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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나 되었을까? 산책삼아 가다 보행교 아래 해파리들이 축제처럼 몰려든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매화잎을 심어놓은 듯, 어린 해파리들의 유영이 황홀하다. 그래도 서슴지 않고 다니는 핫꽁치 녀석들하구, 또 일군의 우아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다니는 것이 인상깊다. 어제 그자리를 지나 한바퀴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잔잔한 파도, 정박하였지만 곧, 어디를 달아날 것 같은 배. 오랫만에 땀을 내어본다. 6k 40'  달이라도 비추이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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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일욜 일터에 도착하니 **님 선물이 도착해있다. 한국화도 도자기...꼼꼼 살펴보았을 흔적들이 배여있는 듯. 조금 서둘러 이렇게 담는다. 맘놓지 못해 건진 것이 별반 없다. 고마움을 이렇게 표해도 되는 것인지~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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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06-1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화집 자꾸들여다보니 다른 재미가 있군요. 고마워요.
 

유명

스치는 느낌을 잡아두다. 친구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접목을 이야기한다. 생물학과 경제학과 융합되는 지점 말이다. 아주 얕은 교류. 그 문턱이 낮음에도 건너지 못하는 모임들의 풍경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과학관련 강연프로그램의 대중화사례를 이야기하며 우리들도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경제학프로그램 가운데 섭외, 대중성 외연확장 방법에 대해서도 들뜬 목소리가 섞여있다. 장사될 것 같다. 장사가 되면 더 깊어질까? 논의가 확장될까? 나무가 성장하는 만큼 뿌리는 깊어지는 것일까? 간간이 논의나 고민지점 사이로 그것들이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무엇, 왜, 어떻게 조심스럽지만 조심스럽지 않게 각기 다른 언어, 다른 공감의 진폭을 만들어내는 것엔 과정의 더깨가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을 여러사람이 다르게, 다른 것을 이상하게 보는 눈을 없앤다면 미리 저만큼 앞길을 가볼 수 있을텐데. 기획의 깊이를 기대해본다. 유명해지는 것과 생각을 품는 이들이, 과정을 담고 품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는 것인가? 비례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붙어있으며 좀더 현실력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저기로 여기를 사는 우리

평론의 고원, 작은사고를 감금하는 시대, 큰기획, 큰맞짱만 존재하는 시대의 우울. 시대의 조울. 바닥에서, 처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모두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래서 늘 잊어버린다. 주변의 덧셈에 대해서, 거대 기획에 함몰해서 작은 나와 우리모둠은 늘 건망이다. 이것또한 지나가리다. 평론의 카타르시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주 작은 것들에 명민하고 고민이 깃들지 않는 이상. 착각은 영원한 자유다. 현실은 늘 그 자리다. 그래 언제 작은 것에 뜨거워본 적 한번 있더냐. 늘 그랬듯이. 나라를 안고사는 이들의 마음 속엔 나라만 들어있는 것을. 작고 소소한 불감이 이렇게, 생각의 중앙집중이 생각이 분권이 되지 않아 늘 거대한 불감으로 이어져 왔던 것을. 한치도 되돌아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낳은 것을.  게으름의 저인망선은 오늘도 유유히 배회한다. 건망의 쌍끌이선이 오늘도 출몰한다. 내게 맞는 말과 표현만 편취한 채 사라질 것이다. 불감의 끝은 돌다돌다보면 그래도 한바퀴돌아 유감인가? 어떻게 해서, 생각들은 몰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생각들의 유랑단은 늘 쏠려다니기만 하는 것일까? 정박하지 못하는 채. 반성하지 못하는 채. 서로 대통령. 서로 거대담론. 사고는 늘 저기를 기준점으로 자란다. 나의 상처로부터 키우거나 아주 조금씩 만나지 않는다. 저기가 멈추면 사고도 생각도 멈추고 정지한다. 저기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거울이다. 저기가 있으면 조금 반짝거리다마는, 여기에서 상처를 저기의 자극을 받아 보듬지 못한다. 늘 여기는 잊혀질 뿐. 저기에 대응해 처리할 뿐.  여전히 처리국면의 한 지점을 지난다. 번번히 성숙의 기회는 불신의 심연을 키우는 지렛대로만 작동되는 닫힌 회로.

종교와 자유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가? 발제자의 질문은 묵직하다. 질문과 달리 종교인의 역할, 영향력 정치행위 등 정작 다른 곳으로 논의가 번진다. 신이 있다고 여기는가? 종교가 필요하다고 여기는가? 그리고 그곳에 개인의 바램까지 보태면서 말이다. 질문을 받자마자 질문을 바꾸어 단다. 종교는 선택?의 자유를 신장시키는가? 종교가 선택의 자유를 신장시키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면, 종교인이 열어두어야 할 사고의 지점은 어디인가? 거꾸로 종교가 얼마나 자유를 신장시킬 수 있는가? 라는 질문도 가능하지 않을까?

종교윤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선택이 아닌 예정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강요한다. 따라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자유와 책임에 대한 윤리의 핵심적 사항을 빼앗아 버린다.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교리는 각기 삶을 더 잘 꾸리고자 하는 갈망에 덮개를 씌운다. 인간행동의 근거로 초자연적인 힘을 붙들어 잡는 교리는 행동과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을 저해한다.

얼마나 많은 책임있는 자리의 종교인이, 아니면 신자들이 옳고 그른가의 선택의 문제를 선과 악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가? 얼마나 많이 논의를 기도를 받아들렸다고 하면서 원점으로 돌려놓는가? 얼마나 많이 신에게 마음을 저당잡혀 행동과 결과에 대한 책임감마저 느끼지 못하는가? 종교가 가져오는 많은 유익보다 얼마나 인식의 자유나 책임, 이웃에게 해야할 것을 눈을 가리게 하는 현실을 꼼꼼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아닌가?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보다 종교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하는 질문으로도 번져야한다고 여긴다.  어느새 안위의 전당으로 일상의 면죄부의 성소로 자리매김하는 현실을 아파할 줄 알아야 하므로... ...

오천만원과 박봉, 노조

경제를 우리몸에서 잘근잘근 떨어뜨린 연유로, 사회단체는 박봉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개인의 헌신이 필요한 것이지 최저임금에 근사하는 생활로도 당연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눈치가 일상이다. 어느덧 사회단체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경제력을 뺀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정도면 단체가 불감한 것이다. 회원들의 살림살이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류의 삶이 있으므로 우리아파트, 옆집이 사는 환경과, 달동네의 비루한 삶이 어느 덧 불감해졌으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과외/대출/기본경제력비치상품. 그렇게 삶 따로, 운동따로 활동따로, 양심의 가책따로의 나날이다.

왜 일까? 왜 터부로, 금기로 자리잡았을까? 사회단체의 살림살이와 회원의 살림살이, 상근자의 살림살이가 저임금-저활동력-빈곤의 축으로 자리잡아 버린 것인가? 헌신을 강요하고 박봉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인가? 왜 자신과 다른 삶, 경제력을 인식조차 하려들지 않고, 자신모둠의 경제력에서 벗어나보려 하지 않는 것인가? 생각조차 허락하지 않는 금기사항이 되어버린 것일까? 논의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생각이 자랄 틈조차 없던 것으로 여겨야 할까?

오천만 땅기면 눈에 보이는 활동력이 그려진다. 맘만 가득하고 생각만 가득한 것과 현실의 부재의 간극을 채울 수 있다. 과제를 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짬짜미의 분담이 그래도 제법 그럴 듯하게 제도화되는 것이다. 일을 저지르고 볼 만도 하지만 생각이 함께 자라지 않고서는 삶의 아주 작은 부분 할당을 받지 못하고 선, 또 한번 상품에, 그럴 듯하게 마음을 기댈 곳 고르는 곳이 되고 말 뿐이다. 고르고 대행하는 곳이 아니라 내 삶이 묻어날 수 있는 곳이나 설령 잘 못되더라도 채우고 만들어나가는 곳이 되어야 하는 연유다.

오천을 땡기는 일이 그래서 부자에게 적선을 받는 일이 아니라 우리 회원의 삶이 전망이 담긴 마음을 받고 싶은 연유이기도 하다. 그 마음의 두레가 박봉에 시달리는 박봉의 활동에 시달리는 사회단체의 숨꼬를 터주고 그래도 삶이 보이는 공간으로 아주 조금 희망이 존재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뱀발 

금욜,토욜 아***, 참* 집알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의 강도도 깊어 흔적이 필요하다 싶다. 근대사모임에선 박목사님의 발제에 이은 문제제기가 인상깊다. 그만큼 따듯한 마음과 열린 생각이 가득하시기 때문이리라. 말미 예전에 하시던 사업과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그런 게으름이 스멀스멀 모임을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좋아하는 것과 현실의 격차가 있다는 것일 수도, 개인과 모임의 문화의 간극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그리고 현재의 시국, 시류에 대한 이야기. 지켜봐야겠지만 좀더 그 아픔들이 거봐 내가 그랬잖아. 내가 잘한 거잖아 못한 거잖아로 번지지말고 작은 것들을 이어주는 끈들로, 갈라서는 계기로가 아니라...그렇게 이어지는 실뿌리로 작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전인수는 현실을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삶이, 기획의 시간이 좀더 길어졌으면 하는데, 늘 일회성, 단발성이 아쉽다. 좀 길게 고민하는 친구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진지하게 경제, 살림살이를 모임에 일상에 붙이면서, 아마추어같은 고민은 많이 줄였으면 한다.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서서, 좀더 밀착해서 고민을 나누었으면, 그럴 기회를 더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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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생각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 자유를 확장하고 넓혀주지만 

같이 생각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따로의 연대를 넓혀주어 

윤리와 현실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의 극단과 현실의 유무를 함께 품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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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처리합니다. 오늘도 당신은 뾰족하게  향하였으므로. 

당신을 처분합니다. 오늘도 당신은 일용할 일을 주셨으므로.  

당신의 실루엣을 보고난 뒤 

당신에 얽힌 실타래에 엮인 뒤 

당신을 어루만집니다. 그런데 당신 근처에 얼씬 거리는 것이 

아직도 처리하고 처분하는 일상으로 비추입니다. 당신을 품는데 인색한 나날. 

어쩌면 세상은 당신을 품는 이와 당신을 처리하는 이로 나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오해하는 이와 이해하는 이로 나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일이되니 처리할 뿐. 품지않습니다. 그렇게 하루는 저물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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