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209

빠문화와 분권 -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지나친 쏠림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디를 가던 이러한 편향은 지나치다 싶다.  자칭 진보도 그러하며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진보를 비난하는 쪽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이념에 대한 쏠림도 그러하다. 이념을 지키는 것, 고수하는 것 역시 현실의 바다에서 경직성을 드러내며, 이념의 시선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2mb빠까지 인식의 시선은 극단을 달린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빠문화 속에 자신은 생략된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끊임없는 의탁~. 스스로 서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나아가고 하는 일은 생략된 경우가 많다. 집단 속에 스스로 던진 것은 아닐까?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조직이나 모임은 부분의 합이 늘 전체보다 작게 나아간다. 느끼지 못하기에 시선은 늘 다른 쪽을 향해 있다. 아픔이 전체에서 나왔는데, 나는 느끼지 못하므로, 내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따라서 아픔은 다른 쪽의 탓이다.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백가쟁명의 토론은 한발 움직이는 것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지침이나 전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면, 당신도 빠의 일원일 수 있다. 아직도 작은 소집단의 결정을 기다리고 다양하게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빠의 일원이다. 그렇게 그것이 주류를 움직인다면, 그 정세판단을 기다린다면 당신의 조직은 요원할 수가 있다. 늘 경직성으로 판단된 전망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 집단지성의 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되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자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낡은 자료를 되돌아보는 수고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경직성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년전에 2년전에 5년전에 10년전에 15년전에 20년전에, 당신은 조중동이 그러하듯, 너무도 확연히 느끼거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뒤쳐저 있는지? 얼마나 나를 따르라가 만연되어 있는지? 어김없이 스스로 빠의 문화에 젖어 있는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당신의 판단을 의탁할 것인가? 아무것도 의탁하지 않는 시선은 변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의탁하지 않는 정신은 또렷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동선은 우리의 동선은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낡은 사고의 감옥에서 도저히 행동이 벗어나지 않는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수결 민주주의의 낡은 모델이 얼마나 함정이 많은지? 숙의 민주주의 모델과 심의 민주주의 모델이 얼마나 다른 각도에서 얼마나 빨리 서로를 알 수 있는지? 조직을 변화하는데 새로운 것, 소수의 의견을 지혜창고에 두고, 얼마든지 꺼내 쓸 수 있는 실험조차 하지 않는 것은 그 증거는 아닐까? 끊임없이 쳐다보고 자신의 행동반경은 끊임없지 제자리한 것은 또 다른 증명은 아닐까?

빠문화에선 권한을 나누거나, 질문이 주관식이 어렵다. 끊임없이 물어봐야 하기때문이다. 스스로 해보거나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큰 관료의 틀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늘 작을 수밖에 없다. 미래를 위한 투자. 새로운 것을 위한 시험. 다양한 아이디어의 잔치가 필요없다. 늘 작은 시선이 그곳에 머물기때문이다. 그 신경계는 산만신경계를 갖을 수밖에 없다. 서로 아픔이란 코드는 통할 길이 없다. 연결되지도 않는다. 끊임없는 내부로 시선. 구심력밖에 작용하지 않아 원심에선 무슨 일조차 일어나는지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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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from 木筆 2008-02-24 11:24 
    지난 한주 스친생각들 크로키 지인들과 세번의 모임. 월 목 목. 일터 화수. * 탈당- 내지 않고 있다. 평당원에게 이들이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부쩍 신상에 대한 질문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2월2일인가 3일인가 어이없는 대의원대회를 보고 경직됨은 물론 기본적 자정능력을 잃어버렸다는 판단이 든다. 불처럼 탈당계를 내고 싶고, 탈당의 변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일주일 지난 2월 9일 저녁, 아*** 분들과 이야기를
 
 
 

 

 

 

 

 

 0. 조류독감은 예상한 범위를 넘어서서 충격적이다. 지난 10여년동안 세계는 종을 넘어서는 변종바이러스의 차단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풍토병처럼 안방의 고양이, 개들 사이에 이미 보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런 상황때문에 이미 대유행병을 예고, 준비하려하고 있으나 난감한 상황인 것 같다. 90년전(1918년) 이미 7천만이상 사상자를 낸 경험은 지구화, 세계화를 거쳐 독감바이러스의 진화를 촉발시켜왔다고 한다. 어쩌면 1억명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타미블루라는 백신마저 제대로 보급될 확율조차 적은 현실이 더욱 개탄스러운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만 모르고 있던 것일까?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던 것인가? 2006년 증보판이 나왔으니 그로 1년이다. 과학전문기자들의 취재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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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구를 입양하다> -대인,성,경제,문화, 등등 대안적 아이디어나 시행사례, 상상력들이 쓸만하다.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 실험을 해보기에 좋을 듯 싶다. 아래 목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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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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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01-3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을 늘리고 깊고 넓고 풍부하게, 멈추게 하거나 비틀게 만드는 법.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될 사람을 만난 듯 하다. 설렌다. 아껴서...조금씩....맘을 만져보자
 

 

일터 약속이 생기지 않아 오랜만에 월요일 저녁 시간이 빈다. 날씨도 알맞아 퇴근하자마자 복장을 챙겨 한바퀴 달린다.  가로등에 비친 갑천이 아름답다. 그리고 싶도록 불빛의 소멸하는 박자, 강물에 소멸하며 진하게 번진다. 내고 달리고 맺고. 10k 60' . 맺고 풀기 뒤풀이 운동. 가벼운 곡기채우고... ... 선약한 선술집으로 향한다.

적확한 지적에 미안한 마음이 샘솟는다. 집행력도, 저축되지 않는 동선들. 기다려보라는, 숙성기간이 길었는데, 가을쯤 새로운 실험의 결과물들을 공유하지 않을까 한다구. 반상근할 분 한분씩만 더 있으면 좋으련만... ... 더디가도 제대로 가려면 시공간의 함수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텐데. 산낙지에 멍게, 그리고 모임안주 많이 들었다. 정신들 차렸으면 좋겠다 빚낸돈으로 살림하듯 저축은 신경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저축하는 습관을 가져보지 못한 모임들은 아닌가? 이리저리 쓸려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자성할 줄 알아야... .... 금요일저녁 갑사찜질방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베이스 캠프는 준비해야 하는데, 지나친 원심이다.싶다

일터인사발표. 오늘 인근 세미나를 듣고 식사하는 와중에 전해들었다. 또 다시 백지상태에서 견적을 내야할 듯 싶다. 이리 숙제는 많아지는가?  출퇴근길 읽은 책이야기들을 나누다보면 공감버전이다. 한데 제도라는 시스템은, 정책이란 시스템은 현장의 사고와 느낌에 그토록 불감증을 반복하는가 싶다. 유전자조작, 영어몰입교육,대운하,기후, 생태.  돈만 보면 사리분별이 없어지기때문인가?

푸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어수선하다. 그나마 달림으로 몸이 가벼운 것이 다행인가? 바다가 보고잡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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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1-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이라 진한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놓으신거군요.ㅎㅎㅎ
술먹는 자리 안주보면 어떤 집 일주일치 부식비에 버금가는거 다반사죠.
진짜 술꾼들은 조촐해도 만족하는데 요즘은 '먹고 죽자'인가봐요.
(예전엔 참 한심하게 길에다 돈 많이 뿌리고 다녀서 지금 없이 사는 벌을 받는 여우)

여울 2008-01-30 11:03   좋아요 0 | URL
어제도 음주했습니다. 길에다 돈 뿌렸어요. 부끄러워요. 하루하루 죽는 삶을, 여전히 소통에 돈이 들어가야하는 일상인지 모르겠어요. 늪지같아요. 일터가 제일 힘드네요. 소통비용이 이렇게 많이 드는 구조라. 사회자본이 빈약하기짝이 없는... ... 아마 벌 받을 것 같아여 ㅁ.
 

 블로그놀이(3) - 원고

 

사회적 "일'과 "일씨"- 일에 치일까? 일을 할까? 만들까? 기를까?




[일], [일]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는지요?  [일]을 처리하시나요? [돈]도 되어야 하는데 돈도 되지 않고 재미도 보람도 없는 일에 매여있다구요? 일생각만 하면 갑갑증이 생기나시나요? 일이 온몸을 칭칭감아 헤어날 수가 없다구요. 죽음의 고역같습니까?

돈을 중심으로 얽혀있는 그물망.  돈을 중심으로  하지 않아 그 그물을  빠져나오는 일들을 생각해봅시다. 편의상 사회적 '일'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돈]의 위계로 치밀하게 설계되고 운영되는 일이 아니라 [사회]와 [사람]을 정점으로 만들어지는 유연하고 촘촘한 일들을 가정해봅시다.

이런 [일]들을 치룰까요? 처리할까요? 당위와 의무감으로 밤낮을 헌신해야 할까요? 물론, 답은 없을 것입니다. 일의 색깔도 여러가지이니 하나로 무슨 색이다라고 하는 것도 합당한 생각은 아닌 듯 합니다. 그래도 숙성이 필요한  사회적 '일'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함께 가졌으면 합니다. 어설피 모은 생각거리 참고만 하시고 혹 다른 관점, 신선한 관점에도 마음 주셨으면 합니다.,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시면 물론 함께 나눠가져야 합니다. 


1.

먼저 두가지 경우를 가정해보자. 정말 하고싶은 일에 푹 빠져서 무아지경에 있던 일. 밤새워 한 일인데 애석하게도 그만 저장도 되지 않고 날라가버렸다.  너무도 관심이 많아, 그 관심으로 지레 씨커멓게 타 되지 않는 일, 배가 산으로 가는 일들 말이다. 애가타고 마음이 타는 일, 눈총받고 있는 일들. 우연이라 하기엔 일이란 놈이 때로는 궁지에 몰리고,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을 보면 대체 무얼까?싶다.


2.

돈을 정점으로 세팅된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규격화된 일의 관점을 조금만 벗어나보면 어떨까? 분업화되고, 표준화되어 그 자리를 끼워맞추거나 넣어버리는 일들, 옴짝달싹 못하는 경직화된 일의 개념을 흔들어보면 어떨까? 그래서,돈이란 심장박동에 맞춰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들.  명예와 권력. 힘만 바라보는 욕망의 장에 예속된 일들. 이런 일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이 기계부속품 같은 생각에서 조금만 비틀어 보자.


3.

일이란 놈이  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씨처럼 배와 배아가 있어야 한다고 보자. 마음도 섞이고, 생각도 섞이고 정성도 섞여야 발아를 한다고 해보자. 생물이라거나 생태란 거창한 말을 빌리지 말더라도 조금만 기계의 관점을 넘어서서 보자. 오래 살아남는 일에 대해 생각해봐도 되고, 이리저리 요리저리 피해가기만 하는 일들을 한번 뜯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장독대에서 곰삭는 장맛이어도 좋고, 아니면 바꾸고 싶은 나의 한모습이어도 좋겠다. 이왕 생각해볼 것이면 인심을 써서  나로 함몰되는 일말고 나-너, 우리로 모아지는 사회적 일들이면 더 좋겠다.



4.

블로그에서 얻은 <꽃과 문장>이라는 아래 내용을 슬쩍 이 생각에 버무려보자. 해야할 요령은 아시겠죠. [꽃]과 [문장]이란 단어를 [일]로 슬그머니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에 넣고 맛이 나도록 삭히시면 더욱 좋겠다. 끝 문장에 너무 연연해하면 안되는 것 잊지 마시구.
 



꽃과 문장


人之有文章, 猶草木之有榮華耳. 種樹之人, 方其種之也, 培其根安其幹已矣. 旣而行其津液, 旉其條葉, 而榮華於是乎發焉. 榮華不可以襲取之也. 誠意正心以培其根, 篤行修身以安其幹, 窮經研禮以行其津液, 博聞游藝以旉其條葉. 於是類其所覺, 以之爲蓄, 宣其所蓄. 以之爲文, 則人之見之者, 見以爲文章. 斯之謂文章, 文章不可以襲取之也.


화단에 초목을 심어 꽃 한송이를 보려면 드는 품이 만만치 않다. 잘 심어 뿌리를 안정시키고, 땅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가지와 잎을 틔운다. 가지도 쳐주고 거름도 주며, 때로 버팀목도 세워주어야 한다. 꽃은 그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바른 마음과 도타운 행실은 초목의 뿌리요 줄기다. 이것이 든든해야 힘을 받는다. 고전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 것은 뿌리를 통해 줄기로 양분을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가지 끝까지 양분이 전달되어야 꽃망울이 부퍼서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운다. 문장은 바로 이렇게 해서 피워낸 꽃송이다. 바탕 공부 없이 꽃만 피우려들지 마라. 세상에 가장 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안 된 글쟁이다.       

- 다산 어록 중 爲陽德人邊知意贈言에서





5.

이제 사회적 '일'들을, 그 [일씨]를 틔워보자. 이 문장을 빌려서 말이다. 묘목을 자라게 해보자.  나비가 꽃처럼 피어 날라가는 탈각과정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주변에 하고 싶은 일들을, 어쩌면 생색도 나지 않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을 세밀히 들여다 보자.  그것이 자판기처럼 뚝딱 해결되거나, 나 혼자 품어서 해결될 일이라는 만용은 일단 접고 말이다.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것이 [사람]이나 [사회]를 품고 있다면 한번 마음의 눈길을 주어보자. 일이란 것이  고민과 번민, 아픔을 키운 마음들로, 애틋한 눈빛이 만나  조금씩 따듯해진다고 생각하자. 조금씩 따듯해진, 설레이는 온기가 비로서 사회적 '싹'을 틔운다.

어여쁜 싹이 돋아났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6.


이제 치뤄야만 되는 시선으로만 [일]을 보지 말자.  우리를 일을 마음 담은 일, 가슴 담은 일. 아픔을 담은 일. 설레임을 담은 일들. 잘 살피고 보살피자. 꽃을 피워야 되는 시선으로,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야 하는 시선으로 살펴보자. 돈의 그물망을 벗어나 외로움을 타는 사회적 [일]들을 마음 속에 가져가 보자. 내 따듯한 가슴만 아니라, 나-너의 가슴으로, 아니 '우리'의 마음으로 가져가 보자. 그리고 그 마음에 품은 일에 개인적인 명예나 권력같이 빌붙어 있는 것들을 거둬내보자. 그 상태에서 사회적 일들의 [싹]을 모목으로 기르자.


지나친 애정도,  너무나 멀리하거나 소원하게도 하지말며, 나만 너만의 일로 생각하지 말자. 지나치게 애정이 많다면  줄이고, 물을 너무 듬뿍 주지 말도록 하며, 바람이 드세면 바람을 막고, 한여름이다 싶으면 그늘도 만들어주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싹들이 묘목으로 듬직한 마을의 이정표로 자랄 수 있도록...그늘에 가린 사회적 일들을, 사회적 일씨를 찾고 보듬고 나누자. 그 싹들을 키우고 자라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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