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믿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을 믿다]를 비평하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소설의 독해방식엔 불콰하다. 가끔 다른 글읽기 방식에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사랑을 믿다]란 한 편의 시가 있다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사랑을 믿다라는 마지막 한줄의 반전에 대한 느낌만 갖는다. 그러고 보니, 그 느낌을 우려먹고 있다. 평론하듯, 비평하듯. 스스로 가져가지는 않고 말이다. 그래서 심화학습이다. 화살을 조금 사적인 공간으로 가져와 본다. [운동 sports? 을 믿다]/[활동 action? 을 믿다]로 오독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랑을 믿다]/[연애를 믿다]로 오독해도 역시 상관없는 일이다.
차고 메마르다. 메마른데 차갑지 않다. 차갑지는 않은데 메마르다. 차겁지도 않고 메마르지도 않다. 자문자답을 해본다. 어디쯤에 걸려있는 것일까? 나란 놈은. 감성이나 감수성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만, 어느 나라사람에게만, 어느 지역사람에게만. 그것이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어리석은 물음을 해본다. 달러. 석유. 금화나 은화. 아니면 어린 느티나무. 아니면 겨울에 심은 매화한그루. 뒤의 것이 그래도 나은 듯하다. 편의상 타협해서 감성이나 감수성을 매화한그루로 하자.
다시 돌아가본다. 감성이 메마르거나 차거나 감수성이 차갑거나 메마르거나 해서, 아니 얄팍한 이기심이나 비겁함으로 인해 감성이나 감수성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수로를 내고 흐르게 하는 것은 아닐까?싶다. 아무래도 나의 감수성이나 감성에 비겁함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충만하고 넘치거나 샘솟는다는 것을 두려워해서, 어쩌면 그것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휘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감성이나 감수성을 저축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진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감성이란 통로, 감수성이란 통로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얄팍한 소심들이 다른 길로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 나의 의식체계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현실이라면 매화한그루를 어떻게 지금보다 달리 키울 수 있을까?
감정이 아니라 감성이나 감수성은 극단으로 가면 어떨까? 위험한 시도일까? 위험한 발상일까? 갈 수 없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딴지거는 것들은 무엇일까?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의 극단은 절망일까? 자유일까? 해방감일까?
뱀 발.
1.건망이다. [사랑을 믿다]를 [사랑을 믿는다]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믿고싶은 것일까? 뒤풀이 자리 이야기가 이어져 내친 김에 더 잇는다. 그냥두자 [사랑을 믿는다]로. 에구 ㅇ. 후유증인가??
2. 설명하는 일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 음미하는 것과 알려주는 것의 간극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음미하는 것은 왜 동시에 이뤄질 수 없는 것일까? 음 그러면 딴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를 받겠구나. 그치 한번에 한가지만 하는 것. 그게 낫겠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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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갑자기 국그릇 위로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친구는 원래 눈물이 많았는데 연애를 하면서 눈물이 더 늘었고, 애인과 결별한 후론 눈물이 거의 주량만큼 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안동소주가 섞인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그러나 친구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도 일 년 전, 몸이건 마음이건 어느 쪽으로도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겉으로는 살 맞은 짐승처럼 꿈틀댔지만, 그 안쪽에서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절망의 비커를 붙들고 쓰디쓴 고통의 한 방울도 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은 어떤 위로나 이해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가히 미친 균형이라 부를 만한 부동의 자세로 육체의 성마른 날뜀을 꼿꼿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시절을 견디자면 어쩔 수 없이 표독해지기 마련인데 그 표독함은 이를테면 맥주에 희석된 안동소주처럼 너무도 특별하고 아름다운 표독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기 앞에서 울고 있는 친구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이 고통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다는 것을. 오래도록 기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고통이 사라진 뒤를 더욱 견딜 수 없어한다는 것을.
나는 그녀가 따라놓은 술을 마셨다. 싱거운 맥주 맛 속에 뾰족한 심처럼 독한 안동소주 향이 박혀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이미 원경으로 물러났다. 이제 실연의 유대는 그녀와 나, 둘 사이에 맺어졌다.
- 권여선, '사랑을 믿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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