, 즉 의미와 삶이 다시금 불가분해지고 인간과 세계가 하나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어는 추상적인데, 유토피아는 관념이 아니라 비전이다. 따라서 모든 유토피아적 활동의 실험장은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구체적인 서사 자체며, 위대한 소설가는 바로 자신의 문체와 줄거리의 형식적 구성 속에서 유토피아의 문제들의 구체적 실례를 제공한다. 반면 유토피아 철학자는 다만 창백하고 추상적인 꿈, 실체가 결여된 소원충족을 제공할 뿐이다. 211-212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제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인데, 사실 이 책은 정치적이기보다 인식론적이며, 새로운 맑스주의 인식론의 기초를 전문적인 방식으로 확립하고자 씌어진 책이다. 루카치의 계급의식이란 그러므로 경험적 심리적 현상이나 혹은 사회학에서 탐구하는 그 집단적 표현물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 귀속성 자체가 정신의 외부현실 파악능력에 가하는 선험적 한계 내지 이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구의 이데올로기 비판과는 처음부터 구별된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미 신비화(현혹)를 함축하며, 일종의 부유하는 심리학적 세계관, 정의상 이미 외부세계 자체와는 무관한 일종의 주관적 그림이라는 발상을 담기 때문이다.....루카치가 적절한 프롤레타리아 인식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이른바 부르주아 철학을 진지하게 취급한 덕분이었다. 루카치는 거짓된 것은 고전적인 중산계급 철학의 내용보다 그 형식이라고 보았다. 220-221

 

맑스의 중산계급 경제이론 비판이 그렇듯,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도 중산계급 철학의 한계를 바로 총체성의 범주를 감당할 능력이나 의지의 결여에서 찾는다. 이것은 외재적 판단기준만이 아니라 고전철학자들 자신도 관심을 기울인 딜레마였으니, 맑스 이전의 독일철학은 개별적 주체 내지 인식자의 보편성(칸트의 선험적 자아나 헤겔의 절대정신의 개념에서 비로소 추상적인 형태로 제기된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에 두었다. 루카치의 독창성은 이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바로 사회현실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구체적 위치에 되돌려놓은 점, 그리고 인식론 차원의 보편성과 개별 사유자의 계급귀속성이 갖는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223

 

루카치가 보기에는 칸트 체계가 그 기념비가 되는 고전철학의 딜레마는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태도란 철학에 선행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이 딜레마는 우리와 외부대상의 관계를 (그리고 결국 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정태적이고 관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중산계급의 성향에서 비롯한다. 마치 우리가 바깥세계의 사물과 갖는 원초적 관계가 만들고 사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시간이 정지된 한순간, 사고로는 결국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 꼼짝 않고 응시하는 관계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물자체의 딜레마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나 거짓문제인 셈이며, 중산계급적 인식의 특권적 계기인 이 애초부터 고정된 상황의 일종의 왜곡된 반영인 셈이다. 224

 

바깥세계를 정태적이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아는 것이 노동자에게는 불가능한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가 바깥세계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이를 직관할 여유 내지 여가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가 바깥세계의 요소를 사고의 대상으로 설정하기도 전에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니, 노동자 자신 속의 이 원초적 소외가 다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그러나 노동자 위치의 강점은 바로 이 끔직한 소외에 있다. 그의 최초의 운동은 작업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지식, 즉 자기의식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자기의식은 애당초 대상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바깥세계의 상품적 성격에 대해 중산계급의 객관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참된 지식을 가져다준다.그의 의식은 상품 자체의 자기의식, 바꿔 말하면 상품의 생산과 교환에 입각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의식 내지 의식화다.” 225

 

호의적인 현대이론가들에 비해 루카치가 우월한 점은 변별적이며 철저히 비교적인 사유양식에 있다. 그는 현대적 현상 내부에 위치하면서 그 근본적 가치들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이 현상을 오직 그것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그것을 규정짓고, 하나의 역사적 계기로서 그것의 경계를 확정하여 그것이 아닌 것들과 구분지을 수 있다. 238

 

루카치의 작업은 서사와 총체성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이런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관찰들에 하나의 이론틀을 제공해준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다름 아닌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전문가의 견해를 재확인해주는데, 하이데거는 맑스주의를 단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존재론으로, 그리고 우리와 존재 자체의 관계를 회복하는 근원적 양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사회적 역사적 실체로 파악된 이런 존재로의 열림에 대해 형식적 기호이자 구체적 표현이 되는 것은 바로 서사. 245

 

 

볕뉘.

 

  루카치와 벤야민편을 읽다보니, 국내에서 미학이나 복제로서 예술 등으로 소개되어 진면목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한다. 미학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맑스를 다시 읽으며, 사회 역사적 변증법을 살려내고 현실에 기반한 인식론의 확장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점이 정작 회자되고 논의되어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의 자료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의 4장 사물화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뭇 책소개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원문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인식론이자 현실을 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접혀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대위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살아날 핵심인식이 아닌가 한다. 부디 편견과 오독 왜곡에서 벗어나 지평을 넓히는 계기를 함께 맛보기를 바란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없다보니 이론의 씨앗도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싶다. 번갈아 읽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제임슨의 책 제목이 맑스주의와 형식이다. 왜 형식, 역사화하는 것이 중요한지, 변증법과 자신의 문체, 전체성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다음편 싸르트르가 더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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