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430-090502

1. 진리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공전하는데 개인은 진리를 향해 애초에 난 할 수 없다거나 난 모른다거나, 게으름으로 진리로 향하는 중력에 흡인되어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다. 부주의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박사님은 전공이 무엇이신가? 당신의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평등과 관계된다고 하다니? 당신은 진리는 있다고 여기는가? 정말. 그 진리는 정지해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2. 당신은 우연히 2009라는 지하철안에 타고 있다. 개인=가족=국가의 등식에 당신의 생각은 안전한가? 한번이라도 온전히 그 등식을 아니다라고 하고 생각을 밀고나간 적은 있는가? 당신의 그 게으름이 늘 3의 되돌이표로 반복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3. 자학과 자조를 넘어서라고 했던가요. 조선왕조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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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은 타인의 검증을 거쳐 자신을 이해시키는 능력이다. 이성과 의지가 동의어이듯, 평등과 지능은 동의어다. 낱낱의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을 정립하는 이 동의관계는 사회 일반을 가능케 하는 동의관계이기도 하다. 지능의 평등은 인류를 이어주는 공통의 끈이자 인간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만일 인간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본다면 헌법은 곧 만들어질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143
위대한 새악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표현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뿐. 선생이 하는 바보 만드는 교훈과 하나하나 반대되는 예술가의 해방하는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이중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에서 예술가다. 예술가는 직업인이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일을 표현 수단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는 느끼는 데 만족하지 않고 나눌 방도를 찾는다. 설명자가 불평등을 필요로 하듯, 예술가는 평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이성적 사회의 모델을 그린다. 그 사회에서는 이성에 외적인 것-물질, 언어적 기호들-에도 이성적 의지가 관통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느끼게끔 하는 의지 말이다. 139
너 자신을 알라는 더 이상 플라톤의 방식으로 너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라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네 안에서 너를 속일 수 없는 것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너의 무능은 걷기를 게을리 하는 것일 뿐이다. 너의 겸허함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머뭇거리는 오만한 공포에 지나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악은 헤매는 것,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 자기가 말하는 것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가 무엇인지 잊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길을 가라. 116
천재들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가장 자주 쓰이는 지능 훈련 방식은 바로 되풀이하기다. 되풀이하기는 지겹다. 첫번째 악은 게으름이다. 자리를 비우고, 반만 보고, 보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 본다고 믿는 것을 말하기는 더 쉬운 일이다. 그런 식으로 부재의 문장들, 정신의 어떤 모험도 번역하지 않는 그러므로가 만들어진다. "나는 못 하오"는 이러한 부재의 문장들의 예다. "나는 못하오"는 어떤 사실/행적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이런 단언에 상응하는 정신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언은 아무 것도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가 지능의 행보를 옥죄느냐 풀어주느냐에 따라 말은 채워지거나 비워지게 된다. 의미 작용은 의지의 작업이다. 바로 그것이 보편적 가르침(개인은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의 비밀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자들의 비밀이기도 하다. 신체에 꼭 필요한 습관들을 들이기 위한 노력, 지능에 새로운 관념을 명령하고 그 관념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명령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우연히 산출된 것을 의도대로 다시 만들고, 불운한 상황을 성공의 기회로 바꾸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112-3
"나는 보고 싶고, 그리고 본다. 나는 듣고 싶고, 그리고 듣는다. 나는 만지고 싶고, 그리고 나의 팔은 뻗어지고 사물의 표면을 타고 움직이거나 사물 내부로 들어간다. 나의 손은 벌려지고, 펼쳐지고, 뻗어지고, 죄고, 나의 손가락은 내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벌려지거나 오므려진다. 이 더듬는 행위에서, 나는 만지고자 하는 나의 의지만 안다. 이 의지는 나의 팔도, 나의 손도, 나의 뇌도, 만짐도 아니다. 이 의지는 곧 나요. 나의 영혼이요, 나의 역량이요, 나의 능력이다. 나는 이 의지를 느낀다. 이 의지는 내 안에 현존한다. 의지는 나 자신이다. [팔, 손,뇌 따위가] 나에게 복종하는 방식을 나는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것의 행위들을 통해서만 그것이 나에게 복종하는 방식을 안다(..) 나는 관념화 idenfication를 만지기라고 본다. 나는 내가 원할 때 감각작용을 갖는다. 나는 나에게 감각작용을 가져오도록 나의 감각들에게 지시한다. 나는 내가 원할 때 관념들을 갖는다. 나는 그 관념을 찾고, 만질 수 있도록 나의 지능에게 지시한다. 손과 지능은 저마다 자신의 권한을 갖고 있는 노예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다." 110-1
우리의 문제는 모든 지능이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의견이 가능함을, 다시 말해 그 역의 어떤 진리도 증명되지 않음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95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대철학자의 훌륭한 생각은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 중 하나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진 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 77
사람들은 수사학에서 이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지를 무화시킬 방법을 찾는다. 수사학은 말하는 존재의 시적인 조건에 반기를 드는 말이다. 그것은 입 다물게 하기 위해 말한다. 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이상이 수사학의 강령이다. 수사학의 실효성은 그것 자체의 중단에 좌우된다.163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4
보편적 가르침을 개혁 정당의 강령에 넣어서도 안 되고, 지적 해방을 반란의 깃발 위에 매달아도 안 된다. 오로지 한 인간만이 한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 오로지 개인만이 이성적일 수 있다. ...해방하는 방식은 하나 뿐이다. 어떤 당도, 어떤 정부도, 어떤 군대로, 어떤 학교도, 어떤 제도도 단 한사람도 해방하지 못할 것이다. 195
나는 신이 혼자서 스승 없이 스스로 지도할 수 있는 인간 영혼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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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희망이 아니다.'란 얘기를 짚어 봅시다. "너는 개인이 아니다. 왜냐면 가족이 있기 때문에, 왜냐면 부모가 있기때문에, 왜냐면 민족이 있기 때문에, 왜냐면 유전자를 계승해야 하기때문..."라고 공공성이라는 걸 생각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 전부 다 개인들이 있지요. 서로가 어떤 혈연이나 그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식구니까, 같은 학교 동창이니까, 같은 조선 사람이니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타자예요. 타자인데 ' 어떤 공간을 잘 좀 지키고, 보람있게 사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그런 것을 생각할 때 개인으로 사고의 극한을 밀어나가 보는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가, 부모가 국가가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내부에서 나와야 되는 겁니다. 비유로 얘기하면요. 이걸 지하철 칸이라고 칩시다. 저는 2009년 우연히 여기 들어왔어요. 물론 가족이 있는데 제일 가까운 타자지요. 형이니까가 아니라 가장 잘 아는 타자인데 2009년 우연히 이 차량에 제가 탔다, 이 차량 안에 어떤 계층이 있고 차별도 있고 어떤 부조리도 있고 폭력도 잇다는 겁니다. 언젠가 저는 여기서 내리겠지요. 죽으면. 그게 내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한, 이 다른 타자들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이 칸 안을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정의롭게,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만들고 싶다는 그런 의도가 있는 개개인이라야 이런 공공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민족이나 그런 공공성이 원래부터 전제로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공공성이라는 것을 철저히 개개인에서부터 생각해야해요. 그러니까 개인의 독립성이야말로 공공성의 바탕이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에 아주 깨끗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으면 안 되는지,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행위야 말로 인간다운 주권을, 주체성을 자기 자신이 획득하려고 하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죽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우리가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을 어떻게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 나갈 것인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고 볼 수도 있다. ) 160-1
내가 여기 있는 어떤 사람에게 애정이나 책임감, 연대감, 이 사람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고 이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느낄 때, 진짜 이것이 자기 것인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떤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누구를 모방한 것인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우리가 독립되어 가는 겁니다. 157 누구의 도덕, 누구의 이데올로기인지를 따져야 한다.
"삶은 아름답다. 삶에는 진실이 있다. 죽으면 안 된다. 자살은 무책임한 짓이다. 가문의 연속성은 누가 지키냐? 친구나 가족한테 면목 없는 거 아닌가? 가문에서 자살하는 놈이 나오면 가문의 명예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식의 설득의 의미 152......"자신은 대학졸업하고 십년 넘게 이렇게 백수로 지내왔다. 인간적인 존엄조차 이렇게 훼손되어 왔다. 그런데 기성세대, 나이 쉰 넘은 일본 주류인 너희들은 더 노력하라든가 우리는 해 왔다든가하는 쓸데없고 공허만 얘기만 한다. 우리는 삶의 보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다. 인간의 존엄성만 지킬 수 있다면, 발휘할 수 있다면 전쟁도 환영한다." 151 아카기 토모히로 [젊은이를 죽게 내버려 두는 나라]에서
만약 돼지가 우리 인간처럼 이성이나 언어가 있다면 자신이 사는 이유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가 인간의 의도로 태어났는데, 그 목적이 인간들 자신이 먹기 위해서다...그러면 우리는 돼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 대부분을 백성으로, 노동자로, 노예로 재생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돼지를 사육하는 것하고 다름이 없지 않나요?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사람을 보내고 노예노동을 시킬 때도 재생산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유럽도 오랫동안 노예제도가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았지요....'인간을 살아야만 한다. 자살하면 안 된다.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가 어떻게 보면, 인간을 영영 착취하려고 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는 거죠. 148-9 착취를 위해 자살을 금지한 산업사회
일본같은 경우 너무 오래 불황이 계속돼 왔습니다. 이미 대졸자 가운데 한 6백만명이나 되는 백수가 있습니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지금 인간의 존엄성조차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더 이상 살아도 그다지 좋은 일이 없겠다 해서 죽어가는 거지요........그런데 어느 순간 이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이유가 국가다, 네 삶의 보람이 국가에 있닥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말하자면 인간에게서 삶의 보람을 먼저 빼앗아 놓고 그 다음에 어떤 보람을 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거지요. 그런 현상이 벌써 보이기 시작해요.(이시하라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참혹한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못들어오게 해야 한다...로 70%나 되는 지지를 얻어 도쿄 도지사가 되었다.) 151
자살이라는 것에 붙은 결들을 나눠볼 수 있는가? 타자하고 맺은 관계때문에 살아야 한다. 가족에 대한, 동지에 대한...국가에 대한 ....천황제, 이탈리아 파시스트.... 우리에겐 개인하고 가족, 가족하고 민족, 민족하고 국가, 국가하고 세계...이런 것을 다 등식으로 보는 가치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로인해 부지불식간에 개인....(동성애자...)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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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강하고 국가는 약하다.
왕가든 무엇이든 요컨대 나와 직접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 즉 '세계의 멸망보다도 내 탁자 위의 빵부스러기가 나에게는 더 큰 문제다'라고 실천하는 것 같은 행동양식과 다를 바 없다. 274
김용운은 "조선시대의 한국은 각 지방마다 흩어져 있는 입자적인 동족 부락들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락 사이에는 횡적 교류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각 부락과 직접 이어지는 곳은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서울뿐이었다."
조선시대에 어머니의 권력은 아들을 '큰사람'을 만들 때에 획득될 수 있었다.(공식적 가족, 자궁가족의 이중구조)
"우리나라에서 이어져 온 윤리는 등급을 전제호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인사하는 것과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다릅니다. 특정한 관계에 특정한 윤리가 적용된 겁니다. 그 결과 같은 혈족이나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는 친절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에게 거부감을 가집니다. 반면 일본은 씨족이라는 배타적 혈족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고가 강했어요." 송준호 유교적 가족주의
송준호는 '조선시대의 지배 엘리트의 실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에 대해 관리의 수가 놀라울 만큼 적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치한 관리의 수가 100여 명에 불과했으며, 서울을 제외하면 조선 8도를 통치한 일선 관리의 숫자는 1000명이 채 안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관직의 수는 놀라울 만큼 적은 데 비해 관직의 희망자 수는 놀라울 만큼 많다는 데 있던 것 같다. 264
와그너는 당파주의의 '가장 충격적인 결과'로 '정치의 실종'을 들엇다. 그는 "정부의 운영이라는 차원에서 정치의 실종은 행정의 마비, 관료적 타성, 무책임성, 실책과 비효율성, 정부의 위기를 의미했다. 정치적 도덕성이란 영역에서 볼 때 정치의 실종이란 부정부패, 연고주의, 인신공격,기회주의, 사대주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국 가치체계의 측면에서는 정치의 실종이 개인,씨족,학교, 애향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파주의는 현안이 되는 논쟁보다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두며 실제 문제보다는 사소한 점에 먼저 관심을 두엇다. 그리고 당파주의는 상대 당의 생각을 모반에 가까운 위험한 것으로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262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자는 전혀 존경받지 못하지만, 즉 '도덕적 헤게모니'는 없지만, 모든 이들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부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기존 체제는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262 체제 안정성
"벼슬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하더라도 중앙, 곧 서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상한 중앙정치 집약적이요, 중앙경제 집약적이며, 중앙문화 집약적인 논리가 지배, 우리 한국인의 현대병 가운데 고질인 '중앙병'을 앓게 하고 있다....한국인의 중앙병은 삼면을 둘러싸고 잇는 바다를 정복하지 못했던 데 원인을 찾아볼 수 가 있다. 해외로 나가는 프런티어 정신이 신라시대 이후 건포도처럼 쭈그러들어 밖으로 뻗어 나가려는 원심력이 약화되고 가운데로 파고들려는 구심력이 반비례해서 커 왔다." 이규태 275
우리는 실패의 원인을 캐는 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거나 무관심하다. 아니 실패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악행과 음모 때문에 그리 된 것이라며 그 악행과 음모의 주체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데에 익숙하다.
그런 강박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법칙이 생겨나게 되었다. 누군가를 실패하게 만들려면 적대자의 입장에서 옳은 말만 해주라. 그러면 옳은 말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하게 돼 있다. 289
냉정해지려면 분류의 유혹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 주장 보수야 진보야?"라는 물음부터 내던져야 한다. 그런 이분법엔 포착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유로운 논의를 위한 자리에서 그런 분류법은 잠시 폐기처분할 필요가 있다. 292
한국정치의 5대환경 - 연고-정실주의문화, 인물중심의 문화(의인화-개인화), 1극주의문화 1극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성을 자랑한다. 승자독식주의와 그에 따른 줄서기, 입신양면의 문화(국리민복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한 출세주의), 지정학적구조.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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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방 청소를 하고 이것저것 교좌책상도 옮기고 나니 그럭저럭 작업할 공간이 된다. 밀린 흔적들을 남겨본다. 잠시 짬을 내어 바닷바람을 쐬어보니, 차오른 달이 그렇게 밝은 것인지 바닷에 은은한 잔영은 얼굴이 비칠 듯 밝다. 바람의 결이 세어 느티나무 잎새소리도 모양도 그러한데 한곳에 잠깐 남겨둔다.
2. 먼댓글의 책들을 자세히 이어가다보니 [나]를 두고, 세파에 상식이라고 묻혀있는 그림자들을 떼어내고 사고를 밀어가다보니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생각의 결을 단단히 부여잡고 밀어가는 모습, 저기까지 스스럼없이 가는 님들의 모습이 경이롭다.
3. 평균적인 다수자의 모습엔 늘 당연한 것이기에 존재를 왜곡하는 결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로 한통속이기도 하므로. 경계에 서거나 경계의 밖에 온몸을 밀어가는, 삶의 변주는 슬픔이나 아픔을 끌어내어서 참혹하다. 하지만 어설픈 희망보다 솔직한 비관이 현실을 더 냉철하게 보기에 현실을 이겨낼 확율이 더 크다.
4.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따로 또 같이 생각의 결을 나누는 것. 앎 역시 극한으로 밀어부치지 않으면 별반 얻을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 포도가 시어 못먹을 것 같다고 하고, 학문의 경계를 두어 전문가의 것이라고 의탁을 하고 만다. 시도 그림도, 건축도, 조각도, 요리도 언어를 배운다는 것, 표현을 배운다는 것. 설명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공유한다는 일은, 주저함없이 밀고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도 버거운 일도 아닐 것이다. 주저함이나 노예나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있다라는 우열의 의식에서 벗어나 지금보다 나은 열린 것을 지향하는 것. 그것에 열정한점을 묵묵히 보태면 될 것. 그렇게 생각한점에 또 생각한점을 보태면 될 것. 너를 경유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 죽음을 가정해본다는 일이 생명을 도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강건하고 구체적으로 지키고 너의 삶을 나의 삶에 넣는 일이 되는 것.
5. 님들의 생각을 쫓다보니 뿌듯하기도 부끄럽기도, 다수자에 서서 늘 생각이 그자리에서 되돌기를 반복하였다는 점. 배울 가슴의 언어, 몸의 언어, 손의 언어, 발의 언어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는 점들. 이것저것 세미나 모임과도 겹쳐 마음이 들떠 있는 듯 싶다.
6. 함께 나뉠 수 없다고 느끼는 일상의 결을 나눈다는 것은 내몸에 착근한 것들을 달리보거나 떨어질 것을 요구한다. 떨어져 다른 위치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공간에 한점으로 떨어뜨려논 데카르트와 홉스,로크,루소의 생각을 밀고나갈 틈도 없이 점유된 자본의 시대의 개인이란, 서경식님이 말한 돼지론에 짐짓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 마냥, 학문이라는 것도 타분야와 타자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 시도, 소설도, 음악도, 공학도, 과학도, 예술도 마치 서로 다른 자식들처럼 자기것만 부여잡고 단절을 더 갈구할 뿐이다.
7. 그 뒷그늘에 뒤섞여있는 관계의 그물에서 개인을 툭 빠져 나오게 만드는 생각의 힘. 그곳에 자본의 관행이 작용하는 중력의 힘이 희미하다. 마치 세상이 압축되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압박이 희박하다. 그런 점에서 늘 삶을 가치를 옭죄던 관념과 상식의 가치들이 흔들린다. 부패한다. 나를 끝까지 밀고가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세상에, 자본에 포획되던 생각은 경계에서 흔들린다. 빠져나갈 듯 말 듯.
8. 그렇게 밀고나가다 보면, 늘 그러하리라고 여기던 관념과 사물의 뒷모습이 보일락말락한다. 전도된 그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던 다른 그것이 보인다. 그래서 사물을 더욱 팽팽하게 파악할 수 있다. 지나친 낙관이란 손수건으로 가려 보이지 않던 현실이 더욱 뚜렷해 온다. 막연한 두려움의 실루엣이 선명해지며 철조망과 장애가 구별된다. 흐릿한 안개. 안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