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해석학의 몇가지 형태

 

(1) 발터 벤야민, 혹은 향수

 

근대 삶의 모든 국면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소외와 비인간화 등에 대해 많은 근대의 철학자들이 한마디씩 했지만, 이런 사상가들과 달리 벤야민은 자신의 삶 또한 구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글의 독특한 매력이 나오니, 그것은 변증법적 예지나 표현된 시적 감수성에서뿐만 아니라 아마도 무엇보다도 그 정신의 자서전적 부분이 객관 형태로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관념의 형상에서 상징적 만족을 얻는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7 “기억은 세대에서 세대로 사건들을 계승해 넘겨주는 전통의 고리를 주조해낸다“ ”유물론이란 자신의 주관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의 주관성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능이란 외부환경의 충격에 대해 유기체를 방어하는 것이라 본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적 외상, 신경증적 반복, 꿈 등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충격이 의식을 뚫고 나와 결국 진정되는 방식이다. 이런 발상은 벤야민의 손에서 역사기술의 도구가 되며, 현대사회에서는 (이는 아마 유기체에 가해지는 온갖 충격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일텐데) 이런 방어기제들이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법이 된다. 즉 방어기제의 갖가지 기계적 대체물들이 의식과 그 대상 사이에 끼어드는데, 이것은 우리를 보호해주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동화되거나 우리의 감각을 진정한 개인적 경험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앗아간다. 88-89

 

상징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상징의 의미를 전혀 못보는 것 사이의 불모의 대립을 넘어선 데 벤야민이 독창성이 있다......우리는 상징적인 대상들을 두 제곱으로 읽어내야, 다시 말해서 이 대상들에서 직접 일대일의 의미를 풀어내기보다는 상징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징후로서 가리키고 있는 그것을 감지해내야 하는 것이다. 93

 

벤야민의 감수성은 인간이 사물의 힘에 굴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순간들 쪽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끄 비극의 낯익은 내용은 서서히 형식의 문제로, 대상의 문제로, 말하자면 우의 자체의 문제로 바뀌어 간다. 우의란 어떤 이유에서건 사물이 의미, 정신, 진정한 인간실존과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그런 세계의 지배적 표현양식이기 때문이다. 97

 

언어보다는 사본, 말의 속뜻보다는 문자, 이것들은 바로끄 세계가 분쇄되어 생긴 파편들이고, 지나친 호기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괴롭히는 야릇하게 읽히는 기호와 징표들이며, 불가사의한 의미를 담고 천천히 무대 위로 지나가는 행렬이다. 이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나는 우의가 우리의 시대에 다시 복원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순전히 역사적 관심거리인 고딕풍 괴물로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정신의 중세적 건강을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라,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 병리학적 현상으로 말이다. 99

 

상징은 찰나적인 것, 서정적인 것, 즉 시간적으로 말하면 단 한순간이다...이와 반대로 우의는 현대인이 시간을 살아가는 가장 주도적인 양식으로서, 순간순간 서툴게나마 의미를 해독해내는 것이며, 이질적이며 불연속적인 순간들에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힘겨운 시도다. “상징은 스러지는 가운데 구원의 빛을 띤 자연의 얼굴을 보이는 반면, 우의의 경우 보는 사람의 눈앞에 얼어붙은 풍경처럼 펼쳐지는 것은 역사의 사상 死相이다. 그 얼굴, 아니 그 해골 속에서는 시의에 맞지 않고 고통스럽고 무위로 돌아간 온갖 것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역사를 세계가 수난을 겪는 이야기로 보는 바로끄적이며 현세적인 설명이야말로 바로 우의적 지각의 정수다. 역사는 고통과 쇠락의 정거장에서만 의미를 띤다. 의미의 양은 죽음의 존재와 쇠락의 힘에 정확히 정비례한다. 죽음이란 자연과 의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세기에 우의는 외부세계를 버리고 떠나는데, 내면세계를 식민화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100

 

안락은 고립을 낳는다. 동시에 안락은 그것을 누리려는 자를 물리적 메커니즘의 힘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19세기 중엽에 성냥이 발명된 이후로 갖가지 새 물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복잡한 일련의 조작을 한번의 손동작으로 대치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발전은 서로 다른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벤야민은 노동자와 노동자와 공장 기계의 작동에 심리적으로 종속됨을 기술함으로써 이 목록을 완결한다....이 평론은 상대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심리상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새로운 언어상황과 저널리즘의 타락에, 또한 대도시 주민으로서 도시의 일상생활의 나날이 심해지는 충격과 지각마비 등에 맞딱드린 시인에서 출발한다....기계와 일련의 발명품이 바로 이 이미지다. 독자들도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앞의 인용이 겉보기에는 역사적 분석 같지만 실제로는 우의적 성찰의 연습, 즉 벤야민의 제재인 그 독특하고 불안한 현대적 심리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찾아내는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아우라나 카리스마는 사라지는 순간 감지하기가 더 용이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소멸의 원인은 전반적인 기술적 발명, 곧 지각의 대체물이자 그 기계적 확대인 기계에 의해 인간의 지각이 대치되는 현상이다. 103

 

연극배우들이 복제 가능한 예술작품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맞부딪친 것처럼, 이야기 tale도 현대의 의사소통체계, 특히 신문에 맞부딪치게 된다. 신문은 신기함의 충격을 흡수하고, 유기체를 충격에 둔감하게 만들어 충격의 강도를 둔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신기한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이야기는 반대로 충격의 힘을 보존하도록 되어 있다. 기계적 형태의 의사소통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새로운 자료들을 소진하는 반면, 구전을 통한 더 오래된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는 근본적 특징을 지닌다. 이야기의 복제가능성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의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사실,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또 기억할 만한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이 줄거리를 듣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동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105

 

옛날의 이야기는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단발의 선택과 기회가 주어지며, 모든 것을 한번의 주사위에 걸어야 하고, 따라서 자연히 개인의 삶이 운명 내지 숙명의 모습, 즉 이야기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의 모습을 띠게 된 사회적 삶을 표현했다. 반면 현대세계(서구와 미국의 세계)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나 기회란 전무할 정도의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철학도, 싸르트르가 그 이론가인 모더니즘의 의식의 문학도 다 여기서 나온 것이며, 플롯의 쇠퇴 또한 여기서 비롯한 것인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사라질 때(벤야민의 의미에서 죽음이 부재할 때) 이야깃거리 역시 사라지고, 다만 아무렇게나 순서를 뒤집을 수 있는 동등한 무게를 지닌 일련의 경험들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107

 

이야기란 과거와 관계를 맺고 과거를 추억하는 심리적 양식만이 아니다. 벤야민에게 이야기란 또한 사라진 사회적·역사적 삶의 형식과 접촉하는 양식이다. 바로 이처럼 이야기행위와 역사적으로 특정한 생산양식의 구체적 형식을 서로 연관짓는 점에서 벤야민은 가장 계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의 모델이 될 수 있다.....이야기는 장인문화의 산물이며, 도자기나 구두장이가 만든 구두처럼 수제품이다. 그리고 이런 수제품과 마찬가지로 도공의 손자취가 유약을 바른 표면에 남는 것처럼 이야기에는 이야기꾼의 손길이 남아 있다.” 108

 

 

볕뉘. 발터 벤야민의 독해는 다양한 것 같다. 읽어내는 사람마다 그 방향이 조금씩 어긋나 애초의 의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 이야기는 다시 그곳을 응시해야지만 연결된 것이 다시 살아오른다라는 눈치이겠다.  저자의 시각을 쫓아가다보면 이렇게 근거가 확실하면서 뿌리깊다. 출발점을 분명하고 남을 수 있도록, 읽고나면 저자인지 벤야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못을 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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