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가 낳은 야수이고, 오늘은 지난 십년의 숙성이다.

뒤풀이, 부문운동이란 것, 소비자와 생산을 가르고, 소비자운동과 노동운동을 가르고, 그 장벽은 쉬이 넘어서지 못할 것이란 것, 그 성이란 것이 나름대로 집착이 있어, 나름대로 서열이 있어 쉽게 양보하지 않으리란 것. 그러니 더 불안해지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더 쫙 붙들게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 공공성을 갖는 기관들의 혁신이나 개혁은 이렇게 해서 어려운 것이고 늘 타겟이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필요하지 않으면 정리해야 한다. 개혁대상이므로 정리해야 한다는 것. 구태를 갖고 있으므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온다. 공공 가치, 상위의 가치가 더 우세하므로 하위의 노동자로서 갖는 가치는 더 부족하다. 공공가치가 더 지체된다면 하는 순환논리에 대한 해답으로, 그래서 정리해도 싸다. 공공가치라는 명분아래 노동자로서 권익과 그 이득을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공공가치가 더 중요하므로 더 중요하지 않는 가치는 잘라내도 된다.

이땅에 살면서 경쟁력이 없다면 퇴출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고, 은근히 약자들에게, 조금 낫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들이댄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것이 이것저것 부위별로 나누고 조각낼 수 있는 것이라면, 병든자도 노인도, 사고로 장애를 가진 이들은 모두 경쟁력이 떨어지므로 거꾸로 이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가 맞는다.

부문운동도 서열이 있는 것이므로 노동도, 농민도 중요하고, 다른 부문은 서열에서 한참 떨어지는 것이므로 중요하고 비중을 별반 둘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기껏 필요해도 보조적인 위상밖에 가질 수 없다라고 하는 것들. 아마 세뇌의 기억은 아닐까? 세상의 것들을 물건이나 조립가능한 것으로 보는 기계주의자들의 생각은 아닐까? 그토록 단순한 논리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현실아닐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다보니 어느새 물들어서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프지 않고, 나는 사고나지 않고, 나는 늙지 않고, 나는 대박을 맞을 것이고, 나는 짤리지 않을 것이고.......나는 결코 약자가 되지 않을 만큼 능력이 있다는 자만으로 늘 나날을 충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도도함이 살아있는 것을 서열로 줄을 세우고, 도식화하고, 부속품처럼 갈아 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불감의 흔적이 그렇게 내비춘다.

이런 말없는 동의가 모든 일터를 룰렛게임에 버금가는 s,a,b.c.d 순환시스템으로 상대평가의 늪으로 빠뜨렸다. 그리고 그 해악이 어디에 미치는지도 묻지 못하게 한다. 당연한 것으로, 나는 아니다란 평가의 악순환. 누가 점수를 매기는지, 누가 서열을 매기는지도 인식을 애써하지 않으려 하면서 말이다.

사고나는 이도 말이없고, 아픈이도 말이없고, 늙은 이도 말이 없고, 부채에 신음하는 이도 말이없고, 짤린이도 말이없고, 약자는 늘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세상이므로, 그렇게 잘나가는 이들은 또 다시 서로를 가려내고 총을 서로의 머리에 겨눈다.


부문운동의 회복은, 사회운동의 활성화는 내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다. 부문운동의 합이 간신히 내몸에 붙게되면 조금, 아주 조금 움직일 지 모른다는 자작이다. 하나씩 불감을 걷어내면 스스로 나의 삶을, 통증을 회복해내는 일이다. 조합원으로 개인이 아니라, 생협의 일원으로, 비정규직의 일원으로, 농민의 일원으로, 언론의 아픔을 조금씩 회복하는 일이다. 기계가 아니라 부속품처럼 저 멀리떨어지고 누군가 대행하겠지란 착각을 거두어내는 일이다. 우리 가족의 촘촘한 일상의 동선이 모두 그 부문운동에 그물로 이어져있다는 것을. 당신이 집착하며 이것만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씩 서로 나눠 아파하는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운동이란 것. 활동이란 것들이 마치 자본의 대차대조표처럼, 1년을 기간으로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어쩌구저쩌구 서로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삶의 기간을 삶의 공백이나 동선을 감안한 활동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삶을 함께 기획하고 회복해내고, 다른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고 가져가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 살궁리와 삶 - 활동을 실무자가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픔과 할 일들, 여건들을 부여잡고 밤새 토론하고 논의하고, 살림을 끌어내고 현실의 틈을 서로 만들어내는 일은 아닐까? 그저 대의나 여건이 나은 헌신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을 지금보다 낫게 살아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다 할 수 있는 생각의 물꼬를 건드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없이 살다보니 정신 줄을 놔놓고 살아온 십년이 아니라, 몸으로 헌신해 몸이 닳고 망가지는 그런 나날이 아니라, 그래서 그(녀)와 함께 이렇게 살고 싶다. 최소한 5년은 이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면 그 삶에 기부할 수 있는, 그(녀)의 삶을 변화시켜 5년뒤엔 이런 일을 함께 해봄직한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부문과 시간의 강박과 사람을 제외한 일에 집착을 조금이나마 벗어난다면?
 

뱀발.  

1. 진보는 늘 감탄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번도 그들의 뒤를 쫓다보면, 머리의 그늘, 분파의 그늘이 얼마나 깊고 깊은지, 절대 꿀리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다. 하지만 그런 강직이 시간이란 함수에 아무런 너-나-너-...의 그물을 바래고 삶에 퇴색해서 본연의 의지는 간 곳이 없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그들은 우리 삶을 포위해 그들의 삶으로 전락시켰음에도 아파하지 않는다.  

2. 내 손에 쥔 것만 아플 뿐..다른 이들이 아파하는 것을 아파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도 아프므로, 그래 그 아픈 것을 놓고 서로 엇갈려 손을 맞잡을 수는 없을 것인가? 그 통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면 아주 조금 너-나-너...가 무척이나 아프고 외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팽겨쳐진 삶들에 조금이라고 기운을 북돋을 수 있을까? 서로 원하는 것을 내것으로 끌어당기려하지 말고 느슨한 연대나 아픔. 그리고 삶의 감탄 1..생각의 뿌듯 1,2,3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3. 그리고 그토록 부여잡았던 강박에 벗어날 수는 없을까? 각론의 각개격파가 아니라 삶의 총론을 되짚어볼 수는 없을까? 부문운동의 유니온삽은 없을까? 아니면 5년 삶동지의 유니온 샵은 없을까? 생각도 몸도 가슴도, 손도 발도 서로 빌려줄 수 있다면, 그렇게 연습해본다면....아마 늦지 않을 수도...성큼성큼...감탄이란 것도 낳을 수도, 오늘이 어제가 낳은 야수가 아니라, 오늘이 지난 십년의 숙성만이 아니라 ... 늘 오늘이 어제의 감탄이 낳은 오늘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오늘의 누적이 또 다른 경로를 만들 수는 없을까? 불안에 치떠는 우리를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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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from 木筆 2009-10-13 14:38 
    [칼 폴라니로 가는 여러 산책길에 대한 소묘]란 주제로 텍스트 [초국적자본주의인가 지역적계획경제인가]에 다른 색깔들을 배경삼아 자료를 만들어본다. 가장 잘배우고 알게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책들이 섞여 어디에 기록했는지도 깜박한다. 어쩌면 하고싶은 이야기는 산책길에 나서기전 준비사항에 있다. 경제인이란, 이분법에 의한 근대인, 직선적인 시간관이나 발전관에 녹아있는 우리는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블로그의
 
 
2009-07-27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8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펌] 090725 거친시대 새길찾기 [지역정치,공공성,경제 그리고 우리의 삶]

[지역, 지방자치, 그리고 민주주의 -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현실과 전망]

1-1. 대표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원하는 '시민 참여의 안내자'가 될 수는 없을까?

- 풀뿌리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공공의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하는 시민개념의 확장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정치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여성, 아동, 이주노동자들도 참여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 또한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참여는 선거에서 투표와 같은 일회적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참여를 의미한다.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공적인 관심과 참여를 의미한다.
- 누가 권력을 잡았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은 시민이 자치의 주체로서 지위를 회복하고 자치의 주체로서 자의식을 깨치는 데 있다
.

- 중앙집권적 국가로부터의 탈피와 연방주의 사고의 도입

1-2. 결국 지역 시민운동은 평범한 주민이 자신의 삶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자기 삶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다른 주민과 관계망을 형성하며, 그 관계망에서 실천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주민'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지역 시민 운동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자기 조직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주민이 모여서 모둠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단체로 까지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1-3. 조직중심, 단체중심이라는 것은 결국 그 중심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지도자, 활동가, 전문가)이 끌어가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시민의 참여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활발히 활동을 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을 시민운동의 관객, 소비자로 만들고 있다. 시민운동의 주체로서 '시민'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이다. 이러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참여의 동기와 욕구가 어떻게 발산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2-1. 어느 사회복지학자는 '국민연금 불신의 진짜 이유'라는 국민은 국민연금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오해가 인식 주체의 잘못된 판단 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해 거부는 근거조차 접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2-2.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을 얻을 수 있다. 시장임금은 노동시장에서 능력대로 벌고 취향대로 쓰는 돈이다. 반면 사회임금은 노동시장에서 번 돈을 한 주머니에 모아 전체 사회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다시 나눠 갖는 재정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를 겪으면서 오로지 시장임금에만 의지해왔다. 그만큼 시장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제 사회임금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2-3. 사회임금의 취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든 우리 동네 자영자든 아이가 있으면 아동수당을 지급받고 몸이 아프면 경제적 부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노후생계 문제 역시 해결방향은 사회임금이다. 

2-4. 사회연대전략의 실패와 한국 노동 운동의 한계 -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저소득 계층 보험료 지원사업- 
 

 

 

 

 

 

 

 



3-1.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 담론 비판 - 이종태, 사회주의는 처세의 상식...진보사상과 양산박, 너무 바쁜 386 ,이종태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후의 파라다이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프레시안 [사회적 대타협론을 위한 변]의 보완 수정 - 잠정적 유토피아와 현실간의 왕복운동이다.

 

 

 

 

 

 

 

뱀발. 주말 강연회. 짬을 낼겸, 책읽기를 채근할 겸해서 강연자분들의 책들을 미리 주문하여 한밭에 두다. 짜투리시간을 내어보니, 무엇을 할 것인가도 중요한데 행간의 과정들이 인상깊다. 하승수(하승우님의 형? 맞는지 ㅎㅎ)님의 생각자락을 가본다. 오건호님의 조합원들과 만남, 생각을 관철하기 위한 노력, 이종태님의 박학이나 최근 동향에 대한 부분들, 진보운동에 대한 생각들을 잠깐잠깐 들여다본다. 강연내용 이면이 더 있거나 드러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면서 말이다. 강연, 토론이 5시간이상 이어진다. 진행을 맡으면서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그래도 강연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 힘이 들어서인지 야심한 시간에 들어와 거의 잠으로 하루를 꼬박 보내게 된다. 참석하신 분, 준비하신 분, 강연자분들 노고에 감사. 여건으로 참석치 못한 분들께도 감사. 

-지역정치, 공공성, 경제 그리고 우리의 삶 녹취록-

 

혹 동영상 필요하신 분은 없겠죠. 혹시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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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약 네가 변한다면 난 5년이상도 기다릴 수 있어
    from 木筆 2009-07-27 17:23 
    뒤풀이, 부문운동이란 것, 소비자와 생산을 가르고, 소비자운동과 노동운동을 가르고, 그 장벽은 쉬이 넘어서지 못할 것이란 것, 그 성이란 것이 나름대로 집착이 있어, 나름대로 서열이 있어 쉽게 양보하지 않으리란 것. 그러니 더 불안해지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고, 더 쫙 붙들게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 공공성을 갖는 기관들의 혁신이나 개혁은 이렇게 해서 어려운 것이고 늘 타겟이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필요하지 않으면 정
 
 
밀밭 2009-07-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생하셨슴다. 녹취록이 상당히 빠르네요. 잘 읽고 갑니다.ㅎㅎ
 
읽거나 읽고 있는 책

1. 화가의 신체성

고흐의 터치가 변화한 것이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엄청난 힘과 품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단시간에 그린 그림과 달리 그가 "밭을 가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구불구불 굴곡을 만들며 그린 것이다. 한 번의 '구불'마다 생명이 깎인다고 할까, 깎인 생명이 캔버스 위에 쌓인다고 할까. 그런 변화는 아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생레미 시대에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화가가 신체성을 자각해가는 역사이다. 그림을 그리는 힘의 강약이 신체에 전해져 화가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대신 거친 돼지털 붓으로 그리면, 시각적으로도 다른 것이 나오게 된다. 화가에게는 몸으로 전해져오는 감각이 있다. 근대회화는 이 감각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런 감각이 일단 해방되면 거기에 반응해, 힘을 담아서 리듬을 만들 수도 있고 터치로 두께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물감의 두께로부터 전해져오는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의 몸이 알아서 반응해하는 식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매우 신체적이라 생각한다.


고흐는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진 못해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 마치 자신의 머리로 선택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고흐의 원근감과 색채에는 신체화된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303

고흐는 원근법을 부정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원근법을 부정하지 않고 제대로 지키려 했는데, 그만 원근법을 위반하고 뚫고 지나가게 된다. 고흐가 죽고나서 20-30년뒤 대상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고흐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그런 거리 감각와 인간주의적으로 말하는 고흐 자신의 삶의 방식, 그것도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훨씬 신체화된 듯한 삶의 방식. 더럽고 가혹한 자유 쪽으로 기울어가는 삶의 방식과 원근법을 뚫고 나가 저편까지 가버린 시선은 뗄 수 없게 꼭 붙어 있다.

2. 


정서에는 기쁨, 슬픔과 같은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명사적 정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듯한', '가슴 설레는' 것과 같은 '형용사적 정서'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정서는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부사적 정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말하는 속도, 음의 높낮이, 말하는 이의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 달라진다. - 부사적 정서란 오감을 통해 전달되고 느끼는 정서적 신호를 뜻한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정서 공유의 부사적 차원을 가르키는 것이다. 마치 '얼씨구'라는 단어가 탈춤에서는 감탄사가 되지만, 일상에서 비꼬는 단어로 느껴지는 바로 그 차원이다.

부사적 정서, 즉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정서 공유는 수도관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전달하려는 논리적인 앎은 물이다. 물은 수도관이 있어야 흘러갈 수 있다. 수도관의 한구석에 구멍이 나 있으면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다 새 나간다. 공유가 가능하려면 바로 이 부사적 정서로부터 활성화되는 정서 공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 부사적 정서가 가장 강하게 활성화되고 공유될 때는 재미 있을 때다.

감정정체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식은 '내적 민주화'다. 내적 민주화란 자신의 정서적 장애와 결핍증후군을 인식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많이 슬퍼하고 타인에 의해 진심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인내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편견과 적대감, 폭력의 위험이 생겨난다. 내적 민주화는 '치료적 문화'를 통해 가능하다. 치료적 문화란 함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뜻한다. 강요나 억압에 의해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정서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타인과 정서공유를 통해 내적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문화다.

순종적이며 획일적인 사고에 쉽게 적응하는의존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구체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며, 타인의 기대와 요구를 재빠르게 찾아내는 재주만 발달할 뿐이다. 타인의 요구에만 적응하는 사회화과정은 여타의 심리적 기본 욕구들이 억압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결핍증후군'이라 한다. 어릴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 부족한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고 한다. 다양한 중독현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억압된 삶의 경험들은 '감정정체'라는 결정적인 정서장애로 이어진다.

서양인은 타인의 존재를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 '너'다. 한국인의 상호작용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그러나 우리라는 경계선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서구인들과 달리 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너에게 나는 정말 간까지 빼줄 만큼 잘한다. 우리사이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존재근거가 되었던 '우리'라는 그 울타리가 변형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우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그 대안적 우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왜곡되고, 건강한 일상의 재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정서적 교류가 박탈된 한국 남자들의 의사소통 장애가 더 더욱 근육과 살을 탐하게 된다.
 

뱀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근대도 넘어서지 못하고, 모더니즘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땅의 남자들과 남자가 된 여자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렇게 방점찍고 있는 사람일테고, 점점 울타리는 좁아들고 다독거려줄, 받아줄 곳 하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하게 축구에 동호회, 부나비처럼 모여들고 메뚜기처럼 우리만을 만든다. 너는 안중에도 없고... ...  명사-동사, 부사에 대한 나름의 의미를 잘 정리해둔 것 같아 옮겨 적어본다.  아래책은 저자도 코멘트하고 있지만 심리학적 환원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많다. 현상에 대해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그에 대한 텃치가 매우 유사하고, 간간이 보이는 편협된 시각도 많이 내비친다.  놀이-재미-문화가 심리적 공감이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루된 것이 그토록 많은 제도의 시선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책을 두고가서 지금에서야 접힌 부분을 메모해둔다. 시간이 멀어지니 기억이 희미하다. 외려 기억을 상기시키는 시간이 더든다.(고뇌의 원근법) ...회화의 신체화를 말하니 오치균?의 지필유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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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의 인문(酌)

1. 가끔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내 마음이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는지? 몸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마음만 온전히 남게 되면, 마음 속엔 온통 사람들이 머물고 있음을,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사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이렇게 생각 속에서만 배회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란 것.


2.  그런데 블로거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교차되지 않는 동선, 마음의 그림자만 보여 불안하다. 삶의 동선에서 교차되지 않기에,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하지만, 마음들이 울타리안에 머물러 그 마음의 빗물들이 웅덩이에 고이지 않나 싶다.


3.  가끔 머리, 가슴, 몸, 손, 발을 따로 보고 거기에 꼬리말을 붙인다. 머리의 연대, 가슴의 연대, 몸의 연대, 손의 연대, 발의 연대로 말이다. 그러다가 머리(만)의 연대, 가슴(만)의 연대, 몸(만)의 연대, 손(만)의 연대, 발(만)의 연대로 이어가다보면 아프다. 그런데 일상이 그렇게 섬처럼 인지되고, 그 섬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의 진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벽의 자장안에 더 강하면 강할수록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에 가슴이 미어진다.

4. 블로거들의 인문은 벽을 트지 못한다. 갇힌 회로나 갇힌 곳으로 소용돌이의 나선을 그리며 소멸한다. 생활의 자장에 갇혀, 나에게 갇혀 삶은 블로거의 밖을 외출하지 못한다. 빈약한 손과 발. 무서운 속도의 자장. 생각의 과속은 또 다른 색깔을 희석한다.

5. 하지만 누군가 물음을 댈 것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여유가 밀고가지 못하므로 인문은 더 여유없다라구.

1. 그럴까?

2. 삶의 여유가 없다라고 여기나 삶과 여유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연애란 것이 삶의 여유가 있다고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그건 핑계의 한부류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아마 그것은 머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이 하는 일일 것이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의 모임이겠다 싶다. 머리만 끓어넘치는 것은 아닌가?


3. 음주의 잔향은 깊다. 마음을 깊게하거나 들뜨게 만들고, 생각할 엄두를 내지 않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약물복용은 또 다른 진폭을 만들고, 가끔은 이해되기도 한다. 중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불특정다수블로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아마 연애들을 하고싶은가보다. 사람들과 관계하고 싶은가보다. 마음 속에, 밀려나간 몸 속에 꿈 속에 사람들이 남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

4. 그러다가 마음을 내민다. 머리만, 가슴만, 몸만, 손만, 발만이 아니라 만을 빼내고 (도)를 들이민다. 머리도, 가슴도, 몸도, 손도, 발도. 그래서 머리-가슴-몸-손-발의 그물에 갇히고 싶다. 그 그물에 드러누어 한여름을 보내고 싶다. 해변가 야자수 그늘에 느긋한 낮잠을 즐기고 싶다. 그대도 옆에 눞고 싶은가? 우리는 (만)의 시대에 지치도록 살고 있다고, 그대는 느끼는가? (도)의 시대가 열리지 않으면 (만)의 늪에서 당신의 삶을 소진될 수 밖에 없다고.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머리가 커서 이미 손과 발이 퇴화되었는지 모른다고, 눈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감각이 소멸했고 더 이상 즐거움의 촉수가, 신경이 발라비틀어졌다고... .. 

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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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신

느낌의 단편들 - 누더기를 걸친 자가 지나갈 때마다 발바리가 짖어대는 것은, 알고보면 번번이 개 주인의 의도나 사주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발바리는 왕왕 그 주인보다 더 사납고 지독하다. 


한때 떵떵거리던 자들은 복고를 주장하고,지금 떵떵거리고 있는 자들은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한 번도 떵떵거려보지 못한 자들은 혁신을 주장한다. 대체로 그렇다. 대체로! 그들이 말하는 복고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몇 해 전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지 우,하,상,주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적막을 느낄 때 창작할 수 있다. 정갈을 느낄 때 창작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창작은 사랑에 근거하기 마련이다. 양주에게는 저서가 없다. 창작은 자신의 내면을 서술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보아줄 사람을 바라기 마련이다. 창작은 사회성을 지닌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한 사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있다. 벗이나 애인.

2. 불교학과 불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비견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문헌학은 로마시대, 중세의 신학적 부활과 재건에 봉사하면서 역사의 연대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헌학은 예술의 차원에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으로 부상하게 된다. 다시 역사학과 문헌학의 관계는 르네상스에 이르러 더 공고히 된다. 영어로 문헌학 philology은 "배움과 문학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1716년에서야 '언어의 과학'이 되었고 18세기 말 독일에서 그리스 세계의 "과학적 연구"를 의미하게 되었을 대 비로소 언어에 대한 학문이라는 정의를 갖게 된다. 문헌학이 언어학적 변모를 거치는 것은 산스크리트의 발견으로 인한 비교언어학의 시작이다.(1786년)

르낭 - 문헌학이란 정신적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정밀과학'이다. 여러 인문과학과 문헌학의 관계는 물체에 관한 여러 철학적 과학에 대한 물리학과 화학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61

한일 불교학의 근대화에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불교학의 근대화에서 학문의 제도적 인프라를 택했고, 조선은 사람을 선택했다. 양자의 차이는 장기의 말판과 말의 관계와 같다. 말판과 말은 둘 다 장기를 두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학문의 장기적 전망으로 볼 때, 차이의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 장기 말이 없어지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해서 게임을 계속할 수 있지만, 장기판의 온전한 형태가 없으면 게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구조적 비유는 지금 학계의 사정을 잘 반영해준다. "인물"을 중시하는 한국의 학계는 주로 출신학교나 학위에 모든 학문의 미래를 걸고 있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할 제도적 장치가 소홀할 때에는 그 인물은 물론 학문까지도 고사해버리고 만다. - 일본은 '불교학'을 근대화시키고자 했고, 조선은 '불교'를 근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4-75

'네팔-독일 간 필사본 보존 계획'(1970.2)-독일의 두 인도학자가 기획한 것으로 네팔의 고문서들이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남겨저 보존되었다. 독일은 이로인해 여러면에서 불교학이나 인도학의 영역에서 상당한 문화정보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독일이 기록한 필사본은 모두 5백만장의 폴리오로 이루어진 16만건에 이른다.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심재관, 책세상, 2001

 뱀발. 책접이를 해둔 것을 메모해두지 못해 잠시 짬독하기 전 남기다. 수구라는 것이 저기 무엇 내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일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두 떵떵거렸던 자들이었기에 더하다는 것이다. 주인의 사주도 없었는데, 개들은 물고 짓어대고 알아서기고 난리부르스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취급을 해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창작에 대한 메모는 최민식님의 내용과 겹친다. 우리 불교에 대한 지적도...기억해둘만 한데 얕은 앎으로....겹칠 때가 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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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7-2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에 대한 메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적막감은 생각을 헤집게 하고 또 다른 현실을 상상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게지요. :)

여울 2009-07-23 10:30   좋아요 0 | URL
도피만은 아니겠죠. 사랑하거나, 또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만들거나,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거나.....다독거림을 받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