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 줄임) 그러나 우리는 그런 혁명적인 사고를 수행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캄프는 그의 저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조작된 사회 여론이 젊은 세대에게 개인이 전부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더라도 젊은 세대가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캄프는 싸구려 생태 담론은 항상 개인을 겨냥한다고 지적한다. 이 담론들은 각자 ‘자신’의 지구를 ‘자신’의 집에서 완성하기에 안성맞춤인 ‘좋은 행동’들을 들먹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텐저스는 똑같은 방식으로 되묻는다.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다른 제안들, 즉 당장은 원하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제안이 어디 있는가? 구체적이고 집단적인 협상을 거친 선택이 어디 있는가? 성공한 사람과 실습생이 공유할 수 있는 사례가 담긴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서로를 격리시키고 서로를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는 노동 형태, 즉 함께 일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사람의 성공을 돕고 공동 작업의 힘을 경험하게 하는 노동의 형태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 이를테면 우리를 교육하고, 움직이고, 세뇌하고, 비워버린 방식을 기억해야만 한다.”
나치즘과 근대성의 구분선은?
이처럼 저자들마다 자신의 소망이 담긴 새로운 사고의 틀을 밝히기 위해 전개한 분석들은 대부분 섬세하고 적절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플라오는 그의 저서 <프로메테우스의 황혼>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신념에 대해 좀더 멀리까지 탐험하며 의문을 제기한다. 지식의 보물찾기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은 서구 문명 수세기를 거쳐 전해 내려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숨겨진 진화와 지속성을 캐는 것이다. 뒤퓌가 ‘오만한 휴머니즘’이라 지칭한 이 게임은 현대 프로메테이즘, 즉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 위에 확립된 이 위대한 광기가 어떻게 예술·과학·기술, 심지어 이데올로기를 키우고 세뇌시켰는지 보여준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걱정스런 방식으로 키우고 세뇌시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미국 우파가 자랑하는 방임주의 그리고 나치즘과 자유민주주의처럼 정치 방향이 극과 극인 이데올로기들이 프로메테우스의 영감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화적 기반의 편재(遍在)가 결과적으로 그 기반을 볼 수 없게 만들고, 바로 그 기반이 지금 우리를 파멸로 이끌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혼란스런 시각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치즘과 근대성을 구분짓는 방역선을 설치하려 노력한다. 나치즘은 철저히 기이한 것으로 내모는 반면, 근대성은 거의 순수한 것으로 치부한다. 특히 나치즘을 근대성이 결여된, 향수에 젖은 구시대적 가치로의 회귀로 규정했던 프랑스 철학자 뤼크 페리가 그러했다. 이런 시각으로 그는 생태주의와 나치즘을 접근시켜, 이 둘이 자연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갖는 것처럼 몰아갔다. 이 논리에 메외스트는 “나치즘은 분명 근대의 야만, 즉 악화되고 미쳐버린 근대성의 형태”이며, “페리가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다른 것에 겹쳐 나오는 부수적인 주제로, 자신을 위한 상상 속의 보상을 노린 것”이라고 반박한다. 근대성의 대표적 단어가 ‘슬픔’이라 생각한 페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나쁜 선례(나치즘- 역자)를 이용한다. 즉, “슬픔과 파멸의 환상”과 “힘으로 세상을 재정비하겠다는 의욕”으로 나치즘이 “우리의 근대성을 가장 명확하게 앞당겨준다”는 보기 드문 프로메테이즘 선언을 한 것이다. 한편 플라오는 한술 더 떠서 “20세기의 재난을 단지 전체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식민 팽창주의와 1차 세계대전을 전체주의 체제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자 프로메테이즘은 우리가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가치인 자유, 진보, 개인의 해방운동, 다른 문화에 제안하고 강요해도 정당할 것처럼 보이는 근대성”과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관건은 진보에서 ‘프로메테우스적이지 않은 개념’을 확립하는 데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에 애착을 갖는 스텐저스는 이 결론에 동의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계승”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의문은 계속된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문제에 개입할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초보 주술사처럼 굴지 않고 인류의 운명을 개선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서구에서 개인을 그의 친구들과 격리해 외톨이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가 획득한 자율성을 지켜줄 수 있을까? 스텐저스에 따르면 향후 수년간 우리는 이런 질문에 집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신과 경쟁할 수 있을까
플라오의 책을 읽다 보면 프로메테이즘의 특성이 자세히 드러난다. 그는 인간은 신들과 하나님과 경쟁할 수 있고, 그들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 위에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인간은 마치 자연 속에 있는 농장주와 같아서,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을 제압하고 개척하고 탈바꿈시킨다고 믿는다. 메외스트는 아마도 이런 뿌리 깊은 확신 때문에 “테크노사이언스는 재난을 초래하는 질주 이외에는 할 일이 없고, 자신이 파괴한 것을 앞으로도 여전히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 영역은 자신이 만들어낸 테크노사이언스의 지능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사람들을 약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플라오는 저서의 한 장(章)을 할애해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쥘 베른의 소설을 분석했다. 플라오는 타고난 카리스마로 동료를 압도하고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지닌 용맹한 영웅들이 독창성이 물씬 풍기는 기구를 타고 역경과 맞서는 것을 프로메테이즘의 전형처럼 봤다.
놀이공원인 도쿄 디즈니랜드(3)는 쥘 베른의 세계를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게다가 이 놀이공원의 화산 이름은 ‘프로메테우스의 산’이다. …플라오는 프랑스 작가(쥘 베른- 역자)가 묘사한 이 탐험가들의 “씩씩하고 남성적인 그림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의 뒤를 잇는 보이스카우트, 군인, 파시스트들을 중심으로 지속·순환될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이 그림에 1980년대부터 우주의 자유로운 영상(공상과학(SF) 영화- 역자)에 고무돼 스포츠와 모험에 뛰어든 기업가들을 추가하고 싶어할 것이다.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던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은 2004년 <필리스 포그(역경)>를 영화로 만든 미국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에 출현하지 않았던가?
또 프로메테이즘은 “인간의 기원(종의 진화 또는 아동의 발달 측면에서 보면)이 처음에는 사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시작한 뒤, 이어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진행된다”고 믿게 만든다. 예컨대 서양의 상상력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만들고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고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사물과 자신의 관계를 상상할 때와 똑같이 도구적 방식으로 상상하며, 존재하는 것을 “백지 상태”로 만들어 이상적 도식에 따라 사회를 재창조하려는 의욕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이 ‘옵션’이기 때문에, 인간이 처음에는 자연의 일부였다는 이런 사고는 루소뿐만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4)의 성격에서도 잘 드러난다.
게다가 점점 더 많은 저자들이 지적하는(5) 문제의식은 충격적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벗어나 개인 및 개체처럼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물론 “사회생활은 인간 조건의 자연적 속성”이지 숙고해 고른 선택은 아니며, ‘사회계약론’은 신화다.
확실한 것은 개인주의를 근본주의(6)로까지 몰고 간 <미국 우파의 등대>의 저자 아인 랜드의 시각이 오판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에서 “널리 퍼져 있는 가정을 토대로 급진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그녀는 개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신은 개별적 속성이다. 총체적인 두뇌와 유사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7) 이에 플라오는 두뇌는 그 반대로 “네트워크로 작동되는 사회적 조직”이라며, 그녀의 결론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두뇌가 개별 활동을 하려면 다른 두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자극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항상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물려준 사회·문화적 생태계 안에서” 생각하며 산다고 주장한다. 랜드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현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8)
하지만 이 주장은 주객이 전도된 억지다. 아이가 개체로서 스스로를 개발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려면 부모를 필두로 한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플라오는 인간 조건의 역설을 “존재의 자아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자아로부터 생기고, 독립심은 의존에서 생긴다”고 요약했다. 만약 랜드의 소설들이 미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힘만 가지고 사회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하며, 시시한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웅처럼 굴며 현혹하기 때문이다. 낸시 휴스턴은 많은 낭만적 표현들의 터전이 된 이런 작품 구도가 허무주의 문학의 성공을 불렀다며, 이런 토양을 가리켜 ‘엘리트주의적 군락’(gregarite elitiste)이라 칭했다.(9) (이하 줄임)
글·모나 숄레 Mona Choll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호 [오만한 프로메테이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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