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르트르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의 현실, 나의 지평 내에 존재하는 노동자대중의 육중한 현존, 바꾸어 말해서 맑스주의를 살고 실천하며 원거리에서 소시민 지식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견인력을 행사하는 거대하고 어둠침침한 집단의 현존이었다.” -원거리 견인력 250

 

 

 

싸르트르는 자기 세대에 대해 우리는 사적유물론만이 현실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접근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맑스주의는 역사의 객관적 차원을 바깥에서부터 이해하는 방식이며, 실존주의는 주관적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방법 탐구는 상반된 것들을 화해시키는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두가지 완전히 다른 존재론적 현상이 일련의 공통된 등식을 공유할 수 있고 단일한 언어적 술어적 체계로 표현될 수 있는 일종의 통일장 이론의 형태를 취한다. 251

 

발레리의 구체적 작품을 하나의 추상적 관념과 결부해서 그것으로 번역해내는데, 이는 곧 소시민의 개념인바, 실제 이런 사고양식과 동시대에 속하는 독일식 정신사의 그 어떤 개념에 못지않게 플라톤적이고 초시간적인 개념이다. 발레리를 실제 소시민, 즉 일정한 역사시기에 나타난 특정 형태의 소시민과 결부시키는 일은 사실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터인데, 발레리 자신과 같은 다수의 개인적 구체적 실존들을 의미있게 다루지 않고서는 그 사회계급을 파악할 수 없으며, 이것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싸르트르는 이런 추상관념의 지적결합을 진정한 체험적 결합으로 대체하려 하며, 사회적 개인적 생활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시간의 중복이나 지체 및 상이한 시간도식들의 동시적 공존과 접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를 다시 역사 속으로 던져넣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관겸과 인간실존의 관계를 역동적 관계로 대체한다. 이는 즉 기투이며, 과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미래를 향해 투사되는 역할의 자유로운 창출로서, 계급관계 및 귀속의 문제다. 259-260

 

역사의 의미는 총체화에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의미는 있는 것이라기보다 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변증법적 방식에 입각해, 우리는 인류가 상호 무관계한 집단과 부족으로 생활했던 선사시대에는 실상 역사에 어떤 단일한 의미도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고 있으며 특정 지역의 사건이 전혀 다른 나라와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와도 관련되고 영향을 끼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의 삶이 단일한 기투로서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단일한 총체화 과정을 구성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를 막연하게나마 실감하게 된다. 278

 

존재와 무의 문맥에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시대와 주위 세계 전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직면한 전쟁은 단지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내면화하고 그것에 반응해야 하며, 어떤 반응에 의해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지 않을 자유가 없다는 의미에서만이라도 나의전쟁이다. 282

 

싸르트르는 힘의 반목적성 내지 실천적 타성태란 두가지 부정의 도식이 가져오는 결과는 인간이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작용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손과 팔을 도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대상에 작용하기 위해 자신을 대상화하며 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타성화한다. 따라서 인간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될 궁극적 가능성은 애초에 인간이 물질에 대해 취하는 이러한 최초의 기본 관계 구조 속에서 주어진다. 283

 

우리는 결코 단둘이 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항상 좀 성급하게 사회라 지칭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거나, 적어도 다른 일군의 인간관계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한쌍이라는 개념, 그리고 3개념에 대한 저항은 이 세계가 텅 빈 공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정한 고독이나 사생활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으려 함으로써 우리 주위에 공간을 마련하려는 방편이다. 싸르트르 체계에서 타인의 역할은 일시적으로 사물에 의해서도 충족될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면상 고립된 두사람에게 부재하거나 잠재적인 제3자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물들인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신혼여행 중인 부부는 모텔에 단둘이 있지만, 다른 모든 미국 중산층사회와 함께 있는 셈이다. 289

 

이와같이 3자관계가 우선한다는 생각은 갖가지 풍부한 시사점과 가능성을 지니는 것 같다. 우선 이 개념은 인간의 삶이 그 구조 자체에서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 집합적이라는 사상에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또 이것은 3자 관계의 기초 위에 구축된 완전히 새로운 심리학 체계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양자관계의 개념이 정적 순환적임에 비해 3자관계 개념은 동적이다. 이것은 개인 간의 경험이 집단경험에 선행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비판과 존재와무의 책으로 시도한 분석과 같은 개인주의적 차원을 즉시 넘어 고독한 개인이 집단행동과 집단단위를 창출해 그의 존재론적 사회경제적 약점을 극복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실어준다. 291

 

산업문명에 특유한 대부분의 행동을 수행할 때, 나는 혼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며, 이것은 외적이기보다 내적 동일성인데, 나는 자신을 타인 내지 타자로 만들며, 나의 행동양식을 타인의 행동양식이라 생각되는 것에 의도적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존재양식이 지니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는 내가 나자신과 나의 행동을 외부 타인의 존재에 맞추고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타자란 없으며 무한퇴영과 사방으로의 무한도주만 있을 따름이다. 각자는 스스로에게 타자인 그만큼 타자들과 동일하다.”고 싸르트르는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수열성은 거대한 착각이며, 개인의 고독으로부터 여론이나 그냥 그들이라 간주되는 가상의 존재로 투사된 일종의 집단환각이다. 그러나 여론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개인을 수열체 속에 통합하는 것은 여론에 대한 믿음과 그 효과일 뿐이다. 295

 

싸르트르는 우리에게 관료조직이 다시 게릴라집단으로 변신할 수 없으며, 경화된 집단은 쇄신될 수 없고, 다만 새로운 집단형성의 충격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320

 

개인적 인간관계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집단행동의 실패에 대한 싸르트르의 기술도 경험적 측면이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사랑하고자 하는 기투는 존재론적 실패라고 말할 때, 이것은 사랑이라는 실제 체험이 실제로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사랑 그 자체란 스스로 정한 존재론적 기능, 즉 어떤 궁극적 충만함을 가져오거나 다른 말로 해서 시간 자체의 궁극적 종말을 달성하는 기능을 실현하는 데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집단 차원에서 존재론적 실패설은 시간 경과, 집단과 상황의 계속적 변화, 세대 계승 등을 강조한다. 이 설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기능을 지니는바, 곧 존재의 윤리라는 환상을 불식하고 우리를 시간 속의 삶과 화해시키려고 노력한다...우리는 대부분 본능적으로 유토피아를 역사가 정지하는 지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판이란 책의 실존적 요소는 이를 엄격히 불식하려 한다. 323

 

중산계급의 존재환상이 취하는 형태란 바로 후회와 가책, 또는 아마 후회보다 훨씬 더, 후회와 가책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두갈래 길로 나아간다. 가책은 과거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반면, 가책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앞으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어떤 결정적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런 두려움의 복합심리는 사용가능성 개념에서 적극적 형태로 나타난다.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을 자유롭게 열어두려 애쓰는 나머지, 나는 미래의 필요에 대비해 현재의 낭비를 두려워하며 수전노처럼 현재를 저장한다. 자아에 대한 이런 완강한 집착과, 이른바 개성으로 알려진, 중산계급적인 내면의 사생활권과 행동여지를 포기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싸르트르의 작품에 낯익다. 326

 

자아의 죽음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를 특별히 변호하기를 포기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새로운 심리적 익명성과 비개인성을 획득함으로써 처음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며 최초로 자신의 입장을 모든 타인으로 구성되며, 어떤 타인과 마찬가지 가치를 지니되 누구보다 낫지 않은 한 전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330

 

세대 간에 이어지는 중산계급 유산의 본질적 부분은 그들이 행한 과거의 폭력, 즉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행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며,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앞의 한 절에서 혈통적 죄라고 불렀다. 이것은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 개념이다. 1848년 세대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는데, 노동자들은 그 기억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하며, 새로운 세대의 공장주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사전에 작정한, 퉁명스럽고 불신적이며 분노에 가득 찬 노동자계급을 대면해야 한다. 이처럼 한번 저지른 행위는 세계 자체의 구조에 편입되어 한편으로는 억압적 입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의혹으로 그 자취를 남기며, 그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객관적 상황으로 제2, 3의 세대에게 돌아온다. 334

 

내가 근본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결코 그런 결정에 대한 나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결정을 회피하는 것은 일부가 해결되거나 일부가 문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동의를 뜻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단일한 상황과 문제에 반응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계급투쟁의 연속성 때문이다. 337

 

소외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자신에게 행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340

 

순수 인간적인 작인보다 경제적인 작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왜곡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개인적 행위자나 개별 계급으로부터 자유와 유효성을 박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행위가 역사에서 취하는 기본적인 구체적 형식, 즉 계급간의 투쟁을 추상화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 속에서 인간행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간과하는 것도 바로 이것, 즉 인간행위가 작용하는 대상인 타인과 타 계층이다. 342

 

싸르트르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물화된 관계의 복합체를 인간행위와 인간관계라는 최초의기본적 현실의 측면에서 다시 진술하려고 결심했다. 이는 맑스주의 모형이 역이다. 346

 

안에서 바라본 나와 바깥으로부터 나의 객관적 존재에 대해 내려진 판단 사이의 거리는 타인을 통한 소외’, 즉 타자와의 기본 투쟁의 모든 형태를 특징짓는데, 우리는 그러한 투쟁에 항상 연루되어 있으며, 나는 항상 그것에 책임이 있고, 내가 그냥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것에 죄가 있다....본 적도 없는 낯선 먼 이방인의 시선은 나의 삶이 영위되는 맥락인 수많은 계급적 집단적 투쟁 중의 하나를 형성하는 만큼, 그 판단으로 나를 엄밀히 에워싼다. 이제 서두에 언급한 바 있는 노동자의 원격 작용평가할 수 있는 좀더 나은 위치에 도달했다. 어떤 구체적 역사적 접촉도 발생하기 전에 단순히 그들이 실존한다는 사실만으로 노동자들이 행사하는, 거의 중력같은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바로 시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53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그러나 먼저 악몽의 넓이와 세기를 헤아려보지 않고서는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다. 354

 

 

볕뉘. 싸르트르의 책 변증법적 이성의 비판은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부분은 500페이지가 넘어서 드러낸다고 하다. "구체의 차원과 역사 자체의 장"을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대부분 앞에서 지쳐 떨어져나간다고 한다. 끝까지 들여다보면  싸르트르이 진면목을 느낄 수 있고,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실존주의를 그저 따로 떨어진 것으로만 느꼈지 맑스주의를 품에 안거나 안긴 모습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고 일러준 이도 없다.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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