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구수하게 내린다. 주지육림에 건져올린 듯, 송년잔치는 어김없이 과잉이다. 가는 해를 이렇게 지나치게 잡아도 되는 것인지? 지가 싫으면 그만둘 일이지만, 습관처럼 굳은 굳은 살은 여전히 관행이다. 버티어준 몸이 고마울 지경이다. 아침에 가벼운 눈발을 맞으며 땀기운을 온몸에 나누어준다.  나간 정신과 신체가 제 집을 찾아오는 듯 싶다.

딱지처럼 단단히 붙어있는 습관에 딴지를 걸자. 관행처럼 가기만하는 모임습관에 말을 걸자. 충분히 힘든 일들을 연례행사처럼 치르기만 하는지 말이다. 버젓이 늘어나기만 하는 살림살이에도 생각을 걸자. 훨씬 가볍고 서로 기분좋은 만남,씀씀이,습관의 하루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만족도를 높이면서 일상을 다이어트해보는 것도 낫지 않을까 싶다.

모임에 의탁하는 정도가 과했던 것은 아닌가? 반중독 상태로 몸이 끌려갔던 것은 아닐까? 모임의 만족도나 일상에 대한 감별의 결과가 바닥에 기었던 지난 해는 아니었을까? 사분지 일 줄이기(반경)- 사분지 일 늘리기(깊이), 타협의 지점을 생각해본다. 일터도 먹고자고마시고하는일도 삶을 꾸려나가는 관계된 일들도 말이다. 삶은 아니더라도 행동의 선택지를 여럿으로 분기해서 앞에 표지판을 만드는 일도 몸의 학대를 줄이면서 해볼 일은 아닌가싶다.

년휴 몰아서 읽은 읽힌 책들이 보내는 신호들은 한결같다. 위기론과 음모같은 부류는 유난히 저어하지만, 이리저리 다른 각도에서 보아도 달라질 것이 별반없다는 사실에 우울하다. 인식과 앎에 이르는 길도 지나치게 사변과 어찌하면 모르게 할까나, 서로 관계없는 것으로 떼어놓기에만 열을 올린 것은 아닌가 싶다.

양지는 이미 녹아있고, 음지는 알맞게 눈들이 쌓인다. 얕게 내리는 눈발이 고마운데, 전라도는 이미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아 불안하다. 자연을 낭만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 조차 어려워진 것 같다. 순식간에 선을 넘어서는 자연은 여백이 아니라 불안으로 들어선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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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행동주의
- 이런 추세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일까? 공정 거래된 커피와 '아동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 않은' 축구공 때문에 비싼 값을 기꺼이 치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구매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될까? 아니면 우리가 거창한 대의명분 때문에 단순히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일까? 1960, 70년대나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진지한 소비자 행동은 여전히 소수를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일요일 아침, 나는 런던 중심가에 있는 집에서 지난밤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깬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래를 하고, 에코버(세계 최초로 환경 보호 원칙에 입각해 생태학적 공장을 지은 벨기에 기업)에서 만든 음료수의 병마게를 딴 다음, 어젯밤에 먹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아닌 유기농 농산물로 만든 피자 접시 위에 생물 분해 성분이 있는 세재를 뿌린다. 그리고 페어트레이드 (1989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공정 무역 운동, 커피 값을 더 내는 대신 제3세계 농민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한 합당한 수익을 보장받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인증 마크가 찍힌 커피를 붓고, 좁은 닭장에서 가둬놓고 기른 것이 아니라 놓아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을 삶는다. 그리고 러시(런던에 있는 무공해 비누가게)에서 산 '동물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거품 비누로 샤워를 한 다음, '아동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리복 운동화에 '노종자 전원이 노동조합원으로 가입한' 리바이스 청바지, '모피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 클로에 티셔츠를 입는다. 머리에는 오존 파괴 물질이 함유되어 있지 않은 웰라 스프레이를 뿌린다. 그리고 신문을 들고 최근 벌어진 맥도날드 불매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재활용지 위에 메모를 하면서, 다음 번 시위 때는 시위 팸플릿을 한 장 집어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보디숍 매장에 들러서는 '공정 거래된' 모이스처라이저를 구입하고, '윤리적인 회사에만 투자하는' 코퍼레이티브 뱅크의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는 동안 매장에 놓인 세계화를 다룬 홍보물을 읽는다. 집으로 가는 동안에는 차를 잠시 세워 무연 휘발유를 주유한다. 도로 양쪽에는 주유소가 두 곳 있다. 두집은 가격도 같고, 기름의 종류와 질도 같다. 하지만 왼쪽 주유소 회사는 나이지리아에서 기름 유출 사고를 낸 적이 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차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집에 가서는 컴퓨터를 켜고 AOL에서 보낸 '우리는 사회적인 이슈를 우선시합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체크한다. 그러고는 맥도날드가 아르헨티나에서 저지른 처사에 항의하는 이메일을 보낸다. 유엔의 기아 사이트에 들어가서는 마우스를 클릭하여 그날 쌀과 옥수수를 기부한 아메리칸익스프레스에 대한 고마움을 말없이 표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아마존에서 나무를 베지 않는다'는 벤 & 제리의 아이스크림을 내내 핥아먹는다. 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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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체와 정신의 구별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억은 미래를 위한 과거와 현재의 종합이다. 곧 과거의 즉자성과 현실의 대자성이 만난다.  물질은 사물과 표상의 사이에 있는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이 물질과 정신의 시간에 의한 교차점이 기억이다.  소화, 호흡, 순환의 몸기능은 감각-운동기능에 복무한다. 정념은 신체에 관련될 때 생기는 것이고, 지각은 신체 밖의 세계와 관계할 때 생기는 것이다.  순수지각은 굴절이 생기는 반사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권리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응축된 기억의 역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순수기억은 학습에 의해 형성되는 (습관-기억)과 시를 읽을 때 생기는 것 같은 (이미지-기억)으로 구분된다.  순수기억(잠재태) 무의식으로 지속에 뿌리를 둔다.

 - 지각-정념들 같은 신체 운동들은 특권적 이미지를 갖는데 세계 속의 한부분으로 신체를 신체 속의 한부분으로 정신을 뿌리내리고 있다. 꿈, 정신착란은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이 와해될 경우 생긴다.

 - 생성과 존재의 철학을 화해시킨다.

 뱀발. 프로이트처럼 혼란스럽지 않다. 스피노자,라이히처럼 감성,감정들의 공리가 명확하여 심리의 모호성이 없다. 생명과 비생명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 구별이 없이 이어진다.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 개념어들에 대한 명증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앎의 나무>의 그림에 도마뱀같은 양서류그림이 나온다. 장을 넘길 수록 그 모습이 확연이 드러나는데, 마지막장에 발은 나무가지와 한몸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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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해의 마무리는  <저 낮은 중국>으로 맺는다. 김우창님의 <지상의 척도> 가운데 산업화, 시와 관련된 몇편도 이어 읽힌다. <기후변동>도 깊이가 있고 궁금해하던 최근 흐름들이나 지난 기억들을 되돌릴 수 있어 의미있다. 그리고 <소리없는 정복>은 기업과 자본의 흐름에 대해 적어 놓아 지난 해와 올해를 잇는 흐름으로 잘 맞는다 싶다.

1. 산업화, 아니 표현을 달리해서 자본화라고 하자. 자본은 필연으로 소외를 동반하는데, 상품으로 인한 소외와 인간 소외이다.  물건은 물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아우라)와 삶에 대한 삼투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이는 사진이 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연유기도 하다. 이 시대는 사건이 없는 시대이고, 개인이건,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것이 오로지 분위기로 만들어진 욕망을 채우기 위한 구매만이 있기에 산 물건이, 상품이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힘들다 한다. 복제의 시대엔 이렇게 충족될 수 없는 욕망과 외화된 상품만이 만연하기에 마음도 만족감도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2. 동남아시아, 저 낮은 중국은 산업화의 물결을 고스란히 대물림하고 있다. 도시의 화려함과 미디어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순박하기만 한 일상을 끊임없이 충동질한다. 무작정 상경이나 무작정 가출이나, 무작정 철거나 분위기를 가진 모든 것이 허망하게 마치 없는 것처럼 버려지고 만다. 소비해야되고 충족될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다.

3. 인신매매, 마약, 다방. 인력거..어찌 그리도 한결같은지? 철거민은 마음 둘 곳이 없다. 겨우존재하는 열외자에겐 아무런 시선도 대책도 없다. 개똥철학으로 내면화된 머리는 여전히 꿈과 욕망을 쫓는다. 마약으로 하루를 연명하여도 세상을 합리화란 내면으로 다져져있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긴 그림자를 남기는 이런 것에 대해 대책도, 목소리도, 관심도 없다. 더 큰 그림자가 더 빠른 속도에 길게 드리워질 뿐이다. 구매와 거래, 단순한 물품교환의 관계는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아주 조금 그때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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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8-01-0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복덩어리에서 복 사주세요 ㅎㅎ

여울 2008-01-03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춥습니다. 찬이가 몹쓸개그라고 하더군요. 주의 줍니다.
 

눈발, 알려지지 않은 지역언론에서 청탁을 받아 2주에 한번씩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나 망칠까 걱정입니다. 그나저나 이전에 끄적거린 것이나 여러분들의 모습과 제모습이 섞여있는 고민이나 일들을 알릴까 합니다.(이해해주시겠죠. 실명과 링크는 걸지 않습니다. 혹 부담되시면 지적해주세요.) 지난 글 가운데 격한 표현은 약간 수정을 보았습니다. 1월 2일자 원고라 미리 보냈습니다.

 

블로그 놀이(2)

자기기인(自欺欺人)시대, <절망> 벗어나기

 

무자년 새해가 이렇게 밝았습니다. 가볍고 발랄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입니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듯 싶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날이 이어지고 무자년 말미에는 풍요로움과 새로움, 탈각과 꿈으로 출렁이기를 희망해봅니다. 아픔을 딛고 조금씩 나아지는 한해가 되길 함께 소망합니다.

지난 해 여름, 블로거 한분의 이벤트가 독특하였습니다. 3건의 이벤트 가운데, <당신이 외우는 시 한편>으로 응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암기에 대한 순발력도 이미 떨어지는 나이, 짧은 것으로 한편을 외워야겠다는 무모한 발상을 하였습니다. 일상의 뜨거움을 늘 환기시키고, 순간순간 기우뚱한 균형을 밟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외웠습니다. 가끔은 술자리에서도……. 하지만, 암기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도 잘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외우고 싶은 시로 이벤트를 참여하고 사설은 주절주절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마침 <파시즘의 대중심리>와 <나의 투쟁>을 읽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한해를 마무리하는 사자성어가 자기기인(自欺欺人)이었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남은 속인다.”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말이라고 하니 기가 막힌 현실이 아닌가요? 정작 자기를 속인 사실은 자기 것이 되어, 더욱 더 당당해지는 현실은 적반하장이 아니라 정말 절망적인 상황은 아닌가요? 속인 것이 참이 되어 돌아다닌다는 사실, 돈과 로또에 주술이 걸려 투기와 투자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회는 참과 거짓이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중독된 사회는 더 이상, 스스로 돌아볼 여력과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합니다. 소통과 연대, 성찰을 이야기하는 진보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이미 뼛속 깊은 반성을 촉구하는 언어가 유행어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입니다. 사회의 연결망 속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스스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중독된 일상을 면밀히 돌아보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그 고리들을 끊어나가고 가볍게 하는 일. 늘 관점을 새롭게 하는 일. 서로 중독된 모습을 제대로 추스르고 잡아주는 일. 한가득 절망만으로 교감하는 사회에 날카로운 틈새를 낼 수 있도록 서로의 힘을 모으고 응집시키는 일. 황폐한 가슴에 따듯한 시 한편 넣고 음미하는 일. 겨눈 화살을 냉정하게 안으로 가져와 일상의 면면을 깊숙이 저며 보는 일. 아프지만, 슬픔이 무겁게 내려앉지만 서로의 눈물로 가져오는 일. 이런 반성을 넘어서는 작은 일들이 작지만 힘이 되고 더 이상 비릿해지는 사회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선물로 온 책 한권, 얇고 빨간 빛의 양장을 한 김우창 교수님의 <자유와 인간적인 삶>, 직선에 곡선을 듬뿍 담은 이 책 한권도 투쟁, 자본, 거짓의 세상에 따듯한 훈풍과 마음을 여러분의 가슴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따듯한 일상과 나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박성우님의 시 <봄, 가지를 꺾다>도 한편 더 보탭니다.

 

당신이 외우는 시 한 편

            < 절   망 >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0. 여름이 다가오기에 앞서, 마음을 움직이고 다독거렸던 시입니다. 시를 외우는 일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제가 쓴 흔적도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어~ 이거 누가 썼지, 내 생각하고 비슷한 데라거나, 이런 생각도 앞서 했는데,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도 하나 없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ㅎㅎ) 그런데 외우고 싶었습니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다음부터 막히기가 …….그냥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왔습니다. 중동내고 외운 것이라곤 그렇게 잘라먹기가 밥 먹듯 하더군요. 그렇다고 지금 온전히 외우는 것은 아닙니다.

1.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와버렸으면 좋겠더군요. 그렇게 시가 바람만큼 짧아졌으면 좋겠고, 그냥 암송되었으면 좋겠더군요. 안타깝게도, 꼼장어 타들어가는 소주잔 앞에서도 외우지 못했습니다. '졸렬과 수치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에서 마음이 막히고, 시간의 속도와 흰 머리카락 숫자와 기억력은 반비례하듯 멈춰 섰습니다.

2. 무더운 여름, 기후 양극화에 기침하듯, 전 국토는 팔월에 굵은 비로, 굵은 폭염으로  지금까지 여름을 반성하는 것일까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면 반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죠. 예상하지 못하는 여름은 곤혹스럽습니다.

3. 그 무덥고 음습한 여름, <디 워>,<화려한 휴가>의 논란은 올 여름을 보는 듯합니다. 폭염과 벼락, 폭우로 범벅이 되는 지금과 흡사하기에 [<디워>-<화려한휴가>] 동시에 여름을 달려가고 있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멸하는 <이랜드>도 함께 말입니다.

4. 그리고 <반성>을 주입하는 졸렬함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5. 주말 한 소년의 눈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지긋지긋한 말단공무원 아버지가 싫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은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맞섭니다. '환쟁이'가 되려는 아이의 어이없음에 실망하였고, 똑똑한 소년은 공부를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만 잘 보기로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신의 주장을 늦출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림과목과 역사과목에 어린 초등학생은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미워? 하던 아버지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또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혈혈단신이 된 아이는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말고는 울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술학도가 되려는 아니는 실업학교에 가게 됩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소년은 미술학도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건축학에 알맞다는 교수의 지적은 건축학을 공부하게 합니다. 웅장한 독일에 매료되면서, 역사 선생님의 역사교육을 확장시키면서 그 소년은 학비를 벌고, 매일매일 끼니를 때우려고, 일을 합니다. 수채화를 그려서 근근이, 겨우겨우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마음에는 우열을 정하고, 독서에는 유용과 무용을 미리정하고 밤을 새웁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민족'입니다. 그 자리 잡힌 '민족'에 모든 지식을 종속시킵니다. 사회민주주의자와 논쟁의 패배도, 마르크스주의자 경험도…….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경험한 단체와 조직, 신문, 존경했던 사람들을 연결하고 편집합니다. 유태인을 그렇게 하나하나 넣었습니다. 그의 지식체계는 아리안인 게르만족의 '민족'이란 서열에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100년 전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습니다. 전쟁이 있는 100년 전에 태어났으면 이렇게 평화로운 아버지 같은 하층 세관원공무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평화주의자라 아니라고 다짐하였듯이, 먼 이국의 땅의 전쟁 소식에 그 소년은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가슴 들뜹니다. 전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소년이 된 것이고, 전쟁터에 자원하게 됩니다. 생사가 넘나드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과 삶의 허전함을 채우는 곳, 첫 전투에서 역시 희열을 느낍니다.

문어보다 구어가 훨씬 유효하며, 인류역사는 문필가가 아니라 연설가에 의해 바뀌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이념과 힘과 강한 민족만 있는 허구 속으로, 뚜벅뚜벅 한걸음씩 걸으며, 비정치적 대중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7명, 7명, 10여명, 30명, 300명,300명, 3000명. 그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움직일 줄 알았습니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점점 옭죄어가는 궁핍과 허탈한 일상에 채워 넣어야 할 것을 너무도 명백히 알았고, 그것은 이론이나 해석이 아니란 것을, 감성의 일관성과 천 번을 이야기해서라도 감성의 길을 내야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문어보다 구어가, 문필가보다 연설가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필요한 것과 해야 할 것은 그는 일치시키지 않았습니다. 환상과 신화속으로 그들을 걸어가게 했습니다. 갈증 나는 세상에, 탄산음료 같은 달콤함으로 더욱 더 채웠습니다.

6. 아시겠죠. 그 소년은 '작은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는 미치광이도, 정신 나간 아이도 아닙니다. 작고 똑똑하고, 어렵지만 성실하고 독서를 많이 하고,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아이일 뿐입니다. 갈수록 힘들어지고, 먹고살기 힘들고, 취업걱정을 해야만 하고, 열심히 학비를 벌어야만 공부를 할 수 있는 지금 비범한 고등학생, 대학생, 아니 중학생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경쟁이 치열한 일터에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엄마, 아빠일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채워야, 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7. 자칭 진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부동층은 부동층일 뿐, 일터는 일터대로 직선의 요구만 하면 민중은 다 따라올 것이다. 세상이 어려워지므로 전선이 선명해져 더 잘 싸우게 되어 곧 바뀌게 될 것이라고 도식화된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히틀러의 오락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그는 새벽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5시에 일어나 빵부스러기를 침상근처에 놓습니다. 그러면 쥐들이 몰려와, 그 빵조각을 뜯어먹습니다. 그렇게 하는 놀이가 옛날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즐겼다고 하네요.

8. 심미적인 관점이 잔혹하게 변할 때, 잔혹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때, 일상을 채우지 못하는 허공에 맺히는 소리만 난무할 때, 대중과 우리는 스타를 원하거나, 우리만을 원합니다. 대리만족이 그 선을 넘어서 미묘한 웃음으로 바뀌고, 전도됩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조-울을 넘나드는 '우리'에 대해서, 자칭 '진보'의 이론-난해함-복잡함, 비정치적인 대중들에 대한 관심 없음이 자꾸 되돌아보게 합니다.

9. 김수영시인이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때, 새긴 '시'가 이렇게 마음에 남는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면에서 외우고 싶은 시가 아니라 잊어버리고 싶은 시이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우리 마음에 아예 사라졌으면 하는 시입니다.

10. 올해 외우고 싶은 시 한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봄, 가지를 꺾다>

박성우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박성우 시인의 <가뜬한 잠>시집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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