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비한점에 대한 사유
만약 네가 변한다면 난 5년이상도 기다릴 수 있어
2008_9 내맘대로 독서 편린 결산 (1)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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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로 가는 여러 산책길에 대한 소묘]란 주제로 텍스트 [초국적자본주의인가 지역적계획경제인가]에 다른 색깔들을 배경삼아 자료를 만들어본다. 가장 잘배우고 알게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책들이 섞여 어디에 기록했는지도 깜박한다. 어쩌면 하고싶은 이야기는 산책길에 나서기전 준비사항에 있다. 경제인이란, 이분법에 의한 근대인, 직선적인 시간관이나 발전관에 녹아있는 우리는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블로그의 속내나 흔적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눈치챌지 모르겠지만, 그 관점에서 벗어나는 흔적이 마음에 배이지 않으면 폴라니에 대한 접근은 끊임없는 되돌이표가 되거나, 또 다시 지금 자신에게 묻어있는 관점으로 색칠하지 않을까 싶다.  

삶의 철학이 자유를 몸통으로, 사회를 오른쪽 날개, 죽음(체념,슬픔,아픔,고통)을 왼쪽날개를 둔 이가 유토피아를 철저히 부정하는 삶을 살아냈다는 마음들을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인류학적지식, 경제학적 지식, 생물학....앎이 필요하겠지만, 앎에 대한 굶주림도 중요하겠지만 몸으로 읽는 연습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머리로만 가져가지 말고 가슴과 마음, 손과 발로, 홀로있는 나가 아니라 나-너로 가져가는 방법으로도 읽으면 어떨까? 그것이 그래도 국가와 사회를 분리하고 사회라는 실체를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그의 말에 다가서는 것은 아닐까? 거칠고, 추상적이고 어눌한 표현에 뜬구름같았을 여러분들에게 송구스럽고 미안한 마음이지만, 사실은 산책을 하기전 준비사항에 대해 치열과 설전과 논의, 고민들이 중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역시 폴라니의 삶과 철학이란 나무에서 그저 유실수를 하나 따먹거나 폴라니를 묻어있지(embeded) 못하게 하고, 발라내는 일만 하는 것일 것이다. 모든 앎이 그러하겠지만 자신과 나-너로 녹이고 배이지 못하게 하는 일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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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상화하는 인식의 한계와 위험
    from 木筆 2009-10-20 09:02 
    -프로메테이즘- (중략)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혁명적인 사고를 수행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캄프는 그의 저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조작된 사회 여론이 젊은 세대에게 개인이 전부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더라도 젊은 세대가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2. 머리에서 발끝까지
    from 木筆 2010-07-23 14:17 
    날로먹기 - 실천적 지식, 과학적 지식, 자유로운 정신들, 실천적 실험, GDP에 잡히지 않는 경제, 필요에 의한 소비, 필요의 양과 질, 생협, 레츠, 두루의 양적 표현에서 질적 표현으로 나아가는 방법, 체험으로 인한 시각의 확보만큼 나아감. 시장의 하이에크식 해석. 시장이 정보(지식)을 섞이게 하고 나눌 수 있게 한다. 시장의 기능을 소비가 아니라 정보의 소통단위로 해석하여 GLC처럼 사회주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함. 렛츠와 생협의 대전이란 지역에 집
 
 
파란여우 2009-10-1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화면을 클릭해보니까 꼭 간첩들 난수표가 저런것 아닐까 문득 그런...ㅎㅎㅎ
나, 언제 이런 강의 한 번 받아볼지...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지적허영이 이럴 때 무색합니다. 오프라인에서 나도 할말 많은데 말이죠. 온라인에선 글빨이 딸려서 못하겠고.

국화가 그새 피었더군요. 세상에나 꽃 핀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여울 2009-10-14 11:23   좋아요 0 | URL
ㅎㅎ

소국이 많이 피었습니다. 국화의 계절이네요. 수련도 내밀던 꽃들을 숨죽여갑니다. 가을이 온 것이죠. 숲의 향기와 가을색감이 그립습니다. 놓치지 말아야죠. 한틈이라도 내어서... 향기도 마시고 빨강도노랑도 마시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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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게으름반-강진다산초당의 대회 참관으로 늦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니 기한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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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삶 앞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ing
    from 木筆 2010-12-09 17:19 
    1.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느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자유시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60     2.
 
 
 

 연구실의 과학자에게 당신이 연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치와 관련이 있습니까? 사회적인 이해관계와 관련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제가 하는 연구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되묻는 것은 아닐까? 순수한 연구에 밤낮을 불문하고 몰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우석이 아니라도 연구원이나 과학기술자들의 행위는 정녕 순수한가? 만약 과속방지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에 관계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 교통경찰의 역할, 법규, 운전자의 습관, 동네의 담론, 서건,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이권 등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이란 것에 기술이란 것에 사회가 뭍어있을 것이다. 마치 순수한 것인냥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연결고리를 물고 들어가면 순수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관계에 무관하다고, 세상과 무관하다는 실험실의 연구원을 저기 태평양 섬의 한 부족이나, 저기 아프리카나 아마존 정글의 부족처럼 정체를 파악하기위해 인류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똑같이 접근이 가능하고 그렇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부족처럼 실험실 인간을 연구한다면, 그 근대인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존재인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얼마나 자신을 맹신하는지에 대한 구멍숭숭뚫린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도, 문학도, 예술도, 정치도, 경제도, 법도, 철학도 제 잘난 맛에 가고 있지만 역으로 시인부족이나 정치인부족이나 법학부족이나 말도 되지 않는 뿌리없는 존재의 맹점을 까발릴 수 있으리라.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 생각이 딛고 있는 바닥, 고정관념이 딛고 있는 바닥들, 그 전제에 대한 고찰로부터 우린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만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씁쓸하게 자본주의를 뱉어낸 인간과 맥락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 바닥들이 얼음처럼 이젠 다 녹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 헤엄쳐야만 할지도 모른다. 서로 손을 내밀어야 겨우...저만큼... ...이미 늦은 일일까?  그게 아니다라고 하는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봐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치의 절반은 과학과 기술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자연의 다른 반쪽은 사회에서 구축된 것이다. 이 두 쪽을 다시 이어서 맞추고 나면 정치적 과제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1.

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스 출신의 과학기술학자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전공하였고 현대과학기술에 관한 인류학적이고 철학적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복잡한 행위자-연결망이론으로 이론적 성과가 외화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에 대해 아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시선을 다시 돌릴 것을 제안한다. 대상을 정화시키고 분할하며 분리시킨 뒤, 익숙하게 재가공하는 모든 행위는 대상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고, 그것을 증식시킨다.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것, 사회로 환원시키는 것. 과학과 기술에 얻은 것을 그대로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나 그렇게 따로따로 가져가는 것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혁명의 기관차는 더욱 더 지칠줄 모르고 달려왔다. 

   
 

"우리가 냉동 배아, 전문가 시스템, 디지털 기기, 센서 기반 로봇, 이종교배 옥수수, 데이터베이스, 향정신성 의약품, 레이더 신호기가 부착된 고래, 유전자 합성기기, 청중 분석 장치 등등에 둘러사이게 된다면, 이 키메라들이 대상이나 주체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한다면 분명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

 
   
 
 2.  
 
그런데, 구획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나돌아 다닌다. 자연이라고 할지? 사회로 나눠야 할지?  자연법칙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나누는 것이 더 이상 해결책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헌법이라는 것이 더 이상 자연의 편이든 사회의 편이든 그것을 받치고 있던 골간(사물의 법칙과 주체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지탱되지 못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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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환원이나 이분법의 편식은 대상을 편취함에 따라 급속히 사건들을 증폭시킬 가능성을 갖는다. 어쩌면 그것이 혁명적인 학문의 분류나 진전을 가져왔을 수 있다. 그렇게 대상과 주체를 도와 모로 나뉘게 됨에 따라, 이분의 칼날에 배여나간 개,걸,윷의 비참은 목소리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2. 어쩌면 대상이나 앎의 편식의 방법론적 취약함이 결정적인지 모른다. 여기에 보태 직선적인 시간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역사주의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게 되고 지난 사실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나선형의 시간관을 갖는 것만으로도 여러 맥락과 사건들, 사실들을 관통하여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수많은 사실들을 지난 시간에서 현재화시킬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오만이 근대인을 근대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런 시간관에 벗어나기만 해도 전근대인, 중세인, 고대인을 저기 역사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으로 인해 보다 더 다름을 이곳으로 채울 수 있기도 하다.

3. 라투르는 인간의 의회, 주체의 의회가 아니라 사물의 의회를 열어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사물이 배태하고 있는, 사물에 딸려있는 여파가 고스란히 인간에 전해지기도 하지만 인간-비인간의 구획도 그렇게 신뢰할 만한 일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버렸던 개-걸-윷의 관심을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복원해내거나,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인간에 귀속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붙어있는 수많은 관계들에 의한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되는 것이라 한다. 

4. 탈근대의 커다란 맹점은 근대를 해체시키지만, 정작 방식이나 저변의 그것은 근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이러한 설명들은 몇권의 저작을 기초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회적 맥락 속의 홉스와 보일로 돌아가 그 분기점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다른 매개들을 설명해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방식이 여러 논의로부터 조금은 덧셈을 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그런 면에서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으며, 세계는 아직 유아기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인간을 비인간과 나누고 인권이란 광폭에 비인간, 자연을 그들로 전락시킨 책임을 고스란히 지고 있는 지금를 사는 사람들은 곱씹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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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813
    from 木筆 2010-08-14 16:20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리학 전공과 시인의 거리는 이공계와 인문학의 사이만큼이나 멀다. 이과생을 만나면 숨이 턱턱 막힐때가 있고, 그 단순함이 답답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낳은 거리감으로 인한다. 물밑 소통도 없는 것을 보면, 참* 모임을 하면서도 외로움을 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친한 거간역할을 한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거리감만큼이나 술한잔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촛불로 대*역 광장에서 짧게 만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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