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없이 보다. 빈센트의 편지글이 번역되어있는 장문의 화집은 그의 그림에 대한 애착과 노력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책들보다 그림이 말하는 것, 편지글의 애잔한 마음이 더 아련하다 싶다. 김환기의 그림은 서울시립미술관 신오감도 전시회에서 본 적이 있는데 데생 1967-197*까지 일련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좋다. 구도도 마음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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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간서적 칸에 있기에 주워들었는데, 어이가 없다. 아직도 이렇게 눈먼 돈 핥아가야 하는 것인지?? 

 

 

  

3. 겸사겸사 폴라니 책들을 곁에 두고 보고 싶었는데 대출이 되었다. 보존서고에서나 [거대한 변환]을 구할 수 있다한다. 덕분에 의욕도 줄고 1,2를 본다.

 

 

 

 

 

090602 

 화집을 보다. 김우창과 김훈이 본 오치균의 그림세계(2009, 생각의 나무), 김환기화집 1975 일지사 출판본. 

 오치균은 1956년생 서울미대를 나와 뉴욕 산타페, 서울 사북이 그림 소재이며 지촉화가이다. 그림은 1차산업이며 생산을 1시간이라도 하지 않으면 공장이 멈춘다고 할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며, 대상에 혼연을 함몰시켜 그림을 그린다. 그 열정은 대인관계까지 어렵게 만들 정도라고 한다. 

김환기화집을 살펴본다. 시간의 함수의 그림의 경향이 보인다. 뇌졸증으로 생을 마감한 이후 그리거나 추구할 그림들이 잡히는 것 같다. 달과 나무, 별, 항아리란 도자기, 꽃의 어울림이란, 그리고 산과 강... ... 요즘 빠져있는 것들의 조형이다. 아름답고, 색감이 그윽하다. 김환기는 따로 그림공부를 배운 것이 없다한다. 도자기에서 색감이나 그림공부를 했다고 할만큼 말이다. 그의 색을 보면 스스럼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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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2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2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3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4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자유-사회, 자유만 아니라, 사회만 아니라,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자유-사회의 그물이 목에 생선가시처럼 걸려있다. 생각을 꿀꺽 삼키지 못하고, 내내 그렇게 다른 생각들을 넘기다보면, 찌릿찌릿 통증을 남긴다.

원없이 하고싶은 것, 하기에도 삶이 벅찰터인데, 그 반대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에 대한 터부, 금기에 마음이 많이 의아스러운 상태였다. 그렇게 고정된 가치나 생각들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정*교수의 강연 뒤풀이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의 기억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최근 서경식님의 김지하에 대비되는, 김상봉님과 만남에 대비되는 생각씨까지 불을 지피고 있는 상태라 마음은 더 착잡한 와중이다.생명, 죽음, 체념, 슬픔, 아픔.....자유...윤리...도덕....

아픔이란 것이 아프지 않은 것, 불감의 영역에서 시선을 넓히는데 기여한다는 것. 애절하지만 공감의 능력을 높이는 것엔 동감하리라. 그런데, 우리들의 가치의 대부분은 자유라는 명사에 슬픔이나 아픔을 연계시켜 한뿌리로 느끼는 것을 거부한다. 대부분 자유를 밀어부치는 논리의 저변은 이것들과 절연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밀고 나간다. 철학자들의 진폭은 모르겠으나 하나의 가치로 환원하는 사고의 습관은 우리 사고와 가치판단을 잠식하고 있지 않을까?

체념이 자유의 폭을 확장시킨다. 자유의 한쪽에, 아니 양쪽에 체념을 거느리고 사고를 확장시킨다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를 존중하며 한편 그들의 선명함에 존경도 하지만, 더 더구나 이러한 쑥대밭같은 현실에서, 그들이 갈구하는 자유란, 침해받지 않을 자유란 사고의 반경은 얼마나될까? 체념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체념이나 슬픔을 안아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싹이 튼 자유일까? 어쩌면 따듯한 온실의 자유라 그렇게 현실의 바람을 만나면 움찔하고 마는 자유는 아닐까?

얼마전 진실을 향하는 자유. 그것은 만인이 평등하게 갖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현실이 진실로 향하는 온갖 열정과 관심을 거봐~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한마디의 중력으로 모두 떨어뜨리고 마는 현실을 읽은 적이 있다. 평등과 자유를 짝짓는 놀라운 사실에 얼마나 궁금증과 자유를 중도에 차단시켰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진실을 향한 자유. 밀고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를 느꼈다. 전문가란 분야란 한계를 짓고, 시인이나 소설가, 극작가, 의사, 변호사란 허울좋은 경계에 진실이나 궁금증을 강금시킨 나날이 부끄러웠다. 진실에는 경계가 없음에도, 무의식적인 구분이 강금시킨 자유의 공간은 무척이나 넓고, 그 즐거움이 무진장하리라는 생각의 자유를 맛보게 된 사실에 놀라웠다.

그런 개인에 출발한 자유의 공간. 그 공간의 한축에 체념과 죽음이라~ 생각의 자유일까? 현실의 자유일까? 가난함이란 것, 아픔이란 것, 슬픔이란 것이 자유를 감금하는 족쇄일까? 인식의 확장과 자유를 생산해내는 자산일까? 몸으로 밀어내는 슬픔과 몸으로 가득찬 아픔. 아마 자유에 손내밀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은 아마아마 고통일 것이다. 현실을 견뎌내야만하는 처절한 고통이리라. 거꾸로 자유로 손내밀지 못하는 그것은 상처만 남기는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아마 자유를 한손에 든 체념은 자유란 공간의 확장일 것이다. 머리속에서 사유하는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공간에 잠식당하고 있는 자유가 아니라 아마 너-나의 윤리를 확장시키는 자유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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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차창가로 흐르는 녹음속에 여러 생각이 든다. 시국이라는 것 - 맺히고 푸는 점이, 생각을 앞서 달린다. 아~. 골목길에 다다랐다고 하면, 그렇게 막혔다고 생각하면, 생각의 월담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지점. 생각의 꽃들은 현실을 밀고나가는 화려한? 행진은 이미 저만큼 내달리고 있다. 막히고 달리고 지치고, 또 막히고 지치고, 또 저기 무엇이 있다면 그리로 내달려가는 청룡열차같은 일상이란, 아~ 생각의 혼수상태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너무 내달려 숨이 막히는 것이 이런 것인가? 벌써 그(녀)들은 그 잘난 생각꼬리들을 휘휘감고, 저쪽에서 웃고 있다. 아~ 우리는 여기있지롱. 너희가 어제 저기있다고 도장 꽉 찍었는데, 너네가 말하는 우리는 벌써 여기로 성큼왔지. 그래 바보들아. 머저리 몸치들아~.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는 걸. 타고 넘거나 보듬고 넘어왔는 걸. 네가 하려는 것이 뭔지 알아하구 조롱반 농담반 섞인 듯.


너희들 생각이란 것이 바늘끝처럼 뾰족하게 하는 것만 알지 그 나머지는 젠병인 걸 알아. 그래서 우리는 늘 너희들을 믿지 않아. 내 그림자처럼 너에게 달라붙어 있거나 네가 기어갈 동안, 뾰족한 바늘에 침잠할 때, 우리는 휑하니 가슴의 결실과 방법을 알지. 눈물한점의 연대를 익히 알거든. 아` 그것이 가르쳐주는 것인지 가르쳐준다고 아는 것인지의 문제일까? 기회는 늘 있었지. 네 몸의 그림자처럼 똑같이 보고 있었지. 네가 시선을 저기에 응시할 때, 이슥한 밤이 되면 우리 그림자들은 뭉치고 넘는 연습을 하지, 너희들이 시선에 목마를 때, 어느새 너와 너의 그림자가 합치고, 담합을 했는지조차 모르지. 그래 모를 것이야.

어쩌면, 삶의 힌트란 것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란, 그저 느슨하기만 한 점선같은 유대도 주체도 최소한의 공약수마저 실천하지 못한 몽매에 툭, 툭 던져지는지도 몰라. 삶의 힌트가 톡톡 던져져도 늘 우리는 몰려가는 저쪽만을 보고, 그 방향이 어디로 던져질까만 걱정하는 걱정바보는 아닐까? 곳곳에 점선 투성이인 매듭을 이어보거나 울타리에 있는 점선들이 무엇이 있는 것일까? 타 넘고 웃고 있는 것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라고 늘 골목길을 따라 쫓아가면 숨던 그것이 무엇인지...늘 쫓아가기만 하지 말라고....말야.

설핏설핏 보여주는 그 그림자들이 어디에 웅성거리는지, 어디에 모여있는지? 그 슬픔이 배여있는 눈물의 샘이 어디서부터 솟아날는지 저어기, 저어기 광장으로 가봐야 하는 것은 아니겠어. 점선같은 점점 실선으로 돋아나는, 저어기 샘, 계곡깊고, 산들이 모여있는 그 곳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어. 여기 골목길 모아지는 저기 마당같은 곳에 모여보면 어떻겠어. 여기 네 사슬같은 족쇄들을 끊어보고 살아보면 어떻겠어. 연대의 실선이 살아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어떻겠어. 여어기, 여어기, 족쇄들이 사실은 다 삮아서 조금만 힘만주면 우수수 벗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야. 삶의 족쇄들이 사실을 그런 것이 아니라구. 그렇게 컴잉아웃하면 그 잘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삶의 족쇄에 얽매여 삶을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둔함의 늪이란 것을 말야.

기획이란 것이, 고민을 담고 섞는다는 것이 자꾸 가짜만 건들다보면, 정작 진짜에 둔감해져 건들 수 조차없어진다는 것. 주변만, 변죽만 건들지 말고, 그래 단도직입으로 갈 필요도 있다는 것을. 기획이란 것도, 기회라는 것도 별반 자주오지 않고, 첫사랑을 놓치듯 훌쩍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살아진 것과 살아갈 것. 살아진 삶과 살아만들어갈 삶. 거기에 삶을 붙쳐가는 일. 삶을 현실로 끌어내는 일.

뱀발. 

1. 말미에 다음을 주저한다. - 날카로운 첫키스 추억. 삶은 아련한 것이 아니라 삶은... 독을 뭍힌 화살같은 생각촉. 여름의 햇살은 표독하다. 은 제 운명을 갈라놓고서...한용운의 님의침묵이 자꾸 맴돈다. 날카로운 키스은 추억은 잊지말라는 듯 잊어져서는 되지않는다면서 간절히 다가선 다. 올해도 어김없이 담장에 붙은 장미는 저리도 붉고, 그 향은 입술을 다가가게 하지만, [제 곡조을 이기지 못하는 사랑노래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에 맴돈다. 뒷걸음치기만 하는, 늘 사랑노래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하는 우려다.  독이 될지 약이 될지. 키스의 기억은 아련할는지 되풀이되는 첫키스는 반복되기만 하는 것인지. 에 맴돈다. 생각이 맴돈다. 님들의 침묵에...그 침묵의 덫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너무도 많은 너무도 강렬한 추억만 화사하게 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두렵다 점점 더워지고 높아지는 햇살에 발린 화살처럼 내리쬐는 생각 촉은...마음을 뚫을 수 있을까? 몸을, 가슴을 관통하여 머리로 전해질까? 손과 발로 감전될 수 있을까? 또 침묵의 늪으로 잠잠해지는 것일까? 또 관조의 늪으로 수몰하는 것일까? 아니라면...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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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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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하루, 아이들과 만남들 사이. 나는 어디쯤 있을까 손을 잡고 품에 안으면 점점 녀석들의 몸속에 피시처럼 딱딱한 것이 들어앉아있는 것 같다. 텔레비전이 녀석들을 꼬옥 껴안고 있는 것 같아. 그녀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마음의 여백이 점점 점점 좁아드는 느낌이다. 그 녀석들의 마음의 오솔길로 내 마음을 살며시 놓고 싶지만, 피시에 텔레비젼에 주고 딱딱해진 마음이 모서리처럼 매만져진다. 말랑말랑한 마음들이 그렇게 땀 속에 비친 맑은 눈망울이 테레비와 피시에 안겨 좀처럼 품을 내주지 않는다. 그녀석들을 닮아가는 품은 낯설다. 마음을 비추일 곳, 녀석들에 네 마음 속에 노닐던 그 그늘을 다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래서 싫다 그렇지 않았던, 피시를 닮은 네 품과 텔레비젼을 닮은 네 눈동자가 싫지 않다던... ... 네 마음들의 그늘에 쉬도록 네 따듯한 품이 그립도록 네 청량한 샘물이 그리워지도록 말이야. 그렇게 네모난 녀석들의 품을 너무 좋아하지 말념. 네 마음이 그 녀석들을 닮아가면 서운하고 아픈단다. 어른들의 그 네모난 모서리 마음에 지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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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녀석 이름이 뭐드라. 열매을 먹은 기억이 한해를 바래서인가 이름이 가물거린다. 요녀석의 흔적을 쫓다나니 잎새의 몸통에 난 더듬이가 끌린다. 어디를 부여잡으려고, 예민한 촉수는 곤충들의, 나비들의 그것같다. 이어 그리다보니 참 이상한 것이, 잡을 곳을 잊은 녀석들은 어김없이 낙엽색으로 말라 있다. 먼저 자리를 잡지 못한 세상의 끈을 잡지 못한 기억을 과감히 중동내버린다. 그리고 그 예민함의 힘을 앞의 새로운 더듬이에게 보탠다. 그렇게 덩굴을 잇고 견디고 타넘곤 하는 것이다.

뱀발. 청미래덩굴을 그리다보니, 덩굴잎이 나는 곳에 어김없이 천사날개같은 더듬이가 춤을 춘다. 그 춤을 왜추는 것인지 무엇을 부여잡으려는 것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도 않지만, 불쑥 커버린 청미래덩굴은 어김없이 더듬이로 부여잡길 갈망한다. 그렇게 더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종태님도 이땅에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며 퇴색하는 빗바랜 더늠이의 안타까움이 아린다. 끝단으로 내동댕이치는 현실에서 우리가 타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부여잡고하는 것인지? 불쑥 마음한점, 손한점 내밀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무척 덥다. 가신 님들을 위해 애도의 마음을 간직해본다. 

그 마음들이 [ㅁ ㅏ ㅇ ㅡ ㅁ] 들이 쌓여 멀리멀리 흘러갔으면 한다. 목련꽃같은 그대들에게 그렇게 홀연히 투욱 마감한 아픈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져본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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