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430-090502

 

1. 진리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공전하는데 개인은 진리를 향해 애초에 난 할 수 없다거나 난 모른다거나, 게으름으로 진리로 향하는 중력에 흡인되어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다. 부주의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박사님은 전공이 무엇이신가? 당신의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평등과 관계된다고 하다니? 당신은 진리는 있다고 여기는가? 정말. 그 진리는 정지해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2. 당신은 우연히 2009라는 지하철안에 타고 있다. 개인=가족=국가의 등식에 당신의 생각은 안전한가? 한번이라도 온전히 그 등식을 아니다라고 하고 생각을 밀고나간 적은 있는가? 당신의 그 게으름이 늘 3의 되돌이표로 반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3. 자학과 자조를 넘어서라고 했던가요. 조선왕조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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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1. 방 청소를 하고 이것저것 교좌책상도 옮기고 나니 그럭저럭 작업할 공간이 된다. 밀린 흔적들을 남겨본다. 잠시 짬을 내어 바닷바람을 쐬어보니, 차오른 달이 그렇게 밝은 것인지 바닷에 은은한 잔영은 얼굴이 비칠 듯 밝다. 바람의 결이 세어 느티나무 잎새소리도 모양도 그러한데 한곳에 잠깐 남겨둔다. 

2. 먼댓글의 책들을 자세히 이어가다보니 [나]를 두고, 세파에 상식이라고 묻혀있는 그림자들을 떼어내고 사고를 밀어가다보니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생각의 결을 단단히 부여잡고 밀어가는 모습, 저기까지 스스럼없이 가는 님들의 모습이 경이롭다. 

3. 평균적인 다수자의 모습엔 늘 당연한 것이기에 존재를 왜곡하는 결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로 한통속이기도 하므로. 경계에 서거나 경계의 밖에 온몸을 밀어가는, 삶의 변주는 슬픔이나 아픔을 끌어내어서 참혹하다. 하지만 어설픈 희망보다 솔직한 비관이 현실을 더 냉철하게 보기에 현실을 이겨낼 확율이 더 크다. 

4.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따로 또 같이 생각의 결을 나누는 것. 앎 역시 극한으로 밀어부치지 않으면 별반 얻을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 포도가 시어 못먹을 것 같다고 하고, 학문의 경계를 두어 전문가의 것이라고 의탁을 하고 만다. 시도 그림도, 건축도, 조각도, 요리도 언어를 배운다는 것, 표현을 배운다는 것. 설명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공유한다는 일은, 주저함없이 밀고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도 버거운 일도 아닐 것이다. 주저함이나 노예나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있다라는 우열의 의식에서 벗어나 지금보다 나은 열린 것을 지향하는 것. 그것에 열정한점을 묵묵히 보태면 될 것. 그렇게 생각한점에 또 생각한점을 보태면 될 것. 너를 경유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 죽음을 가정해본다는 일이 생명을 도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강건하고 구체적으로 지키고 너의 삶을 나의 삶에 넣는 일이 되는 것. 

5. 님들의 생각을 쫓다보니 뿌듯하기도 부끄럽기도, 다수자에 서서 늘 생각이 그자리에서 되돌기를 반복하였다는 점. 배울 가슴의 언어, 몸의 언어, 손의 언어, 발의 언어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는 점들. 이것저것 세미나 모임과도 겹쳐 마음이 들떠 있는 듯 싶다.  

6.  함께 나뉠 수 없다고 느끼는 일상의 결을 나눈다는 것은 내몸에 착근한 것들을 달리보거나 떨어질 것을 요구한다. 떨어져 다른 위치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공간에 한점으로 떨어뜨려논 데카르트와 홉스,로크,루소의 생각을 밀고나갈 틈도 없이 점유된 자본의 시대의 개인이란, 서경식님이 말한 돼지론에 짐짓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 마냥, 학문이라는 것도 타분야와 타자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 시도, 소설도, 음악도, 공학도, 과학도, 예술도 마치 서로 다른 자식들처럼 자기것만 부여잡고 단절을 더 갈구할 뿐이다. 

7. 그 뒷그늘에 뒤섞여있는 관계의 그물에서 개인을 툭 빠져 나오게 만드는 생각의 힘. 그곳에 자본의 관행이 작용하는 중력의 힘이 희미하다. 마치 세상이 압축되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압박이 희박하다. 그런 점에서 늘 삶을 가치를 옭죄던 관념과 상식의 가치들이 흔들린다. 부패한다. 나를 끝까지 밀고가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세상에, 자본에 포획되던 생각은 경계에서 흔들린다. 빠져나갈 듯 말 듯. 

8. 그렇게 밀고나가다 보면, 늘 그러하리라고 여기던 관념과 사물의 뒷모습이 보일락말락한다. 전도된 그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던 다른 그것이 보인다. 그래서 사물을 더욱 팽팽하게 파악할 수 있다. 지나친 낙관이란 손수건으로 가려 보이지 않던 현실이 더욱 뚜렷해 온다. 막연한 두려움의 실루엣이 선명해지며 철조망과 장애가 구별된다. 흐릿한 안개. 안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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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낮, 등나무를 자세히 보니 아카시아를 닮다. 꽃이 피는 것도 버선코가 납작할 뿐, 나비처럼 화사하게 고개를 드는 모습은 같은 박자다. 줄기가 더 길고 잎도 부드러운 맛은 부족하지만, 향도 보라도 바람품은 햇살에 날리는 모습은 봐줄만 하다. 꽃잎하나 하나 세세히 그려주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룬다. 톡톡 고개내민 모습, 아직 피지 않은 모습, 다 피어 진보라로 향하는 실루엣만 기억할 겸 남겨본다. 

주말 바빴다. 서울가는 길. 대전에 내려 세미나, 새벽에 잠들고, 부리나케 참* 회의, 그리고 타박?맞으며 서울행. 다소 냉냉한 기운을 견딜 수 없고, 몸도 자꾸만 쳐져내리지만, 되풀이되는 책읽기와 궁금증은 깊어만 진다. 등나무가 내리듯 바닥으로 향한다. 향기를 가지고 끝까지 가본다. 

좀더 숙성을 하고 마음 가닥을 잡아봐야겠다. 이번주는 착실해야하는데, 오늘 도서관은 할까? 월요일인데 또 허탕이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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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9-05-1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봐도 타박맞을만 하군요. 건강 잘 챙기세요. ㅎㅎ

여울 2009-05-1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구무언이네요. 흨흨. 근신중입니다.
 

 

서경식님이 한국에서 2년 체류하면서, 책자의 마지막장 제목을 이렇게 달고 있다. 절망스러울 정도로 답답한 일본 사회를 구원해줄 희망을 갖고 왔지만,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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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라케 수사로 "아, 저는 약간 힘이 없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요" "너무 정의로운 얘기는 제가 못따라가요" "나는 맨날 먹고살기 힘들어서, 바빠서 그런 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라는 식으로 회피한다. 지식인조차도 그렇다.  

3.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의'라는 말을 하기가 쑥쓰러워지는 분위기로 되어간다는 점에서 30여년전 일본의 전철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밟고 있다. 한국 사회가 희망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일본 사회만을 닮지 않았으며 하는데... ... 

4. "아, 저는 지식인이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월급쟁이지요"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급속이 많아질거예요. 

 

뱀발. 

1. 일본을 닮아간다는 이야기. 일상적 파시즘의 우려들이 회자되지 시작한지가 이삼년쯤 되는 것 같다. 좀더 구체화되면 좋을텐데. 부족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작년 이명박 정권 1주년쯤 대담한 내용인데, 정치적 냉소주의에 시선이 간다. 스스로도 그러하며,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마저 손을 놓고 있는 듯한 상황은 무서운 속도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속력이 빨라지는 지점은 현실을 너무도 확연히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고비가 그 지점일 수도 있고 거기에서 갈라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냉소와 무기력증이 스며들지 않게, 작은 마음들, 행동들을 더 챙겨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생활인들은 더 더구나 그러하므로 큰꿈 큰서사를 뿌리내릴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아픔도 슬픔도 섞어 방법을 찾아내야하는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무기력을 핑계로 매체마저 관심을 끝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다른 버전이 몸이 생각이 바지런을 떨어야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파시즘을 이야기하거나 예견하면서도 양손에, 생각의 무기를 무장해제하는 일은 더 더구나...더 예민해져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현안과 현실에 대해 더 더욱 궁리를 하고 파고 들어야 하지 않나싶다. 무기력을 경계하는, 경고하는 님의 말처럼.... 

 2. 우리가 언제 엠비를 보고 그것에 맞춰 살거나 싸우거나 한 것이 아니라 겨우존재하는 열외자의 삶으로 살고 고민하고 고뇌한 것이 아닌가? 

3. 엠비의 시선에 우리 고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시선에 고민을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엠비를 보고 넋놓는 일과 이웃을 보고 넋놓는 일과 다를 것이 별반 없는 것은 아닐까? 고민과 동선을 냉동시키는 일은 아닐까? 사고를 판단정지시키는 일은 아닌가? 그런면에서 시대의 우울은 생각의 경계에 서있는 [너-나]에게 책임지우는 일이 많은 것은 아닐까?  

4. 고민을 밀고나가는 일, 생각이 멈춰버린 지점. 다시 봐야하지 않을까? 나는 왜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ㄲ 생각있는 사람들이 고민을 멈춰버렷으므로 이중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고민을 차치하고 일상으로 들어갈 명분을 얻을 수 있고,  서로서로 큰서사는 흘러가는대로 더 놔둘 것이고... .......어쩌면 고민을 증폭시켜야, 삶과 생활의 결을 더 단단히 넓혀야 하는 시대의 몫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5. 빠르게빠르게 좁은 보를 지나가는 물살에 그저 떠내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면......그러지 않았으므로 남탓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했으므로 지금이 방종의 시기로 기억될는지도 모른다. 우울을 가장한 무기력의 시점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생각있는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멈추었으므로.... ...잔인한 여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운들 차렸으면 블로거 논쟁이라고 분분하면 좋겠다. 엠비가 대신 내삶을 너-나의 삶을 살아주는 것ㄷ 아닌데 너무 기운 없고, 기운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왜 이리 남의 시선에 민감한 것이 생각있는 사람들이었던가...?? 왜 고민의 지점이 늘 '그'였을까? 고민의 지점이 너나 나나 너-나로 넘어오면 문제라도 생기는 것일까?  

6. 큰서사도 작은서사 일상과 큰 공간을 병립시키려는 노력은 걸쇠라도 걸린 것일까? 큰서사에 늘 나의 생각을 담보잡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큰서사와 작은서사를 관통시키는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은 있던가? 

7.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우리에게 가능한가? 묻고있는 저자처럼, 지금의 고통과 함께하는 기억의 출구는 연대를 만들 수 있을까? 파시즘의 방어선을 칠 수 있을까? 최소한의 물음이라도 공유할 명분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의 연대는 가능한가?  고민의 연대는 가능한가? 삶의 연대는 가능할 수 있을까? 있을까? 

8. 시대가 시대를 닮아가고 사람이 사람을 닮아가고 마음이 마음을 닮아가고, 사고의 휴전선을 뛰쳐나가고 생각의 휴전선도 뛰쳐나가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 할 수 없다는 것도 별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 정권과 맞짱을 떠야한다는 생각이 늘 걸려있는 것은 아닐까? 일대일 대결에 너무 친숙한 것은 아닐까? 우리 생각은 힘이 너무 세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모으로 모으고 함박눈처럼 뭉쳐야 단단해지고 밀가루처럼 물도 묻혀야 말랑말랑 반죽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우리 생각은 늘 통째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은 아닐까? 힘이 그만큼이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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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주말이 지나고나서 며칠만에 들렀더니 찔레꽃과 아카시아꽃이 절반은 피어버렸다. 아직 피기전 버선코같은 꽃들을 담다. 한입 오물거렸더니 향이 혓속 깊숙히 넘어온다. 그래서 한잎 더. 향이 머리 속을 온통 휘이 감는다. 

2. 주말 서울을 왕래하고 신경을 곧추 썼더니, 몸이 말이 아니다. 잠으로 충전하다시피 하다 내려와 잔일들을 보고 삼학도로 목*역으로 한바퀴 바다내음을 맡고 달래주었다. 8k 80' 난영공원엔 고양이가 낯설게 반기고 오래묵은 제분공장이 앞을 버티어 서고, 삼학도 사이 공원공사가 아담하게 꾸며주고 있음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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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루만에 아카시아 꽃들이 절반을 채운 것이 나비처럼 날아갈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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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채워지려는 밤, 잠이 쉬이 오질 않아 뒤척인다. 뭉글거리는 생각끝을 달고 잠 속으로 들어가본다. 도시에 느린시공간이거나 이질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볼 수 없을까? 면이어도 읍내여도, 마을 하나, 동네하나를 바닷가의 하나의 섬처럼 가꾸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아주 작은 규칙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고, 자전거나 걸어야 되고, 뭔가 하나 하면 한끼 해결하거나, 한달을 보내거나(가르칠 거리가 있다면..). 한주를 보내거나 품을 나눠, 나눈 것이 서로 남는 그런 시공간은 없는 것일까? 아주 만화같은 이야기만, 아주 어이없는 소리일까? 도시의 한마을의 공간이 이색적이 아니라 과정으로 충만한 공간에 먹고 마시고 나누고 삶의 작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시공간을 비틀어 둘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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