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서두에 놓인 '벽제 가는 길' 연작은 궁핍했던 유년기에 시인을 업고 키우며 방직공장에 다닌 누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대한 노래다. 그 길에서 시인은 무논으로 흘러드는 논물, 강바닥의 돌멩이, 뭉툭한 바위, 막사발 같은 달을 만난다. 그리고 그 속에 단단한 생의 의지와 결기가 살아숨쉬고 있음을 넌지시 들려준다.

등단 후 8년이라는 시간 동안 튼실하게 벼려온 시인의 연장은 '건강하고 부드럽다'. 돌에서 꽃으로, 그리고 길과 집으로 이어지는 기억과 응시, 상상은 서로 견고하게 얽혀 있다. 화려한 파격이나 손쉬운 초월에 기대지 않고, 경험적 충실성과 서정적 회감(回感)의 원리로 단단하고 생기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시적 행보에 신뢰를 가지게 하는 이승희 시인의 첫 시집이다(책소개에서)


 

나무젓가락

 

내가 바라본 것은 푸른 하늘과 구름, 내가 들었던 것은

반달 같은 시내를 따라 흐르고 흘렀던 결 곱던 노래들.

미루나무 온몸으로 흔들리던 그 낮은 시냇가의 낮잠

 

딱 한 끼 밥을 위해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나무타는 법

 

우선은 소곤거리듯 아주 부드러운 말로 만져주어야지,

잎들이 녹색의 알갱이를 가득 물고, 아침 햇살에 입을 다

헹구듯이 서둘지 말고 따스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다 보

면 아주 조금씩 길이 열릴 거야, 그러면 그 알갱이들 사

이로 네 마음을 밀어 넣어두는 거야. 아주 느리게 잎사귀

를 둥글게 말아 쥐고 잠드는 벌레들처럼 말이야. 그러고

는 수액의 물결을 타고 때로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어 나

무 꼭대기에도 올랐다가 느리게 느리게 온 가지들 끝으

로 오므리거나 풀어져내리기도 하면서 그 나무 속, 하늘

로 흐르는 강을 흘러흘러 둥둥 떠밀리거나 떠밀어 갈 수

있지.

 

햇살에 잠겨 있는 어린 나무의 잎사귀를 본 적이 있지?

그 말았다가 펴는 손바닥의 따뜻한 피, 손가락 끝까지 흐

르는 생명줄. 그런 어리고 순한 나무들을 낳는 거야, 솜

털 가득한 그 눈들을 보며 그것들이 작은 숨을 쉴 때 그

숨을 나누어 마실 수 있지. 그러면 참 사는 거 같을거야.

 

봄에 놀다

겨울로부터 쫓겨나 것들아, 아기 잇속 같은 잎들아, 망

울진 꽃들아, 그리고 너 키 작은 토끼풀, 민들레야 모두

나와 술 한잔 하자. 나를 버린 겨울일랑 용서하자, 떠밀

려 살아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오늘뿐이겠느냐. 집

나온 자식들 모여 질탕하게 놀아보자

 

놀다가 지쳐 쓰러져 죽을 때, 그때가지만 딱 놀아보자

 

돌멩이를 쥐고

둥근 돌이 싫습니다. 그 둥글다는 게, 그 순딩이 같은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싫었습니다. 깨트려버리고서야 알

았습니다. 둥근 돌 속에 감추어진 그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을 세우고 있던 것을, 무덤 같기만 하던 그 속에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은 시뻘건 불을 피워 올리고도 남을 분노라

는 것을.

 

둥근 것들은 다 그렇게 제 속으로만 날카로운 각을 세

우나 봅니다.


 풋여름

 

어린 나무를 타 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나무 몸을 부둥켜안고 기어올라

풋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린 나무를 휘갑치는 담쟁이넝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풋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나무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 냄새를 풍기는

순 풋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 풋 풋한 나날.  진달래꽃 한 묶음 바쳐 묵념할 날, 마음은 수유리 얕은 길을 가고 있다. 지난 토요일 지인의 득녀소식에 동네서점을 기웃거리다. <맨발>과 <초록거미의 사랑>,강은교를 고르다.  이승희시집이 제일 많이 속이 접혔고, 그다음은 문태준,<맨발>  정끝별<삼천갑자복사꽃>이 강은교 시집은 불과 두편만이 접힌다.  새벽 짙은 비로 세상은 벌써 바뀌었지만, 세상은 늘 퇴행으로 몸을 가두어두는 것 같아 아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60417

(참*)회의 뒤, 사무국에서 바람잡는다. 내일 서울 발표도 있고 주저스럽긴 하지만, 풀리지 않은 매듭들이 통째로 이야기 사이로 나온다. 그렇게 막걸리 한 사발에 풀어도 보고, 삭혀도 보고...따로 둘 곳도 찾아보다. 넘 이슥해진다.  발표가 쉽지 않을 듯.  잠잘 시간이 많지 않다. 6시반에 일터에서 모여 출발키로 하였건만, 알람은 죄다 꺼버린 안해, 동료의 손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간다.

설 깬 채, 차 안에서 자료를 보고 발표가닥을 잡아본다. 잡히지 않던 가닥이 그 나마 순순히 잡히니, 아마 어제 술기운때문인 듯하다. 어쩌다보니 음주발표가 된 셈인데(농도 낮은...) 다행히 좋은 반응들이어서 돌아오는 길 맘이 편하다.

돌아온 저녁 일터, 한 매듭을 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060415

 유성 생*고,  오랜만에 축구장을 찾다. 교*청 분들과 시합, 경기는 시종 우세하였으나, 몇달 축구를 하지 않은 몸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중에서야 몸이 조금은 풀리는 듯한데, 날이 너무 맑고 고와 바람에 우수수 꽃살을 나부끼는 한 아름드리 벚꽃나무에게 넋을 놓아버린다. 무장해제 당한 기분을 아시는가~

 060416

아침 대전마라톤 대회를 참석하다.  바람은 불지만 약간 선선한 날씨는 안성마춤인 듯, 현장접수를 하고 10k만 달리자는 마음은 곧 변한다. 말미에서 천천히 달린다. 혹 느릿느릿 가도 전 처럼 걷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내심 불안하고, 축구경기한 다리 근육도 뭉쳐있는 듯하여 편치 않다.  더불어 달린다.

대전천을 빠져나가 유등천을 접어들며, 몇번의 봄비로 흐르는 냇물은 빠져버릴 듯 맑다. 군데군데 박혀있는 버드나무도 애기살이 붙어 다소곳하고 실바람에 부드럽고,  듬성듬성 박혀있는 겨울꽃도 운치를 더하기엔 손색이 없다.

그렇게 넋놓고 달리다 말미 힘이 남는 듯, 국수와 막걸리 한점으로 주말을 마무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꽃 진 자리에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양지바른 곳에 벌써 꽃보다 꽃 진 자리가 늘었다. 그립지만, 이제 생각거리 무게를 조금은 빈 자리로 옮겨야 할 시간인 듯...  음지에서 반기면 될 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산 2006-04-1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대전서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는데, 혹시 여울마당은 뛰지 않으셨는지 궁금했답니다.
기록 페이퍼가 없는 걸 보니 아마 안 뛰셨나봐요.

여울 2006-04-1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버드내 버드나무, 유등천- 유채꽃에 흠뻑 취해 돌아왔습니다. 아름답더군요. ㅎㅎ
 

 "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함께 흥분하여 소리 높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우스갯소리로 울적한 마음을 한번 비틀어 밖으로 날려 보내는 것......  마음속에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근심 걱정도 한 번 담갔다 하면 사뿐하게 걸러져 밝은 웃음으로 올라오게 하는 우물 말입니다...... 그 물방울이 우리에게도 튕겨져 시원하고 명랑한 기분에 온몸이 젖어 유쾌해지는 것일까...."

 

1. 책을 이리도 잘 만들 수 있을까?  15년쯤 된 것 같은데, 저자 부친 안재구교수의 강연회인지, 좌담회인지 끝이 나고 잔디밭에 앉아  여러분들이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엉뚱한 질문을 했던 것 같기도 하구.  생각보다 편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설마  아드님이 쓴 책일 줄이야? 무척이나 놀라웠다. 그리고 내내 이어지는 편안함과 부드러움, 잔잔함이 이어지는 듯했다.

2. 옛날과 오늘, 어른과 아이,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소통한다는 문고의 로고와 잘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3. 읽는 내내 긴장하고 조바심내고, 책장을 닫기 아쉬울 정도의 미련이 남는다. 더구나 그 문집들이 대부분 번역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니 말이다. 배부른 하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