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홍신사상신서 17
아돌프 히틀러 지음 / 홍신문화사 / 1991년 9월
절판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태적 교설은 자연의 귀족주의적 원리를 거부하고, 힘과 권력이라는 영원한 우선권 대신에 대중의 수와 그들의 공허한 중량을 주장한다. 마르크시즘은 그처럼 인간에게 있는 가치를 부정하고 민족과 인종의 의의에 이론異論을 주장하며, 그와 함께 인간성에 있어서 그 존립과 문명화의 가능성을 절단하려고 한다..... 나는 오늘날 내가 유태인과 투쟁하는 것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뜻이라고 믿으며, 동시에 나의 주主의 일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확신한다.-40-41쪽

연설의 의의
펜에는 언제나 혁명을 이론적으로 기초한 것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적 정치적인 방법으로써 위대한 역사적인 사태를 야기시켰던 힘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미래에도 직접 입에서 나온 말의 마력뿐이었다. 대다수의 민중은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나 연설의 힘만이 그 토대가 되어 왔다. 위대한 목표를 가진 운동은 민중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어느 문제라도 우선 이런 관점에서 음미하고,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54-55쪽

현명한 독일 외교가 1904년 (러일전쟁)일본역할을 인수했다면 어는 정도로 독일을 위한 것이 되었을지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짐작하건데 결코 '세계대전'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4년의 유혈은 제1차 세계대전 유혈의 약 10분의 1에 불과했던 것이다.-68쪽

당시 사병이었던 나는 정치를 논의하려 하지 않았고, 또 시기적으로도 부적당했다.(중략) 나는 전쟁의 기쁨을 고양시키기 위한 어떤 수단도 강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격했다.-78쪽

나는 그 당시 정부가 마르크시즘의 구체화로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태도를 달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몰두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 교설에 대한 효율적인 대용물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중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대중을 우둔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정치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지성보다는 감성 쪽이 보다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 매우 조심해야만 한다.-80쪽

선전의 목적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무기도, 그것이 보다 신속한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인도적이었다. 그리고 국민이 자유의 존엄성을 확보하도록 돕는 방법만이 미였다. 선전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지식층에 대해서인ㄱ, 아니면 지식 수준이 낮은 대중에 대해서인가? 선전은 영원히 오직 대중에게만 필요한 것이다.(선전이란 그 내용상으로 보아 학문이 아니다)-83쪽

모든 선전 공작의 독창성은 언제나 동시에 기초적인 원칙이 날카롭게 고려되지 않으면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선전은 짤게 제한하고, 이것을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 이 견인불굴성이, 여기서도 성공에 이르는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선전은 우매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흥미있는 변화를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고 대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의 우매함 때문에 하나의 일에 관해서 지식을 갖고 싶어하기까지 언제나 일정한 시간을 요한다. 가장 간단한 개념을 몇천 번이라도 되풀이 하는 것만이 결국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86쪽

내가 평화롭고 무위한 시대에 태어나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이럴 즈음 발발한 남아전쟁은, 나에게는 번갯불 같은 힘을 주었다. 나는 매일매일 신문을 기다기고..멀리서나마 이 영웅적인 투쟁의 목격자로서 희열을 느꼈다.-74쪽

나는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에 내 애국적인 열정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행동으로 확인해보 싶은 희망을 여러 번 가졌었다...이 기분의 진실정을 표명하기 위해서 이제 영원한 심판자이신 신의 법정에 증인으로서 설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은, 나에게는 늦은 일이긴 했지만,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 책을 버리고 출전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76쪽

나는 한번 결심한 것을 나중에 번복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나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이번 일을 영원한 문제로서 결심을 해야만 했다. 그 무렵,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 시작해서, 또 무엇 하나 실행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다.-110쪽

민중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기의 목표에 대해서 적극적인 투쟁을 지도해 가는 것과, 이 목표의 적대자를 절멸시키는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다. 반대파를 맹렬히 공격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자기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증거가 된다. 대중은 본능적이며, 그들의 감정은 원수간이기를 바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 악수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력한 자으 승리와, 약한자의 절망, 또는 무조건적인 예속을 바란다.-163쪽

맺는 말
이 운동이 오늘날 우리 의회주의적 부패의 세계 속에서 더욱더 그 투쟁의 가장 깊은 본질을 자각하고, 자신을 인종과 인물의 가치에 있어 순정한 권화로 감지함으로써 그것에 의해서 질서를 부여받게 된다면, 운동은 거의 수학적 규칙성에 입각하여 언젠가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게 될 것이다.(중략) 인종 타락의 시대에 각국의 최선의 인종적 요소 보호에 몰두한 국가는, 언젠가 지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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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디 워> 광팬들, 집단행패 그만해라(진중권)

[아침햇발] 이무기에 짓밟힐 위태로운 운명 / 신기섭 


» 신기섭 논설위원


괴물이 판을 치고 있다. 필름 속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을 휘젓고 다닌 이무기가 현실로 뛰쳐나온 통에 인터넷은 불에 탄 검은 땅 꼴이 됐다. 기존의 모든 것은 녹아내려 사라질 판이다. 이른바 ‘기자·평론가와 네티즌의 전쟁’을 진단하는 이들은 애국주의, 유사 파시즘, 반지성주의 따위의 수식을 붙여가며 사태를 걱정한다. 하지만 많은 대중은 이런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잃을 것은 ‘영화가 지킬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할리우드와 겨룰 컴퓨터 그래픽’이 가져다 주는 자부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디 워>를 보기 전엔 왜 이렇게 요란한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사태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할리우드 영화로 착각할 만한 화면 속에서 서양 배우가 ‘이무기’, ‘여의주’를 입에 담고 한국의 오래된 전설을 이야기한다. 이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하다.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의 산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쥐라기공원> 영화 한편이 현대차 몇백만대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을 떠올리면서 이 정체 모를 뿌듯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자부심에다 경제적 잠재성까지 느낄 수 있는데, 서사구조가 부실하면 어떤가.(사실 서사구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들은 도망 다니기 바빠서 연기를 선보일 짬도 별로 없다.)

수백만 관객이 극장을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빠’라는 딱지도 개의치 않는 일부 누리꾼의 주장이 마냥 억지는 아니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이라는 달콤한 상상의 대가만으로도 몇천원은 아깝지 않다. 영화가 올림픽 경긴 줄 아느냐는 비판은 ‘우리도 해냈다’는 자부심을 깨기엔 너무 허약하다. 영화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은 경제적 잠재성 앞에서 ‘먹물들의 잘난 척’이 되고 만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은 뿌리가 같다. 한국인이 느끼는 자부심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성과 덕분이다. 그리고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경제적 잠재성은 최고의 희망이 된다. 게다가 이 가치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네티즌’이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은 ‘먹물들’이 퍼뜨린 가치를 따를 뿐이다. 어차피 이 가치를 자신있게 거부할 자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가치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무기에 박수 친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이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바닥이라는 사실이다. 멋진 컴퓨터 그래픽이 꿈꾸게 하는 경제적 가치는 쪼들리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대리만족의 아편이다. 시장과 경제가 종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종교가 됐다는 미국 신학자 하비 콕스의 말은 비유가 아니다. 눈앞의 진짜 현실이다.

이 새로운 종교 앞에서 예술은 허깨비가 되고, 아름다움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시키는 이무기의 승천 장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종교 앞에서 가장 무력한 것은 ‘비판적 지성’이다. 이 종교가 가짜라는 것, 이무기는 눈앞의 현실을 가리는 값싼 진통제일 뿐이라는 진실을 말할 목소리 말이다. 게다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도 대부분 돈이라는 괴물에 항복한 지 오래다.

비판적 지식인이 사라졌다고 비판적 지성도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돈이라는 종교는 가짜”라고 외치는 순간 비판적 지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돈이라는 괴물이 뿜어내는 불길로 온 땅이 재가 되기 전에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이 괴물은 ‘먹물들’만 골라서 희생물로 삼지는 않는다. 이무기에 박수 친 ‘당신’도 피해갈 길은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한겨레신문 070817


 안타까운 뱀발

0. 중독 - 알코올중독, 게임중독, 경마-도박중독, 주식중독, 로또중독 주변에서 당신은 중독이라고 해도, 정작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도 '절대로', 자각증세는 몇번의 신호를 보낼 것이다. 나만의 짜릿함을 가져오는 그것이 '스트레스'해소란 스포츠와 미사여구로 입혀진다.

1. '음란'과 '폭력' 역시 떨어져 있으면 보인다. 하지만 천박한 '자본', 아니 '자본'과 얼마나 근친한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스트레스'해소로 바뀐다. 어린이에게 '음란'과 '폭력'의 무서움을 절감하지만, 어른이 본인은 다른 일들이 된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노출되어 힘들다고. 그런 삶의 공극을 채워질 것은 '격투기'와 더 가학적인 '음란물'이라고 강변을 한다.

2. 어쩌면 이 시대에 깊히 함침해 있는 이상, 이 땅덩어리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정상은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 단순한 신화의 구도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금은

3. 사회적 정신적 전염병에 감염되고 있는지 모른다. 도박을 도박이라 부르지 못하고, 중독을 중독이라 진단하지 못하는, 그 중독증을 어떻게 자각하지 못하는... ...

4. '중독된' 또 다른 종과 주변을 배회하는 종, 중독되지 못해 안달하는 종. 당신의 로망과 신화는 안전한가? 최음제는 현실의 건강과 상관없다. 아편과 약물은 정신건강의 영역을 넓혀주는 신의 선물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즐기면 즐길 수록 우리의 심미적 감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지속성을 상실한 '변*'에 가까워진다.

5. 당대의 가치, 특히 급조된 우리의 가치에 대해, 뿌리부터 의심해보는 ...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의심해보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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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독
    from 木筆 2007-11-19 09:04 
    기획의 말 중독 권하는 사회 - 중독의 이율배반 / 김현철 테마 테마 1. 대통령들의 취임사, 국가를 앵벌이하다 - 국가중독 / 고지훈 테마 2. 소원함의 폐기와 친밀성의 중대 - 접속중독 / 송종현 테마 3. 문화 현상으로서의 일과 소비 - 일중독 / 강수돌 테마 4. 종교와 근대적 자아의 대립 - 종교중독 / 장석만 테마 5. 사상, 연애 그리고 유행:한국 근대의 중독들 / 이영아 테마 6. 멜랑콜리, 그 우울한 에너지:서양 미
 
 
 

 

      더위가 어쭙잖다. 나름대로 피서를 요기해 놓는다. 책도 마저 읽을 겸,

      조금 늦은 퇴근 뒤 도서관행이다.

       인근 도서관이 종합열람실은 저녁 8시, 도서실은 10시 이후로

      늘렸다는 소식을 보아서 빈 시간을 채운다. 문제는 저녁, 든든하게 먹으면 졸릴

      것이고, 도서관에서 때우려니 그렇다. 다른데서 먹고 가기에도 그렇구해서

      도착하니, 그냥 이곳에서 국수로 간단히 요기해야겠다는 마음이 잡힌다.

 

       그런데, 국수가 곱빼기다. 생각해주신다는 것이 그만...남겨도 용량을 초과한 듯

        책를 손대자 마자 꾸벅증이다. 그래도 십여분 졸음으로 그나마 씻기는 것이 다행~

         <완당평전 1>을 마치니, 열시가 조금 넘는다. 완당의 깐죽거림이 눈앞에 쟁쟁하다.

 

그래도 여전히 더위는 식을 줄 모른다. 

몸에 땀을 내주면 괜찮을까? 무리는 하지말고 동네 한바퀴, 약한 강도로 몸을 풀어주고

등줄기 시원한 샤워~. 그나마 폭염은 한풀 꺾인다. 잠도 어제보단 편하게 잔다.    070816  5k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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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0개 상황에서 "예"라는 대답이 4개 이하이면 당신은 책이나 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당신이 이 블로그에 오게 된 것은 우연 또는 사고였을 것이다. 5-12개 나오면 당신은 정상이다. 안심하고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살아 가면 된다. 13개 이상 나오면 당신은 활자중독증이다. 그런 분들은 필히 이 게시판에 족적을 남겨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16개 이상 나오면 당신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증이다.




1. 화장실에 갈 때는 아무리 급해도 신문이나 잡지나 책을 꼭 챙긴다. 나올 때는 다리에 감각이 없다. 
YES

2. 피치 못해 화장실에 읽을거리를 챙겨가지 못했을때는, 볼일을 보면서 주변에 보이는 활자들을 꼼꼼이 읽는다. [공중화장실일 경우] 벽의 낙서(예:저는 밤마다 *려요. 01x-xxx-xxxx로 전화해 주세요) , 광고스티커(예:무모증으로 고민하십니까?) [집 화장실일 경우] 염색약 사용설명서, 샴푸 뒷면(예:xx삼푸는 발삼향을 추출하여 윤기있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유지해 드립니다. xx샴푸는 xx린스와 함께 쓰시면 더욱 효과가 좋습니다.) 
YES


3. 시골에 내려갔을때 마땅히 읽을 게 없어 "축산신문"이나 농약 사용설명서를 20분 이상 읽어본 적이 있다.
YES


4. 신문을 광고(와 신문 사이에 끼여있는 광고지)와 주식시세를 포함해서 1면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적이 있다.
NO


5. 대형서점에 한번 가면 평균 3시간 이상 서 있는다.
NO


6. 책냄새를 좋아하고 5가지 이상의 책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NO


7.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때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나 책을 읽는다. 지하철을 탔을 때를 위해 따로 준비해 두는 읽을거리가 있다.
YES

8. 집을 떠나게 되면(예:피서갈 때, MT갈 때) 꼭 책이나 잡지 한권 이상을 가방에 챙긴다.
YES

9. 책값이 비싸서 망설여본 적이 없다. 책값은 아무리 비싸도 아깝지 않다.
NO


10. 나는 서핑 중독증세도 있다.
NO

11. 하지만 채팅보다는 주로 눈팅을 선호한다.

YES

12. 책을 도저히 놓을 수 없어 약속시간에 늦을 때가 종종 있다.
 NO.


13.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YES

14. 학교 도서관 사서선생님과 알고 지냈다. 단 학교도서관이 없었던, 또는 사서선생님이 없었던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공공도서관 사서나 서점 주인도 됨.
 YES

15. 맞춤법에 민감하다. 예를 들어 "찌개"를 "찌게"라고 쓴 식당에 들어가면 불편해진다.
 YES


16. 혼자 식사할 때는, 책이나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결국 찌개는 식고 밥은 딱딱해진다.
 YES

17. 밤에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이불을 둘러쓰고 몰래 책을 본 적이 있다.
 NO

18. 고3때는 집에서 나 때문에 신문을 끊었다. (논술세대는 제외)
 NO

19. 시험 전날 딴 책을 보느라 밤을 새거나, 책을 읽느라 숙제를 못해간 적이 있다.
NO

20. 플랫폼에 걸린 지하철 노선도는 아무리 오래 봐도 재미있다.
YES

11개, 휴우~ .  다행~ .. 퍼오고 퍼온 것이라 출처모름.  한번 해보삼. 알라디너분들 만만치 않을 듯~.  중독증이라면 어쩌라구~... 자중하셔야지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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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활자중독증 자가진단-조선인 편
    from 조선인과 마로, 그리고 해람 2007-08-16 13:38 
    다음 20개 상황에서 "예"라는 대답이 4개 이하이면 당신은 책이나 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당신이 이 블로그에 오게 된 것은 우연 또는 사고였을 것이다. 5-12개 나오면 당신은 정상이다. 안심하고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살아 가면 된다. 13개 이상 나오면 당신은 활자중독증이다. 그런 분들은 필히 이 게시판에 족적을 남겨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16개 이상 나오면 당신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증이다. 1. 화장실에 갈 때
 
 
가을산 2007-08-16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13개네요. 전반부는 부진: 2,3,7,8 후반부는 거의다: 10,11,12,13,14,15,16,17,19. (20번은 책이 없을 때만 봄. ^^;;)

여울 2007-08-16 13:45   좋아요 0 | URL
ㅎㅎ.
6번 질문--책냄새가 5가지 이상이라... 제 후각에 문제있나요.
10부터 질문은 가중점을 두어야겠는데요. ㅎㅎ

조선인 2007-08-1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3,7,8,10,11,12,13,14,15,16,17,19
음, 살짝 중독증이긴 하군요. 쩝.
그런데 여울마당님이 12,17,19를 No라고 대답한 건 거짓말 같아요.
에, 또, 가을산님이 1번을 No라고 한 건 직업 탓일까요?

여울 2007-08-16 13:43   좋아요 0 | URL
ㅎㅎ. 답변드리죠. 범생이예요.ㅁ ㅎㅎ. 12,17,19. 이해 되시죠.그런데 일을 못하네요. 이러다 짤릴 것 같아요. 바꿔놓고 생각해도.. 알라딘 증거 충분함-일을 하지 않고 딴짓만 한다아... 일터책에 보고싶은 책 끼워놓고 본다.... 조선인님, 사알짝 중독이네여. 저두 살짝 안중독...

마노아 2007-08-1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상 범주네요. 화장실에 오래 있을 적 시절에는 꼭 들고 갔는데 지금은 금방 나올 수 있어서 안 들고 가요. 내가 아끼는 책 남이 화장실 들고 가면 막 화나요^^;;;

여울 2007-08-16 15:53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부럽군요. 부러워요. ㅎㅎ. 음. 사시는대로 사시면 되네여 ㅁ.ㅎㅎ.
 
[코멘트]<디 워> 광팬들, 집단행패 그만해라(진중권)


[한겨레] 060317  고전 다시읽기/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월드컵, 장갑차, 노무현, 황우석의 공통점은? 그렇다. 모두 대중과, 대중적인 운동 내지 대중적인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적극적인 지지나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하나의 흐름이, 대중이 되어 커다란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 사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대해 말하면, 어느새 87년 6월항쟁이나 7~8월의 ‘노동자대투쟁’ 혹은 광주항쟁 등을 떠올릴 것이다. 대중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만들어낸 사건들은 대개 이처럼 혁명이나 항쟁, 저항의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에 관심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을 혁명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지금은 잠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솟구쳐오를 혁명적 존재로. 이런 관념 속에 있는 한 2002년 월드컵의 대중이나 황우석 사건의 대중은 안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1930년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미친 듯이 몰려갔던 대중 또한 안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세계 인민들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밀어주고 블레어를 밀어주는 대중, 혹은 지금은 천황이나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

라이히가 이 책을 쓰던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실히 그랬다. 노동자를 포함해 인민대중들이 미친 듯이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며 지지했지만, 그것은 모두 원래는 선한 그들이 ‘나쁜 넘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거짓’을 폭로하면, 진실을 알려주면 대중이 혁명적인 본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쓸 당시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나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자신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억압할 게 분명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마치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대중은 왜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 혁명적이어야 마땅한 계급의 대중조차 어째서 혁명이 아니라 반동을 지지하거나 욕망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라이히로 하여금 바로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밀려가지 않는 위대한 저작들의 대열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라이히는 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대중은 본래 혁명적이지만 속아서 저런 거라는 식으로 당혹스런 사태에 눈감지 않으며, 그렇다고 하이데거나 고상한 철학자들처럼 대중이란 속물적인 욕망, 복종적인 태도로 사는 ‘世人(세인)’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대중이 갖는 그 노예적이고 속물적이며 때론 반동적이기도 한 태도를 냉정하게 직시하며, 그것이 야기하는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대중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욕망이나 태도를 전환시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해방을 위해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지,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자였음을 확신한다. 진정 혁명을 꿈꾸는 자에겐, 어떤 계급이나 대중이 혁명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의당 혁명적이어야 할 그들이 혁명적이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게, 그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면서 또한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길 욕망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라이히의 이 질문이야말로 혁명을 꿈꾸는 모든 정치학이 대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했던 것일 게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기도 했던 그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변형시킨, 생물학적 욕망과 오르가즘 능력이 강조된 정신분석학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성격구조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지배하려고 하지만 강한 자들 앞에선 굴종하려는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구조는 성적인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

아버지에 복종…성적억압의 산물


물질적 착취나 억압은 그에 대한 반역을 야기하지만, 성적 억압은 복종을 야기한다. 성적 억압은 “네가 원하는 건 네 엄마지?”라고 다그치며 욕망을 수치심으로 몰아넣는 한편, “계속 그러면 잘라버릴 거야!”라며 위협하며 욕망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은 오르가즘에 대한 공포를 낳고, 그것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러한 억압은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작동한다. 총통에 대한 선망, 총통에 대한 복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야기하는 이 성적 억압의 산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이것이 파시즘으로 몰려갔던 대중들의 심리, 요컨대 ‘파시즘의 대중심리’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혁파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욕구의 충족이나 쾌락, 기쁨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금욕적 체제를 넘어서서 노동과 즐거움이 서로 합치하고 노동과 욕구의 충족이 서로 나란히 공존하는 그런 체제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되게 하고, 일이 싫어도 참고 하는 의무가 아니라 좋아서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 이러한 체제를 그는 ‘노동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장인적 생산체제로 돌아가길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라이히는 노스탤지어를 먹고 사는 낭만적 몽상가가 아니다. 거꾸로 그는 기계적 합리화나 분업을 유지하면서 노동이 즐거운 활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를 위해선 노동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하며, 작업 자체를 일하는 노동자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며 관리하는 작업장 자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을 통해 노동자 자신이 작업은 물론 경영 전체를, 나아가 집단의 활동 자체를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기-책임(자율주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한 때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민주주의를 향해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던 이 혁명이 30년대 들어가면서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로 후퇴했음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주관리는 중앙에서의 결정이 집행되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장치와 국가적 통치자로 대체되고, 자발적인 노동은 성과급이나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직장을 고정하는 제도(그는 이를 ‘자물쇠’라고 부른다)에 의해 의무가 된다; 게으른 노동자와 성실한 노동자를 게시하는 제도를 통해 한편에선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심과 증오심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에선 승리감과 공명심, 야심과 자만심을 배양하는 권위적 성격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스타하노프 운동 식의 노동경쟁체제로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적대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등등. 대다수 대중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이런 요소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이후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예리하고 현실적이다.

공산당과 정신분석협회서 쫓겨나


이 탁월한 책이 제대로 된 독자를 발견했던 것은 혁명과 사랑, 혁명과 욕망을 연결하고자 했던 1968년에 이르러서였다. 니체 말처럼 그는 너무 빨리 왔던 것일까? 그러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늦게 왔던 것일까? 어쨌건 그의 책이 갖는 이 '반시대성‘으로 인해 그는 혁명을 하고자 했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성과 욕망, 무의식에 대해 연구했지만 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으며, 나중엔 정신과의사들의 집요한 로비로 미 식품의약청에 의해 체포·투옥되어 옥사했다. 그의 시간이 오기 이전인 1957년에. 그러나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그를 죽인 사람들은 이미 누구도 기억되지 못하지만, 이 책은 이후에도 오랜 시간 살아서 그의 시간을 지켜볼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파시즘의 대중심리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그린비 펴냄(2006)

(독일어 초고로 새로 번역된 책)


오르가즘의 기능

빌헬름 라이히 지음, 윤수종 옮김.

그린비 펴냄(2005)

(라이히의 성격분석기법이나 성 과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책)


빌헬름 라이히

마이런 섀라프 지음, 이미선 옮김

양문 펴냄(2005)

(라이히의 ‘환자’이자 제자였던, 지금은 하버드대 의대 교수인 정신의학자가 쓴 라이히 전기)



50자 서평

◇ 한 30대 독자 “파시즘이라는 유령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이때 이 책은 파시즘적, 외디푸스적, 가족주의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다. 사랑하라. 일하라. 자유롭게!”

◇ 김상운(인터넷서점 알라딘 독자) “‘운동’으로서의 파시즘을 분해함으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신우익의 발호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어 주는 파시즘과 국가주의 연구의 살아 있는 고전.”

◇ 김민규(회사원) “수십 년 전에 있었던 비극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 없는 비극들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시대의 역작.”

◇ 김희진(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 “가장 강력한 반동적 정치를 만들어내는 건 스스로 비정치적이라 느끼는 사람들의 예의바름과 신비주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파시즘을 우려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 다음주 이후 고전 <나는 고발한다>, <노자>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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